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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강연의 시대에서 향연의 시대로
[공희준의 일망타진] 창의력 극대화해야 성공하는 시대, 우리들의 진로
 
공희준   기사입력  2015/01/07 [16:09]

1. “칠판과 공책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뭐가 대신 들어올까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교육전문가는 물론이고 정치인과 경제학자, 심지어 어린 학생들마저도 마치 사전에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너무나 천편일률적 정답을 내놓곤 한다. “아이패드요!"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극소수의 다른 대답도 나올 수가 있을지 모른다. ”갤럭시노트입니다.“

 
사지선다형의 객관식 시험문제에 인생과 영혼을 모두 저당 잡혀 살아온 한국인들의 상상력 빈곤과 획일적 사고를 풍자적으로 묘사하는 사례로 가끔씩 인용되는 예화가 있었다.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물이 된다”고 응답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왜냐면 얼음이 녹으면 일어날 수 있는 무수한 현상들로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갈 폭넓은 사고의 지평이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원천적으로 봉쇄돼왔기 때문이란다.
 
나는 얼음이 녹으면 축대가 무너진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달동네라고 낭만적으로 불려온 비탈진 산동네에서 성장한 영향으로 말미암아, 봄철의 해빙기만 되면 도처에서 흉물스럽게 생겨난 담벼락들의 굵고 가는 균열들로부터 안전과 생존을 맞바꿔야만 하는 서민들의 비애를 경험적으로 발견한 탓이었으리라.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는 발랄한 상상력을 발휘하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모자랐던 모양이다.
 
‘저녁이 있는 삶’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어도, ‘축대가 있는 삶’에서는 다행히 운 좋게 벗어날 수가 있었기에 “칠판과 공책이 사라지면 뭐가 나타날까요?”라는 질문에는 비교적 밝고 긍정적 방향으로 답변할 수 있을 성싶다.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답안은 “향연이 들어선다”는 거다. 플라톤의 대표작인 ‘국가’에 등장하는 바로 그 향연(Symposium) 말이다.
 
소품종 대량생산의 시대는 강연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다. 몇몇 종류의 제품들을 단시간 안에 대량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요구되기 마련인 생각의 수준도, 상상력의 범위도, 기술적 숙련도도 엇비슷한 인력들을 대규모로 양성해내는 데에는 우리가 현재의 학교 교육에서 겪어온 바와 같은 강의식의, 곧 강연 방식의 교육법이 단연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사람이 말한 내용을 열심히 필기하고 암기한 다음에, 그것을 문제지 위에서 정확하게 재연해낼 수 있는지가 한 사람의 인생의 성패를 갈라왔다. 서울 강남의 어느 남자 고등학교에 걸려 있었다는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이 달라진다”는 급훈도 이러한 평가 방식이 낳은 살풍경한 희비극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확대해석은 아닐 게다.
 
문제는 칠판과 공책이 사라진 자리에 갤럭시노트나 아이패드가 들어와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지 남의 얘기를 무비판적으로 필기하고 암기하는 속도만 과거와 견주어 좀 더 빨라질 뿐이다.
 
사무직이든 생산직이든, 공공 분야건 민간 부문이건 수만 명이 동시에 유사한 성격의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그 기대수명의 끝자리에 다다랐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에 진출한 이후에는 서로 다른 직종에 종사할 가능성이 매우 큰 수십만 명의 인간들이 여전히 같은 책으로 공부하고,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시험을 치른다. 단지 출생연도가 똑같다는 이유만으로.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하나마나한 지식을 동갑내기들 중에 상대적으로 잘 암기한 학생이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법원장과 검사장이 되고, 은행장이 되고, 재벌기업의 임원이 되는 구조다.
 
2. 나중에 사회로 진출하면 별로 쓸모가 없을 잡동사니 지식들을 달달 외워서 답안지 위에다 복사기인 양 재생하는 것을 능사 내지 장땡으로 여겨온 한국사회에서는 다른 나라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정확히는 희한한 형태의 출세한 기업가를 낳았다. 메가스터디로 대표되는 입시재벌이 그것이다. 교사로 취업하려는 임용고시 준비생들을 상대로 교육학 교재를 판매해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모았다는 노량진의 어느 수험학원 운영자도 마찬가지 범주에 속한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수학 참고서를 팔아 거대한 사학재단을 일군 한 전직 학원 강사도 있다. 창의성 죽이는 시대를 창의적으로 역이용해 부와 명예를 함께 거머쥔 인물들인 셈이다.
 
최근 몇 편간 대세로 자리 잡아온 이른바 ‘토크 콘서트’도 강연의 시대의 산물에 불과하다. 유명 진보 지식인들이 멘토라는 이름으로 출연하는 이들 토크 콘서트들은 시민들에게 비판적 사고를 길러주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허나 반론을 주장할 시간도, 이의를 제기할 분위기도 보장하지 않은 채 수천 명의 참석자들이 그야말로 인간의 얼굴을 한 순한 양떼가 되고 마는 행사를 통해 주체적이고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기르겠다는 것은 촛대를 훔쳐 성경을 읽는 모순적 행위만큼이나 자가당착적 일로 보인다. 나는 얘기하니, 너는 들으라는 일방적 전달 체계는 교육방송의 입시 프로그램이나 토크 콘서트나 기본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특정인을, 그것도 민간인을 콕 집어 거명해 미안한 느낌이 들지만, 인간을 붕어빵으로 찍어내는 강연의 시대의 끝판왕은 메가스터디의 손주은 회장일 터이다. 가르치는 도구가 칠판과 백묵에서 대형 LED모니터와 파워포인트로 진화하고, 필기의 수단이 모닝글로리 공책으로부터 애플 아이패드로 바뀌는 기술적 변동에 아랑곳없이 그와 그의 동료들은 강연의 시대의 아이돌이자 아이콘으로 군림해왔다.
 
창의력은 억누르면서 암기력은 십분 활용해야 성공하는 시대에서, 암기력은 평균치에 머물지언정 창의력은 극대화시켜야만 성공하는 시대로 우리는 넘어가고 있다. 아니, 넘어가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면 대통령의 말을 신의 목소리로 떠받드는 영혼 없는 공무원들과, ‘땅콩 리턴’을 강요한 오너의 딸을 보호하고자 비행기에서 불법적으로 쫓겨난 사무장을 되레 압박한 대한항공의 파렴치한 임직원들 같은 자들이 이 사회의 엘리트와 모범적 생활인으로 현재처럼 계속 행세해나갈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래서 전국 도처에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는 수많은 소규모 공부모임들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다. 기성 학교와 기존의 학원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을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에 걸맞은 인재들이 그러한 곳들로부터 태어나리라고 확신한다. 거기에서는 교사와 학생의 구분이 없다. 한마디로 계급장 떼고 모두가 배움에 임한다. 이 구절에서는 내가 스승이 되지만, 저 단락에 가면 이번에는 내가 제자가 된다. 유연하기에 창조적이고, 창조적이기에 유연하다. 당연히 소통이 살아 있고, 진정으로 쌍방향적이며 민주적이다. 이 모임들이야말로 한국의 교육이 강연의 시대에서 향연의 시대로 발전해가도록 이끌 선도적 맹아들인 것이다.
 
아마도 그런 연유로 나는 북촌학당의 김윤 학장에게 당신의 진짜 경쟁상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출현한 다른 인문학 공동체의 좌장들이 아니라 손주은 회장이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인류사를 의미 있게 진보시킨 빛나는 배움의 현장들에는 칠판도, 아이패드도, 격의도 없었다.


* 21세기경제학연구소(www.taeri.org) 12월호 소식지에 보낸 글임.

글쓴이는 시사평론가, <이수만 평전>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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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1/07 [16:0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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