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일 오후 열린 서울 중부서 앞 광복회 주최 인간띠잇기 행사에 나온 김정육 광복회 사무총장(우)이다. © 김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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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은 국가기념일인 제65회 현충일이다. 하지만 이날은 71년 전 친일파 처벌을 위해 설치된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과 그의 하수인인 친일경찰의 습격을 받은 날이기도 하다. 6일 오후 3시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서는 광복회 주최로 인간띠잇기 행사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경찰에 의해 저질러진 반민특위 파괴에 대해 경찰청장의 사과를 촉구했다.
71년 전인 1949년 6월 6일 친일파 조사에 속도를 내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사무실에 권총을 든 친일파 중부경찰서장과 경찰들이 난입해 고발장 문서와 서류 등을 탈취하고, 직원과 민간인 35명을 체포해갔다. 광복회가 6일 중부경찰서 앞에서 인간띠잇기 행사를 하며 경찰청장이 사과를 하라고 외친 이유이기도 하다.
이날 중부경찰서 앞에는 반민특위 유족들이 많이 참석했고, 그중 고 김상덕 반민특위위원장의 장남인 김정육(86) 광복회 사무총장도 함께 했다.
지난 3월 25일 오후 김원웅 광복회장을 인터뷰를 할 때, 잠시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당시 대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먼저 반민특위 6.6 폭란에 대해 경찰청장의 사과를 요구하기 위해 경찰간부를 만났다고 했다.
“제가 직접 반민특위 폭란과 관련해 경찰청장이 국민 앞에 사과를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경찰청장을 만나려고 했지만 만나지 못하고 총경을 만났다. 경찰청장에게 얘기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분이어서 얘기를 나눴다. 반민특위가 해체됐다고 하는데 경찰청에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라고 물었다. 내 질문에 뼈가 있는 것 같아서인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김 사무총장은 총경에게 “반민특위 해체가 아니라 친일 경찰이 무력을 행사한 폭란"이라고 밝혔다고 강조했다.
“총경에게 내가 반민특위가 해체됐다는 역사는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해체된 것이 아니라 친일 경찰들이 쳐들어와 무력으로 파괴시킨 것이라고 했다. 국회에서 제정한 반민법에 따라 진행한 반민특위의 합법적 활동을 파괴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법에 따라 설치된 반민특위가 멀쩡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무력으로 들어와 각 지방에서 온 고발장과 서류 등의 탈취는 물론, 직원들을 구타하고 파괴시켰다.”
김정육 사무총장은 49년 6월 6일 경찰이 반민특위 습격을 했는데, 이전인 5월 말경 이승만 대통령이 부친인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만났다고도 했다.
“부친을 만난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경찰 노덕술 등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부친께서는 거부했다. 그 이후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습격을 했다.”
그는" 이승민 정권에서 친일경찰과 짜고, 반민특위를 파괴시킨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반민특위를 해체하려면 의회에서 수순을 밟아 해체해야 했다. 반민특위는 친일경찰에 의해 파괴시킨 게 정확한 대답이고, 법 질서 파괴행위이다. 이승만 독재정권에서 친일경찰과 짜고 한 것이다. 설령 경찰청의 의지로 한 것이 아니라도 반민특위로 피해본 유족들이 있으니 경찰을 대표한 경찰청장이 사과해야 한다.”
▲ 지난 3월 25일 기자(김철관 한국인터넷기자협회장, 좌)와 만나 대화하고 있는 김정육 광복회 사무총장(우)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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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는 국회를 통과한 반민법에 따라 50년 6월 20일까지 운영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49년 6월 6일 반민특위를 습격을 한 후, 자유당이 의회 다수당이란 이유로 밀어붙여 49년 8월 31일로 기간을 단축시켜 반민특위를 해체했다.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이후, 20여일 만인 26일 김구 선생이 안두희에게 암살됐다. 반민특위가 일제 강점기 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 조사 대상은 약 7000여명으로 알려졌고, 이중 10%도 되지 않은 682건을 조사했고 221건을 기소한 상태였다.
그럼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 사무총장의 부친 김상덕 선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정운현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이 인터넷 언론 <진실의 길>에 2017년 8월 9일 기고한 ‘김상덕 반민특위원장 아들 김정육 선생’이란 제목의 글을 인용해 본다.
“김상덕 선생은 1891년 경북 고령 출생했다. 1919년 도쿄 ‘2.8독립선언’을 주도했고, 이듬해 상해로 망명해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문화부장 등을 지냈다. 해방 후 고향인 경북 고령에서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2년 뒤 한국전쟁 때 다른 요인들과 함께 납북됐다. 1956년 평양에서 타계했고, 현재 평양 교외 재북인사묘역에 안장돼 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됐다.
그의 슬하에 1남 1여를 뒀다. 부친이 납북되자 두 자녀는 천애 고아가 됐다. 아들 김정육 현 광복회 사무총장은 경남 합천 외삼촌댁에 의탁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고학을 하며 대학을 겨우 졸업했지만, 취업이 되질 않았다. 납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연좌제에 걸려 번번이 낙방을 했다. 취업이 다 됐다가도 ‘김상덕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쫓겨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