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성을 추구하는 고독한 인기 디제이 도끼빗입니다.
정은임 아나운서 사망 소식을 듣고 오랫만에 판에 얹은 먼지를 털어내고 디제이 박스에 앉았습니다.
도끼빗 디제이는 은임이와 초등학교 동창입니다. 老子는 태어났을 때부터 할아버지 모습이었다는 속설이 있지요. 제가 보고 기억하는 5학년 짜리 은임이도 어른 모습과 똑같은 바로 그 얼굴 그 말투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제가 보지 못한 갓난 아기 시절도 똑같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예쁘고 똑똑하고 어른스런 정은임이 그저 크기만 작아진 채로 매일 우리 눈 앞의 교실과 복도를 종종걸음으로 지나다닌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어찌 전교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의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 꼬맹이들이 기껏 찾아낸 정은임 험담이라는 게 “흥, 쟤는 키도 작은 주제에 무슨 엉뎅이가 저렇게 크냐” 머 이런 거였습니다.
도끼빗은 은임이와 같은 아파트 바로 뒷동에 살았더랬습니다. 그래서 가끔 방과 후 집에 오는 길에서 마주치게 될 때가 있었습니다. 말도 좀 붙이고 친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전교적 왈가닥이라는 것 말고는 자신있게 내놓을 것이 없던 도끼빗, 어서 옆에 가지도 못하고. 기껏 한 짓이라고는 주변에 항상 드글거렸던 왈패 패거리들과 함께 집에 가는 은임이 한 20미터 뒤에서 짖궂은 소리나 해대는 거였죠. “야 엉뎅이 한번 크다..” 머 이딴 소리. 도끼빗 같은 못난 머스매들의 이 따우 “히야까시”에 시달려 익숙해진 은임이는 가끔 한번 돌아보고 그냥 킥 웃고 말아서 되레 우리만 머쓱해지곤 했습니다.
은임이가 중학교 졸업할 적에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때에 초등학교 동창회를 조직하려고 도끼빗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14살짜리 소녀 그리고 대학들어온 여대생 모습의 은임이도 똑똑히 기억에 남아 있네요. 정말 믿을 수 없는 “비눌리아” 정은임. 생김생김도 말투도 그리고 하는 행실도 전교 어린이 부회장 시절의 꼬마 정은임 그 모습 그대로. 똑부러진 말투에 너무 어른스런 생각. 한번은 무슨 남녀 미팅 비슷한 자리였는데, 한참 웃고 떠든 후 끝날 때에 우리의 정은임 선수 “자, 그럼 우리 이제 이 자리를 정리하는 의미에서…”하는 멘트를 날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모습은 한창 여드름 뻗치던 왈패 소년 도끼빗에게는 너무나 낮선 것이었드랬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못난 도끼빗, “엉뎅이” 운운 대신 나이에 걸맞는 새로운 “신포도” 대사를 찾았습니다. “에이, 재수없어”.
도끼빗은 90년대 정은임 아나운서의 프로를 한번도 본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저 내가 알던 그 “비눌리아” 정은임이라면 뭐 안보고 들어도 비디오 오디오려니 했을 뿐이었죠. 그런데 새로 알게 된 것들도 있었습니다. 은임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다가가서 곰살궂게 어루만져주었는지. 영화라는 게 그저 찍 늘어져 팝콘 씹으며 보는 강건너 불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있어야만 하는, 있을 수 밖에 없는 하지만 있지 않은” 바로 우리들 세상이라는 것. 그것을 일깨움으로서 비루하고 너절한 현실에 매일 지쳐가던 우리들에게 기쁨과 꿈을 가져다 주려 은임이가 얼마나 애썼는지. 그래서 그 현실 속에서 천천히 질식해야했던 90년대 어항 속의 우리 금붕어들이 그나마 뽀꼬뽀꼬 숨을 쉬러 모여든 것이 그녀의 음악판이었다는 것. 그리고 걔중 몇 마리 금붕어는 은임이의 그 작은 어깨에 염치불구 아예 눈물콧물 다흘려가며 한없이 파고 들었다는 것도.
“비눌리아” 은임이, 이렇게 따뜻하고 깊은 마음이 있는 정은임 아나운서는 내 기억 속의 꼬마 은임이 그리고 중학생 대학생 정은임양 바로 그 사람이겠죠. 그렇다면 한결같았던 것은 그녀의 예쁜 얼굴 똑부러진 말투 만이 아니고 그 곱고 착한 마음도 그랬었다는 말이었군요. 그녀의 뒷동에 살았던 도끼빗, 그리고 그녀와 함께 살 수 있었던 우리 모두는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老子같이 쭈굴쭈굴한 애늙은이 대신 정은임 “비눌리아”를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보았던 사람으로서 감히 증언 장담하건대, 정은임 아나운서는 아마 천국이든 극락이든 어디에서건 똑같은 모습으로 “비눌리아” 그러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고달프게 살다간 리버 피닉스랑 김광석이랑 모아놓고 또 예의 그 “자, 이 자리를 정리하는 의미에서…”하는 어른스런 말투로 따뜻하게 다독여주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마음 풀고 웃어봅시다. 은임이는 지금 저쪽 나라에서 리버 피닉스랑 “바람”이 나서 바쁘다고 그래서 당분간 방송 복귀는 어렵다고 합니다. 그 대신 그 바람 대충 정리되면 언젠가 자세히 이야기 해준다고 하네요. 도끼빗, 리버 피닉스가 밉긴 하지만 은임씨의 행복을 위해서 그냥 순순히 보내 주기로 마음을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