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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와 추미애의 역할은 더욱 커야한다
한나라당-수구언론에 맞서 시민사회가 중도파를 살려야
 
바람의 흐름   기사입력  2003/09/24 [11:38]

1. 들어가는 말-김근태의 '연합공천 주장'은 원칙인가? 또 다른 헛발질인가?

민주당의 분당상황이 초래한 한국정치의 상황은 그야말로 일희일비요 안개정국이다. 엄연하게 수구세력에게 이로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가장 큰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양정파를 위해 올인 한 분들은 서로를 인정할 수 없다고 대척점을 공공히 하고 있습니다. 

▲김근태 의원     ©김근태의원홈페이지
와중에 신당의 원내대표가 된 김근태는 뜬금 없는(?) '연합공천'을 되내이며 또 다시 양 정파로부터 분당 전처럼 의구심 혹은 비난을 자초하는 행보를 하였습니다. 신당파에서는 개혁당의 유시민과 김원웅이 총대를 맸고, 민주당 사수파는 한화갑이 나섰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분명 한나라당과 수구언론에게 유리한 지점이며, 이것은 민중의 이익과 역사의 흐름에 반하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각정파의 입장이 두드러지는 인터넷 정치공간-정치웹진에서도 예외 없이 민중의 이익을 위한 연대와 시민사회의 다중을 대상으로한 공정한 개혁경쟁의 당부나 우려의 목소리는 역시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라는 속담처럼 '강건너의 한가로운 불구경꾼'의 입장으로 또 다시 매도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가요?  과연 분당전의 중도파처럼 이들은 '기회주의자'요 실제로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들이란 말입니까?

2. 기연불연(基然不然)-"그렇다 동시에 아니다."
-분당전의 중도파의 강준만식의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고 결집할지니!

필자의 견해는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아니다." 입니다. 이들이 올바른 깃발을 들었다 해도 현상적으로 이들의 소리는 바로 정치공학적으로 사장되어 버린 존재의 고독한 외침이었기에  힘의 논리가 구현되는 현실 정치의 지점에선 '있으나 마나'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격하되고 만 것은 이들이 진실로 필요 없는 혹은 잘못된 노선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상층의 정치꾼들에 의한 정치공학적 매장이었습니다. 이들에겐 이것을 이겨낼 정치공학적 정치력이 없었으며, 시민사회로부터의 공감대와 그러한 실천을 담보할 담론확산의 장이 부재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정치공학에 대응할 힘만 갖추어 졌었다면 결코 '백해무익'의 존재요 깃발로 더 나아가서 기회주의로 매도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점에선 '있으나 마나' 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김근태의 잊혀진 속내와 행동과 실천을 먼저 알고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김근태는 일관된 실천을 해왔으나 언론의 조명과 시민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점은 지금은 갈라졌지만 분당 전의 중도파 역시 동일하게 해당 되었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 최근에 '문화일보'에 기고된 '김근태의 김용옥과의 인터뷰' 정도는 일독하려는 소통의 노력은 필요하다 봅니다.

[참고기사] <사상가 도올이 만난 사람>역사,진보냐 후퇴냐 선택할때-도올,김근태 통합신당 원내대표 인터뷰, 문화일보(2003. 9. 22)

자 이쯤에서 누군가가 문제제기를 해야 정상일 것입니다. 감정적인 토로가 아닌 한 호흡 쉬어가는 이성적인 논객이라면 이렇게  반문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근태 등의 중도파가 백해무익하지 않은 이유가 고작 정치력(정치공학적인 소멸-사장을 막아내고 다중의 주목과 설득 지지를 이끌어내는 의미의)이 부재하지 않았다라면~ 이라는 가정하에 나온다는 말인가? 현실에 부재한 힘을 가정한다는 것 자체가 '있으나 마나' 한  소리 아닌가?"

다시금 필자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렇다 동시에 아니다."  여기서 역정을 내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만 조금 더 인내심을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저 역시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말장난으로 소비하며 욕을 먹기 싫기 때문이며, 제 속내는 일관되게  민중의 이익-보다 널리 이로운 사회를 위한 진정성의 발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실은 존재하나 미약한)  가정하이기 때문에 있으나 마나 한 것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는 이 부존의 혹은 미약한 정치력을 간과하지 못할 실재의 영역으로 이끌어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올바름에도 현실의 힘이 미약하다는 이유로 배척받는 이 부당한 현실을 위해 소리를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소설처럼 삭막한 도시생활에 지치고 망가져 돌아온 그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배덕의 도시로 스스로 뛰어드는 남동생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 미약하지만 정의로운 깃발을 위해 이제 실체적 힘을 부여하겠다고 말입니다. 누구는 바리케이트를 치고 화염병을 든 심정으로 나섰지만 그 대상은 더이상 노무현 상병이 아닌 김근태요 분당전의 중도파요 강준만의 개혁노선입니다. 또한 추미애와 김영환 등입니다. 이들의 노선이야말로 진정 이시대의 정도요 민중의 이해와 맞닿으며 이익을 충실하게 구현 할 수 있다 여기기 때문입니다.

3. 다시 중도파와 시민사회가 나서야 할 때다

▲추미애 의원  ©추미애의원홈페이지
김근태는 신당파만의 김근태가 아니며 추미애는 구주류만의 추미애가 아닌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분당 전의 가치로 되돌리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김근태는 노무현과 싸우고 추미애는 후단협과 싸워야 합니다. 이제 이들을 대변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결집하여야 하며, 정파적 견해에 매몰되어 민중의 이익과 가치를 저버리려는 작금의 현실을 질타할 제3의 소리가 울려 퍼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양극을 녹여 크게 하나가 되게 하는 존재하나 잊혀진 중극의 영역입니다. 이제 이 잊혀진 영역의 가치에 동의 하는 모든 힘을 결집시켜 실체화 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참된 삶을 영위하려면 민중이 널리 이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겨 내야할 수구세력이 아직 강고하기에 당위입니다. 이들은 민중과의 쟁투에서 압도적 힘을 바탕으로 작은 승리를 거두면서도 실제적으로 한발 한발 물러나고 있었습니다. 

민중은 지면서 승리해왔고 이들은 이기면서 져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변신에 능합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기만적이고 허구적인 여러 방책들로 민중을 분열하고 그 증오의 정치에 기생하여 건재함을 과시 해왔습니다.  두번 연속 대통령 선거에 패배했지만 이들의 지역분할 전술은 영남의 강고한 지역정서를 바탕으로 의회를 장악하며, 내각제 개헌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현 가능성의 희박할 만큼 오히려 악재로 작용 할 만큼의 한국의 시민사회가 성숙했기도 합니다. 두번의 대선승리의 덕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생과정은 2002년의 한국은 대한민국으로 불리우기에 충분할 만큼 여러 상징을 발현시켰고, 모든 상징은 드라마틱한 승리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슴을 그 전환기를 말해 줍니다.만 우리는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만물은 고정불변하지 않고 늘 변화발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그러함에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우리는 충분하게 소통하고 있는지 반문해 볼 일입니다. 변화는 일관된 방향성이 있으며, 그 방향성은 불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양한 시공간 속에서 변주 될 뿐이지 각 시대정신으로 살아 숨쉬는 것입니다(이 방향성에 대해서 부연하고 구체적으로 논증하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중도파를 실체화시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고 실천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고(사실 분당전에 그러했어야 함을 그렇게 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그렇지 못했던 시민사회 내부의 소리의 부재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러한 제3의 흐름 -중극을 실체화 시키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존재하며 간과된 영역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논증하는 것도 차후로 미룹니다만 옳음에도 왜 숨죽여 왜곡되고 부당하게 매도 당했는지 그 지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 나가고자 합니다.

실은 이 지점에 대해서 저는 대선이 끝난 이후 졸필을  들었었습니다. "고래를 삼키는 개미가 될 때"라고 개혁당원으로서 개혁당에게 바라는 글이었지만 개인적인 일에 매여 개혁당원으로서의 활동 자체도 등한시 한 저로서는 그야말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글 속에서 미약하게나마 2002년 변화의 흐름에 함의된 뜻을 밝힌 바 있었습니다. 

[관련기사] 바람의 흐름, 개혁당, 고래를 삼키는 개미가 되어야, 대자보(2002. 12. 24)

당시에는 유시민의 절박한 진정성에 감동을 받고 작은 힘을 보탠 셈이지만 작금의 유시민과 김근태간의 '연합공천'에 관한 의견충돌에 있어서는 유시민에 대한 강준만의 비판에서 더욱 타당함이 있다 여깁니다.  유시민은 신당강경파와는 흡사한 코드를 지녔다고 봅니다. 그런면에서 김근태는 전투병 파병반대와 마찬가지로 신당내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깃발을 들고 싸워야 될 것이고,  추미애나 김영환 등도 박상천-정균환 등과 긴장관계를 가질 것으로 봅니다. 이것에서 미약하나마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개혁당으로는 아니 현재의 현대적 정당 건설과 정당 운동만으로는(그것이 신당이든 개혁된 민주당이든 무관하게)  담보되지 못한 영역이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였고 그것은 상층의 정당운동이 필연적으로 참여민주주의의 구현을 어떠한 정당에 소속된 정파와 정치인을 통하게 되기 때문에 각자의 삶에 근거하여 변화 발전 소통연대하고 네트웍을 이루는 시민사회와의 간극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민사회 내부, 다시말하면 참여민주주의의 하층을 형성하는 구조는 정치로 집중되어 구현되는 정당정치의 상층의 구조와는 별개의 영역으로 존재하며, 이 둘의 간극은 참여민주주의 방향성에서 중첩을 이루고 좀 더 밀착해가는 방향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는 최근 '강준만식 개혁, 중도파와 시민사회의 길'이라는 졸필에서 밝혔듯이 그러한 간극이 수구세력이 강고하게  잔존하는 한국적 상황에선 더욱 제한되어져 밀착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즉 다원성에 기초하는 시민사회의 원리와 참여하고 연대하는 방식이 왜곡되게 나타나고 작금의 분당상황에서 적전분열과 어부지리의 이전투구로 현상화된다는 것입니다.

[관련기사] 바람의 흐름, 강준만식 개혁, 중도파와 시민사회의 길, 대자보(2003. 9. 21)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선 제3의 소리의 결집이 시민사회 내부로부터 일어야 하며 상층의 정치권의 분당전의 중도파를 살려내어야 합니다. 그들을 살려내어 민중 이익과 명실상부한 참여공동체적인 시민사회의 완성이라는 대의를  위해 분투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총선 승리의 유일한 길이 될 것입니다.

필요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기존의 자원을 견인하여 한나라당과 수구언론에게 어부지리를 주는 것 결과적으로 민중의 이익에 저해되며 역사발전을 저해시키는 전환기적인 혼란으로부터 역사발전의 주체인 민중 스스로가 민중의 이익 즉 시민사회의 구조적 발전을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졸견에 일말이나마 동조하시는 분들과 함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엄연하게 존재하고 변화 발전하나 간과되고 소외되어버린, 그러나 분명 제자리를 찾아야 할 중도파 살리기에 시민사회가 나서야 합니다. 본래 시민사회가 담당하고 주도해야할 이 영역의 발굴에 네티즌의 뜻이 모아지길 바랍니다. 

저의 상황이 여의치 않기에 글이 중복되고 장황함을 알면서도 다듬을 수 없음을 사죄 드립니다. 원래는 제가 설정하고 주목하는 참여-시민사회 구현의 하층을 담당하는 내부의 발전양상과 역사적 전개를 현대공동체주의자들의 연구성과를 빌어서 그것이 어떻게 한국적 상황에서 적용되고 역사상 최초로 그러한 이론이 구현되어 가는지를 밝히고 싶었지만 이정도에서 글을 맺고자 합니다.

[사족]

이에 관한 제 거칠은 사고의 편린들은 그간의 저의 글 특히 대선 직후의 졸필 '개혁당 이제는 고래를 삼키는 개미가 되어야 할때'를 참조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다음 기회에 좀 더 다듬어서 말씀 드릴 기회가 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제가 어떠한 학문적 성과를 논하고 싶은 것은 아니며, 단지 작금의 상황에서 민중의 이익을 구현하는 것에 일말의 도움이 되는 지점에 도움이 될만한 한 개인의 고민이 될까 여기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쟁쟁한 인물들과 집단이 간과하는 것을 '소 뒷발로 쥐 잡듯이' 소심한 개인이  찔러 보기도 하는 것이며, 그 손가락질이 뻘짓이라도 작은 파문이 되기도 하리라 봅니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분당 상황이 초래하는 적전분열과 어부지리는 민중의 이익과 역사발전, 그리고 참여민주주의의 구현에 해악적이라는 것입니다. 정권교체와 햇볕정책의 의의를 가슴에 담고 있는 분들이라면 이러한 과오를 두고 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이 대선에서 한나라당-수구언론과 맞서서 함께 쟁투한 까닭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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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9/24 [11:3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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