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나타난 신은 고대인이 인식한 신관의 반영일 뿐이다 하느님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 즉 신의 존재나 성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오래 동안 불경죄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대부분 ‘태생적 기독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서구 사회의 지식인들은 거침없이 신에 대한 도전을 감행했다. 그들은 “신은 죽었다”거나 “신은 존재하나 섭리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로 전통적 신관을 서슴없이 부정하거나 넘어섰다.
그들이 성서에 나타난 전통적 신관을 넘어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인식 구도 안에 잡힌 신은 참 신일 수 없다”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서에 나타난 신’은 ‘성서 세계를 살던 과거 신앙의 선조들이 인식한 신’이었으며, 그렇기에 그들의 인식 능력의 한계만큼이나 성서의 신 역시 한계를 보이고 있음을 자각하였던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아빠’는 ‘자기보다 좀 더 힘 센 아이를 물리치고 때려주며 언제나 자기 편만 들어주는 아빠’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관은 2~3천년 전의 원시 신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는 유치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가나안 원주민을 남김없이 몰살하라고 명령하는 신, 질투심에 불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천재지변을 내려 수천명씩 살육하는 무자비한 신의 모습은 기원전 팔레스틴 지방에 살았던 고대 유대인의 신 인식 능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고귀한(?) 자료이다.
문제는 기독교인 중 상당수가 이런 사실을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했다는데 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오류가 없다”는 너무나도 비합리적인 명제가 오랫동안 교계를 지배해 온 데 그 근본원인이 있다.
오늘날 신학의 발달, 특히 성서비평학을 통해 성서에는 수많은 오류와 한계, 왜곡이 있음을 낱낱이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전통적인 교리에 의해 성서를 절대절명의 ‘신의 계시언어’로 이해하는 골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과거의 전제에 함몰되어 자신의 합리적인 이성과 판단력을 교회에 갖다 바친채 2~3천년 전의 원시 세계관 안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하느님을 마음껏 의심했다 그러나 골수 기독교인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성서 자체에는, 특히 성서를 기록한 성서기자들 가운데는, 그 때까지의 전통적 신관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껏 의심하며 하나님의 독재와 횡포(?)에 저항한 ‘하느님의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발칙하게도 하느님과 협상을 벌여 “의인 50명이 없기에 소돔성을 멸하겠다”는 하느님에게 “그건 하느님답지 않은 짓”이라며 자신이 섬기는 구약의 신 야훼를 설득한다. 아브라함의 협상 전략에 말려든 야훼는 50명에서 열 명씩 깍아주며 몇차례의 협상을 거쳐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소돔성을 멸하지 않겠다”는 합의에 이른다. 그러나 성서는, 소돔성에 의인 10명이 없어 끝내 멸망당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어, 역시 아브라함보다는 야훼가 한 수 위임을 증명(?)한다.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이 야훼에게 좀 더 따졌으면 좋았겠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왜 야훼는 어린아이의 인권은 고려하지 않고 있는가. 분별력을 어느 정도 갖춘 성인들의 도덕적 타락에 대해 벌을 내리는 것은 신다운 행동으로 이해한다고 치자. 아무런 분별력이 없는 천진한 아이들, 특히 갓난아이의 인권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애비 애미 잘못 만난 죄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스러져야 하는가. 도대체 이런 신이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니 “사랑의 하느님”이니 하는 고백을 들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
어느 정도 분별력을 가진 비기독교인은 이런 기록이 ‘2~3천년 전 고대인이 가졌던 신 인식의 한계’임을 상식 수준에서 알고 있다. ‘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리에 세뇌당한 한국의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혼란을 겪고 있다.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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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새롭게 해석되야 할 것이다. ©인터넷 이미지 |
좀 더 본격적으로 따져보자. 욥기의 저자는 오늘날의 한국 주류 개신교인들이 갖고 있는 두려움, 즉 “하나님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전제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품고 있던 ‘신의 성품과 섭리에 대한 의심’을 그의 저작 <욥기>에서 남김없이 풀어내고 있다. (욥기의 저자는 자신의 글이 후에 성서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며 <욥기>라는 제목도 후대에 붙여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갈등을 욥이라는 제삼자를 등장시켜 고백록 형식으로 풀어낸다. 기원전 2세기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욥기의 저자는 진솔한 신앙인이었으며 그 시대에 일반적으로 갖고 있던 신관에 대한 의문과 그로 말미암은 자신의 고민을 거리낌없이 토해낸다. 그는 ‘신의 존재나 성품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불경죄’라든가 ‘구원받지 못할 중죄’라는 교리적 전제에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신앙인이요 지적 탐구자였다.
그는 “왜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화두를 욥기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묻는다. 그런 욥기 기자에게 전통적인 신관은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한다. 누군가 고난을 받는다면 ‘무언가 신에게 벌받을 짓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때까지 전통적인 신관이 내놓은 답이었다.
독실하다는 요즘 한국의 주류 개신교인들이 그런 대답을 들었다면 “알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다면 그렇게 믿어야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감히 인간이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냥 접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러냐?”고 감히 따지고 물었다간 교회생활 편하게 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천국행 티켓’이 날아갈 지도 모를테니 말이다.
“의인의 고난을 방치하는 하느님은 의롭지 못하다” 그러나 욥기 기자는 당당하게 항변한다. 성서 속의 욥을 대변하게 된 그는, 그 때까지 전해진 교리적 전제 하에서 반응한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전제, “하느님은 선인을 후대하며 악인에게 벌을 내린다”는 전제 하에서 자기주장을 편다. 교리에 저항하기보다 하느님께 직접 대항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먼저 그는 “하느님은 의롭지 못하다”고 대든다. 교리에 의하면 ‘누군가 고난을 받는다면 악을 행했기 때문’일텐데, 그는 현실 사회에서 분명히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음을 보았다. 신에게 거세게 저항하는 그의 논지를 간단히 정리하면 “어떻게 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의로운 사람을 고난에 처하게 하거나 방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욥의 발칙한 도전에 당황한 그의 친구들은 욥을 거세게 비난한다. “너는 악행을 했을 뿐 아니라 감히 신을 의심하고 그에게 도전하는 불경죄까지 짓고 있다”고 힐난한 것이다. 그러나 욥은 굴하지 않고 대답한다. “나는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잘못한 쪽은 내가 아니라 신이다.” 그는 신에게 대들고 따질 수 있는 용기, 아니 그런 신앙을 가졌다. 적어도 그가 믿는 신은 오늘날 기독교 교리가 말하는 (사랑을 말하지만 사실은) 무시무시한 하느님이 아니었다. 의심하거나 대들어서는 천벌을 면키 어려운 ‘너무나도 멀고 무서운’ 신이 아니었다. 그의 신은 ‘대화할 수 있는 신’이었다. 아무리 신이라도 부당하다고 느끼면 “나는 당신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고 따질 수 있는 하느님을 욥기 기자는 믿었던 것이다.
“신이 전능자라면 부당한 현실을 방관해선 안된다” 결국 욥의 친구들은 그를 이기지 못한다. 욥기의 후반부로 넘어가면 엘리후가 나타나 다른 각도에서 욥을 설득한다. “이 세상에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다. 나는 네가 악행을 저질렀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신의 세계를 넘보지 말아라. 신은 전능자이며 너는 유한자다.”
엘리후의 신앙은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또 하나의 신관을 반영한다. 그의 논지는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신앙 논리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냥 믿어라.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며 우리는 유한자가 아닌가...”
그러나 욥은 엘리후의 말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가 엘리후의 논리에 맞서 말하는 바를 요약하면 이렇다. “신은 전능자이고 사람은 유한자라는 네 말은 맞다. 그러나 내가 당하는 현실은 부당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신이 진정 전능자이며 세상을 섭리하는 분이라면 적어도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이런 부당한 현실을 야기하거나 방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엘리후도 욥을 이길 수 없었다. 이번에는 신이 직접 (혹은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욥과 논쟁을 벌인다. 신은 자신의 존재의 차원과 기원, 능력을 과시한다. 욥에게 친히 나타나 설득하는 신의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너와 나는 존재의 차원이 다르며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창조주의 섭리를 가타부타 논할 셈이냐?”
결국 욥은 두 손을 든다. 그가 사태를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다만 그는 신을 체험했고 위안을 받았다. 현실의 모순과 고통은 계속되지만...
아마도 이것이 종교의 중요한 속성일 것이다. 신이 주는 위로는 현실의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현실을 넘어 희망과 위안을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당차게 신에게 도전장을 던졌던 욥은 다시 신의 품에 안기게 되고, 신은 그런 기특한 욥에게 전에 그가 가졌던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불행으로 모두 잃었던) 모든 것을 갑절로 되돌려 준다. 재산도 두 배로, 잃었던 아이들도 두 배로...
여기서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재산은 그렇다고 치자. 아이들을 두 배로 주었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인가.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먼저 죽은 아이들의 생명을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단순한 물리적 계산법을 고귀한 생명체에 대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신이여, 지금 누굴 놀리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독실한(?) 기독교인은 그냥 넘어가야 한다. 더 이상 물으면 불경죄가 된다.
신의 독재와 횡포에 저항하는 하느님의 사람들 나는 글 앞부분에서, “성서 자체에는, 특히 성서를 기록한 성서기자들 가운데는, 그 때까지의 전통적 신관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껏 의심하며 하나님의 독재와 횡포(?)에 저항한 ‘하느님의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고 말했다.
아브라함도, 욥기의 기자도 ‘도무지 하느님답지 않은 하느님’께 저항했다. 그것은 그 때까지의 신관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그런 의심과 도전을 통해 원시 신관이 성숙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신 자체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신 인식에 대한 도전’이며, 역사와 사회의 발전에 따라 당연히 물어야 할 정직한 종교적 물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독실한 주류 개신교인들은 하느님께 대들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의심하려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하느님을 의심하는 것은 천벌을 받을 짓이라고 목청높여 외친다.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한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아빠 하느님’ 앞에 마음껏 투정(?)을 부렸음을 기억하라. 예수는 십자가를 하루 앞둔 겟세마네 기도에서 “이 잔을 피하여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투정을 부렸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죽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불의와 타협하기보다 의롭게 죽는 길을 선택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따라야 할 십자가의 길이며,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이다. 또한 그런 점에서 예수는 참 사람이었다.
욥기 기자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으로 대변되는 한국식 기독교 신앙을 접했다면 아마 이렇게 항변하지 않았을까. “세종대왕도, 이순신 장군도, 순박하게 살아가는 시골 농부도,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아가기를 힘쓰는 선량한 소시민도 단지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구요? 심지어 부처님도 지옥행이라구요? 그건 하느님답지 않습니다. 당신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요 사랑의 하느님으로 고백되는 분이 아닙니까?”
오늘날 한국의 주류 개신교인들은 그들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닮지 않았다. 욥기 기자의 신앙과도 거리가 멀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예수의 하느님인 ‘아빠 하느님’과는 너무도 다르다.
의심하지 않는 신앙, 부당한 교리에 항거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