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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이중성, 스스로 무죄추정하나
[정문순 칼럼] 살인 용의자도 얼굴 공개, '장자연 문건' 용의자 공개해야
 
정문순   기사입력  2009/04/15 [21:36]
인터넷 검색창에서 고(故) 장자연 씨와, 그가 언급한 두 명의 ‘방사장’ 이름을 쳐보았다. 조선일보가 아직 여기엔 손을 못댔는지 많은 자료가 그냥 주르륵 떴다. 대부분 누리꾼들이 한 신인 여자 배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의분을 토하며 올린 글들이다. 그러나 몇몇 인터넷 언론을 제외하고는, 문제의 문건을 처음 입수하여 보도한 KBS를 포함한 매체들은 죄다 신문 이름을 가렸다. 포털사이트 <다음>은 관련 기사에 댓글 쓰기를 막아놓았다. 조선일보에서는 고(故) 장자연 씨 기사를 구경하기도 힘들다. 하늘 알고, 땅 알고, 나 알고, 저 아는 일이라고 했던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한다는 표현은 이런 경우에 들어맞을 것이다.
 
처음에 여러 언론 보도에서 ‘장자연 리스트’ 에 '유력언론사' 사주 2명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길래, 나는 그 중의 하나는 보나마나 '1등 신문‘일 것이고 나머지는 언론권력 2등이나 3등인 다른 신문사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권력 1등도, 2등도 하나의 신문사였으니 내 상상력을 능가하는 조선일보의 ‘역량’에 백기를 들고 싶다.
 
고인이 남긴 진술이 사실이라면 내 상상력은 더한 시험에 든다. 조선일보와 성 추문의 악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조선일보 2대 사주 방일영에 대해 “기생의 머리를 가장 많이 올려준 사람”이라고 한 유명한 증언이 ‘장자연 리스트’와 연관하여 떠오르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박정희 통치 시대에 주요 국사는 청와대에서 결정되지 않았다. ‘기생’이 나오는 곳은 고급 요정이나 요릿집으로서 최고 권력자의 밀실정치가 벌어지던 곳이다.
 
기생의 머리 운운은 공식적인 정치권력자 못지않은 권력을 휘둘렀던 언론사 사주의 위력을 드러내는 것인데 반해, 햇병아리 여자 배우의 존재가 정치와 연결되는 뭔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험이 없거나 적은 여자인, 머리 올리기 전 기생이나 나어린 연예인의 존재는, ‘닳지 않은’ 여성의 몸을 선호하는 권력 남성들의 비뚤어진 '취미'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고인의 증언대로라면, 한국의 1등 신문사가 쥔 권력은 펜대를 통해서만 발현된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성적 지배욕으로도 실현되었구나 하는 상상력으로 이어진다.
 
조선일보는 물론 억울할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그가 남긴 진술 하나로 단정을 짓는 건 옳지 않다. 죽은 장자연이 거짓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잣대대로라면 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모든 범죄 용의자도 당연히 무죄로 다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조선일보는 스스로에게 적용한 무죄추정의 원칙을 남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다. 조선일보가 경기도 일대 연쇄살인 용의자의 얼굴과 실명을 공개했을 때 그가 행여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중에 없었다. 일상에서도 성폭력의 공포를 느끼며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범인의 실체를 그들 눈앞에 들이미는 것은 실제 성폭력에 준하는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점은 아예 고려 밖이었다.
 
자신들이 침 뱉은 용의자로 장사를 하니 결과는 대박이었다. 조선일보 말고도 여러 신문사들이 용의자의 베일을 벗겼다. 중앙일보의 경우 인터넷에 올린 용의자의 사진이 200만이 넘는 클릭 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때 호기심을 못 이겨 마우스를 갖다 댄 사람들 중에 나도 끼어 있었다. 범죄 용의자가 특별하게 생겼을 리 만무하건만 유치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대가로 용의자의 얼굴이 정확히 뇌리에 각인되는 고통을 치러야 했다. 사진 속의 용의자가 흉악범은 흉악하게 생겼다는 통념에 어긋나지 않은 용모였다면, 충격이 그나마 덜했을지 도 모른다. 조선일보는 독자의 알 권리를 내세웠지만 그들이 정작 보장해준 건 사람들이 범인에게서 더 큰 충격을 받을 권리였다.
 
고 장자연이 남긴 문건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억울하다면 철저히 조사해서 자신들의 결백을 입증해달라고 하는 것이 순서다. 고인이 유서와 다름없는 문건에서 권력층 남성들에게 유린을 당한 고통을 기록하면서 거론한 이름이라면, 사람들이 고인의 죽음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은 지극한 인지상정이다. 종이신문들은 하나같이 후환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는 반면, 이름 없고 힘 없는 누리꾼들이 방씨 일가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인지하는 감수성이, 처벌을 각오해야 한다는 두려움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죽음이 억울하다면 해원시켜줘야 하고, 애꿎은 목숨을 죽음에 빠뜨린 자들이 있다면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소박한 연대 의식이 남아 있는 한, 조선일보를 겨냥하는 불편한 시선들은 거두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무의미한 일인 줄 알면서도 살인 용의자의 얼굴을 보며 분노라도 터뜨리고 싶었던 것도 악에 대해서는 당연히 분노하고 징계해야 한다는 소박한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인지상정에 편승하고 그것을 부추긴 것이 조선일보였지만, 똑같은 잣대를 자신들에게 적용하는 양심만큼은 다른 데 놔두고 온 것이다. 공인도 권력자도 아닌 살인 용의자에게는 무죄추정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던 자들이 왜 자신들에게는 예외를 두며, 사람들이 받을 충격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이 자신들의 불명예에는 왜 그리도 예민한가.
 
이 사회에 인지상정이라는 것이 살아있다면, 힘 없는 한 여자 배우가 세상에 남긴 종이 한 장을 무시하는 것은, 권력층 남성들에게 성적 유린을 당해 죽음을 결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두 번 죽이는 짓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남의 고통에 기꺼이 눈 감지 않는 이들이 있는 한, ‘고위 임원’, ‘유력 인사’에 가려진 실명은 언제까지나 불명예스럽게 들추어진다는 점에 대해 유력신문사는 통감하기 바란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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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4/15 [21:3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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