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이명박의 ‘포퓰리즘 언어’를 해부한다
[강준만의 세상 읽기] 정치언어는 정치현실, 이명박의 시각주의 화법
 
강준만   기사입력  2008/04/23 [15:33]
정치언어는 정치현실이다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명저 『혁명론(On Revolution)』에서 “그 어떤 분야보다도 정치에서는 존재(being)와 외양(appearance)을 구별할 길이 없다. 인간사의 영역에 있어서 존재와 외양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1) 생각해보자. 정치적 사건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람들이 정치적 사건을 경험하는 건 매스미디어 또는 대인 커뮤니케이션 채널의 언어를 통해서다. 그런데 그 언어는 결코 중립적이지도 않으며 순수하지도 않다. 언어는 현실의 거울이 아니라 현실의 창조자인 셈이다.2) 그런 의미에서 정치언어는 정치현실이며, 의미에 대한 갈등이 없다면 그건 정치적인 이슈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3)

“정치언어는 정치현실이다”라는 명제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말이 많았던 노무현, 그리고 그 점에서 노무현에 필적하는 이명박의 한국에서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노무현의 지지자들이 “그까짓 스타일” 하고 가볍게 여겼던 노무현의 화법이 노무현을 키운 동시에 노무현을 죽였다. 이제 이명박의 차례인가?

원래 인생의 밑바닥에서 일어나 대성한 사람은 ‘포퓰리즘 언어’를 구사하기 마련이다. ‘포퓰리즘 언어’의 가장 큰 특성은 ‘막말’과 ‘내지르기’다. 당연히 이명박은 ‘막말’과 ‘내지르기’에 능하다. 잠시 대선 전으로 돌아가보자. 고원은 이명박의 “담론은 ‘사물에 대한 극도의 단순화’와 ‘거침없는 내지르기’를 특징으로 한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가령 ‘내가 하면 정부 예산에서 매년 20조 원은 남길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말은 너무 자신감이 넘친 나머지 별다른 논증 없이도 한순간에 현 정부를 바보로 만들면서 청중들을 사로잡는 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그의 언술이 토론과 공감에 바탕을 둔 민주적 리더십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확실하다.”4)
 
이명박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손호철은 이명박에 대해 ‘시한폭탄’이라는 별명까지 붙였다. 손호철은 “노 대통령은 특유의 경박함으로 입만 열면 사고를 쳐오고 있다. 그러나 이 전 시장의 입도 노 대통령 못지않다. 아니 노 대통령이 논리라도 있다면 이 전 시장은 그것도 아니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해 서울시장에 당선되면 ‘놀기 좋아하기 때문에 공무원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한 비아냥이나, 박(근혜) 의원에 대한 ‘육아’ 발언이 대표적인 예다. 한마디로, 언제 무슨 말을 해 사고를 칠지 모르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다”라고 주장했다.5)

손호철이 이 말을 한 바로 다음날인 2007년 2월 27일 이명박은 산업화 비판 세력을 “1970, 1980년대 빈둥빈둥 놀면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비난해 구설수에 올랐다. 이명박은 손호철의 더욱 강도 높은 독설을 ‘보너스’로 받아야 했다. 손호철은 “이 전 시장의 발언을 전해 듣던 순간, 가장 강하게 엄습한 것은 나의 글이 적중했다는 통쾌함도, 이런 망발을 할 수 있나 하는 분노도 아니었다. 오히려 글을 잘못 썼다는 자괴감이었다”며 “문제는 이 전 시장의 입이 아니라 머리, 아니 총체적 삶이었다. 그런데 하찮은 입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말이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이 이처럼 한심하고 소름 끼치는 사고방식과 역사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라고 주장했다.6)

이명박은 자신의 발언은 민주화 세력을 지목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1964년 6·3 시위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 동안 복역한 과거에 기대어 “내가 민주화세력 아니냐”고 해명했지만, 옹색했다. 오죽하면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마저 한숨을 내쉬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말’ 때문에 욕먹는 걸 4년간 보고도 왜 저러는지”라며 개탄했을까.7)

‘내지르기’를 즐겨 하다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라는 말을 듣게 된 이명박이 노무현·이해찬의 막말을 자주 비판해왔다는 것도 흥미롭다. 예컨대 이명박은 2005년 6월 “이 총리는 그때그때 말을 함부로 하는 게 문제예요. 일관된 철학을 가지고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과 같이 국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이 총리는 입부터 진중해야 해요. 이 총리의 직설화법이 노무현 대통령과 닮은꼴입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8)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막말’에도 손해를 보는 막말과 그렇지 않은 막말이 있는 걸까? 손호철은 노무현의 막말엔 논리나 있다며 노무현의 막말을 더 나은 걸로 평가했지만, 그건 진보적 지식인의 입장을 반영한 것 같고, 다른 의견도 있다. 이상호의 다음과 같은 분석에 주목해보는 게 좋겠다.

“정치인으로서 이명박 서울시장의 뛰어난 재주 중 하나는 핵심을 찌르는 어법이다. 기업인 출신이라 그런지 수치 등 실물에 밝고 어려운 얘기도 쉽게 하는 남다른 능력이 있다. 이런 그가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유력시되는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을 두고 ‘노는 것, 춤추는 것을 좋아하니까 서울시 공무원들은 매일 놀 수 있어 좋아하지 않겠느냐’고 비꼬았다. 여자라고 깔보는 듯한 남성 우월적 권위주의에다 지금껏 자신과 더불어 일해온 서울시 공무원들에 대한 ‘싸늘한 폄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데마고그(선동)’로서 파괴력은 만만치 않은 것 같다.9)
 
이명박의 시각주의 화법
 
이런 이야기다. 노무현도 후보 시절엔 막말로 큰 재미를 보았다. 노무현의 막말은 대통령이 된 이후에 문제가 되었다. 주로 제도권력을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권력의 책임을 외면한 막말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 정점에 있으면서 그러니, 대중은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짜증을 낼 수밖에.

이명박의 막말은 서울시장과 대통령의 무게가 다르므로 노무현에 비해 유리한 점이 있었지만, 그와 더불어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막말에 능하다는 차별성이 있었다. 예컨대, 2005년 6월 이명박은 정부 부동산 정책을 언급하면서 “중앙정부가 아니라 군청 수준”이라고 조롱했다.10) 여당 대변인 전병헌은 이명박의 발언을 ‘면장 수준’이라고 맞받아쳤지만, 어떤 주장이 더 먹혔을까?

이틀 후 이명박은 ‘군청 수준’ 발언과 관련, “군청의 행정 수준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정부 정책이 너무 세세한 부분까지 커버하려 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고 해명하면서도, 다시 “정부가 강남의 아파트값을 떨어뜨리려는 정책을 쓰는데 ‘강남 아줌마’들은 담합해서 가격을 올리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정부 정책이 이들 아줌마 수준보다 못하다”고 조롱했다.11) 과연 대중이 이런 조롱에 화를 냈을까?

대중의 인지에 있어서 중요한 건 생생한 그림이다. 실물 그림이건 마음속의 그림이건 강한 이미지 어필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인지법은 ‘시각주의’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디지털 혁명은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열었다. 최근의 UCC 열풍이 말해주듯이 2000년대는 ‘보여주는 문화로의 전환’을 넘어서 완성단계에 접어든 시대다.

이명박도 자신의 시각주의를 인정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있다. 그분은 경부고속도로나 거대 공업단지처럼 눈에 보이는 업적을 남겼다. 사람은 눈으로 보면 가장 확실하게 설득 당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는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성과로 국민들을 설득하는 게 나의 전략”이라고 말한다.12) 

이명박의 청계천은 정몽준의 월드컵이었다. 청계천과 월드컵은 둘 다 시각주의 문화의 화려한 꽃이었다. 후보 시절의 노무현에게도 보여줄 게 있긴 했다. 그건 그의 ‘눈물’이었다. 그 눈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는가를 상기해보라.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었다는 게 노무현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이명박은 어법마저 시각주의 원리에 충실했다. 그는 청계천 덕분에 홍수처럼 쏟아진 언론 인터뷰 기회마다 ‘4200번’을 강조하곤 했다. 질문이야 뻔한 게 아니겠는가. 청계천 복원사업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이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그는 ‘4200번’을 무수히 반복했다.

“시장 선거 기간 자문을 해줬던 전문가들조차도 막상 시장이 되니 복원 계획만 세우다 말라고 충고할 정도로 어려운 사업이었다. 교통 문제, 복잡한 이해관계 등도 어려웠지만 청계천 주변 22만 명의 상인들과 1500명의 노점상들과의 갈등이 가장 어려웠다. 이들에게는 생존이 달린 문제였지만 보상 없이 구두로 약속할 수밖에 없어 합의 도출이 어려웠다. 이 때문에 무려 4200회 이상 상인들을 만나 대화하고 설득했다.”13)

수백, 수천 번 반복된 이야기라, 웬만큼 관심 있는 사람들은 거의 외울 정도였다. 게다가 이명박은 말도 드라마틱하게 했다. “뭐가 가장 어려웠나?” “청계천 상인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사실상 불가능하게 보였다. 22만 명이 머리띠를 두르고 반대했다.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명의 희생자라도 나왔으면 촛불시위로 끝장났을 것이다.”14)
 
‘이명박이 이해찬·손학규보다 더 진보적’
 
이념은 시각주의의 그물망에 잡히지 않는다. 이념싸움에 지친 우리 시대의 대중은 ‘탈이념화’를 포용으로 본다. 물론 이명박은 보수우익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담론은 ‘이념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보는 자세를 취했다. 대표적인 보수 논객으로 일부 사람들에겐 ‘극우 논객’으로 평가받는 조갑제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이명박을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로 추켜세운 적도 있었지만, 이명박은 그걸 곤혹스러워하면서 그 굴레를 벗어나려고 애썼다.15)
이명박은 “이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만 진보와 보수를 따진다. 문제는 경제성장 과정에서 격차가 너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 간격을 해소할 수 있는 정책을 가진 사람이 정치인이 돼야 한다. 그 격차를 줄이는 것이 진보와 보수를 없애는 길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 11대 통상 국가다. 미국엔 5대 통상 국가로 성장했다. 이젠 서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국익이 기준이 돼야 한다. 미국의 국익과 우리의 국익이 일치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일본 국민의 70%는 반미(反美)인데도 정부 정책을 따라간다. 국익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하면 대화가 되겠느냐. 드러내 놓고 미국과 중국 중 중국이 더 좋다고 말하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16)

‘청계천’보다는 적게 말했겠지만, 이런 좌우(左右) 초월론은 그의 인터뷰 단골 메뉴였다. 그는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이분법적 접근을 빨리 뛰어넘어야 한다”며 “우리 사회에 극좌와 극우가 다 있지만, 양 극단은 힘을 못 쓰는 만큼 나머지 사람들이 힘을 모으면 된다”고 통합론까지 역설했다.17) 또 이명박은 “나의 생각은 온건보수지만 행동은 진보개혁적으로 한다”며 “서울시가 시내버스 사유 노선을 회수해 준공영화한 것은 사회주의적 성격으로 운동권에선 속 시원해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8)

이명박의 이런 독특한 이념론에 대해 진보 인사들은 펄펄 뛰었지만, 진보 쪽의 이념론은 대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오히려 이명박의 이념론이 먹혀들고 있었다는 말이다. 2005년 10월에 실시한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조사에서, 일반 대중은 대선 후보들의 진보성 순서를 ‘정동영 > 김근태 > 이명박 > 이해찬 > 손학규 > 고건 > 박근혜’ 순으로 평가했다. 오피니언 리더들은 이명박이 박근혜 다음으로 보수적이라고 평가했지만, 일반인들은 이명박이 이해찬이나 손학규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봤다.19)

오피니언 리더들이 볼 때엔 황당하겠지만, 그게 현실인 걸 어찌하랴. 그래서 이명박은 ‘스타일로 승부하는 최초의 보수 정치인’이라는 말도 들었다. 신윤동욱은 “그의 지지자들은 이명박의 이념보다는 이명박의 스타일에 매혹됐다. 그의 스타일은 일하는 스타일이다. 사람들은 ‘그는 어쨌든 무엇이든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그의 스타일은 가시적 성과를 내면서 호응을 얻고 있다. 그는 좋게 말해, 정치인의 공허한 말에 지친 국민에게 청량제 같은 시원함을 선사했다”며 “그래서 그의 인기를 ‘탈근대적인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고 했다.20)

이명박이 때때로 ‘탈근대적’으로 보였던 건 그의 유별난 시각주의가 이념 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발주의는 곧 시각주의이기 때문에 그의 시각주의는 보수 우익으로 비치지만, 이명박에게 이념은 우연적인 것일 수 있다. 예컨대, 그의 시각이 달동네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면 그는 진보로 선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명박은 2007년 2월 서울의 한 구립 어린이집을 찾아간 자리에서 다섯 살까지는 의료비 전액 무료화를 포함해 의무보육 시스템으로 돌보겠다고 공약했다. 진보적? 아니다. 전혀 아니다. 이는 빈곤층 어린이의 의료 문제라는 구체적 현실에서 출발한 귀납적 접근 방법일 뿐이다.

그러나 언론의 보도 프레임은 연역의 함정에 빠져 있어서 이런 걸 잘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한겨레 24시팀장 박용현은 “어찌 보면 경부운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일 수도 있는 이 공약이 주요한 토론거리가 되지 않는 점이 아쉽다”고 했다.21) 이명박에 호의적일 것 같은 보수 신문들조차 그 점을 놓쳤다는 게 흥미롭지 않은가?
 
이명박의 새로운 ‘그림 만들기’
 
대통령이 된 후의 이명박은 새로운 ‘그림 만들기’에 열중이다. 지난 2월 27일 이명박은 취임 후 수석 비서관 회의를 처음 주재한 자리에서 “라면값이 100원 올랐다. 라면 많이 먹는 서민들에게 100원은 크다”며 “청와대는 초점을 서민들에게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라면의 상징성이 얼마나 강한가. 거의 모든 기사 제목들이 ‘라면값 100원’을 부각시켰다.
 
이에 대해 상지대 교수 홍성태는 “대통령이 당선 뒤 부동산값 등 시장에 줄곧 물가 인상의 신호를 보내놓고선, 라면값을 갖고서 얘기하는 건 모순”이라고 했다. 맞다. 아니 ‘모순’인 정도가 아니다. 한마디로, 속 보인다. 이명박의 ‘공직자 머슴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공직자 머슴론’에 대해 “말만 들어도 속이 다 시원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니, ‘라면값 100원’에 대해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아마도 이런 반응이지 않았을까.

“아, 라면값 100원을 신경 쓰는 대통령! 각료 후보자 15명의 평균 재산 신고액이 39억 원이면 어떠랴. 그들의 평균적 특징이 ‘최소 2채 이상인 주택 중 하나는 강남에 있고, 골프장 회원권은 필수, 외제차를 굴리는 40억 원 가까운 재산가’라 한들 그게 무슨 대수랴. 그들이 온갖 비리 의혹으로 얼룩진 사람들이라 한들 또 어떠랴. 라면 많이 먹는 서민들에게 100원은 크다는 사실을 알고 그걸 강조하는 명박이가 있으니 믿어볼 만하다.”

좀 웃자고 해본 말이긴 하지만, 이명박으로선 ‘라면값 100원’이 손해를 본 말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아니 이문을 크게 남긴 말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빈말일망정, ‘라면값 100원’은 이명박이 ‘막말’에만 능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라면값 100원’의 반대편에 ‘10배 남는 장사’가 있다. 2004년 6월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게 벌어지던 때에 노무현은 분양원가 공개에 반대하면서 “10배 남는 장사도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분양원가 공개는 열린우리당의 총선 공약이었음에도 그렇게 당당하게 큰소리치면서 공약을 뒤엎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다.

실제로 이 ‘10배 남는 장사’ 발언 직후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급락하기 시작했으며, 여론조사에서 ‘서민을 위한 정당’으로 열린우리당보다는 한나라당을 지목한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나기도 했다.22) 말의 재앙이요, 저주였다. ‘10배 남는 장사’의 무게엔 못 미칠망정 노무현은 집권 기간 내내 이런 ‘막말’을 양산해냈으니 스스로 지지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안달한 셈이다.
 
이명박의 적(敵)은 이명박 자신
 
혹자는 언론 탓을 할지도 모르겠다. 노무현도 서민을 감동시킬 수 있는 말을 많이 했는데, 언론이 그건 다 무시하고 욕먹을 소리만 크게 부각시켰으며, 이명박은 언론으로부터 정반대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될 법하다. 실제로 노무현 지지자들은 지금도 모든 걸 ‘언론 탓’으로 돌리고 있잖은가.

실은 바로 그런 ‘언론 탓’이 노 정권의 최대 자해 행위였지만, 여기서 그걸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한번 보자. 이명박은 출발서부터 우리 사회의 각계를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층의 지지와 신뢰를 누린 반면, 노무현은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그들의 비위를 어느 정도나마 맞춰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차이가 낳은 효과가 만만치 않다.

이미 기득권층의 지지와 신뢰를 확보한 이명박은 늘 서민을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시장을 누비고 다니며 ‘라면값 100원’만 외쳐도 된다. 기득권층에겐 ‘조용한 실질’을, 서민에겐 ‘요란한 이미지’를 선사하는 것이다. 반면 서민의 부푼 기대 속에서 출발한 노무현은 그 기대의 크기와 속도를 통제해야 할 입장에 처한 동시에 기득권층의 강한 의구심을 어느 정도나마 해소시켜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10배 남는 장사’도 그런 심리상태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을까?

그러나 아무리 그런 이해심을 발휘한다 해도, 집권 후의 노무현이 말로 망가진 건 분명한 사실이다. “논쟁을 할 때에 상대편을 약 오르게 하라. 그러면 스스로 무너진다.” 노무현은 바로 이 원리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화가 나면 논쟁의 목적을 잊고, 논쟁 상대편의 비열함을 공격하는 데에 몰두하게 된다. 노무현은 정적(政敵)들의 공격에 약이 올라 “경제가 좋다”는 호언장담을 수십 번 했으며, 그 증거로 자주 서민과는 무관한 주가를 들먹이곤 했다.

정말 모든 언론이 노무현을 골탕 먹이기로 작정해 일부러 보도를 하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양산해낸 그 수많은 말속에서 ‘라면값 100원’과 같은 유형의 말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공무원에 대해서도 내내 수 늘리고 칭찬만 하기에 바빴다. 비판자들의 주장처럼 노무현이 어떤 점에선 포퓰리스트였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는 민심을 전혀 모르거니와 알려고도 하지 않는 지독한 안티-포퓰리스트이기도 했던 셈이다. 노무현도 모든 싸움이 끝난 지금쯤은 차분하게 자신의 그런 엄청난 과오를 인정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을지 그것이 궁금하다.

노무현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이제 이명박의 최대 적(敵)은 바로 이명박 자신이다. ‘포퓰리즘 언어’는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 자신의 함정을 파기 마련이다. 정치언어는 정치현실이긴 하지만, 궁극적인 현실은 아니다. 대중은 곧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손으로도 만질 수 있는 걸 요구하게 돼 있다. 그건 ‘내지르기’의 카타르시스 효과만으론 충족시킬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자신의 성공 신화의 포로 노릇을 청산하고 소통의 문을 활짝 여는 건 누구에게나 미덕이다.
 
[각주]
 

1) Hannah Arendt, On Revolution, New York: Viking, 1963, p.94.
2) Murray Edelman, Politics as Symbolic Action: Mass Arousal and Quiescence, Chicago: Markham, 1971, p.66.
3) Murray Edelman, Politics as Symbolic Action: Mass Arousal and Quiescence, Chicago: Markham, 1971, p.10.
4)  고원, 「이명박 신드롬은 아파트값이다」, 『한겨레21』, 2007년 2월 27일, 92~94면.
5)  손호철, 「거울 이미지」, 『한국일보』, 2007년 2월 26일, 30면.
6)  손호철, 「‘빈둥거렸다’굽셔?」, 『한국일보』, 2007년 3월 5일, 30면.
7)  황준범, 「불도저 자신감? 시대 성찰 부족?: 이명박 ‘거침없는 말’ 논란」, 『한겨레』, 2007년 3월 1일, 6면.
8)  김성동, 「“검찰의 청계천 재개발 비리 수사는 나를 겨냥했다: 검찰 수사에 성난 이명박 서울시장」, 『월간조선』, 2005년 7월, 158쪽.
9)  이상호, 「서울시장이라는 자리」, 『문화일보』, 2006년 3월 7일, 30면.
10)  허윤, 「서울시 독자 부동산 대책 착수: 이명박 시장 “정부 정책은 군청 수준… 잘못 건드려 더 올라”」, 『국민일보』, 2005년 6월 9일, 1면.
11) 박태해, 「“정부 부동산정책 아줌마보다 못해”: 이명박 시장 또 비판」, 『세계일보』, 2005년 6월 11일, A4면.
12) 김성동,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성과로 국민들을 설득하는 게 나의 전략”: 청계천 복원의 주인공 이명박 서울시장의 24시」, 『월간조선』, 2005년 11월, 129~130쪽.
13)  박선화, 「이명박 서울시장 인터뷰: “청계천 복원 성공의 90%는 시민 협조 덕분”」, 『서울신문』, 2005년 9월 30일, 6면.
14)  이영성, 「신년 대선주자 인터뷰 (5) 이명박: “국민들은 일하는 모습 갈망하는 것 같아”」, 『한국일보』, 2006년 1월 25일, 5면.
15)  백왕순, 「이명박 시장 ‘조갑제씨, 제발 내버려둬…’」, 『내일신문』, 2004년 11월 10일, 2면.
16) 정연욱·박민혁, 「‘만년 프런티어’ 자임하는 실용주의자: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동아일보』, 2004년 6월 18일, A5면.
17)  윤정호, 「“뉴라이트인 척하는 사람들 있어 시류에 편승 말고 옥석 가려야”: 이명박 서울시장」, 『조선일보』, 2004년 12월 29일, A6면.
18)  김정하, 「“나는 온건보수지만 행동은 진보적 서울버스 준공영화, 사회주의 성격”: 이명박 시장 기자 간담회」, 『중앙일보』, 2004년 12월 29일, 6면.
19) 류이근, 「이명박은 중도 아닌 보수」, 『한겨레21』, 2006년 1월 10일, 34면.

20) 신윤동욱, 「애증의 명바기!」, 『한겨레21』, 2005년 10월 25일, 33~35면.

21) 박용현, 「이명박과 심상정의 공통분모?」, 『한겨레』, 2007년 3월 9일, 30면.

22)  박태견, 『참여정권, 건설족 덫에 걸리다』, 뷰스, 2005, 141쪽.

* 본문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8년 5월호에 실렸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8/04/23 [15:33]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정석과꼼수 2008/06/01 [04:18] 수정 | 삭제
  • 모든 것은 자업자득이다.
    강준만도 자업자득이다.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다.
    강준만은 조선일보 강팬인가 보다.
    노무현은 화법이 문제가 아니라 조중동이 승리했다는 것이 문제다.
    노무현 욕하는 것 살펴보니 다 조중동보고서 그대로 옮기는 것이었다.
  • 작운 2008/04/24 [02:20] 수정 | 삭제
  • 강준만의 글이 노무현에 관한 것인지 이명박에 관한 것인지 헷갈린다.
    강준만은 이명박을 빌어 노무현을 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명박에 관한 글에 필요이상으로 노무현을 개입시키고 있다. 그것도 노무현의 말은 '경박하다'라는 전제를 깔고서..
    강준만의 노무현에 대한 증오를 짐작하고는 있지만 그의 거의 모든 글에 노무현을 등장시키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자신이 언론학자로서 언어가 어떤식으로 왜곡되고 미화되는지 너무 잘 안다. 그러기에 그가 한 때 안티 조선의 선봉자을 자임하지 않았든가?
    이제와서 노무현의 실패를 언론과 무관한듯 노무현의 자업자득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 백성주 2008/04/23 [18:28] 수정 | 삭제
  • 조중동은 신문장사를 잘 하고 있다. 조중동은 독자들의 관심사를 살살 긁어줄 기사를 양산한다. 노무현을 싫어하는 독자들을 위해서 노무현을 까는 기사를 양산해 온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명박을 좋아하는 독자들을 위해서 이명박을 안 까고 살살 보호해 준다. 독자가 조중동을 애독하는 건 이런 까닭이다.

    자, 공정하게 말해 보자. 대운하 공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었다. 조중동이 이걸 제대로 비판했으면 대통령당선은 커녕 당내 경선에서도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대로 된 비판이 없는 탓에 이명박 대통령이 탄생했다.

    이명박의 화법은 별 거 아니다. 장삼이사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게 대통령이 하는 말이니 거룩하고 뽀대나게 들릴 뿐이지. 망언이나 일삼는 꼴을 보면 김영삼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 조중동이 안 까니까 별 문제 없는 것처럼 넘어가는 것이지, 같은 말을 노무현이 했어 봐라.... 조중동과 독자들이 가만 있었겠는가!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