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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이 '1/10의 도덕성' 밖에 안되나
정치자금 문제, 정치구조의 근본적 개혁이끄는 출발점으로
 
홍기빈   기사입력  2003/12/15 [18:51]
‘대통령직 하야’, ‘(재)신임’ 등의 단어에 놀라거나 고무되는 사람들은 이제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청와대와 ‘정신적 여당’은 무의미한 정치적 수사를 자제하고 정상적인 정치 과정이 한국 사회에 뿌리박을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차원에서의 정치 개혁에 착수하는 것만이 진정한 ‘고해성사’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1. 노무현 진영은 ‘10분의 1’ 이상 걷을 능력이 있었는가

▲14일 노무현 대통령이 4당대표와의 회동에서 발언하고 있다.     ©YTN
노대통령은 자신의 ‘불법 대선 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지 않을 것이므로 상대적 도덕성을 갖고 있음을 주장합니다. 반면, 노대통령을 비판하는 쪽에서는 ‘오십보 백보다’ ‘그 10분의 1이라는 선은 누구 맘대로 정한 것이냐’에 주로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에 중요한 점 하나가 간과되고 있습니다. 그 ‘10분의 1’이라는 액수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진영의 ‘상대적 도덕성’의 지표인가 아니면 ‘수금 능력’의 지표인가라는 문제입니다.

한나라당과의 헌금 액수의 차이가 ‘10배 이상’이라는 노대통령의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노대통령은 그렇게 불법 모금 액수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들의 도덕성에 있다고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도덕성’이 있는 집단이므로 ‘모금 액수가 적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잘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안희정 이광재 등등이 수금 과정에서 혹시 ‘과도한 양’의 헌금이 들어오는 일이 있으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게 걷을 수는 없다’라는 정신을 발동하여 돌려주었다는 것일까요? 애초에 법이 정해놓은 모금 규모는 대충 다 무시하기로 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인데 과연 그랬을까요?

사실 그 ‘10배’ 라는 차이는 그 당시 노무현 진영의 ‘수금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게 훨씬 자연스럽지 않은가요? 즉, 온갖 인맥을 다 동원하여 재계 쪽에 힘껏 손을 뻗쳤을 때 거두어 들일 수 있는 돈의 차이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에 불과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능력을 결정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했을 것입니다. 먼저 재계에서 점치는 노무현의 실제 당선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고 민주당 인맥과의 전통적 친소(親疎)도 있을 것이요 또 그 밖에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정말로 들어가지 않았을 요소는 바로 모금하는 쪽의 ‘도덕적 자제력’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국, ‘받는 쪽은 얼마든지 허리띠를 풀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들어온 돈이 1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상황으로 짐작됩니다.

만약에 이것이 진실이라면 그 ‘10분의 1’이라는 숫자는 노대통령이 의도하는 바와는 달리 ‘도덕성’의 지표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만큼 ‘재계와의 유착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바로 도덕성의 증거가 아니냐’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남의 집 사과 나무를 건드리면 안된다는 원칙 때문에 잠자코 있는 것과 ‘팔이 짧아서’ 잠자코 있는 것은 결코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도덕성’이란 원칙과 가치를 수호하려는 행위 주체자의 ‘내면의 강인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주장하려면 ‘악덕을 저지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강인함 때문에 그 악덕을 저지르지 않는 것임’을 중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능한 자는 겸손할 수 없으며, 추녀는 정숙이라는 미덕을 내세울 수 없다’고도 합니다.

이 문제가 단지 윤리 도덕의 고담준론의 차원을 넘어 현실적으로 의미를 갖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그 옛날의 노무현 진영은 청와대의 주인이 되어 있고 만약 마음만 먹는다면 그 ‘수금 능력’이라는 것도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그 당사자들의 마음 속에 그 내면의 강인함으로서의 도덕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한국 정치판 전체의 기강을 결정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얼마전까지는 희망돼지와 그에 얽힌 각종 정치적 수사로서 자신들이 바로 그런 ‘도덕성’을 갖춘 존재라고 내세울 논리가 있었습니다만, 얼마 전부터의 검찰의 수사 결과, ‘모금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지 이들도 똑같은 보수 정치인들일 뿐이다’라는 심증과 환멸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청와대’ 접수를 계기로 ‘모금 능력’까지 올라가 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옛날 민정당 한나라당 또 부패한 지역 정당들과 별 차이없는 행태가 나오게 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서서히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가고 있으며, 올해 내내 청와대의 주변에서 이리저리 터져나온 각종 소문과 의혹은 그것을 더 비관적으로 만들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또, 이로 인한 정치권 전반에 대한 분노와 회의가 한국의 보수 정치판 전체가 현재 처하고 있는 위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대통령이 아무리 대통령직을 걸고 ‘작년 대선에서의 모금액수가 10분의 1이하’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해도 그 도덕성이 증명되는 것도 아니오 현재 정치권 전반의 위기가 해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지금’ 그렇게 투명하고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려는 도덕성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2. ‘정치 자금 사건의 정치학’

그런데 이러한 모든 논리는 다 추측에 기반한 것에 불과합니다. 정말 그 ‘10배 차이가 나는’ 모금액의 규모가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는 알길이 없습니다. 사실 정치자금 건이 터질 때마다 정말로 궁금한 것은 그 구체적 액수가 어떻게 결정되는지입니다. 과연 주는 쪽 받는 쪽은 액수를 놓고 흥정을 벌일까요? 아니면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걸까요? 혹 두 경우가 공존하는 걸까요? 또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쪽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10억을 줄지 1억을 줄지를 ‘계산’하는 것일까요? 이 정치적인 ‘선의(good will)’이야말로 무형 자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으니 분명히 기업 쪽에서는 나름대로의 산정 근거가 있을 터인데. 똑같은 정치인들인데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투자’하는 각각의 경우 ‘수익률’이 어떻게 다르다고 평가하는 것이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등등등.

저희같은 서민들로서는 쉬이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파헤치려면 정치권 전체와 재계 전체에 대해서 한마디로 보수 정치판과 재계 전체의 몇 십년에 걸친 관계에 대해 구조적 차원에서 파헤쳐야 합니다. 그런데 일이 터지면 항상 똑같이 배나오고 턱에 기름낀 모습이라 누구인지 구별도 안가는 정치인 몇 사람들 잡혀가고 천문학적 숫자만 이야기 되다가 누가 깃털이네 몸통이네하는 추측만 난무하면서 허탈하게 끝나버립니다. 왜 이런 갑갑한 일이 벌어질까요.

그 이유는 ‘정치 자금 사건의 정치학’에 있습니다. 한국 보수 정치판에서 정치 자금 건을 터뜨리는 쪽은 무슨 ‘한국 정치 환경 정화’ 따위의 이상이 목표가 아니라 그를 통해 특정 세력에 타격을 가하겠다는 ‘당파적’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건의 주요 촛점을 항상 ‘누가 얼마를 먹었다더라. 박살내자’로 몰고가려 합니다. 그러면 반대 쪽에서는 ‘나만 먹었냐 너도 먹었지’라는 역공세가 나옵니다. 그러면 ‘먹은 액수와 규모가 다르다.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가 같으냐’는 말이 나오고, 그러면 다시 저 쪽에서는 ‘웃기지 마라 오십보 백보다’라는 말로 되받아칩니다. 그 뒤에 천편일률의 엔딩이 대미를 장식합니다.

각 당 모두 자신의 지지자들을 향해 돌아서서 비장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총선/지자제선거/대선에서 우리 당을 지지하여 저놈들을 심판하는 것만이 깨끗한 정치를 이루는 길이다”고 호소합니다. 그 결과 ‘똥묻은 개’, ‘겨 묻은 개’, ‘오십보 도망병’, ‘백보 도망병’이 모두 그대로 당선됩니다. 결국 사건 전개는 거의 도식화가 가능한 지경입니다. 최초 폭로 – 반대 폭로 – 액수 비교 – 똥개/겨개론 – 오십보/백보론 –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지지자 집결 호소 – 똥묻은 개와 겨 묻은 개의 당선 – 또 폭로 ….이하 동문.

군정 독재가 종식되면서 서로 내걸 만한 뚜렷한 대립선이 애매해진 90년대 한국의 보수 정당들이 지겹게 틀어댄 레퍼토리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역 정치 구도는 갈수록 공고해졌고, 국민들은 갈갈이 찢어져 반목하고 분열되었습니다. 슬프게도, 현재 노대통령 측과 한나라당이 틀어대고 있는 드라마가 똑같습니다. 앞에서 보았듯, 도저히 이치에 닿지도 않는 ‘10분의 1먹었으니 우리는 도덕적이다’라는 논리가 나오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 불과합니다.

한나라당은 무슨 ‘특별 검사제’를 동원하여 까발리자고 대들고 있으며, 대통령측은 ‘10분의 1밖에 안 먹었다’는 것을 증거로 자신들의 ‘도덕성’을 내걸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서로 자신들의 지지자들에게 4월 총선에서 상대를 심판하고 ‘승리’하는 것만이 이 땅에 정치 개혁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똘똘 뭉쳐 겨우 얻어낸 ‘청와대’와 ‘대통령직’은 저번의 ‘재신임’ 파동 이후 또 다시 이 드라마의 극적 효과를 높이는 소도구로 쓰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대통령의 ‘대통령직 운운’의 발언을 듣고 별로 무슨 말을 할 마음도 안 생기는 이유입니다. .

3. 정치 관련 법과 제도를 개혁하라

노대통령과 그 세력이 이러한 비난과 의심을 일소하고 스스로가 진정한 개혁 세력임을 확인하는 길이 없지 않습니다. 앞에서 노대통령 측은 자신들이 별 ‘수금 능력도 없었던’ 2002년 대선 당시의 도덕성이 아니라 청와대의 주인이 된 ‘지금’ 도덕성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현재의 정치 자금 스캔달이 어느 특정 세력을 공격하여 지지자의 집결을 노리는 ‘총선 전략’이 아니라 진정 노대통령 스스로가 여러 번 천명했듯 정치 구조의 근본적 개혁을 지향하는 첫 단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노대통령과 그의 ‘정신적 여당’은 이러한 과제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바로 총선을 앞두고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각종 정치 관련 제도의 개혁을 솔선함을 통해서입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어째서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 모아놓은 자리에 도망병들과 개들만 득실거리며 주인 행세를 하는지 황당할 뿐입니다. 50보건 100보건 똥이 묻었건 겨가 묻었건 상관없습니다. 정치 제도라는 소중한 공간에 ‘개’나 ‘도망병’들은 얼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근본적으로 제도와 법을 바꾸기를 원합니다. 거기에 필요한 개혁안이 준비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지난 주에 <정치개혁위원회>가 제출한 안에는 여러 가지 고무적이고 혁신적이면서도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들이 많이 있습니다. 게다가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 자신의 ‘대통령직’까지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이미 몇 차례 공언한 바 있습니다. 게다가 보수 정치판의 근본적 개혁을 원하는 국민들의 열망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것도 상식입니다. 또 예상되는 그 가장 강력한 반대자인 한나라당은 지금 커다란 위기에 처하여 발언권을 잃다시피 하였습니다. 따라서, 대통령과 그의 ‘정신적 여당’이 스스로 공언한 바 있는 그 정도의 결의 수준의 반만 갖춘다고 하더라도 정치판의 구조적 개혁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진척시킬 수 있습니다.

정치 개혁을 위해 이렇게 뚜렷하고도 시급한 과제를 소홀히 하면서 현재의 혼란을 그저 지지자 결집을 통한 내년 4월 총선 전략으로만 쓰려고 한다면 노대통령측은 자신들 스스로가 그 ‘정치 개혁의 대상’인 보수 기득권 정치 세력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정당의 구조 개혁을 이유로 민주당을 박차고 나온 ‘열린 우리당’의 형성 과정을 보면 "정말로 알고보니 그런 것 같다"는 의혹이 이미 많은 이들의 마음을 잡고 있습니다. 노대통령과 그 세력이 ‘대통령직을 걸고’ 또 필요하다면 ‘재신임’을 연계시켜가면서 정치 관련 법과 제도의 개혁을 수행함으로서 이러한 난관을 뚫어낼 것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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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12/15 [18:5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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