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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나라가 독립운동가들이 바란 나라인가?
[이대로의 우리말글사랑]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다녀온 이야기
 
이대로   기사입력  2008/04/20 [11:34]
지난 4월 초 청명절 공휴일을 맞이해서 중경에 있는 상해임시정부 터와 사천외국어대학에 다녀왔다. 중국은 청명날이 공휴일인데 마침 주말과 닿아서 3일을 쉴 수 있기에 오래전부터 꿈꾸던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방문 계획을 실천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백범과 이시영님 들 독립운동가들이 1919년에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쫓기어 중경까지 가 1945년 광복을 맞아 돌아온 마지막 임시정부가 있던 곳이다. 그런데 중경이 내가 있는 절강성에서 한국 서울에 가는 거리만큼 먼 곳이어서 항주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고 무한 비행장에 내렸다가  그 비행기로 다시 손님을 태운다음 중경 비행장으로 다시 가니 4시간이나 걸렸다.
 
중경 비행장에 내리니 사천외대 한국어학과 과장인 강걸교수가 마중을 나와서 함께 사천외대에 들러 라국충 동방어학원장과 강택민 외사처장을 만났다. 퇴근시간인데도 기다렸다가 환영해주어 고마웠다. 이번에 내가 중경에 간 건 임시정부 터를 방문하고 선배들의 독립운동 기운을 받아서 중국에 우리말과 우리문화를 뿌리내리게 하겠다는 뜻과 중경 사천외대의  한국어교육 상황을 살펴보고 협조할 일을 찾으려는 두 목적을 가진 방문이었다.
 
중경은 인구가 3천만 명이 되는 중국 중서부의 중심도시이고 사천외대는 50년 역사를 가 진 국립 외국어대학이다. 그 중경 사천외대에 한국어학과가 3년 전에 개설되어 정식 학부생이 50명이고, 그 외 평생교육원식 한국어반 학생이 300여명이라고 했다. 중경은 일제 때부터 우리 겨레와 인연이 깊은 곳인데 수천만 리 깊은 내륙에 있어 우리 기업 진출도 늦고 우리말 보급도 늦었으나 뒤늦게 우리 기업과 교포도 늘고, 우리말과 문화도 뿌리내리기 시작한 곳이다.
 
중국 어느 지역, 어느 대학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연변대학 출신 우리 동포 학자들이 한국어학과를 개설하고 한국어와 한국문화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이 대학에도 연변대학을 나온   강걸(37살) 교수가 3년 전에 한국어학과를 설립하고 드넓은 중국 중원에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뿌리내리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강 교수는 30대 후반 젊은 학자로서 중경까지 와서 독립운동을 한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이어 우리 문화 미개지인 중국 중서부 지역에 우리말과 문화를 보급하고 한국과 중국의 우호협력에 몸을 바치겠다는 강렬한 의지와 꿈을 가진 대한한 젊은 교수였다.
 
▲중국 장개석국민당정부 항일유적지 옛 사무실에서 오른쪽 이대로 교수, 왼쪽 강결 교수가 한, 중 문화교류를 통한 우호협력시대를 여는 일을 함께 하자고 약속하고 다짐했다.     © 이대로

첫날은 사천외대를 들러보고 이튼 날 아침 강걸 교수와 함께 숙소에서 가까운 장개석 항일유적지를 먼저 들렀다. 봄비가 조금씩 내리지만 중국인들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활동하고 있었다.  항일 유적지는 이름도 서울 남산과 같고, 높이도 비슷한 산마루에 있었다. 일본군이 그곳까지 폭격을 하기 때문에 높은 산속에 본부를 두고 싸웠다고 한다. 전시실에서 사진과 동영상을 보니 그 당시 시내엔 일본 비행기가 까맣게 몰려와서 폭탄을 퍼부어서 다 파괴되고 사람들이 죽은 시신이 거리를 메우고 있어 참혹했다. 그 때 그곳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들도 일본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후엔 장강(양자강 상류)과 가릉강이 만나는 곳에 들러서 일본군이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었던 도시를 내려다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지금은 강가에 유람선이 떠있고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던 곳에 높은 빌딩이 올라간 풍경을 보면서 백범과 독립운동가들이 이 강을 바라보며 일본과 싸울 준비를 할 때 심정을 짐작해봤다. 그리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터로 향하니 비도 그치고 날이 밝게 개였다. 한국에서 임시정부 터를 보겠다고 온 이대로를 환영하는 뜻으로 하늘이 비를 그치게 했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연화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터에 들렀다.
 
▲난빙공원에서 비가 내리는 장강과 일제 때 폭격 당한 시내를 바라보며 독립을 생각했다.     ©이대로

중경엔 대한민국임시정부 오사야항 청사, 광복국사령부 터, 기강현 임시정부청사 터 들이 있는데 연화지 청사터가 마지막 청사로서 상해임시정부 건물보다는 규모도 크고 좋았다.  독립운동가들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윤봉길 의사 의거가 있은 뒤 일본군의 감시가 심해서 수천만 리나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장개석 정부 도움으로 임시정부 청사를 꾸렸다. 이곳엔 회의실, 접견실, 교육장 등도 갖추고 군관학교를 세우고 이범석, 이청천 장군들이 광복군도 양성하였으나 참전을 못하고 아쉽게 중경에서 고국에 돌아온 것이다.
 
청사를 둘러보고 우리 동포인 이선자 부관장과 차를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하는 국어독립운동과 친일파청산활동은 무엇인지 물어서 설명했다. 나라도 빼앗기고 우리말도 못쓰게 한 일본제국 식민지시대에 일제가 강제로 일본어 몰입교육을 시켰는데 지금 우리 정부가 미국말 몰입교육에 정신이 나갔다고까지 말하니 부관장은 “ 일제 때 이곳 중국까지 와서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 바라는 조국이 지금 조국의 모습이었을까요?” 하면서 “남북이 갈려서 싸우고 있으며, 외국 문화와 외국말 섬기기에 온힘을 바치는 그런 조국은 아니었을 겁니다.”라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나는 “백범은 문화자주강국이 되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나는 오늘 선배들이 바라던 나라를 만드는 일을 죽는 날까지 할 결심을 했다. 내 꿈은 빨리 나라를 통일하고 문화강국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 중국과 일본이 유럽연합처럼 사이좋게 오고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잘 살고 힘센 나라가 될 때 가능한 일이다. ”라고 말했고, 함께 있던 강걸 교수도 공감을 표시하면서 “중경에 한국어 교육 바람을 일으키고, 한국 학생들이 독립운동 유적지를 들러보는 교육장을 만들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왼쪽부터 임정청사 이선자 부관장, 이대로 교수, 백범동상, 중국인 관장, 강걸 교수. 휴일인데도 한국에서 손님이 온다고 하니 나와 만나준 임시정부 청사의 관장과 부관장이 고맙다.     © 이대로

백범과 독립 운동가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이 먼 곳까지 와서 숨어살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광복군을 조직했다. 이제 우리는 나라를 되찾았고 마음 놓고 오고갈 수 있는 평화시대에 살고 있다. 빨리 우리말과 정신부터 독립하고 나라를 통일해서 잘사는 문화강국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다시는 강대국에 늘려 살지 않게 되고 중국 일본과 우방이 된다. 우리가 못살고 문화 후진국이면 그들은 우리를 깔보고 또 지배하려 할 것이다. 우리도 중국말을 배우고 여기 중국인들에게도 우리말과 문화를 가르치는 일을 열심히 하련다. 이 일은 영어에 목숨을 거는 일보다도 더 시급하고 가치가 있고 효과가 크고 중요한 일이다.


<대자보> 고문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한국어인공지능학회 회장

한글이름짓기연구소 소장
세종대왕나신곳찾기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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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4/20 [11:3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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