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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kDoo의 소름돋기] 프릭스
비정상적 지배계급은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지배하나
 
김정곤   기사입력  2003/09/06 [09:46]

▲프릭스 포스터     ©프릭스 제작사
토드 브라우닝의 프릭스는 최초 공개 이후 30년간이나 상영금지라는 창작물에 관한 한 사형선고라 할 수 있는 처분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영화가 그런 과도한 처분을 받아야 했을 만큼 급진적 이었을까요 또는 위험했었던 걸까요.

1932년에 등장한 이 영화는 실재 "기형인들을 통해 정상인의 위선과 오만을 파헤쳤다" 라고 후대에 평가 받고 있지요. 하지만 단지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상영 금지라는 과처분을 받은 건 아닐 겁니다. 1932년이면 영화의 형식이 거의 완성됐던 시기였지요. 그와 함께 아직은 영화라는 매체의 낮 설음을 감지 할 수도 있던 시기이지요. 당시까지 지배 계층의 오락거리는 역시 영화보다 품위가 있어 보이는 연극(일반인들의 위한 연극과는 그 규모와 내용이 틀린)이나 대규모 뮤지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이에 반해 일반인들의 오락거리는 영화나 소규모 연극들(상당히 잔혹한 내용들과 상황을 많이 다루었던) 그리고 유랑 곡마단이 있겠습니다. 특히 유랑 곡마단의 경우 위험천만한 기예들과 함께 가장 많은 볼거리를 이루던 것이 바로 기형인들의 쇼 였었지요.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이나 샘 레이미의 다크맨에서 리암 리슨이 광기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죠(다크맨에서의 놀이공원 씬은 엘리펀트 맨의 장면을 인용 하면서 전체 기형인(괴물)을 다룬 영화들을 페러디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현재 인식하고 있는 우리들의 정상성을 벗어나는 모든 생물체들을 볼거리 또는 위해한 생물체로 다루면서 그들을 격리 또는 말살 해야 한다는 관념을 은연중에 모두에게 심어놓게 되는 겁니다. 사실 토드 브라우닝의 프릭스에서는 이러한 기존의 관습을 뒤엎지는 못합니다. 다만 정상인의 이기심, 위선과 탐욕을 폭로하며 그들 또한 충분히 비정상인에게 위협을 당할 수 있다고 경고 하고 있을 뿐이죠. 아마도 이 영화는 토드 브라우닝이 어렸을 적 몸담았던 유랑 곡마단의 식구들에게 바치는 영화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고를 가득 담은 덕분에 이 영화는 오히려 세상에서 버림 받아 버리고 말았던 거죠.

그럼 왜 이런 단순한 경고에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기겁을 해야 했던 걸까요.

▲프릭스에 등장하는 기형인들. 지배계급은 비정상인들을 사회모순의 탈출구로 활용한다     ©프릭스 제작사
영화 ‘울프 걸’에서는 "기형인들 은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그들은 평생 그들의 방에서 지내야 한다" 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일반인(관습적인)의 관점에서 비정상인은 공포스러운 존재라기 보다는 혐오스러운 존재에 가깝습니다. 또한 열등한 존재로도 인식하지요. 아마도 당시의 사람들은(상영금지 시켰던) 이런 혐오스럽고 열등한 존재들에게 경고를 받는다는 걸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되길 꿈꿨던 야수의 이야기인 울프 걸(결국 인간의 육체에 야수의 심성을 얻고 맙니다)이나 괴물에 육체에 괴물의 심성을 받아 들이는 다크맨은 정말이지 탁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건 정상인(지배계층)의 인식이 아닙니다. 그들이 두려워 하거나 역겨워 했던 건 위험한 괴물로 날조된 비정상인들 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도시의 뒷골목을 전전하거나 유랑곡마단의 낡아빠진 포장마차에 실려 이리 저리 헤매던 그들의 생경한 외모를 혐오스러워 했던 것이지요 지배계층에 의해 만들어지고 가공 되어진 인식은 케리나 다크맨에서처럼 비정상인을 뒤틀린 의식의 소유자로 인식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때문에 당연하게도 비정상인은 사회의 규제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문명의 발생 이후 개인의 다양성은 수없이 억압 받아 왔었습니다. 부족국가 시절부터 왕권 정치 시절을 지나 자본주의라는 극도로 개인적인 사회로 세상은 계속해서 변화해 왔습니다. 하지만 변화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지요 그것은 지배계층의 인식입니다. 지배를 위해 필요한 요소 중 하나가 집단의 시각을 하나로 묶어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집단의 행동 양식이나 가공된 외형에 관한 혐오감을 조성하는 것이지요. 이는 지배계급이 다른 집단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 자신이 소유한 집단을 하나로 모으는데 아주 좋은 구실을 만들게 됩니다. 우리와는 다른(비정상적인) 무리들의 위협을 당연히 모두가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심어지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비정상성에 관한 인식은 점차 그 폭을 넓게 합니다. 장애인, 동성애자, 양성애자, 유색인들 그리고 여성으로 까지 말이죠.
 
▲프릭스의 한 장면     ©프릭스 제작사
지배 계급은 언제나 차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아무런 도움이 안될 뿐더러 오히려 그들의 지배 체제에 상당한 위협을 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배 계급의 대부분이 폭력의 우위를 점하는 남성들이라는 데 이유가 있습니다.

 장애인-> 동성/양성애자-> 여성-> 유색인-> 쓸모 없는 남성

위의 진행식은 억압의 순서 입니다. 또한 쓸모 없는 남성을 제외하면 인권회복 역순서 이기도 합니다. 가장 폭력을 행사하기 쉬운 순서로부터 억압이 점점 이루어져 갔다고 볼 수 있지요. 또한 여성을 제외하고는 영화 내에 등장하기 시작한 역순이기도 합니다 프릭스가 1960년이 지난 후에야 개봉된걸 감안하면 말이죠.
 
그럼 왜 이런 억압이 일어 났을까요.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인식은 전환을 맞이하게 됩니다. 정상과 비정상이 아니라 나와 너 우리와 그들...그들의 행동과 성향을 규정된 틀 속에서 보는 게 아니라 좀더 다양한 사고 속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사이에 잘못된 구조들을 파악하게 되고 그 잘못된 구조와 틀을 깨트리기 위해 약자들은 한데 모이게 됩니다. 아무리 약자들이라도 한데 뭉치게 되면 충분히 지배계층/기득권을 위협하기에는 충분하죠. 또한 이러한 기능들은 사회를 재편하는데 충분한 힘이 되고도 남습니다.
 
지배계급/기득권 층은 이러한 것들이 두려운 것이지요

1932년 영국에서 프릭스가 개봉 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한편의 영화가 세상을 바꾸기는 거의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새로운 담론이 형성되고 그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 갔더라면 사회 약자에 대한 인권 회복이 좀더 빠르게 이루어 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정상성들...사회의 기준이 되고 있는 정상성들이 과연 모두를 위한 정상적인 판단 하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는 사실 분별하기가 그리 쉽지 않지요 하지만 지배 이데올로기의 대책점을 제시하는 데는 다양성의 올바른 인식이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이겠습니다.

* 필자는 '영화평론가'를 지망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앞으로 '공포영화'와 사회적 맥락을 함께 잡는 그로우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필법(?)으로 대자보 독자들을 즐겁게 만날 것입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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