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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고객?”, 국정은 장사가 아니다
[시론] 대통령과 장관들이 하는 ‘정책고객관리 토론회’ 중계방송 감상기
 
이대로   기사입력  2005/11/14 [11:32]
나는 국회방송이나 한국정책방송(KTV)을 자주 본다. 11월 12일 오후에 한국정책방송에서 대통령과 장관들이 모여 정책토론을 하는 중계방송을 봤다. 토론 제목이 ‘정책고객관리 토론회’였고, 주제가 <정책고객과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나는 이 방송을 보면서 정부기관의 보고서가 어려운 한자말과 영어가 섞여 딱딱하고 거리감을 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욱이 국민을 ‘고객’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기업에 물어볼 일이 있거나 은행에 갔을 때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어서 오세요.”라고 코맹맹이 소리로 친절한 듯이 말하지만 역겹게 느껴서 그런 말을 쓰지 말았으면 했는데 정부기관까지 그러니 실망이 커서 가슴이 쿵쾅거렸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에서 올해 KT란 회사를 ‘우리말 훼방꾼’으로 뽑았다. 그 이유가, 회사 이름을 우리말이 아닌 영문으로 바꾸고 영문 간판과 광고문을 언론을 통해 뿌리는 것도 있지만 ‘고객’이란 역겨운 일본 한자말을 마구 퍼트렸기 때문이었다. 요즘 어떤 기업에 전화를 걸거나 은행을 찾아가면 어른이건 아이이건, 여자이건 남자이건 무조건 ‘고객님’이라고 부른다. 친절하게 대한다고 그러지만 너무 틀에 박힌 호칭이라 오히려 역겹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말을 자주 많이 쓰고 퍼트린 게 KT(전화국)란 회사였다. 거의 모든 국민이 그 회사 전화를 가입해 쓰고 있는데 전화 가입자들에게 자주 많이 써서 중독 시켰다. 이제 다른 회사도 많이 중독되고 정부까지 그러고 있다.
 
왜 이 말이 좋지 않은 지 몇 가지만 말하겠다. 본래 ‘고객’이란 낱말은 일본 한자말로서 사전에 나온 그 말뜻은 “고객 (顧客) [명사] 영업을 하는 사람에게 대상자로 찾아오는 손(사람)”이라고 되어있다. 물건을 파는 가게나 회사의 ‘주인’이 아니고, 찾아오는 ‘손(客)님’이라는 뜻이다. ‘손님’이라고 해야 참된 우리말이 되고, 따뜻한 높임말이 된다. ‘객(客)님’이라고 하면 낯설 듯이 ‘고객님’도 우리말답지 않은 말이다.
 
돈벌이를 하는 집(점포)이나 회사에 손님이 찾아오면 무조건 모든 사람에게 ‘고객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어른은 ‘선생님’이나 ‘할머님’이라는 식으로 어른 대접을 하고, 학생에겐 ‘학생’이라고 하던지, 어린 아이에겐 사랑스런 태도로 ‘아가’라고 부르는 게 더 친절감을 준다. 제 아버지 친구가 전화를 해도 ‘고객님’이라고 하고, 어린 아이가 전화를 해도 ‘고객님’이라고 하는 건 우리말 짓밟기요 비틀기가 된다.
 
30년 전만 해도 가게에 가면 ‘손님’이라고 하던가 ‘학생’이라고 했지 ‘고객님’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저기 회사와 점포에 가도 ‘고객님’이라고 한다. “고속도로에 쓴 표지판이 잘못 써져 있다”라고 도로공사에 항의 전화를 해도 “고객님, 그런 거 가지고 그렇게 항의 전화하세요? 고객님!”이라고 말한다. 몇 년 전부터 일본 한자말을 좋아하는 대한항공(조중훈)계열회사가 ‘택배(宅配)’란 일본 한자말을 쓰니까 다른 운송회사도 그 말을 쓰고 정부기관인 우체국까지 그 말을 쓰던데, 이 ‘고객(顧客)’이란 말도 일본 전화국이나 회사에서 많이 쓰니 따라 쓰게 된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제 청와대나 서울시청에 건의 전화를 하거나 잘못된 걸 항의할 때도 코맹맹이 목소리로 “고객님, 그렇게 열 내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고객님!”이라고 할 거 같아 소름이 끼친다.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고 정부나 공무원은 국민을 대신해 나라의 일을 하는 일꾼이다. 세경을 받고 일하는 머슴과 같다. 그런데 일꾼(공무원)이 주인(국민)을 손(客)으로 보고, 그렇게 맞이하고 있다. 더욱이 국민(주인)을 '돈벌이를 위한 영업 대상처럼, 자신들에게 이익을 주는 고객'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국민과 정부가 마음이 통할 리가 없고 서로 믿음이 갈 수가 없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거기다가 국민을 무슨 싸움 상대로 여기는 것도 같다.
 
가게 주인이나 회사가 손(사람)님을 끌어들여서 이익을 챙기려고 ‘고객’이라고 부르는 것은 몰라도, 정부가 국민에게 봉사하고 섬기는 마음이 아니고, 국민을 자기에게 이익을 주는 대상으로 여기는 ‘고객’으로 본다면 큰 잘못이다. 정당이나 정치인이 국민을 자기 지지자나 편으로 만들 생각만 가지고 홍보를 하고 국민을 관리한다면 잘못된 일이고, 잘못 본 시각이다. 국민에게 봉사하고 섬기는 마음과 태도로 말을 하고, 움직일 때 국민이 믿고 따른다.
 
정책토론회 때 외무부 장관이 발표하는 문구를 보니 “정책홍보 마인드의 문제점”, “견학 프로그램과 메시지”처럼 영어를 섞어 쓰고 있었다. 옛날에 한자를 섞어 쓰더니 이제 미국말을 섞어 써야 유식해 보이는 거로 아는 거 같다. “온라인 미디어, 홍보 시스템” 같은 영문을 섞어 말하는 국무위원들을 보며 너무 실망했다. 대통령이 “우리 고객이 좋아하는 논리와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콘텐츠 싸움을 해야 한다. 국정브리핑을 통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개발...”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답답했다. 국민을 남의 고객과 우리 고객을 나누어 보는 것일까?
 
행정자치부가 돈에 눈이 먼 회사들을 본떠서 ‘홍보팀, 행정팀’이라는 식으로 조직을 ‘팀제’로 바꾸더니 다른 정부기관과 공무원들이 모두 ‘우리 팀’이니 ‘무슨 팀’이라고 하고 있다. ‘팀’이란 영문자만 붙이면 모두 잘 되는 거로 아는 거 같다. 그러나 운동선수들을 ‘축구팀’이나 ‘배구팀’이라고 하는 걸 들어봐서인지 공무원들이 운동선수로 보였다. 그런데 이제 국민을 ‘고객’이라고 하니 정치인이 제 이익만 챙기려는 장사꾼으로 보인다.
 
다행히 정책 토론회 때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이 “고객이란 용어가 부적절한 거 같다”라면서 용어 선택에 신경을 쓰면 좋겠다고 말하고, 이해찬 총리가 “민간기법을 너무 따르다 보니 용어도 기업 냄새가 난다”라고 지적해서 좀 마음이 풀렸다. 한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을 보여준다. 국민을 자기에게 이익을 주는 대상으로 보는 태도로는 국민의 사랑과 믿음을 받을 수 없다. 또 그런 토론과 방송도 헛돈 쓰기요 헛심 빼기다.
 
나도 정부에 자주 정책 건의를 하는 사람(고객)인데 정부는 내 건의에 대해 대답은 하지 않고, ‘스팸메일’ 같은 자기 홍보 편지만 자꾸 보낸다. 그런 글을 아무리 보내야 헛수고임을 알라. 옛날 독재 군사정부는 건의문을 보내면 형식에 그친 거라도 꼭 답장을 해주었다. 지금 대통령이나 장관과의 대화방에 아무리 글을 올려야 답장이 오지 않는다. 더러 자기 부처 누리집에 답변을 쓰는 이가 있는데,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네가 찾아와 말했으니 대답도 찾아와 듣든지 말든지 하라는 식이다. 토론방송이 끝나니 <정책포커스(진행자 정찬용:전 청와대 비서)>란 방송을 하는 데 별로 볼 기분이 나지 않아 방송을 꺼버렸다.


<대자보> 고문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한국어인공지능학회 회장

한글이름짓기연구소 소장
세종대왕나신곳찾기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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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11/14 [11:3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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