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도올 김용옥 교수의 「가련하다. 헌재여! 당신들은 성문헌법 수호자였거늘…」이라는 글을 읽었다. 끝간데 없는 박람강기(博覽强記)와 사건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이 어우러진 이 특별기고와 비교하면 헌법재판관들의 결정문은 논리의 치밀함이나 역사인식의 성숙함, 문체의 단단함 등의 면에서 초라하기 그지 없어 보인다. 도올은 당대의 석학답게 헌재의 결정이 내포한 역사적, 개념적, 논리적 오류들을 낱낱이 지적함으로써, 헌재의 결정이 얼마나 천박한 역사인식 위에 터잡아 엉성하게 구축된 건축물인지를 석연히 밝혀주었다. 심지어 국민투표에 의해서 행정수도 이전을 결정할 수 있는 방법조차 사실상 원천봉쇄한 헌법재판관들의 결정의 배후에 내밀히 작동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특정정치인과 정치세력에 대한 증오의 감정조차 세밀히 묘파(描破)한 도올의 솔직함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도올의 특별기고가 더욱 값지게 여겨지는 것은, 이번 헌재의 결정을 두고 양비(兩非)와 양시(兩是) 혹은 헌재의 결정이 내포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헌재의 결정은 존중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지식인들과의 분명한 차별성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도올의 사자후(獅子吼)를 인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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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의 결정이 반역사적임을 낱낱이 설파하는 도올 김용옥의 일갈은 양시 양비론에 숨어 보신에만 급급한 사이비 지식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오마이뉴스 10월 26일자 기사 | "2004년 10월 21일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에 의하여 낭독된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헌재결정문'은 행정수도이전이라는 거국적 사태에 대한 순수한 법리적 규명에서 귀납된 결론이 아니라, 오로지 현 행정부가 행정수도이전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연역적 전제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모든 논리를 조작해낸 느낌을 강렬하게 던져주는 문장이다.
이 결정과정에서 헌법의 해석 자체가 위헌적 소지를 지니는 많은 억지춘향의 논리를 내포하게 되었으며, 또 이러한 논리는 우리국가의 질서근간 자체를 해체시킬 수 있다. 헌법의 해석이 몇몇 편협한 법관의 주관적 독단에 좌우된다면 법치의 근원이 흔들릴 수 있다.
… 그러나 이런 용어를 지어내는 동시에 그들은 더욱 극심한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그들 자신이 평생을 일제식민지를 통하여 수용된 대륙법 계열의 성문법만을 우리나라 법질서의 근간으로 생각하는 성문법 전통의 옹호자로서 자처해온 사람들이며, 불문헌법적 유연성이나 유동성을 거부해온 자들이기 때문이다.
성문법적 자구의 해석에 매달리며 독재권력의 시녀노릇을 해온 자들이, 이제 와서 통치권력이 권력행사를 삼가는 시대에 왔다고 해서 불문헌법 운운하면서 자의적 권력을 구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망발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법구절을 넘어서는 불문의 민족대의를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불문헌법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성문헌법론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불문헌법 운운하는가?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행정수도이전의 문제를 어떠한 무리수를 쓰더라도 헌법에 귀속시켜서 헌법개정이라는 어려운 입법절차를 거치게 함으로써 국민투표라는 대처방안까지를 원천 봉쇄시키려는 아주 악질적인 정치적 모략을 획책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뒤통수를 되맞을 수 있는 가능성을 모면하는 안전판이 설치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수도의 설정과 이전의 의사결정은 국민이 스스로 결단하여야 할 사항이다"라고 말한 그들 자신의 명제를 위배하면서까지, 정치적 이념과 정당의 이권의 노예로서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근원적으로 국민을 불신하고 국민에게 여하한 논의의 기회조차 빼앗기 위한 기발한 방편으로써 "관습헌법"이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날조해내야만 했던 어떤 허구적 논리로 빠져든 것이다. 국정을 국민 스스로의 결단이 아닌 보수적 관성체계의 손아귀에 장악케 하기 위해
…헌재결정문의 이면에는 깊은 증오의 정조가 도사리고 있다. 그 증오의 실체는 특정한 정치인이나 정당에 대한 대적적 감정일 뿐이며 행정수도이전이라는 구체적 행위의 역사적 의의를 포괄적으로 형량하는 태도와 무관하다. 헌법의 해석은 특정 개인에 대한 증오로부터 출발할 수 없으며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방편으로서 악용될 수 없다.
정치권의 합의를 도출하는 방향에서 판결을 보류할 수도 있으며, 합의가 도출되지 않을 때는 대통령재량에 의하여 국민투표에 회부함으로써 국민 스스로가 설득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할 수도 있는 사안을, 굳이 안건의 성격을 왜곡하고 천도가 아닌 것을 천도라고 침소봉대하여 그릇된 대전제를 설정하고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관철시키는 결론을 유도한 것은 명백한 위헌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12조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고 명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헌재재판관들은 정치행위를 한 것이다. 그들의 결정은 법리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술수다"
도올은 이 글에서 한국사회 지식인 대다수가 외면하고 있는 지식인의 임무를 온몸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 임무는 다름아닌 옳고 그름(是非)에 대한 판단이다. 또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사회구성원들에게 직접 알리는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지식인들은 국가와 사회의 정신을 책임진 사람들이고, 사건과 현상의 본질을 밝게 드러낼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며,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를 사회 구성원들에게 알릴 사명을 가진 자들이다.
또한 지식인들이 설정한 좌표와 그들이 설계하는 사회 각 부면의 청사진에 따라 사회는 그 나아갈 방향을 정한다. 시장에서 날품을 파는 사람의 생각이나 벌언 조차도 그 근원을 따지고 보면 지식인들의 아이디어와 발언에서 비롯한 것이 대부분임을 감안할 때 지식인들의 사회적, 역사적 책임은 가히 무한대라고 할 것이다.
지식인의 정신노동과 농부의 육체노동이 노동의 본래 속성상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식인의 정신노동을 값지게 생각하는 것은 위와 같은 까닭이다. 그런데 그간 한국사회의 대다수 지식인들은 어떠했는가? 불행히도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건국 이후 위에서 열거한 지식인의 사명을 방기한 채 자신들이 지닌 지식을 이용하여 사익(私益)을 추구하였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교란시켰으며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여 왔다. 과거에 그들은 독재자들의 영구집권을 위한 이론을 제공하였고, 지금은 일체의 개혁입법과 정책에 빨간칠을 하고 있는 수구언론에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고 있다.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 지식인들의 사정도 그리 다르지는 않아서 이들은 현실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과 개입 보다는 강단에서 추상적 사변을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다. 이와 같은 사정을 살피건대 도올의 특별기고는 단연 빛을 발한다. 옳고 그름이 착종(錯綜)된 지금, 아래와 같은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지식인의 면모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헌재의 판결에 대하여 무한한 반박의 논리를 고안해낼 수 있을 것이다. 헌재의 판결 자체가 무지막지한 궤변덩어리며 이 사회의 건전한 상식을 반영하는 하등의 논리도 내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은 위헌적 판단에 의한 헌재의 위헌결정을 수용해서는 아니된다. 헌재의 재판관들을 탄핵하고 헌재를 해체시키는 조직적인 활동을 벌여야 한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도올과 같이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감연히 말할 수 있는 지식인들을 원하고 있다. /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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