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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식 궤변의 ‘폭력성’을 비판한다
궤변의 구조와 방식, 선거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가?
 
강준만   기사입력  2002/07/23 [03:56]
  선거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선거는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만드는가? 그렇다. 그게 바로 선거의 마력이다. 서울시장 선거 문제로 나와 논쟁을 벌였던 진중권 역시 내게는 선거에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 나는 지난 6․13 지방선거 기간 중 진중권처럼 미치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가 이문옥의 선거운동을 위해 나에 대해 온갖 부당한 발언을 남발했기 때문이다. 그 발언에 대응하는 건 미친 짓은 아니기 때문에 대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여러 번 하기도 했지만, 나는 묵묵히 인내했다.

[관련기사]
강준만, '논쟁의 생명은 ‘진실성’이다: 진중권의 반론에 답한다', <인물과 사상>(7월호)
강준만, '서울시장 선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인물과 사상>(6월호)
진중권, [반론] 다시 ‘이문옥과 국민사기극’으로

이젠 6.13 지방선거가 끝났으니 좀 차분해졌을까? 아직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제 나도 할 말은 해야겠다. 나는 선거기간 중 진중권이 '한겨레' 지면을 통해 시도한 나에 대한 비방에 대해 ‘왜냐면’을 통해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진중권은 재반론을 했고, ‘왜냐면’ 담당자는 나에게 재재반론을 하겠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을 드렸다.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글 잘 받았습니다. 진중권 씨의 반론에 대해선 재반론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의 반론을 논점을 고의적으로 이탈한 ‘궤변의 극치’로 생각하는데, '한겨레' ‘왜냐면’을 위해서도 그런 주장은 제가 따로 장문의 반론을 통해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IMAGE1_LEFT} 그렇다. 나는 여전히 진중권의 글을 ‘궤변의 극치’로 생각한다. 이 글이 바로 그 ‘장문의 반론’이다. 여기서 한가지 양해 말씀을 드려야겠다. 남의 발언을 ‘궤변’이라고 부르는 건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나는 고민을 많이 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명백한 궤변인 경우에도 그걸 ‘궤변’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가? 어쩌다 한번 실수를 한 게 아니라 내내 궤변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는데도 그걸 ‘궤변’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가? 게다가 그 궤변이 매우 폭력적인데도?

궤변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남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궤변과 남들이 쉽게 알아볼 수 없는 궤변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진중권의 궤변을 후자(後者)의 것으로 생각한다. 나의 주장이 과연 타당한지는 독자들께서 심판해주시기 바란다. 이 논쟁의 전말을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우선 내가 '한겨레'(5월 28일자) ‘왜냐면’에 기고했던 글을 여기에 싣도록 하겠다. 다음과 같다.

'김민석-이문옥 논쟁에 대해'

한겨레 5월 24일치에 실린 진중권 씨의 '‘증오와 종말의 정치’라는 제목의 칼럼은 근시안적 당파성에 매몰된 좌파 지식인이 흔히 빠지기 쉬운 ‘독선과 오만’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간 언론 분야를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진보 정당에 가해지고 있는 부당한 차별과 박해에 대해 싸워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선과 정의를 독점하려는 일부 좌파 지식인들의 ‘독선과 오만’에 대해서도 싸울 것이다. 선거에 의해 심판을 받겠다는 합법 정당의 존재양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무슨 도덕성 운동을 전개하는 집단처럼 늘 남을 향해 훈계하고 욕하려는 일부 당원들의 오만한 행태야말로 진보 정당 대중화의 발목을 잡는 주범임을 널리 알릴 것이다.

진씨는 문제의 칼럼에서 나의 ‘소극적 진보’라는 개념을 왜곡하여 ‘거짓말’이라고 단정짓는 비방을 감행하였다. 사실이 아닌 의견에 대해 ‘거짓말’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건 ꡔ조선일보ꡕ조차도 잘 하지 않는 수법임을 감안할 때에 진씨의 ‘똘레랑스(관용)’ 수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극우파뿐만 아니라 좌파의 ‘앵똘레랑스(불관용)’에도 반대한다는 걸 분명히 밝혀둔다.

진씨가 이문옥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의 사이버 대변인으로서 전개하고 있는 선거운동의 핵심 전략은 “지방선거는 대선의 전초전이 아니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그의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한 바 있다. 그러나 내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진씨가 지방선거를 대선의 전초전으로 보는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들이 ‘상대에 대한 증오감’에 눈이 멀어 ‘유치한 국민사기극’을 저지르고 있다고 공격한다는 점이다.

이 후보는 민주노동당의 후보인가, 아니면 ‘진중권당’의 후보인가? 나는 이 후보가 민주노동당의 후보일 것이라 믿고, 이 후보가 진 대변인의 해당 행위에 대해 적절한 조처를 취해줄 것을 촉구한다. 지방선거가 대선의 전초전이라는 건 민주노동당의 기본적인 선거전략인데도 불구하고 진 대변인은 자기 정당을 공격해대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 아닌가.

이해삼 민주노동당 기획위원장은 민주노동당 정책이론지 <이론과 실천> 2002년 5월호에 쓴  '서울시장 선거를 2002년 대선의 전초전으로'라는 제목의 글에서 “6월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이문옥 선거운동은 대선의 중대한 전초전이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 이하 중략...
  
우리의 현실에선 사회민주주의 하나 제대로 하는 데도 100년은 걸릴 거라면서 좌파 진영의 무책임한 이상주의를 비판하는 진씨의 평소 주장에 나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정통 좌파는 진씨의 주장을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 전에 투철한 자기성찰을 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진씨도 나의 주장을 ‘거짓말’이라고 성급히 결론 내리지 말고, 자신이 선거의 계절을 맞아 너무 들뜬 건 아닌지 치열한 자기성찰을 해보는 게 좋으리라 믿는다.

진중권은 ‘소아병적 의인’

위와 같은 내용이었다. 위에 고딕체로 처리한 부분은 지면의 제약 때문에 '한겨레'에 실리지 못하고 잘려 나간 부분이다. 자, 이제부터 이 글에 대해 진중권이 한겨레(5월 31일자) ‘왜냐면’에 기고한 반론의 내용을 차례대로 음미하면서 내가 왜 그의 주장을 궤변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말씀드려 보겠다.(이 점에 대해서는 <월간 인물과 사상>(7월호)에 쓴 '논쟁의 생명은 ‘진실성’이다: 진중권의 반론에 답한다'를 먼저 참고하기 바란바-필자 주)
                                   
“선과 정의를 독점하려는 ‘독선과 오만’”, “남을 향해 훈계하고 욕하려는 오만한 행태.” 이런 인신공격은 성숙한 논쟁에는 적합하지 않다. 내가 이런 봉변을 당하는 이유는 강준만 씨의 신조어 ‘소극적 진보’가 진보가 아닌 것을 진보로 포장하는 ‘거짓말’이라고 말했기 때문. 덕분에 강씨가 한때 “우리 사회의 의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나는 졸지에 '조선일보'보다 더 나쁜 놈으로 강등된다. 이게 뭔가? 동의하지 않으면, 근거를 제시할 일이다. 

인신공격? 진중권 자신이 남의 의견을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건 ‘성숙한 논쟁’의 일환이고 진중권의 그런 행태를 지적한 건 ‘인신공격’이란 말인가?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대목에서 진중권식 궤변의 백미는 바로 그 다음에 나온다. “강씨가 한때 ‘우리 사회의 의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나는 졸지에 '조선일보'보다 더 나쁜 놈으로 강등된다”? 나는 이런 식의 말장난이 너무 싫다. 진실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진중권은 자기딴엔 이런 게 바로 논쟁술의 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궤변을 그럴 듯하게 보이게끔 장난치는 게 논쟁이냐 이 말이다.

  그러나 궤변가의 사전엔 ‘사과’는 말할 것도 없고 아예 ‘과오’라는 단어조차 없다. 궤변가는 하품을 해도 그게 진리의 소리라고 주장한다. 보라. 진중권이 하는 말을! “강씨가 한때 ‘우리 사회의 의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나는 졸지에”? 여기서 이 말이 왜 필요한가? 이 말이 궤변이라는 건 굳이 반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조금 후 진중권 자신이 답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ꡔ한겨레ꡕ ‘왜냐면’이 진중권의 글 가운데 중요하다 싶어 큰 활자로 부각시킨 다음과 같은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가 지지하는 당이라도 잘못된 길을 가면 지적해야 한다. 또 그렇게 상식의 편에 서서 당내에서 고언을 하는 ‘악역’을 맡으라 내게 권한 이가 바로 강준만씨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건 ‘해당행위’니 처벌하라 요구하는가?

이 주장에 대한 답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여기선 자기가 지지하는 당이라도 잘못된 길을 가면 지적해야 한다는 지당하신 말씀만 음미해보자. 자, 그렇다면 자기가 한때 ‘우리 사회의 의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사람이라도 잘못된 길을 가면 지적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단 말인가?

좋다. 진중권이 그냥 글을 재미있게 쓰겠다고 한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나도 가끔 그런 짓을 하면서 진중권만 너무 몰아붙이는 건 공평치 못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진중권의 경우, 문제는 그의 모든 글이 시종일관 그런 식의 말장난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데에 있다.

나는 여전히 진중권이 ‘우리 사회의 의인’이라는 생각을 양보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사실이 많이 드러났으므로 한가지 수식은 해야겠다. 진중권은 ‘소아병적 의인’이다. 모든 사람이 진중권을 알아주고 떠받들어주는 한 그는 우리 사회를 위해 의로운 일을 많이 할 사람이다. 나는 그건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진중권 천하제일주의’

  이 서슬퍼런 성토 속에서 정작 “‘소극적’이라는 형용사로 진보가 아닌 것을 ‘진보’로 포장하지 말라”는 내 주장에 대한 반박은 생략된다. 반복한다. 소위 ‘소극적 진보’란 사실상 그가 ‘적극적 진보’라 부르는 것을 포기하는, 우리 유권자들이 가진 어떤 ‘보수적’ 투표성향의 이름일 뿐. 그래서 나는 이를 ‘거짓말’이라 했다. 그런데 그는 이 논리적 주장을 “ꡔ조선일보ꡕ조차도 잘 하지 않는 수법”으로, 자기 인격에 대한 ‘비방’으로 간주한다. 

나는 이 주장에서 진중권식 궤변의 모태라 할 ‘진중권 천하제일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를 재확인하게 된다. 진중권이 생각하는 ‘진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진중권의 입장을 ‘적극적 진보’로 표현해준 과공(過恭)이 문제였던가? 아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진중권은 민주노동당 내의 극우파다. 그것도 대단히 강경한 극우파다. 그는 자신보다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내심이 매우 약하다. 욕설까지 마구 퍼부어대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내 글을 다음과 같이 끝맺었던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선 사회민주주의 하나 제대로 하는 데도 100년은 걸릴 거라면서 좌파 진영의 무책임한 이상주의를 비판하는 진씨의 평소 주장에 나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정통 좌파는 진씨의 주장을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 전에 투철한 자기성찰을 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진씨도 나의 주장을 ‘거짓말’이라고 성급히 결론 내리지 말고, 자신이 선거의 계절을 맞아 너무 들뜬 건 아닌지 치열한 자기성찰을 해보는 게 좋으리라 믿는다.”

진중권은 나의 이 주장에 대해선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궤변가는 자신의 왼쪽에 있는 사람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을 상대할 때엔 각기 다른 전략을 사용한다. 나는 진중권에게 자신의 왼쪽에 있는 사람과 논쟁할 때엔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함부로 ‘거짓말’이라고 단언할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를 했던 것인데, 그는 계속 또다른 궤변으로만 대처하고 있다.

  거짓말 수준에 이른 진중권의 뻥튀기

그는 지난 대선 때 진보 정당을 향해 “아예 출마할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가 사과를 하더니, 이번에는 광역단체를 포기하라고 충고한다. 결국 서울시장에도 출마하지 말라는 얘기다. 이는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이문옥은 구청장 선거에나 나가라”고 모욕한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이게 그의 ‘소극적 진보’ 개념의 현실적 효용이다. 

궤변가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자신의 방어에 주력하는 ‘소극적 궤변가’와 상대편의 약을 올리는 데에서 쾌감을 느끼는 ‘적극적 궤변가’ 또는 ‘가학적 궤변가’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진중권은 후자의 경우다. 진중권이 그간 “그는 지난 대선 때 진보정당을 향해 ‘아예 출마할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가 사과를 하더니”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한 줄 아는가? 그걸 누가 알겠는가? 당하는 나만 알지! 진중권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강준만이 민주노동당은 서울시장 선거는 포기하고 구청장 선거에나 주력하라는 주장을 했다는 거짓말을 몇 번이나 한 줄 아는가? 그걸 누가 알겠는가? 당하는 나만 알지!

  내가 진중권에게 너무 화를 내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게다. 이해한다. 이건 당사자가 아니면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진중권이 자기 정당화와 자기 미화를 위해 나의 주장을 왜곡한 사례는 한두 건이 아니다. 아예 상습적이다. 내가 앞으로 두고두고 계속 소개해 드리겠다.

  뻥튀기도 너무 심하면 거짓말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중권의 그런 거짓말을 감상해보자. “이번에는 광역단체를 포기하라고 충고한다. 결국 서울시장에도 출마하지 말라는 얘기다.” 이건 거짓말이다. 진중권이 이런 뻥튀기 거짓말을 하게 된 근거는 내가 <월간 인물과 사상>(6월호)에 쓴 '서울시장 선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진중권의 질문에 답한다」는 글에서 한 다음과 같은 주장일 것이다. ‘서울시장 선거의 의미’라고 하는 소제목하의 글을 그대로 다 인용한다.

'서울시장 선거의 의미'

진중권은 네번째로 “지방선거는 대선의 전초전”이라며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려면 지방선거에서 무조건 그와 같은 당에 속하는 후보를 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정치성 짙은 발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물었다.

나는 그런 발언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으며 사안별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가설은 우리의 정치사에서 한번도 입증된 바 없는 미신일 뿐”이라는 진중권의 주장에도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선거는 어차피 ‘입증의 게임’은 아니며 그런 가설이 바람직하냐 바람직하지 않으냐 하는 건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미신’일망정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면 그게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그 가설을 신봉하여 모든 경우에 그 가설대로 행동하는 것에 반대할 뿐이다.

나는 민주노동당이 대선과 서울시장 선거에 적극 참여해 민주노동당의 기상을 크게 떨쳐보는 것도 좋겠지만, 비교적 작은 선거에 역량을 집중시켜 확실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서서히 발판을 구축해 나가는 방식도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진중권은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들겠지만, 서울시장 선거의 의미와 여느 중소도시 시장 선거의 의미는 크게 다르다. 물론 대선에 미칠 수 있는 영향도 크게 다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진중권의 생각이 아니다. 중요한 건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들의 생각을 도덕적 잣대로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의 죄책감을 남에게 떠넘기지 말자

위와 같은 내용이었다. 진중권은 위에 고딕체로 처리한 나의 말을 자신의 거짓말에 대한 근거로 삼고 있다. 나는 이런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글은 진중권의 떼쓰기에 대한 답이었다. 그가 김민석에게 표를 던지겠다는 네티즌들을 향해 도덕적 공격과 욕설을 하는 것에 대한 답이었다는 말이다. 즉, 진중권의 그런 떼쓰기는 여느 중소도시의 경우엔 통할 수 있겠지만, 서울시장 선거엔 먹혀들기 어렵다는 말을 해준 것이다. 나는 “지방선거는 대선의 전초전”이라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으며 사안별로 판단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진중권은 그 말뜻을 이해 못한 건가? 내 말이 어떻게 “이번에는 광역단체를 포기하라고 충고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민주노동당의 선거전략은 기본적으로 ‘위에서 아래로’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대선과 서울시장 선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나는 그런 방식보다는 ‘아래에서 위로’의 방식이 민주노동당의 발전을 위해 훨씬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두가지 방식은 각기 일장일단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게 더 낫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위에서 아래로’의 방식은 크게 세(勢)를 떨쳐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있으나, 민주노동당원들의 희생이 너무 크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게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민주노동당의 ‘위에서 아래로’의 방식에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그런 시비는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나와야지 나 같은 사람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진중권이 문제삼은 내 글은 진중권의 욕설을 수반한 떼쓰기에 대한 답이었을 뿐이다. 진중권은 이문옥과 그의 가족에게 느끼는 죄책감을 행여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려는 시도를 즉각 중단해야 할 것이다.

  진중권의 희한한 ‘논리 회로’

한나라당은 정권을 잡아서는 안 되는 극우집단인가? 그럼 민주당이 실정을 하면 어떻게 하나? 사탄에게 정권을 넘기느니 계속 민주당을 찍어라? 그래서 민주당이 영구집권을 해야 한다? 강씨는 이를 ‘소극적 진보’라 부르겠지만, 민주당과 한나라당 양측이 가진 이런 태도가 결국 한국 정치를 구태에 묶어놓는 보수성이라는 게 나의 인식이다. 최근 광주의 시민단체들이 민주당의 행태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훌륭한 일이다. 물론 강씨의 눈에는 이것이 ‘소극적 진보’조차 가로막아 수구집단의 집권을 초래하는 반동적(?) 행태로 보이겠지만.

진중권의 거짓말이 너무 심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방선거는 대선의 전초전”이라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으며 사안별로 판단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나는 이미 호남에서 여러 차례 이번엔 ‘민주당 독식’을 꼭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사람이다. 나는 그 지긋지긋한 지역주의 투표를 끝장내기 위해서라도 이번엔 호남에서 한나라당 당선자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런데 진중권이 말하는 걸 보라. “최근 광주의 시민단체들이 민주당의 행태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도 나의 눈에는 “‘소극적 진보’조차 가로막아 수구집단의 집권을 초래하는 반동적(?) 행태로 보이겠지만” 운운하는 걸 보라.

  진중권이 도대체 왜 이런 어이없는 무리를 범하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진중권의 텍스트주의는 ‘진중권 천하제일주의’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진중권은 자신에게 유리할 때에는 텍스트 밖의 세계도 넘보지만, 자신에게 유리할 게 없을 때엔 텍스트와 그 텍스트 필자와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또한 진중권의 텍스트 분석엔 역사와 구조가 없다. 오직 텍스트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한국의 분단 상황과 국가보안법에 대해선 잘 알고 있겠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텍스트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선 눈을 감는다. 그래서 그의 텍스트 분석에선 한국과 독일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는 자신이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독일의 나치가 ‘운명공동체’라는 말을 썼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나치식 어법’ 운운하면서 그걸 그대로 한국 상황에 적용시켜 보겠다는 순진한 모범생의 자세를 갖고 있다. 한총련이 진중권에 의해 인성(人性)을 모욕당하고 파시스트 집단으로 매도되는 이유도 상당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중권식 텍스트 분석으론 한국의 웬만한 민족주의자를 파시스트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민주노동당도 안심해선 안 된다. 진중권이 어느 날 등을 돌리게 되면 파시스트 집단으로 급전직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진중권 천하제일주의’가 너무 무섭다.

내가 과연 이런 ‘진중권 천하제일주의’에 대해 일일이 답을 해야 하는 건가? 나는 그래도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단 한 사람이라도 진중권의 궤변에 속아넘어가는 사람이 나와서는 안 되겠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배려의 차원에서 한국일보(6월 11일자)에 '자기 무덤 파는 정당들'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는 걸 밝혀둔다.

  진중권식 궤변의 진수

위 글에서 지적한 문제엔 수구 신문들이 져야 할 책임도 있다. 수구 신문들은 호남에서 민주당 지지율이 떨어지면 그걸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도하는 게 아니라 ‘민주당이 호남에서조차 몰락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논평한다. 수구 신문들이 평소 ‘지역 정당’에 대해 얼마나 혹독한 비판을 해왔던가를 상기한다면, 이는 수구 신문들의 ‘정신 착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젠 한나라당까지 이래도 욕하고 저래도 욕하는 수구 신문들의 수법을 배웠나보다. 한나라당은 한동안 노무현이 김대중을 비판하지 않는다고 죽어라 하고 욕하더니 노무현이 김대중과의 차별화 시도를 할 조짐을 보이자 ‘배은망덕’이라고 공격해댔다. 수구 세력은 매사가 이런 식이다. 진중권마저 그런 저열한 수준의 수법을 나에게 써먹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강씨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지방선거를 대선의 전초전으로 보는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란다. 다시 말한다. 자치단체장을 뽑는 선거를 특정 대선후보를 위한 행사로 전락시키는 것은 분명 “정치적으로 변질”된 태도다. 이는 나만의 인식이 아니라 몇몇 신문에서 사설로 주장한 바 있고, 선거보도감시연대의 견해이기도 하다. 강씨는 나의 이런 논리적 지적이 유권자를 국민사기극의 주범으로 ‘공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이 말이 매우 ‘선동적’이라 느낀다. 강씨가 ꡔ노무현과 국민사기극ꡕ을 썼을 때, 그는 국민이나 혹은 민주당 지지자들을 ‘공격’했던 것일까? 똑같은 말도 자기가 쓰면 ‘제언’, 남이 쓰면 ‘공격’이 되나 보다.
“지방선거가 대선의 전초전이라는 건 민주노동당의 기본적인 선거전략인데” 진중권이 당의 방침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단다. 그래서 그는 이문옥에게 나의 “해당 행위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촉구하기까지 한다. 코미디다. 정당은 지지자를 규합하기 위해 그럴 수 있다. 그런 관점을 흔히 ‘정략적’이라 부른다. 당원에게나 통용될 이런 ‘정략적’ 관점으로 시민사회의 상식을 왜곡하지 말라는 것. 그게 내 주장이다. 그리고 이는 당원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상식을 지키는 지식인의 자격으로 한 발언이다. ꡔ한겨레ꡕ 컬럼 역시 나는 특정 당의 당원 자격으로 쓰지 않았다. ꡔ한겨레ꡕ가 당기관지인가? 
 자기가 지지하는 당이라도 잘못된 길을 가면 지적해야 한다. 또 그렇게 상식의 편에 서서 당내에서 고언을 하는 ‘악역’을 맡으라 내게 권한 이가 바로 강준만씨.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건 ‘해당행위’니 처벌하라 요구하는가? 내 비록 당원이라도 권영길의 대선승리를 위해 문제 있는 후보를 내놓고 찍으라고 강권한다면, 그 때는 시민사회의 상식의 편에서 기꺼이 ‘해당행위’를 저지르다 강준만씨가 촉구한 그 ‘적절한 조치’를 당할 것이다. 나는 상대를 특정 당의 당원으로 환원시킴으로써 논점을 피해가려는 그의 어법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느껴진다.


  진중권의 ‘딴전 피우기’ 수법

남은 것 한꺼번에 이야기하자. 위 글은 진중권식 궤변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말꼬리 잡기’ 수준을 넘어선, ‘딴전 피우기’ 수법이라고 할까? 내 글의 논점은 무엇이었을까? 웬만큼 글을 읽을 줄 아는 중학생 정도면 내 글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이 논점이었다고 말하지 않을까?

“지방선거를 대선의 전초전으로 보는 건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지역주의와 껍데기뿐인 지방자치제로 인해 그 현상이 심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은 건 사실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지역주의 해소와 지방자치제 강화를 위해 애쓰면서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는 게 좋은 방법일 듯하다. 그러나 진씨의 방법은 그런 게 아니다. 도덕적 공격과 비방이다. 이건 곤란하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정당부터 자신의 ‘도덕적 공격과 비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남들을 향해 도덕적 공격과 비방을 해대는 건 좀 우습지 않느냐 이 말이다. 진중권이 시늉일망정 민주노동당의 그런 전략을 공개적으로 비판이나 하면서 그러면 내 말도 않겠다.

어찌됐건 진중권의 반론은 참으로 뜻밖이다. 나는 민주노동당이 “지방선거는 대선의 전초전”이라고 주장하는 건 보수 정당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고 주장할 줄 알았다. 왜? 나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진중권이 그렇게 답을 하면 다음과 같은 답을 해줄 생각이었다.

‘그렇다. 지방선거가 대선의 전초전이냐 아니냐 하는 건 누가 무슨 뜻으로 어느 지역 어떤 상황에서 그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서울 다르고 진중권이 사는 김포가 다를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진중권은 이문옥 선거운동을 위해 ‘서울시장 선거’를 ‘지방선거’로 바꿔치기 해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수법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안 된다.’

강준만의 ‘제언’, 진중권의 ‘공격’

진중권은 자신이 나를 흉내내 ‘국민사기극’을 외쳐대는 게 왜 문제가 되는지 그걸 이해를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잘 알면서도 억지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 선의의 해석을 해주자. 아마도 그래서 “강씨가 ꡔ노무현과 국민사기극ꡕ을 썼을 때, 그는 국민이나 혹은 민주당 지지자들을 ‘공격’했던 것일까? 똑같은 말도 자기가 쓰면 ‘제언’, 남이 쓰면 ‘공격’이 되나 보다”라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내가 <월간 인물과 사상>(7월호)에서 해준 답을 다시 여기에 소개하면서 추가 설명을 드려야겠다.

“나는 자전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인들의 ‘자동차 중독증’을 호되게 비
판하는 글을 자주 쓴다. 나는 그 글 읽고 기분 나빴다는 사람 못 봤다. 오히려 내게 감사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자동차 중독증’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 글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어 스스로 알아서 지나친 자동차 이용을 자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중권은 내 글에 감명을 받은 탓인지 내 주장을 직접 운동으로 연결시켜 보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무차별적으로 자동차 운전자만 보면 호통을 쳐대고 심지어 자동차 타이어에 빵꾸를 내고 다니는 방법까지 쓰는 게 아닌가. 그는 그러고선 나를 찾아와 자신의 행위를 지지하는 글을 써달라고 요구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진중권이 나를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이라고 어찌나 욕을 해대는지 정말 죽을 맛이다.”

그렇다. 내가 하는 건 ‘제언’이지만, 진중권이 하는 건 ‘공격’이다. 자신의 단순한 디지털 논리 회로만 작동시킬 생각하지 말고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진중권은 자신이 내게 처음에 던진 질문도 오직 그 텍스트만으로 평가받고 싶다는 것이겠지만, 진중권의 텍스트는 진중권이 이문옥의 사이버 대변인으로서 해온 텍스트 밖의 다른 활동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진중권은 내가 이문옥에게 진중권의 “해당 행위에 대해 적절한 조처를 취하라”고 촉구한 걸 ‘코미디’라고 말한다. 맞다. 동의한다. 내가 진중권의 글에서 동의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대목이었다. 나로선 내 글의 일부가 잘려 나가 내 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주지 못한 게 안타깝다. 내가 원래 썼던 글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그 코미디의 대사는 다음과 같다.

“이 후보는 민주노동당의 후보인가, 아니면 ‘진중권당’의 후보인가? 나는 이 후보가 민주노동당의 후보일 것이라 믿고, 이 후보가 진 대변인의 해당 행위에 대해 적절한 조처를 취해줄 것을 촉구한다.”

나는 나의 코미디 이전에 이문옥이 ‘진중권당’의 후보가 아닌가 하는 ‘코미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선거기간 중 일부 사회당 당원들이 진중권의 거듭되는 사회당 모욕에 대해 민주노동당 지도부에 이의를 제기한 것도 그러한 ‘코미디 의혹’을 뒷받침해주는 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중권은 나의 코미디에 대한 평가에 임하기에 앞서 나와 사회당의 ‘코미디 의혹’ 제기에 침묵으로 대응한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코미디에 대한 비판에 임해야 하리라 믿는다.

‘당원-지식인’ 분리론의 함정

진중권이 자기 정당화를 위해 ‘당원’과 ‘지식인’을 분리시키는 건 스스로 자기가 빠질 함정을 판 건 아닌지 걱정된다. 진보 정당마저도 진중권이 옹호하는 ‘정략적’ 관점을 가질 수 있다면 보수 정당과 정치인들의 ‘정략적’ 관점이 도대체 무슨 문제가 된다는 걸까? 우리가 말하는 정치개혁이라는 건 가능한 한 그러한 ‘정략적’ 관점마저도 극복해 나가자는 게 아니었나?

진중권은 '한겨레'가 당기관지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렇게 뻔뻔하게 묻기 전에 이 말을 해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지식인이 김민석의 사이버 대변인을 맡았다면 결코 ꡔ한겨레ꡕ에 김민석 선거운동을 하는 내용의 칼럼을 쓸 수는 없었을 거라는 점이다. 진중권은 진보 정당 후보의 사이버 대변인으로서 특혜를 누린 것이다. 물론 나는 그러한 특혜가 ꡔ한겨레ꡕ의 창간정신에 비추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중권이 그런 이치는 전혀 아는 바 없다는 듯 딴전 피우는 건 영 보기에 좋지 않다.

진중권도 그걸 알고서 '한겨레'에 그런 칼럼을 썼을 것이다. 진중권이 '6월 7일자)에 쓴 "‘흑백화면’뿐인 선거방송"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 다음과 같은 선거운동은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이번 선거에는 정당명부제에 따라 1인2표제가 시행되니, 우리 사회가 무지개처럼 다양해지기를 원하는 유권자들은 이 새로운 제도의 취지에 맞게 한 표는 현재를 위해 찍되, 다른 한 표는 미래를 위해 진보정당이나 시민단체와 같은 새로운 정치세력에게 던지는 것도 생각해 봄직하다.

그렇다. 바로 이런 식으로 선거운동을 하라는 게 나의 뜻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겁 먹고 나간 점이 있어 오히려 그게 불만일 정도다. “한 표는 현재를 위해 찍되”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 한 표마저도 진보 정당을 위해 찍을 수 있으면 찍어야지 왜 그렇게 주눅이 든 말씀을 하시나? 내 이야기는 김민석에게 표를 던지겠다는 사람들에게 욕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지, 진중권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진중권이 이른바 ‘의제설정 플레이’를 위해 (또는 자신의 유희와 오락 차원에서) 시도한 도덕적 공격과 욕설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진중권이 당내 ‘악역’을 맡으라는 나의 고언을 수용해 실천에 옮길 뜻을 밝힌 것에 대해선 감사드린다. 그러나 실천의 내용이 잘못되었다. 나는 <월간 인물과 사상>(7월호)에 쓴 '논쟁의 생명은 ‘진실성’이다: 진중권의 반론에 답한다'라는 글에서 이미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걸 밝혀둔다.

“진중권에겐 도무지 자기성찰의 의지나 능력이 없다는 걸 확실하게 확인한 이상, 이제 나는 민주노동당이 진중권에게 고언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진중권은 자기의 편견으로 천하통일을 이루기 위해 민주노동당을 방패 삼아 쓸데없이 많은 적(敵)을 만들어내면서 상대편이 약 올라 하는 걸 즐기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진중권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진중권이 민주노동당을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건 곤란하다. 민주노동당은 진중권 개인 정당이 아니라 공당이기 때문에 나부터 진중권의 그런 이용에 반대한다는 걸 분명히 밝혀둔다.”

  진실성이 결여된 말장난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진중권이 토한 웅변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위한 의도가 엿보이긴 하지만, 진실성이 결여된 잔재주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어인 이유에서일까? 지나가는 사람 뒤통수 때려놓고선 그 사람이 보이는 점잖지 못한, 아니 점잖을 수 없는 반응을 소개하면서 개탄하는 식이라고나 할까?
진중권의 집에선 조금만 걸어가면 될 거리도 꼭 차를 타고 간다. 진중권은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진중권은 자기 집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선 모른 척 해오다가 옆집에서도 그렇게 하는 걸 보고선 호통을 쳐댄다. ‘자동차 중독증 환자’라는 둥 ‘그러고서도 민주 시민 행세를 할 수 있느냐’는 둥 이만저만한 독설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진중권은 자기는 언제든 옳은 일이라면 자기 집안을 욕보이는 일을 할 것이며, 이는 강준만이 자신에게 권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중권은 그게 옳은 일이 아니라는 강준만의 말은 전혀 듣지 않는다. 이제 강준만은 큰일났다. 진중권이 혹 자기 집 때려 부수는 최악의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 가서도 진중권은 그게 다 강준만이 권한 것이라고 말할 게 아닌가. 더 이상의 해설이 필요하겠는가? 정말이지 콧구멍이 두 개라 숨을 쉰다.

진중권이 <월간 북매거진 텍스트>(6월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진중권은 논쟁을 하면서 “사실 욕먹을 때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너희들 약 올랐구나?’ 싶은 심정이 들면서…!”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나는 진중권이 모든 경우에 다 그렇게 하진 않을 거라고 믿지만, 나와의 논쟁에선 진중권이 그런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내가 여태까지 밝힌 바와 같이, 진중권은 시종일관 자기 정당화를 위한 말장난으로 일관했을 뿐 대화를 해보겠다는 진지한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점에 대해 화를 낸 것이다. 진중권식 표현을 빌리자면, 약이 오른 것이다. 진중권은 ‘성공’이라면서 쾌감을 느끼고 있을까? 모를 일이다.

  이장춘의 반론에 답한다

진중권의 반론에 대한 답은 그 정도로 하고, 이번엔 이장춘이'오마이뉴스'에 올린 반론에 대해 답해보기로 하자. 이장춘의 반론은 진중권의 글에 비해 훨씬 더 진실되다는 점에서 나에겐 더 소중한 글이었다. 그러나 ‘뻥’이 너무 심하다. 이장춘은 “틈만 나면 진보정당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면서”라는 주장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진중권의 도발도 그렇거니와, 최근 내가 썼던 모든 민주노동당 관련 글들은 거의 대부분 민주노동당원들의 나에 대한 비판에 반응한 것이었다.

이장춘은 일부 민주노동당원들이 나에 대해 얼마나 잔인한 인신공격을 했는지 전혀 아는 바 없는가? 예컨대, 나를 ‘악(惡)’으로 묘사한 민주노동당 강북을 지구당위원장 박용진의 글을 못 봤는가? 그의 그런 공격은 나의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을 읽고서 나온 것인데, 그 책 어디에 내가 민주노동당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는가?

이장춘이 나의 ‘진보 정당’ 옹호를 너무 좁게만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말씀도 드리고 싶다. ‘정당’에 초점을 맞추지 마시고 ‘진보’에 초점을 맞춰주시기 바란다. 안티조선운동도 아주 좋은 ‘진보 살리기’ 아닌가? 내가 이 책에 실린 다른 글에서 소개한, 지난해 6월 '한겨레'에 기고한 ‘진보 죽이기’라는 제목의 칼럼도 참고해주시면 고맙겠다.

  ‘분열과 증오의 수사학’으론 안 된다

나는 지금 진중권보다는 내가 더 진보 정당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다. 물론 이장춘은 웃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거의 모든 진보 정당 당원들이 웃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이 책에서 ‘김대중 신드롬’과 ‘진중권 신드롬’을 말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젠 생각의 틀을 좀 바꿔보자는 것이다.

어느 운동가는 과거 진보정당 운동의 3대 특성으로 “고질적 분열증, 관념적 급진성, 대중적 취약성” 등을 든 바 있다.(김대일, <21세기 좌익을 위하여 그리고 나를 위하여>(민맥, 1995), 129쪽-필자 주) 과연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3대 특성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자폐적인 집단에서 내부 분열만 일삼는다면, 그런 정당이 어찌 대중화될 수 있겠는가?

이장춘은 진중권의 극렬한 한총련 매도를 잘 알 것이다. 그러나 한총련은 지난 6월 4일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과 소속 광역단체장 후보들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민주노동당이 ‘진중권당’은 아닐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무관하게 이장춘 자신의 진심을 이야기해달라. 진중권의 ‘분열과 증오의 수사학’이 민주노동당에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는가?

자꾸 나만 문제삼지 말고 제발 설문조사라도 해보기 바란다. 범개혁진영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민주노동당 사람들과는 대화가 안 통하고 민주노동당의 폐쇄성이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란 말이다.

나는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의 빛이자 그림자라고 생각한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의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버팀목 때문에 민주노동당이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당연히 마땅히 갖춰야 할 겸손도 잊어버렸다. 전투적인 파업의 자세가 민주노동당을 지배하는 기본 정서가 되고 말았으며, 그 런 상황 때문에 진중권의 사회당에 대한 모욕조차 민주노동당 당원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나의 진단이다. 이것도 ‘짱돌’인가?

진보 정당과의 대화는 가능한가?

강준만은 또한 선과 정의를 독점하려는 좌파지식인들의 독선과 오만에 대해 얘기하였다. 현실에서 돈도 권력도 없는 진보정당이 그나마 경쟁력, 대중적 호소력을 가진 부분은 바로 이 선과 정의이다. 이 부분에서 경쟁자에 대한 상대적 우위성을 주장하는 것이 강준만에게는 왜 도덕성 운동이라거나 상대에 대한 훈계나 욕설로 들리는 것일까? 그럼 강준만이 영남패권주의를 비판하며 DJ를 지지했던 것은 이 선과 정의, 도덕성 운동, 상대에 대한 훈계나 욕설과 다른 것인가? 강준만의 잣대가 균형을 잃고 있다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나는 ‘본질’은 같은 것이라는 데엔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수구기득권을 고수하겠다는 사람과 수구기득권을 깨기 위해 ‘방법으로서의 현실성’을 고려하겠다는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는 게 뭐가 문제냐는 식의 주장엔 동의하기 어렵다. 진정한 균형감각이란 그런 차이까지 헤아려주는 게 아닐까?
반면 진중권은 어떤가? 진중권과의 논쟁은 내가 시작한 게 아니다. 진중권은 나에게 공개적으로 선거운동용 질문을 던져놓고 두 번씩이나 답을 하라고 야유를 보내며 독촉했다. 신문에 대고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 내가 언제 서울시장 선거에 대해 단 한마디라도 했는가? 나는 이장춘이 ‘패거리주의 당파성’을 떠나 진중권의 행태에 대해 공정한 판단을 내려주기를 촉구한다.

  진중권의 호남인에 대한 광기

  그는 좌파의 앵똘레랑스를 과감히 반대한다고 한다. 진중권의 주장에 대한 반박은 진중권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나는 강준만이 가진 똘레랑스의 개념에 대해 문득 회의를 느낀다. 관용이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베푸는 것이다.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베푸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가진 것 없는 진보세력이라고 똘레랑스를 발휘할 여지가 없지는 않겠으나 강준만 자신이 진보세력에 발휘하는 똘레랑스의 인색함과 어찌 비교가 될까? 똑같은 돌에 맞아도 개구리가 맞으면 사망이지만 하마가 맞으면 장난이다.

일리 있는 말씀이다. 나도 이런 반론을 염두에 두고 ‘똘레랑스’라는 말을 썼다. 내 답은 이렇다. 민주노동당은 선거를 통해 집권하겠다는 합법정당인가? 만약 그렇다면, 속에선 구토가 치밀어 올라와도 똘레랑스를 실천해야만 한다. 그걸 실천할 수 없다면, 지하정당으로 탈바꿈하거나 선거 이외의 방식으로 투쟁을 해야 할 것이다.

호남에 대한 태도도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진중권은 호남인들에 대한 똘레랑스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초등학생도 뻔히 알 수 있는 수준의 호남 차별 발언에 대해선 이의를 제기할 만큼의 상식은 갖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는 현상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를 뿐만 아니라 되려 호남인들을 모독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나는 ꡔ월간 북매거진 텍스트ꡕ(5월호)를 읽다가 진중권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혀를 끌끌 찼다는 걸 밝혀둔다.

우리 당원이 만 오천인데, 호남 당원이 몇 명인 줄 아나? 삼백 명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거의 광적인 거다. 광기다. 요번에 호남에서 노무현에 대해서 전략적 지지를 표명했는데, 그런 묘를 앞으로 계속 보여줄 필요가 있다.

나는 그간 진중권의 호남 관련 발언에 대해 계속 선의의 해석을 해왔지만, 이 발언만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선의의 해석을 해주기가 어려울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진중권의 머리와 가슴속엔 ‘호남차별 바이러스’가 활개치고 있는 것 같다. 진중권의 위와 같은 발언을 읽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진중권의 주장처럼 ‘호남=광기’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이 얼마나 위험하고 잔인한 짓인가.

진중권에게 묻겠다. 위 발언에 대해 책임질 수 있겠는가? 내가 살고 있는 전주만 해도 민주노동당 당원의 수가 260명이나 된다. 군산의 민주노동당 당원의 수도 그와 비슷하다. 두 도시의 당원수만 해도 이미 진중권이 말한 수보다 200명을 초과했다. 더이상 내 입으로 말 않겠다. 나는 진중권이 정확한 통계를 확인해본 후 자신의 위와 같은 발언에 대해 공개적으로 해명할 것을 요구한다.

나는 진중권의 광기가 무섭다. 설사 호남 당원의 수가 300명이라고 해도 위와 같은 식으로 말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진중권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지기 위해 우선 지난 6․13 지방선거의 정당 투표에서 민주노동당의 지역별 득표율을 살펴보자. 가장 높은 순서대로 열거해 보겠다. 울산 28.70%, 전남 14.99%, 광주 14.79%, 전북 12.77%, 부산 10.67%, 제주 10.60%, 경남 8.96%, 강원 8.64%, 대전 7.54%, 충북 7.33%, 인천 6.28%, 서울 6.06%, 경기 5.82%, 대구 5.17%, 충남 4.54%, 경북 4.50% 등이다.

울산이라고 하는 특수한 노동자 도시를 제외한다면, 호남지역이 1, 2, 3위를 차지했다. 자, 어디 진중권에게 물어보자. 민주노동당이 호남에서 한나라당을 제치고 두번째로 높은 지지를 받은 것도 호남인들의 광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진중권은 영남에 민주노동당원 수가 많은 게 영남인들은 광기가 없고 진보적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인간이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당’이라는 말도 못 들어보았는가? 민주노총의 등에 업혀 거저 먹다시피 한 당원의 수를 앞세워 호남의 ‘광기’를 질타하다니, 이런 장난을 쳐도 되는 건가? 호남에 공장이 많이 들어서 노동자들의 수가 늘어나도 호남인들은 그 광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원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진중권은 먹고 살 길이 없어 호남을 떠나 영남으로 이주한 호남인들의 수가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호남 출신 영남 당원들의 수를 따져 보았느냐 이 말이다. 진중권은 호남 차별이 두려워 영남에서 자신의 고향을 숨기고 사는 호남 출신 사람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는가? 또 호남차별에 한이 맺혀 김대중을 지지해온 호남인들이 진중권의 눈엔 단지 ‘김대중 광신도’로만 보이는가? 심심하면 ‘김대중 광신도’니 ‘민주당 광신도’니 하는 욕설을 내뱉어온 진중권이 감히 소수파의 대변자를 자임하고 진보 및 좌파 행세를 하는 건 사기극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호남에서 노무현에 대해서 전략적 지지를 표명했는데, 그런 묘를 앞으로 계속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앞으론 이런 말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전략적 지지’인지 ‘순수한 지지’인지 진중권이 어떻게 아는가? 호남인들의 속에 들어갔다 나왔는가? 내가 진중권과 같은 인간들 들으라고 <월간 인물과 사상>(6월호)에서 말한 걸 여기 다시 인용한다. 다음과 같다.

“광주의 선택은 예찬받아야 한다. 과도한 분석에 임하지 말라. ‘분석 기계’가 되어선 곤란하다. 우리 인간은 매우 복잡한 동물이다. 매우 숭고한 뜻을 갖고 하는 일의 어느 한 구석에도 작은 이기심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그 이기심을 부각시키기 위해 발버둥치지 마시라. 이 세상 모든 일이 정신분석학이나 생물학의 차원에서 분석되고 해석될 때에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건 없다. 인간의 존엄이라는 건 결코 그런 게 아니다.”

  ‘똘레랑스’를 지식계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이장춘이 똘레랑스를 지식계의 관점에서 보는 것도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진중권이 잘 지적했듯이, 한국 지식계엔 정치 영역과 비교하여 과도할 정도의 좌파 지식인들이 포진하고 있다. 또 '시민의 신문'(5월 27일자)에 따르면, 전국의 시민운동가 200명이 선호하는 정당은 민주노동당(35.0%), 민주당(11.0%), 녹색평화당(6.5%), 사회당(5.0%), 한나라당(1.5%) 순이었다.

이 나라는 여전히 ‘영남 패권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나라다. 지식인들이 활개치는 언로(言路)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최근 가톨릭대 정치학과 교수 김만흠의 탁월한 연구 결과를 통해 밝혀졌듯이, 조․중․동의 외부 기고자 출신지를 살펴보자. 영남 출신은 ꡔ동아일보ꡕ 49.4%, ꡔ조선일보ꡕ 41.6%, ꡔ중앙일보ꡕ 36.8%인 반면, 호남 출신은 ꡔ동아일보ꡕ 7.6%, ꡔ조선일보ꡕ 8.4%, ꡔ중앙일보ꡕ 13.9%이다.

이런 기가 막힌 사실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남 패권주의’가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하는 것은 단순히 보수 정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개혁적인 성향을 갖고 있으면서도 호남차별 의식을 갖고 있거나 호남차별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들 숱하게 많다. 또 추상의 세계에선 개혁/진보적이면서도 현실세계에 대해 냉소적인 사람들도 숱하게 많다. 이들은 이념이나 정치적 지향성 이전에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하지 않으려 하고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 이들이 나보다 더 개혁적이거나 진보적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파시즘과 맑시즘

나는 이장춘이 똘레랑스를 좀더 넓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기를 바란다. 사회학자 강기택이 <동향과 전망>(1999년 가을호)에 쓴 글에서 똘레랑스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좌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이들이 물리적 권력만 획득하면 포스트모더니스트와 리버럴리스트를 충분히 박해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정통 맑시즘을 한다고 아무리 외친들 합리적 대화와 비판의 정신이 없다면 그것은 맹목적 파시즘이지 맑시즘이 아니다.”

이장춘의 반론에 대한 답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겠다. 이후에도 좋은 말씀을 많이 했으나 이미 앞에서, 그리고 <월간 인물과 사상>(7월호)에 쓴 글에서 충분한 답을 드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이장춘과 같은 분들과 생산적인 논쟁을 하고 싶다. 진중권과의 논쟁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 서로 자기가 더 잘났다는 치졸한 싸움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 진중권과 강준만에게 돌을 던지자. 두 사람의 부풀려진 이름의 거품을 빼자. 나와 마찬가지로 진중권도 우리 두 사람의 그러한 ‘제몫 찾기’를 환영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국민사기극’이라는 표현에 대해

이번엔 ‘약수’라는 ID를 가진 네티즌께서 진중권이 시비를 건 ‘국민사기극’이라는 표현에 대해 진중권의 주장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하는 주장을 하셨기에 이에 대해 답을 드리고자 한다. 나는 <월간 인물과 사상>(7월호)에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은 답을 드렸다.

“진중권은 ‘정당 정치’라고 하는 시민사회의 상식을 조롱한다. 기존의 정치혐오주의에 편승하겠다는 것이겠지만, 그래서야 쓰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조롱했나?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을 주로 민주당 지지자들을 위해 썼다는 나의 발언에 대해 그렇다면 책제목을 <노무현과 민주당 사기극>으로 붙였어야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그게 바로 디지털식 사고라는 거다. ‘주로’라는 말에 주목하시라. 덤으로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무당파들까지 넘어오면 금상첨화지, 그 말에 왜 그렇게 난리를 치나? 난 민주노동당원들은 행여 그 책을 읽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걸 밝혀둔다. 외람된 발언일 것이나, 나는 열려 있다. 나는 ‘정당 정치’라는 상식과 진중권이 이문옥 예찬을 위해 역설하는 상식 사이의 상호 소통을 인정하면서, 사안별 질적 분석을 주장했다. 반면 진중권의 잣대는 오직 하나이며 굳게 닫혀 있다. 진중권은 내가 ‘국민사기극의 주범’으로 ‘주로 민주당 지지자들’을 지목했기 때문에 그들이 강준만에게 돌을 던져야 할까 라고 묻는다. 별 걱정 다 한다. ‘사기’보다 더 나쁜 범죄가 많다는 것만 알아두시면 되겠다.”

‘약수’는 내가 진중권의 추궁에 밀려 ‘자기 정당화’ 차원에서 어설픈 변명을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는 이미 민주노동당 정책이론지 ꡔ이론과 실천ꡕ(2001년 10월호)에 민주노동당 강북을 지구당위원장인 박용진의 비판에 대한 반론으로 기고한 「‘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어떻게 퇴치할 것인가?: 박용진의 비판에 답한다」라는 글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이 주장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기에, 이걸로 이 글의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까마귀’라는 표현은 원래 박용진의 것임을 밝혀둔다.)

선악(善惡) 이분법을 버려라

나는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그 책을 보는 걸 원치 않는다. 내 책에 넘어갈 리도 없겠지만 박용진이 우려하는 것처럼 만의 하나라도 넘어간다면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민주노동당을 굳건하게 지켜주시기 바란다.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은 우선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는 ‘까마귀들’ 보라고 쓴 책이다. 나는 노무현이 민주당 후보가 된다면 그 때엔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또다른 ‘까마귀들’ 보라고 새로운 책을 쓸 생각이지만,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책을 쓸 생각은 전혀 없다. 왜? 그 만큼 내가 민주노동당을 아끼기 때문이다. 나는 왜 박용진 ‘백로’가 ‘까마귀들’ 보라고 쓴 책을 읽고서 괜한 흥분을 했는지 그게 안타깝긴 하지만, 박용진이 그 글을 쓰게 된 두번째 이유만큼은 흔쾌히 공감할 수 있었다. ‘비판적 지지’라는 망령을 퇴치해야 할 필요성 말이다. 좀 더 유쾌한 방식으로 그 필요성을 제기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

나와 박용진은 똑같이 큰 과오를 하나 저지르고 있는 게 있다. 나는 한국 사회의 ‘극우 헤게모니’를 깨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노동자들의 고통을 염두에 두고 그걸 배려하는 글쓰기를 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점에서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이 비판받을 점이 있다고 보며, 이 점 죄송하게 생각한다.

반면 박용진이 저지른 과오는 ‘비판적 지지’ 쪽으로 기운 사람들의 심리를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그들을 ‘악의 집단’으로 공격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위험한 병균’이요 ‘퇴치되어야 할 전염병’으로 매도한다고 해서 그들이 생각을 바꿀까? 물론 박용진은 그 글을 주로 민주노동당 당원들을 염두에 쓰고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자면 내 책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민주당 지지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일 뿐이다. 우리가 피차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내 책이나 ꡔ이론과 실천ꡕ이나 주로 겨냥하는 대상 독자가 있겠지만, 어차피 ‘매품(賣品)’으로 시장에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독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잊어선 안 되리라는 점이다.

박용진의 글이 오직 당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비밀문건이었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당원들로 하여금 일상적 삶의 전선에서 만나는 ‘비판적 지지’ 쪽으로 기운 사람들을 설득할 논리를 제공하는 데 있어서 겨우 ‘위험한 병균’이요 ‘퇴치되어야 할 전염병’이요 ‘악의 무리’라는 구호만을 외치게 한다는 건 그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시위를 할 때엔 그렇게 할망정 ‘생활 투쟁’의 용도로 좀더 세련되고 정교한 논리를 제공해줄 수는 없는 걸까?

외람되지만, 너무 답답한 나머지 내가 한번 제공해 보겠다. 물론 나는 ‘극우 헤게모니’를 깨고자 하는 나의 목표와 공생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지만, 이 이상 더 좋은 논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 내가 ‘비판적 지지’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귀신같이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현단계의 한국 정치는 ‘반사 정치’요 ‘반감 정치’다. 누굴 좋아서 지지한다기보다는 누굴 싫어하기 때문에 그 싫어하는 세력과 경쟁관계에 있는 정당에게 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이른바 ‘반(反)DJ 정서’의 가공할 파괴력을 잘 아시지 않는가. 그 파괴력엔 미치지 못할망정 ‘반(反)한나라당 정서’도 만만치 않다. 민주노동당은 어떤 정서를 이용할 것인가?

물론 이건 쉽게 결정한 문제가 아니다. 어느 한쪽을 택하면 반드시 다른 한쪽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두 가지 정서를 다 이용할 것을 권하고 싶다. 단,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한나라당을 공격할 때엔 그 수구성와 극우성을 전방위적으로 공격하되, 김대중과 민주당을 공격할 때엔 노동자들의 생존권 차원에서만 공격해야 한다.

이건 아주 쉬운 원칙인 것 같지만, 의외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예컨대, 박용진의 글을 보자. 그는 김대중 정권의 모든 걸 부정하면서 ‘악의 무리’로 단죄하고 있다. 노무현을 공격하기 위해 언론개혁마저도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하면 ‘비판적 지지’라는 망령을 퇴치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내가 장담하지만 이건 ‘비판적 지지’라는 망령을 키우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절대 이런 식으론 안 된다.

* 본문은 단행본 <인물과 사상>23호(개마고원, 2002.7)에 발표된 원고를 축약한 것입니다. 그러니 본문의 축약된 원고로 논거를 삼는 것은 자제해 주시고, 원본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본문의 전재를 허락해준 개마고원 출판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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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7/23 [03:5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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