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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배타적 독선, 다원주의로 풀자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구약성서에 나타난 다원주의, 요나서 다시 읽다
 
류상태   기사입력  2006/01/11 [08:02]
요나서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다원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많다. "다원주의" 하면 곧 "이단"이 된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다원주의자"로 한번 찍히면 매장이 되었다. 감리교 신학대학 학장이었던 변선환 목사님이 다원주의자로 찍혀 교단에서 축출되고 학교에서도 쫓겨난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한국 교회가 진화되어 도달하지 않으면 안될 하나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배타적 신념체계로는 다원화된 사회에서 수많은 갈등을 양산하여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자기 분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편협하고 독선적인 배타적 신앙으로는, 진리의 길을 함께 찾아가야 할 아름다운 이웃 종교, 이웃 문화와의 공존은 커녕, 사회에서 왕따를 당해 존립 기반마저 흔들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는 사해동포주의와도 통한다. 인터넷 채팅 등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지구마을에서, 모든 인류가 서로 화합하고 평화를 누리는 '지구마을 사람들'로 함께 살아가려면, 다른 신념 체계, 다른 문화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신념체계를 인정하지 않고는 나도 살 수 없다"는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해묵은 것이다. 개신교 이외에는 거의 모든 종교가 이미 도달한 것이기도 하다. 어느 종교가 자기만 절대 진리를 갖고 있다는 과대망상증에 젖어 있는가. 유일신 종교 삼형제 가운데서, 유대교나 이슬람교도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믿지 않으면 다 지옥에 간다" 식의 무모한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다.

천주교도 40여년 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배타주의 신앙을 극복했다. 오랫 동안 개신교 국가들로 자처해왔던 북유럽에서도 이런 식의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원시 신앙은 극복된 지 오래다. 오로지 영국 일부와 미국, 그리고 한국의 개신교만이 아직까지 2000년 전의 야만적인 신앙을 그대로 갖고 있다.

그나마 미국에서도 한국과 같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근본주의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전체 개신교인의 30∼40%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거의 80∼90%에 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배타적인 신앙이 옳다고 믿고 있다.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인 셈이다.

다원주의를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는 답답한 개신교도들은 성서를 절대 무기로 내세운다. 그러나 성서에는 배타주의와 포용주의 내지는 다원주의의 치열한 이론 공방이 산재해 있다. 구약성서의 요나서를 예로 들어보자.

요나는 기원전 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큰 도성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라는 신탁(신의 명령)을 받는다. 요나의 예언을 들은 니느웨 사람들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고, 그들의 진정한 회개를 보신 하느님은 니느웨를 용서하기로 한다.

원수의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보고 신이 나서 신의 심판을 예언했던 요나로서는 김이 빠지는 일이었다. 그는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멀리 나시스로 배를 타고 도망갔다.

그러나 신의 손길을 피해 어디로 가겠는가. 하느님은 폭풍과 해일을 보내 요나의 퇴로를 차단(?)했고, 선원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커다란 물고기에 삼켜진 요나는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서 회개하고, 드디어 하느님은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토해내게 하여 니느웨에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게 한다.

한국 교회에는 아직도 요나서를 기원전 8세기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찰떡같이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요나서는 사해동포주의 사상에 입각해 기원전 2세기에 쓰여진 위대한 문학작품이다.

요나서의 저자는, 솔로몬 이후 무너지기 시작한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에 철저히 유린당하는 비참한 꼴을, 그리고 그 이유를 냉철하게 꿰뚫어보았다.

그는 자원과 지리적 한계를 넘어서기 어려운 이스라엘 민족이, 오로지 “신은 우리 편”이라는 배타적 신앙으로 무장하여 문화 정치적 쇄국주의로 일관하는 한, 다원화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처절하게 인식하였다.

당시 세계는 그리스의 알렉산더에 의해 국가 간의 문화적 장벽이 제거되어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로마라는 신흥 강대국이 지중해 서편을 평정하고 그 세력을 팔레스틴 지방으로 서서히 뻗치고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살길은 국수적 배타주의를 넘어 사해동포주의로, 다원주의로 가는 길 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이런 깨달음은 이미 ‘제2 이사야’를 필두로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론 포로기에 시작된 혁신운동으로, 그 맥을 타고 잔잔히 이어져온 예언자 전통의 한 흐름이었다.

그런 "깨어있는 하느님의 사람들"이 기원전 2세기에도 나타나 여러 문학작품을 낳았다. 그 중 다니엘서는 여전히 유대민족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묵시문학으로, 요나서와 욥기 등은 기존 신학의 탈피를 요구하며 실존적, 다원적 신학으로의 진화를 요구하는 혁명적인 작품으로 나타났다.

요나서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제 우리는, 이웃민족은 모두 저주받을 민족이며 오로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 사랑하고 구원하신다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신앙과 신학을 넘어서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토록 미워하는 원수 나라들, 그들까지도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우리 유대인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전 인류의 하느님이시다. 그 사실을 깨닫지 않은 한, 우리 민족의 살길은 없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당시 유대인들이 공유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요나서의 저자는 대놓고 이런 주장을 할 수가 없었다. 잘못 하다가는 길거리에서 맞아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통과 교리로 철저히 무장한 교리주의자들은 그런 ‘이단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나서의 저자는, 다원주의로, 사해동포주의로 가야만 이스라엘 민족이 살 수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먼저 이스라엘 민족이 가질 수밖에 없는 거부감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문학 작품으로 전하기로 했다. 마치 김홍신이 <인간시장>에서 전두환 일파에 의해 벌어지는 기가 막힌 일들을 “권총찬” 혹은 “장총찬”이라는 이름으로나마 알리고 싶어했듯이...

요나서는 기원전 2세기, 급변하는 세계에서 눈먼 장님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민족의 눈을 뜨게 하려는 진보 지식인의 치열한 고뇌를 담고 있다. "제발 눈을 떠라. 배타적 민족주의, 독선적 신앙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위대한 신의 사랑을 어찌 한 민족이 독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2천년 동안 기독교의 맥을 이어온 ‘문자주의’ 신학은, 이 위대한 요나서마저 ‘문자’ 안에 가두어 버렸다. 골수 기독인들은 상징과 비유를 ‘뜻’으로 읽지 못하고, 여전히 ‘문자’로 읽고 있다. 사람이 실제로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뿐만 아니라, 요나서야 말로 예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한 사건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종교가 갖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소개, 우리 사회에서 종교가 빚어낼 수 있는 갈등을 극복하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류상태 선생의 '세계 종교의 문을 열다'     © 인물과 사상, 2005
사람이 물고기에 삼켜진 채로 물고기의 내장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 또한 사흘만에 토해져서도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자연 상태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이 개입하시면 그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진실로’ 믿고 있다. (이런 이런∼!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짓궂은 마술사 수준인 게로구먼.)

골수 기독교인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그네들은 하느님을 진실로, 세상을 질서와 조화 속에 창조하신 분, 자연에 법칙을 부여하신 분이라고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왜 그 하느님은 그렇게도 자주 자신이 만든 자연법칙을 스스로 깨뜨리는 것인가? 그것은 하느님 마음이라고? 우린 그냥 기록된 대로 믿기만 하면 된다고? 오호, 통제라...

그래서 어느 사회학자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람이 종교를 가짐으로 해서 받을 수 있는 불행 중 가장 큰 것은,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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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1/11 [08:0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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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사와사랑을 2006/01/16 [13:33] 수정 | 삭제
  • 하나님을 지식으로 인간의 생각대로 따지는것 부터가 잘못이다.

    다원주의든 일원주의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그 분께서 직접 말씀하실것이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

    기도하고 무릎 꿇어 하나니이 계신지 계시다면 응답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라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면 성경이 진리인지 교회나 목사들이 하는 설교가 왜 필요한지 직접 경험해 나가면서 배워야 한다.

    요나의 일이 거짓이고 소설일 뿐이라고?

    하나님의 기적중 아주 작은 한 부분일뿐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걸 경험하면 그런소리 절대로 할수 없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니까 다원주의 독선적 어쩌고 저쩌고 떠들고 있는데

    하나님을 만나보면 모든걸 알게 될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앎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올자가 없느니라"

    "천지 만물에 나 외에 다른 이름을 너희에게 준 일이 없느니라"

    "나 외에 다른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사람이 기도한다는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가정을 해야한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혹시 계실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존재하시니까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 간절히 찾아야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너희집이 구원을 얻으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