류상태의 참예수를 찾아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하느님을 의심말라고? 기독교는 무엇을 원하나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의심않고 부당함에 저항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
 
류상태   기사입력  2006/07/09 [20:40]
성서에 나타난 신은 고대인이 인식한 신관의 반영일 뿐이다
 
하느님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 즉 신의 존재나 성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오래 동안 불경죄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대부분 ‘태생적 기독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서구 사회의 지식인들은 거침없이 신에 대한 도전을 감행했다. 그들은 “신은 죽었다”거나 “신은 존재하나 섭리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로 전통적 신관을 서슴없이 부정하거나 넘어섰다.
 
그들이 성서에 나타난 전통적 신관을 넘어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인식 구도 안에 잡힌 신은 참 신일 수 없다”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서에 나타난 신’은 ‘성서 세계를 살던 과거 신앙의 선조들이 인식한 신’이었으며, 그렇기에 그들의 인식 능력의 한계만큼이나 성서의 신 역시 한계를 보이고 있음을 자각하였던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아빠’는 ‘자기보다 좀 더 힘 센 아이를 물리치고 때려주며 언제나 자기 편만 들어주는 아빠’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관은 2~3천년 전의 원시 신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는 유치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가나안 원주민을 남김없이 몰살하라고 명령하는 신, 질투심에 불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천재지변을 내려 수천명씩 살육하는 무자비한 신의 모습은 기원전 팔레스틴 지방에 살았던 고대 유대인의 신 인식 능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고귀한(?) 자료이다.
 
문제는 기독교인 중 상당수가 이런 사실을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했다는데 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오류가 없다”는 너무나도 비합리적인 명제가 오랫동안 교계를 지배해 온 데 그 근본원인이 있다.
 
오늘날 신학의 발달, 특히 성서비평학을 통해 성서에는 수많은 오류와 한계, 왜곡이 있음을 낱낱이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전통적인 교리에 의해 성서를 절대절명의 ‘신의 계시언어’로 이해하는 골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과거의 전제에 함몰되어 자신의 합리적인 이성과 판단력을 교회에 갖다 바친채 2~3천년 전의 원시 세계관 안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하느님을 마음껏 의심했다
 
그러나 골수 기독교인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성서 자체에는, 특히 성서를 기록한 성서기자들 가운데는, 그 때까지의 전통적 신관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껏 의심하며 하나님의 독재와 횡포(?)에 저항한 ‘하느님의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발칙하게도 하느님과 협상을 벌여 “의인 50명이 없기에 소돔성을 멸하겠다”는 하느님에게 “그건 하느님답지 않은 짓”이라며 자신이 섬기는 구약의 신 야훼를 설득한다. 아브라함의 협상 전략에 말려든 야훼는 50명에서 열 명씩 깍아주며 몇차례의 협상을 거쳐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소돔성을 멸하지 않겠다”는 합의에 이른다. 그러나 성서는, 소돔성에 의인 10명이 없어 끝내 멸망당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어, 역시 아브라함보다는 야훼가 한 수 위임을 증명(?)한다.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이 야훼에게 좀 더 따졌으면 좋았겠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왜 야훼는 어린아이의 인권은 고려하지 않고 있는가. 분별력을 어느 정도 갖춘 성인들의 도덕적 타락에 대해 벌을 내리는 것은 신다운 행동으로 이해한다고 치자. 아무런 분별력이 없는 천진한 아이들, 특히 갓난아이의 인권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애비 애미 잘못 만난 죄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스러져야 하는가. 도대체 이런 신이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니 “사랑의 하느님”이니 하는 고백을 들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
 
어느 정도 분별력을 가진 비기독교인은 이런 기록이 ‘2~3천년 전 고대인이 가졌던 신 인식의 한계’임을 상식 수준에서 알고 있다. ‘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리에 세뇌당한 한국의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혼란을 겪고 있다.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까닭이다.
 
▲기독교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새롭게 해석되야 할 것이다.     ©인터넷 이미지

좀 더 본격적으로 따져보자. 욥기의 저자는 오늘날의 한국 주류 개신교인들이 갖고 있는 두려움, 즉 “하나님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전제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품고 있던 ‘신의 성품과 섭리에 대한 의심’을 그의 저작 <욥기>에서 남김없이 풀어내고 있다. (욥기의 저자는 자신의 글이 후에 성서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며 <욥기>라는 제목도 후대에 붙여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갈등을 욥이라는 제삼자를 등장시켜 고백록 형식으로 풀어낸다. 기원전 2세기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욥기의 저자는 진솔한 신앙인이었으며 그 시대에 일반적으로 갖고 있던 신관에 대한 의문과 그로 말미암은 자신의 고민을 거리낌없이 토해낸다. 그는 ‘신의 존재나 성품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불경죄’라든가 ‘구원받지 못할 중죄’라는 교리적 전제에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신앙인이요 지적 탐구자였다.
 
그는 “왜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화두를 욥기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묻는다. 그런 욥기 기자에게 전통적인 신관은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한다. 누군가 고난을 받는다면 ‘무언가 신에게 벌받을 짓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때까지 전통적인 신관이 내놓은 답이었다.
 
독실하다는 요즘 한국의 주류 개신교인들이 그런 대답을 들었다면 “알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다면 그렇게 믿어야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감히 인간이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냥 접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러냐?”고 감히 따지고 물었다간 교회생활 편하게 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천국행 티켓’이 날아갈 지도 모를테니 말이다.
 
“의인의 고난을 방치하는 하느님은 의롭지 못하다”
 
그러나 욥기 기자는 당당하게 항변한다. 성서 속의 욥을 대변하게 된 그는, 그 때까지 전해진 교리적 전제 하에서 반응한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전제, “하느님은 선인을 후대하며 악인에게 벌을 내린다”는 전제 하에서 자기주장을 편다. 교리에 저항하기보다 하느님께 직접 대항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먼저 그는 “하느님은 의롭지 못하다”고 대든다. 교리에 의하면 ‘누군가 고난을 받는다면 악을 행했기 때문’일텐데, 그는 현실 사회에서 분명히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음을 보았다. 신에게 거세게 저항하는 그의 논지를 간단히 정리하면 “어떻게 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의로운 사람을 고난에 처하게 하거나 방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욥의 발칙한 도전에 당황한 그의 친구들은 욥을 거세게 비난한다. “너는 악행을 했을 뿐 아니라 감히 신을 의심하고 그에게 도전하는 불경죄까지 짓고 있다”고 힐난한 것이다. 그러나 욥은 굴하지 않고 대답한다. “나는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잘못한 쪽은 내가 아니라 신이다.”
 
그는 신에게 대들고 따질 수 있는 용기, 아니 그런 신앙을 가졌다. 적어도 그가 믿는 신은 오늘날 기독교 교리가 말하는 (사랑을 말하지만 사실은) 무시무시한 하느님이 아니었다. 의심하거나 대들어서는 천벌을 면키 어려운 ‘너무나도 멀고 무서운’ 신이 아니었다. 그의 신은 ‘대화할 수 있는 신’이었다. 아무리 신이라도 부당하다고 느끼면 “나는 당신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고 따질 수 있는 하느님을 욥기 기자는 믿었던 것이다.
 
“신이 전능자라면 부당한 현실을 방관해선 안된다”
 
결국 욥의 친구들은 그를 이기지 못한다. 욥기의 후반부로 넘어가면 엘리후가 나타나 다른 각도에서 욥을 설득한다. “이 세상에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다. 나는 네가 악행을 저질렀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신의 세계를 넘보지 말아라. 신은 전능자이며 너는 유한자다.”
 
엘리후의 신앙은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또 하나의 신관을 반영한다. 그의 논지는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신앙 논리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냥 믿어라.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며 우리는 유한자가 아닌가...”
 
그러나 욥은 엘리후의 말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가 엘리후의 논리에 맞서 말하는 바를 요약하면 이렇다. “신은 전능자이고 사람은 유한자라는 네 말은 맞다. 그러나 내가 당하는 현실은 부당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신이 진정 전능자이며 세상을 섭리하는 분이라면 적어도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이런 부당한 현실을 야기하거나 방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엘리후도 욥을 이길 수 없었다. 이번에는 신이 직접 (혹은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욥과 논쟁을 벌인다. 신은 자신의 존재의 차원과 기원, 능력을 과시한다. 욥에게 친히 나타나 설득하는 신의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너와 나는 존재의 차원이 다르며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창조주의 섭리를 가타부타 논할 셈이냐?”
 
결국 욥은 두 손을 든다. 그가 사태를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다만 그는 신을 체험했고 위안을 받았다. 현실의 모순과 고통은 계속되지만...
 
아마도 이것이 종교의 중요한 속성일 것이다. 신이 주는 위로는 현실의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현실을 넘어 희망과 위안을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당차게 신에게 도전장을 던졌던 욥은 다시 신의 품에 안기게 되고, 신은 그런 기특한 욥에게 전에 그가 가졌던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불행으로 모두 잃었던) 모든 것을 갑절로 되돌려 준다. 재산도 두 배로, 잃었던 아이들도 두 배로...
 
여기서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재산은 그렇다고 치자. 아이들을 두 배로 주었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인가.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먼저 죽은 아이들의 생명을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단순한 물리적 계산법을 고귀한 생명체에 대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신이여, 지금 누굴 놀리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독실한(?) 기독교인은 그냥 넘어가야 한다. 더 이상 물으면 불경죄가 된다.
 
신의 독재와 횡포에 저항하는 하느님의 사람들
 
나는 글 앞부분에서, “성서 자체에는, 특히 성서를 기록한 성서기자들 가운데는, 그 때까지의 전통적 신관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껏 의심하며 하나님의 독재와 횡포(?)에 저항한 ‘하느님의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고 말했다.
 
아브라함도, 욥기의 기자도 ‘도무지 하느님답지 않은 하느님’께 저항했다. 그것은 그 때까지의 신관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그런 의심과 도전을 통해 원시 신관이 성숙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신 자체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신 인식에 대한 도전’이며, 역사와 사회의 발전에 따라 당연히 물어야 할 정직한 종교적 물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독실한 주류 개신교인들은 하느님께 대들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의심하려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하느님을 의심하는 것은 천벌을 받을 짓이라고 목청높여 외친다.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한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아빠 하느님’ 앞에 마음껏 투정(?)을 부렸음을 기억하라. 예수는 십자가를 하루 앞둔 겟세마네 기도에서 “이 잔을 피하여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투정을 부렸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죽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불의와 타협하기보다 의롭게 죽는 길을 선택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따라야 할 십자가의 길이며,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이다. 또한 그런 점에서 예수는 참 사람이었다.
 
욥기 기자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으로 대변되는 한국식 기독교 신앙을 접했다면 아마 이렇게 항변하지 않았을까. “세종대왕도, 이순신 장군도, 순박하게 살아가는 시골 농부도,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아가기를 힘쓰는 선량한 소시민도 단지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구요? 심지어 부처님도 지옥행이라구요? 그건 하느님답지 않습니다. 당신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요 사랑의 하느님으로 고백되는 분이 아닙니까?”
 
오늘날 한국의 주류 개신교인들은 그들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닮지 않았다. 욥기 기자의 신앙과도 거리가 멀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예수의 하느님인 ‘아빠 하느님’과는 너무도 다르다.
의심하지 않는 신앙, 부당한 교리에 항거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일 뿐이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6/07/09 [20:40]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진리 사랑 2010/09/16 [08:30] 수정 | 삭제
  • 강가딘님!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사가 안돼 수입이 없으면서도 빚을 내서 십일조를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수입이 없는데 무슨 십일조를 냅니까? 십일조는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빚을 내서 십일조를 냈다면 그것은 쓰고 남은 것을 드린 것이겠죠! 그리고 십일조는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십일조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강가딘님이 이해하시기에 어려운 말이겠죠! 아무튼 강가딘님은 천주교에 대해 환상을 가지신 분 같은데 천주교의 실체를 알면 그런 환상이 단번에 깨어질 것입니다.
  • 지은 2007/03/22 [14:15] 수정 | 삭제




  • 모든 진리추구는 왜? 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치열한 의심과 회의와 그것에 닿으려는 노력이나
    깊은 사고도 필요하고 수긍과 수용, 비평과 비판
    하는 의식없이 무조건적인 맹신,믿고싶어서 믿는,
    혹은 믿는다는 착각, 이것이 신앙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맹신이야말로 성황당 믿음이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음의 평안만 찾으면 끝, 축복만 받으면 끝,
    선택받은 사람은 구원받고.. 열려라참깨식의 바위뒤에
    신을 가두고 숭배하는 대부분의 교회..
    십칠년 만에 친구따라 교회에 몇 주째 다니고 있다
    다행히 내 느낌으론 많이 열린 사고와 깨어있는 젊은
    목사님의 말씀시간이 거부감없이 다가왔다
    자유로운 사고와 합리적인 이성을 제한하는 것을
    절대자도 원치 않으실 듯하다
    물론 신은 종교화 신학과 철학을 초월,포월하겠지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제발 교회를 멀리하거나 하거나
    신앙에 회의가 든다거나 하고 누군가 말할때
    시험에 들었다는 둥 사탄이 씌웠다는둥 해서 매도하지 말자 제발..
    구약이 고대인들의 신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말에 동감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공부하고 의미를 찾고 또한 신약에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지는 신의 실재,인간의 신에대한 개방성,
    부활의 상징적인 의미 이런 것들도 다각적으로 받아들이고싶다
    언어적현실만으로 이해할 수없는 것이 성경임은 확실하다

    기독교가 진정 발전하고 많이 전파되려면
    배타적인 종교적 성격을 버려야 할 것이다 본래
    기독교 정신은 사랑이니까...
    교회의 배타성으로 인해 기독교를 알고싶고 다가가고 싶어도
    엄두를 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교회가 기복신앙을 뒤에 엎고 성장한것을 뭐랄 수는
    없지만 제발 복좀 그만 외쳤으면 좋겠다
    내가 믿는 절대자가 혹은 진리가 혹은 하나님이 여호와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예수님도 성인이라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갖기까지 참 ...
    모태신앙이나 유아때부터 신앙이 있던 사람들은 부모를 부정하는
    것 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내가 믿는 절대 진리혹은 절대자 초월자가 이런 자유로운 사고 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생각지 않는다
    내가 교회에서 가장 거북한 말이 질투의 하나님이 어쩌구 하는 것이다
    우상숭배역시.. 역사속에서 왕권과 신권을 동일시 하기 위해
    통합차원에서 배타성이 생긴 것 같다
    암튼 관념과 신학 철학을 뛰어넘는 분, 절대 진리란 왜? 라는
    의문 부터 그 출발점이 되어야할 것 같다
    이런 얘길 하면 신앙좋은 친구는 말한다
    그냥 무식하게 믿어보라고 믿어야 알 수있다고 시험에 들지 말라고,,,
    사탄에 속지 말라고.. 성경에 다 나와있다고..
    그럴수록 난 교회에서 더 멀어져간다
    암튼 내가 믿는 절대자가 여호와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갈릴레이가 그랬다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 골수인 2006/07/26 [18:45] 수정 | 삭제
  • 유상태님의 글을 보면 계몽의 성격이 강하다. 나는 알고있는데, 골수기독교인(보수적인 교인)은 모르니 꿈을 깨라는 말이다. 종교가 이렇게 설득해서 바뀔수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그러나 내가 배운 현대적인 종교지식만이 옳다는 독선에 빠져있는것은 아닐까? 성서비평학이 그렇게 창궐했지만, 결국 그들이 이룬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결코 생명을 살리지 못했다. 유상태님의 행동도 다분히 감정적이다. 학교에서의 일을 계기로 뭔가 큰 결심을 하고 활동하고 계신것 같다. 난 보수기독교의 행태에 대해서 반성할 점이 많다고 본다. 그러나 신앙자체는 고귀하고 보존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유상태님의 모습은 돈키호테와 같은 모습이다. 모양이 좋지않다. 진리는 운동으로 이룰수있는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모든 것은 밝혀지고 이루어진다. 좀더 겸손히 기다릴순 없을까?
  • 미친이반 2006/07/21 [17:32] 수정 | 삭제
  • 그는 임금이 아니라 한낱 망나니이다. 죽여라!!
    사당에 정성을 들여도 효험이 없으면 그 사당은 허물어라!!
    맹자 말이다. 곧 유가의 입장이다.

    법가의 입장은? 음란사종(淫亂邪宗)은 가차없이 폐한다.
  • 강가딘 2006/07/11 [13:23] 수정 | 삭제
  • ****먼저 개신교****


    아래의 글은 순복음 교회 사이트에서 퍼왔답니다.


    Q : 십일조에 대한 질문입니다.

    저는 결혼6년차 주부입니다.

    처음부터 빚으로 출발해서 아직까지 경제적으로 많이 힘든가운데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현금서비스 받거나 마이너스를 내서라도 십일조는 꼭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빚을 청산하고 싶은 마음에 십일조 내는 것이 고민스럽습니다.

    맞벌이로 열심히 벌어서 아껴서 살아도 워낙 빚이 많다보니 이자내고나면 1년

    에 1백만원 갚기도 힘이듭니다.

    이대로 살다간 앞날도 안보이고 십일조내는 돈이라도 아껴서 빚을 갚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언 부탁드립니다.



    A : 안녕하세요.

    최고의 카운슬러 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님의 질문에 대해서 저의 당회장 목사님의 저서 “하늘문을 여는 십일조”에서

    해당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어 올립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생활은 각종 월부금과 보험금, 은행 대부금 등 빚

    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려면 금전 지출의 우선순위를 바로

    정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월급날 빚을 먼저 갚을 것인지, 십일조를 먼저 드릴 것인지 고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빚을 먼저 갚은 후에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는 십일조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리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우리의 것이 아닌데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빚을 갚을 수 있겠

    습니까?

    빚쟁이의 독촉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나님께

    돌리는 신자다운 믿음의 실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빚더미에 앉아 있다면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

    다.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빚을 갚을 수 있는 재

    물도 주실 것이며, 꾸어 줄지라도 꾸지 않는 여유 있는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

    입니다.


    매우 어려운 상황 중에도 이 우선 순위를 철저히 지켜 하나님의 것을 먼저 드림

    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고 큰 복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맨소래담으로 유명한 하이드씨(A.A.Hyde)입니다.

    그는 사업을 하던 중 1880년대의 경제 공황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

    며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그는 십일조를 반드시 먼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는 그를 지켜 본 사람들은 빚도 안 갚고 십일

    조를 하느냐고 힐문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빚을 먼저 갚아야 여러분에게 진 빚도 갚을 수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경제 불황은 계속되었지만 그는 끊임없이 십일조 생활을 하였습니

    다.


    드디어 1890년대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풍성히 주심으로 그의 사업

    은 날로 번창했으며, 그는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소득의 십 분의 구를 바치기까

    지 했습니다.

    이제 하이드씨는 세계적인 부호로서 교회사에 불멸의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

    다.

    그럼 주님 안에서 늘 승리하시고 님의 모든 재정적인 상황이 풍성하게 역전되기

    를 기도드립니다.


    +++천주교+++++

    동행이라는 평화방송 프로그램에서

    식당을 운영한다는 한 아주머니, 장사가 안돼 수입이 없으면서, 빚을 내어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렸다 함.
    나중에 수녀님이 이를 알고 무척 화를 내시고, 상담을 한 신부님도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 의무감으로 십일조를 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하심.
    내가 마음이 우러나와서 주님께 바치는 것이 바른 십일조이지, 의무감으로 하는 십일조는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지 않는다고 하심.
    그리고 그러게 그릇된 헌금은 신앙심을 오도한다고 하심...

    니들이 예수를 믿고,야훼를 믿는건 다 니네 맘인데,
    이왕에 믿으려면 제대로된 종교를 믿어라...
    나 천주교 신자 아님...
    나 무신론자임... 성경을 사막 민간설화라고 믿는 사람임

  • 유일신과성전 2006/07/10 [20:31] 수정 | 삭제
  • 모든 종교와 교리를 가진 집단들은 함부로 거리에서 전도와 포교를 못하도록 해야 하며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종교집단에서 운영하는 사학재단은 유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 평화 2006/07/10 [14:33] 수정 | 삭제
  • 유목사님에게는 다수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부정하고 헤칠 권한이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유목사님의 행적은 부정적으로 보이는 가롯유다의 의심과 정의로움과 다르지 않습니다.
    좀 더 말을 아끼고 유목사님이 아니하셔도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다른 생각으로 기독교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조용히 기도하시고 목사님의 진로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 랍비 2006/07/10 [11:13] 수정 | 삭제
  • 그런데 참으로 안됐군요,
    우리 유상태 목사님같은 분이 많아야 소돔과 고모라에서 받은 저주를 여기만큼은 피해갈텐데, 의인들을 아무리 찾아봐도 오히려 여기는 없고, 유럽과 동남아 등지에서 목사.신학생 신분도 감추고 조용히 공부하거나 가난하지만 나름대로의 사회 활동에 여념없는 친구들은 많네요~ ..

    이를테면 의인들이 쫓겨난 셈이죠. ..

    우리 한국 교회가 번창하고 이윤창출도 꾀하겠다는데, 혹여나 방해가 됐거나 잘못됐다며 한 마디했다는 크나큰 죄목으로 간신히 몸만 살아서 타지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위와같이 제 주변에 살았던 친구들이 무슨 요나와 피코키오처럼 물고기 뱃속에서 살일도 없지않습니까?

    그들은 모국도 아닌 타지에서 비참하게 살더군요..
    하지만 그들로부터 한결같이 들어온것은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겁니다.

    그래요..
    우리 유상태 목사님과 그들은 아마 현세에 나타난 예레미아거나 엘리야일겁니다.

    하지만.. 정말 고통스럽군요.. 어느순간에는 욥보다도 더 고통스러울것같습니다.

    아프고 고통스럽다면 말을 해야 알아듣지않나요?
    어미뒤에 업혀있는 한 아이가 아픈지,, 고통스러운지 알려면 울어야하는데, 그걸두고 누군가 아이에게 참으라고 야단한다면 그것만큼 큰 위선도 없을것같습니다.

    얼마전 광화문에서 한잔 할때에 만난 한 친구도 그렇더군요.

    여기사회가 얼마나 지독하고 갖은 모멸감속에 아이들을 키워왔는지 모르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가 아프다는걸 감추고, 상대가 누구건 자기하나를 지키기위해 앞뒤안가리고 싸우더군요..

    단순히 본능적으로 말이죠.
    이러한 경우는 비단 한사람에 국한된일은 아닐겁니다.
    여기 한국에는 어려서부터 상처받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줄만한 사람들이 없다는게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죠.

    단지 돈만 주면 속은 몰라도 외상정도는 치료해주거나, 혹은 "위로"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자기들도 잘 모르는 약과 예수를 팔아먹곤 하죠.

    부당함에 항거하거나 투쟁하는 신앙뿐만 아니라,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줄 아는 신앙이 자리잡길 기원합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하늘은 바라볼것같군요.
    어차피 Natura는 구히브리어에도 없었던 神의 또다른 이름이니까요..

    중세 레오10세때 마틴 루터 신부가 결국 목사로 살면서 카톨릭의 부패상을 비난했듯이, 유상태 목사님은 지금 한국 교회의 잘잘못을 바로 잡아줄수있는 몇 안되는 분입니다.

    수백년동안 카톨릭도 변했으니 이제는 한국 개신교회 차례겠죠..
    그 후에는 미국도 변해야겠지만!

    암튼 글 잘읽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도 자주 목사님의 글을 읽길 희망합니다.
  • 하하 2006/07/10 [03:46] 수정 | 삭제
  • 기독교 한마디로 하자면 수구꼴집단의 교화소이다.교회가 반공이념과 보수이념의 의식화 시키는 장소가 되어 버려다.한기총 소속 모든 교단은 교회내에서 구국기도 하면서 설교하면서 현재에도 하고 있다.장로와 목사 손을 잡고 성도를 의식화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