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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없는 강남비판에 강남북 차별 심화된다
공희준의 '강북식민지'론, 강남인에 대한 분노와 갈등 조장
 
황진태   기사입력  2003/12/19 [00:36]

저녁에 종로에 약속이 있어서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충무로부터 을지로를 지나 광장시장에 당도했다. 을지로에서 종로를 가는 길에 추위에도 불구하고 청계천 공사가 한창이다. 서프라이즈 논객, 공희준이 얼마 전에 썼던 ‘곱창칼럼(?)’이 생각났다.

강북에 살면서 강남을 위한 변명에 앞서서

본 기자는 이명박 시장을 향해서 곱상한 글을 써기보다는 대놓고 육두문자를 휘갈기고 싶다. 역시 ‘존재는 의식을 규정하는가’ 강북토박이로 스무해를 넘긴 지금, 이 시장의 녹슬지 않은 불도저는 강북의 서민으로서 당연히 꼬울 수밖에 없다. 이내 종로를 향해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한 할머니가 심심함을 채워줄 조그마한 티비에서 날씨예보가 보고 있다. “내일 날씨는 오늘보다 더욱 춥겠습니다.” 기상 캐스터의 말을 들은 할머니는 “영하 십도가 되더라도 바람만 불지 않으면 상관없어”라고 혼잣말을 하셨다. 그런데 할머니보다 훨씬 어리고 건장한 전경들이 할머니가 장사하시는 바로 옆 미군기지 주변을 에워싸고 경비를 서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몇몇은 끼니도 제대로 못 때웠는지 입김을 불면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빵과 우유를 우걱우걱 씹고 마시고 있다.

이라크는 접어두더라도 얼마 전 미군의 뺑소니 운전에 대한 정부의 소극적인 대처에 생각나서 화가 났다. 저 전경들은 뺑소니 운전자를 보호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자신들의 가족마저 ‘충분히’ 뺑소니를 칠 놈들 때문에 거리에서 입김을 불며 추위에 떨며 눈치를 보며 빵과 우유를 먹고 있다.

강남을 위한 변명에 들어가며

▲서프라이즈 공희준씨의 글, 고가 하나 헐었을 뿐인데     ©서프라이즈
독자들이 서두를 읽으면서 기자에 대해서 그렇게 ‘강북에 사는 게 억울하냐’는 푸념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면 일단 성공(?)이다. 이 글은 강북에 사는 주제에 ‘강남에 대한 변명’을 하고자 쓰게 되었다.

사실 예전부터 ‘자영업의 정치’에서 ‘서민의 정치’로 칼럼방명을 바꾼 공희준의 ‘서민의 칼럼’에 대한 반론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쓸 생각이었지만 ‘미루다, 미루다’ 그의 글에 공감하는 폭이 더 넓어서 반론형식보다는 보론과 ‘조그만 지적’이 나은 성 싶어 이제야 글을 쓰게 됐다. 어쨌든 이 글은 전적으로 그의 글이 자극을 주었다.           

‘고가 하나 헐었을 뿐인데, 강남부(富)스 이명박의 강북 식민지화 야욕을 분석한다’는 공희준의 글에 인근에 사는 기자 또한 공감되는 게 많았다. 하지만 몇 가지 지적을 하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청계천 일대 주상복합단지 건설은 ‘식민단지’가 아니다

“청계천사업은 일종의 페이크모션이다. 이명박 시장의 노림수는 따로 있다. 그가 목적하는 바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강북에 대규모 강남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다. 청계천복원사업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겨냥하고 있다. 청계천복원으로 환경시장이라는 영예로운 명분도 축적하면서, 인근에 중대형 평형위주의 아파트와 주상복합 식민타운을 형성해 재테크에 혈안이 된 강남주민들의 투기욕구도 충족시켜준다는 복안이다. 대권도전을 염두에 둔 이명박 시장의 그랜드디자인이 청계천사업의 성공에 의지하고 있음은 너도 알고 나도 안다.”(공희준의 서민의 정치, 서프라이즈)

공희준의 말마따나 “청계천복원공사현장 제3공사구간은 이명박 시장의 친정인 현대건설이 맡고 있”고 이점 아니꼬울 수 있겠으나, 청계천 일대에 “주상복합단지”를 “식민단지”로 보는 공희준의 시야에 대해서 기자는 다르게 본다.

이러한 재개발를 도시지리학에서는 ‘도심재활성화(Gentrification)’라고 하는데 이 현상은 “중산층이 교외지역보다 값싼 기존 도심의 쇠락지구를 새로운 주거지역으로 변모시키며 진입하는 과정을 말하며,  1970년대에 시작되었으며 교외화에 역행하는 현상이다.”(권용우, 도시의 이해, 박영사 참조) 따라서 이러한 도심재활성화는 “도시 내 주택시장으로의 자본유입에 따라 부동산 가치는 상승하게 되었고, 이는 다시 상승된 지대를 감당할 수 없는 기존 주민을 몰아냄으로써 재활성화된 지역이 보다 확대하게 된다.”(같은책) 굳이 신자유주의의 시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상의 현대 세계도시들의 패턴이 “기업가주의적인 도시정책”을 수행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래서 이러한 세계도시인 서울은 거시적으로 초국적 자본 등의 “고차기능을 수용하기 위한 업무공간을 확보하고 고급서비스업 및 레저시설, 고소득층 주택지 등을 개발하는데 중점”(같은책)을 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도심재활성화가 부동산 투자가들이나 건축업자들이 부동산 가치를 올림으로써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도 일정 부분 작용한다.

여기서 기자의 시각에서는 이명박 시장이 강남의 식민지로 강북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동경의 동경만매립계획이나 런던의 도크랜드 개발, 그리고 뉴욕의 배터리파크시티 계획 등처럼 세계도시화 되는 도시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설사 이명박이 아니라 민주노동당 당적이라도 이 흐름을 거스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청계천 하나만을 보고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서울시가 내놓은 뉴타운-균형개발 계획의 전체 조망도를 살펴보았으면 한다. 청계천 사업과 마찬가지로 용산, 미아리 등등의 사례마저 ‘강북’안으로 옭어 매고 강남을 비판하는 반대논리의 근거로 사용하기에는 억지 논리의 우려가 엿보인다.

강남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또한 “재테크에 혈안이 된 강남주민들의 투기욕구”라며 공희준은 강남 안의 스펙트럼을 무시하고 있는 데. 공희준의 칼럼에 대한 댓글(실명이 아닌 댓글은 신빙성이 없을 수 있으나 거꾸로 생각하여 가명을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의 ‘솔직한 반응’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자.)을 몇 가지를 살펴보면.

독자 ID ‘지식’: 모든것을 '강남'이라는 화두를 통해 궤변으로 풀어버리는 그의 논리는 문제가 많습니다. 포퓰리즘적으로 사람들의 회포는 풀어줄 수 있지만, 논리가 없다고 봅니다. 님의 궤변으로 인해 회포풀고 욕하면서 불만을 풀어버리는 독자들에게 결코 도움되는 일은 아니죠...불만과 사회갈등을 재생산할 뿐이죠.

독자 ID ‘글쎄요..’: 어느 정도 사는 사람들이 강남에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정말 갑부들도 아니랍니다..가진게 집한채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죠..권력과는 별 상관없는 사람들도 대부분입니다..언론에서 신흥 졸부의 이미지의 상징으로 올리는 것이 역설적으로 어느 정도는 만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 ID ‘나강남8학군’: 희준님은 뭐가그리 꼬이셨는지 강남사람들만 보면 열불나시나 보죠? 대한민국 잘못된건 좌다 강남사람 잘못, 모든 서울시정책은 소수의 강남구민을 위한 정책, 희준님의 글 요즘들어 독기가 서려있군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공희준의 비판의 과녁이 너무 넓다는 점이다. 속된 말로 너무 강남을 싸잡아 비판하는 게 아닌가 본다.(기자가 강남에 비해서 소외된 강북에 살면서도 이러한 관용(?)이 생기는 것은 강남과 강북을 넘어서 서울과 지방으로 가른다면 나 또한 지방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낫게 산다는 죄책감 비슷한 게 생겨서다.) 이는 얼마 전 [미디어 포커스]에서도 강남에 대한 언론의 보도에 대해서 싸잡아 비판하는 보도방식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강남주민은 모두가 부동산 투기꾼인가

공희준의 “강남주민들의 투기욕구도 충족시켜준다는 복안”이라는 주장도 분별없이 ‘어림잡아서’ 강남사람을 싸잡는 거 아닌가. 이러한 공희준의 싸잡기 비판과 더불어 언론의 강남보도에 대한 비판을 한국경제신문(12월 1일자, 37면)에서 ‘강남 토박이’인 중산층 주부들이 강남문제를 주제로 의견을 나눈 기획을 소개하겠다.(평소 기자가 전경련을 옹호하는 한국경제신문을 비판하고 있다가 이렇게 인용하는 게 좀 찝찝했지만 ‘한경대’에서도 이러한 기획기사를 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대부분 강남주민들은 집 한 채만 가졌을 뿐입니다. 많은 수의 강남주민들은 집값이 너무 오르는 걸 원하지 않아요. 팔고 다른 데 갈 것도 아닌데 세금부담만 늘어나기 때문이지요. 설사 집을 팔더라도 강남 안에서 평수를 늘려 이사하는 게 목표인데 큰 평수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을 중산층이 좋아할 리 있나요.”

“정부는 강남의 모든 부동산 관련 세금을 대폭 높인다고 하는 데 결국 1가구에 십수년 살아온 우리 같은 중산층은 퇴출 당하고 강남은 그야말로 ‘부자들의 동네’로 변할 겁니다. 그러면 국민 위화감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공희준의 강남비판에 명확한 효과를 위해서는 ‘그 밥에 그 나물로’ 싸잡아 비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남거주민 중에서도 (강남에서도 타워팰리스가 보이는 도곡동, 포이동 일대의 판자촌인 구룡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있듯이) 비록 강남 중산층이란 개념이 불분명하더라도 (또한 강북에서도 계층을 나누기란 쉽지 않듯이) 타자를 깨기 위한 공희준의 칼럼이 강남계층을 일원화하여 또 다른 타자화와 역차별화를 유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 그리고 이참에 공희준의 좋은 칼럼이 싸잡아 비판당하는 상황이 초래되는 것은 막았으면 해서 언급했다.  

정부와 강남은 구별해서 비판해야

공희준도 다른 칼럼을 통해서 관료들에 대해서 비판을 가했었지만 강남에 살고 있는 ‘정부관료들에 의해서 정책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비판은 분명 일리 있다. 하지만 전적으로 관료들이 ‘강남에 살아서’ 정책이 잘 조율 되지 않는 다고 단정짓는 것도 문제가 된다. (이러한 기자의 비판이 ‘양비론의 줄다리기’를 하는 듯 하여 참으로 입장이 애매하다.) 그래서 좀 더 관료들의 문제점에 대한 강남 중산층 주부들의 시야에서 살펴보았으면 한다.

“최근의 부동산 투기가 강남에서 시작돼 강남주민들이 투기의 원흉인 것처럼 치부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정부의 주택도시정책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교육문제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정부는 무능과 정책 실패를 인정하기는커녕 강남 탓으로 몰아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걸핏 하면 ‘강남’운운하는 발표를 하는데 너무 속이 상합니다.”

“투기의 대명사처럼 된 타워팰리스만 해도 그래요. 13년 전 강남에 처음 올 때만 해도 허허벌판이던 타워팰리스 자리는 원래 행정타운으로 예고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가 주민반발을 무릅쓰고 주상복합단지 허가를 내줬습니다. 정부가 도시 틀을 그렇게 짜놓고 집값이 치솟자 책임은 그저 강남에 살던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꼴입니다. 타워팰리스도 처음 미분양 때 회사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산 사람이 많다는 데 그 이후 값이 오르자 입주자 모두 투기꾼 비슷하게 비춰지잖아요.”

최근 재산세 인상에 대해서 언론에서는 강남의 반발에 대해서 ‘지역주의’로 몰고 갔다. 일부는 일리 있겠지만, 재산세와 관련하여 한경의 이동우 사회부장은 이러한 관료들의 폐단에 대해서 좀 더 실증적으로 짚어주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주민들도 ‘아파트 값에 비해 재산세 부담이 낮은 편이고 중소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내고 있기 때문에 교정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이런 정황에 비추어 행자부가 3~4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재산세를 올리는 방법을 택했더라면 이런 소동없이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 사실 행자부에서도 “세 부담을 갑자기 몇 배씩 올리면 조세저항이 너무 클”것으로 보고 “조세에 관한 한 공무원이 중심을 잡아야지 여론에 편승해 화끈하게 고치면 부작용이 커진다”며 ‘속도전’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었다.(12월 14일자 한경, 이동우, '코드'관료들의 명분)  

하지만 이러한 조심스런 행보를 보였던 행정부는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속도전을 내기 시작했으며, 이 부장은 “반발하는 지역주민들과 민선단체장을 ‘지역이기주의와 개혁저항’으로 모는 것은 자가당착이다.”라고 말한다. 부안 사태만 보더라도 지역주민의 의견수렴을 제대로 못하는 ‘비’토론공화국’의 ‘비’참여에서 알 수 있듯이 이동우 부장의 관료들의 폐단에 대한 지적은 필요하다.

강준만 교수의 ‘미국의 벙커도시와 강남을 비교한 글을 읽고서

강북에 태어나 살아오던 기자가 어딜 놀러 가거나 술을 마시더라도 강남보다는 강북이 친숙하고 상대적으로 강남은 낯설고 멀게만 느껴진다. 이는 각자 개인마다 경험 등을 통해서 ‘마음 속의 도시(city of the mind)’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먼저 주변의 도시환경에서 얻게 도는 시각적 요소를 마음 속에 지도의 형태로 정리하는데, 이를 심상지도(mental map) 또는 인지지도(cognitive map)이라 한다.”(권용우, 도시의 이해, 학지사 참조) 서울시 지도를 펴놓고 물리적인 거리는 차이가 없더라도 이러한 심상지도에 의해서 행동패턴이 결정되는 개인은 심리적인 거리가 물리적인 거리보다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이는 독자마다 경험을 통해서 공감할 것이다.

심상지도의 구축과정은 두 가지가 작용하는데 ‘현상적 환경’과 ‘행태적 환경’이다. “현상적 환경은 객관적, 물리적 환경이며 행태적 환경은 주관적, 심리적 환경이다. 행태적 환경은 공간적 의사결정시 현상적 환경을 왜곡된 형태로 변형하는데.”(같은책) 이러한 왜곡에는 “사회경제적 지위, 거주기간, 생애주기 등”이 작용한다. 내가 강남에서 태어났는지, 가정형편이 어떠한지, 그곳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등등이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현재 강남에 대한 심상지도는 신문과 방송, 지식인들의 오피니언을 통해서 나오는 행태적 환경의 ‘왜곡’은 지정학적으로 강남을 진퇴양난의 지세로 형성시키고 있다.

분명 강남문제가 한국사회의 딜레마인 것은 분명하나. 정책 등의 실수로 인한 ‘강남의 강남화’에 대한 비판보다는 개인으로 문제를 환원하는 비판이 주가 되는 것은 갈등의 씨앗만을 잉태할 뿐이다. 이는 강준만 교수도 인물과 사상 28권에서 미국의 벙커도시와 강남을 비교하면서 “단순히 경제적인 차이에 그치지 않고 문화적인 분리를 재생산하는 광적인 갈등에 대한 대응과 대항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기실 강 교수가 주장하는 ‘문화적인 분리’는 누누이 기자가 이글에서 강조했듯이 세계도시들의 대체적인 추세로서 “세계도시 내부의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는 공간적, 문화적, 정치적 양극화로 이어지면서 도시 전체적으로 이중도시(dual city)화가 진전되고 있는 것”(권용우, 도시의 이해, 학지사)으로서 그러한 분석은 흔하다면 흔하다고 볼 수 있다.

‘하부토대가 상부토대를 움직인다’는 맑스의 주장만을 상기하더라도 굳이 미국의 사례를 인용하면서 서울의 양극화를 강조하는 것은 진부한 비판의 소지가 크며, 신문과 방송의 ‘강남 때리기’를 오히려 강화 시켜주는 것이라 보여진다. 어쩌면 이 또한 강 교수의 ‘심상지도’가 이러한 매체에 의해서 오히려 역으로 ‘왜곡’의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강 교수의 미국도시와 강남을 비교한 분석이 전적으로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강 교수의 “단순히 경제적인 차이에 그치지 않고 문화적인 분리를 재생산”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미국보다는 남미경제형을 닮아가는 한국경제와 미국의 벙커도시 수준을 넘어서 요새화되고 무장 사설경비원이 들어선 남미도시의 이중도시화를 인용했더라면 설명의 더 큰 효과가 크지 않았을 까 싶다. 그 글에서 뭔가 대안이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어쩌면 기자가 지역차별에 대해서 강 교수가 오랫동안 문제를 제기해왔던 지식인이기에 다른 지식인에 비해서 조금 더 큰 기대감을 갖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기자 또한 이 글에서 지역 차별과 관련하여 대안 부재의 딜레마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면서 말이다.

강남을 위한 변명을 마치면서

얼마 전, 청계천 복원사업 도중에 전태일 동판을 지멋대로 철거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내가 아무리 ‘도심재활성화’라며 이명박 시장을 옹호해주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이명박 시장의 개념 없이 불도저를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까지 감싸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상도동 재개발 지역에서의 아기 분유도 제대로 못 먹이고, 70대 노인과 아이들과 망루에서 새총을 만들어 용역업체 직원과의 가히 전쟁을 하고 있는 서민들을 볼 때 이 사장의 서민에 대한 궁핍한 배려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래서 기자 또한 공희준의 ‘곱창칼럼’에 공감하는 바가 클 수밖에 없었다.

도심재활성화로 청계천을 복원하고 미아리 텍사스의 매매춘 여성들을 쫓아내어 세계에 ‘HI! SEOUL’의 이미지를 부각하는 것도 좋고, 서울이 세계도시의 중추가 되는 거 다 좋다. 그런데 삶의 공간에서 쫓겨난 사람에 대해서 반드시 사후적인 배려를 해야만 한다. 어쩌면 기자의 이번 강남에 대한 변명은 쫓겨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굳이 강남사람까지 어시스트를 안하더라도 크게 잘못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매매춘 종사자, 노동자, 무허가 거주민 등)과 더불어 기자 또한 강북에 사는 서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남거주민에 대해서 이렇게 옹호해주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강남주민들은 선의를 헤아려야 할 것이다.

강남에 거주하는 한 주부는 “강남에는 투기꾼만 사는 게 아니라 기업가 과학자 등 이 나라 발전에 기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는 데 이들을 너무 기죽이면 결국 덜 가진 사람, 강남 밖 사람들에게도 득이 될 게 없다”고 말씀하셨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해준다면 더욱 좋을 듯하다.

“강북에는 강남을 못마땅해 하는 ‘강북 밖 사람’만 사는 게 아니라 노동자 회사원 등 평범한 사람들이 나라 발전에 기여하는 많은 사람이 산다는 것”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기자의 강남을 위한 변명이 그저 ‘변명’으로 끝나지 않을 듯 하다. 지역차별과 구별의 경계가 사라지기 위해서 서로간의 배려가 절실할 때다./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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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12/19 [00:3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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