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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조 망언’의 시대, 공병우를 회상함
[논단] 겨레의 참 스승 공병우 박사의 정신과 삶은 한국병의 치료제
 
이대로   기사입력  2005/03/07 [10:42]
  우리의 스승이고 국어운동 선배이신 공병우 박사가 이 땅을 떠나신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돌아가신 다음 해에 여기 한글학회에서 기리는 모임을 한번 가지고 9년 동안 한글단체 차원에서 추모식을 하지 못하고 10년이 훌쩍 지났다. 한글문화원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일한 사람끼리는 해마다 만나 추모하는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안타깝고 아쉬웠기에 10주기가 되는 올해는 나라에서 10월 문화인물로 지정해 좀 더 크게 추모식을 하고 온 국민에게 공 박사의 정신과 삶을 알리고 싶었는데 그도 안 되었다.  이 자리를 마련하고 함께 모이신 여러분께 큰 절 올린다.

  요즘 힘센 나라의 돈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쥐고 뒤흔들어 나랏말이 흔들리고 나라살림이 어렵다. 나라와 겨레의 앞날이 밝지 않고 불안하다. 공병우 박사님의 삶 속에 나라가 잘 되고 우리가 잘 사는 길이 있다고 본 사람으로서  온 나라 사람들에게 공박사의 정신과 삶을 알려주고 본받아 이 어려움을 이겨내자고 외치고 싶다.
 
공병우 식 삶은 한국병 치료약이다
 
  이 나라 최초의 안과 전문 개업의로서 돈 잘 버는 의사 일보다, 돈만 쓰는 타자기 발명과 보급에 힘쓰시고 한글 기계화 연구와 한글사랑 운동에 몸바친 공병우 박사님은 선구자, 선각자였고 애국자였으며 성직자 못지 않게 남을 위해 살다 가신 참사람이었고 참 한국인이었다. 이름난 고집쟁이로서 철저히 내 식대로 살다 가신 분이지만 자기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과 나라를 사랑한 분으로서 많은 한국인들이 오래오래 기억하고 본받을 점이 많은 큰 어른이셨다.

  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모두 그렇게 살면 이 나라엔 아무 어려움이 없고 볼같이 일어날 것이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과학 등 온갖 사회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와 길이 공병우식 삶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생 때부터 국어운동을 하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 길에서 훌륭한 선생님과 선후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보람 있었다. 그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준 훌륭한 분들 가운데 공 박사를 만난 것은 더 큰 영광이고 기쁨이었다. 공 박사의 삶과 정신 속에 오늘날 여러 한국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보기에 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살펴보겠다.
 
1. [교육 문제] 스스로 공부하고 실천하는 분이었다.
 
  선생님은 이름난 안과 의사요 의학 박사인데 학교 졸업장이 없는 분이다. 스스로 공부해야겠다는 걸 깨닫고 독학으로 공부를 해서 상급학교 입학할 자격시험을 따냈고 박사 학위까지 받은 분이다. 그래서인지 학력과 간판보다 성실성과  사람 됨됨이를 더 중요하게 보셨다. 일류대학을 나왔다던가 높은 직함을 가진 사람에게 필요이상으로 굽실대거나 더 우러러보지 않았다. 오늘날 학력과 간판을 따려는 공부, 시험 점수를 잘 받으려는 점수 따기 공부가 아닌 실제 사는 데 필요한 공부를 스스로 열심히 하고 일터에서도 몸바쳐 일하는 사람을 더 좋게 보았다. 모르는 건 어린아이에게도 물어서 배우려 하셨고 배우려는 사람에겐 당신께서 아는 걸 모두 가르쳐 주시려 했다. 그런 뜻과 정신 속에서 국문과 출신인 박흥호 선생을 제자로 불러 셈틀 전문가가 되는 길을 열어 주었고 님의 품안에서 아래한글이 태어나게 했다.

  오늘날 이 나라에 좋은 대학에 가서 저만 출세하고 잘 살겠다고 난리법석을 떠는 풍조는 교육 망국 병이라고 할 정도인데 공 박사 정신과 삶을 배우고 따르면 모두 치료가 될 수 있다. 자식이 좋은 대학에 못 갔다고 애타고 있는 분이나 교육 정책담당자는 공 박사의 삶을 눈여겨보면 좋겠다. 간판 따기 공부와  강요된 억지공부가 아닌 바로 쓸모가 있는 공부, 스스로 공부하는 교육 환경을 만들고 돌아가실 때까지 실천하셨다. 평생공부란  말이 있는 데 이분의 삶이 바로 평생공부 실천이었다. 외국에 갔다오면 혀가 꼬부라지고 반 외국인이 되지 않고 더 참된 한국인이 되고 그 곳에서 좋은 것을 보고 배운 것을 많은 이에게 가르치고 우리 문화 창조에 이용했다.
 
2. [경제 문제] 돈을 아껴 쓰고 꼭 써야 할 곳에 값있게 쓴 분이었다.
 
  선생님은 일제가 물러 간 뒤 서울에서 네 번째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돈을 많이 번 분이었다고 한다. 이 분이 돈을 잘 번 건 부지런히 일하고 연구하여 눈병을 남달리 잘 고쳤고 온 나라에 그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공부를 하고 실력을 갖추고 꼭 해야 할 일을 하면 돈도 잘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남다른 생각으로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하는 그 바탕에서 돈이 굴러온 것이다. 남다른 제품이나 음식을 만들면 잘 팔리고 소문이 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보여주셨다. 개인 장사도 회사의 수출도 이 원리는 똑 같다.

  그런데 선생님은 돈을 한없이 벌려고 발버둥치거나, 번 돈을 당신만 좋게 쓰려고 하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베풀었다. 한마디로 돈을 값있고 알뜰하게 잘 썼다. 한글을 온 국민이 사랑하고 즐겨 쓰면 모두 더 잘 살 수 있다는 걸 깨닫고 그 길에 번 돈과 힘을 바치셨다. 속도 타자기를 발명하고 그것을 보급하는 일을 열심히 한 것도 온 국민이 똑똑하고 잘 사는 길, 이익 되는 길을 열어 주려한 것이다. 단군 임금의 홍익인간정신,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드신 정신과 통하는 것이다. 한글을 잘 이용하면 우리 경제가 일어나기 때문에 잘 사는 길을 열어주려고 한글운동을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에게만 좋은 일엔 돈을 아끼셨다. 옷도 신발도 헤져 못 쓸 때까지 쓰셨다. 아흔 살이 다 된 할아버지가 군대 야전병원에서나 볼 수 있는 딱딱한 나무 침대, 냉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시멘트 사무실에서 스스로 고구마를 쪄서 점심으로 때우며 연구를 하시는 모습은 눈물겨웠다. 훈장을 타실 때도 평상복으로 가셨다.

  다른 사람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돈을 많이 번 사람들, 저만 잘 살겠다고 온갖 부정한 짓을 하는 기업가들, 피땀어린 국민의 세금을 멋대로 쓰는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배우고 본받으면 나라살림이 더 좋아질 것이다. 돈을 깨끗하게 잘 벌고 알뜰하게 잘 쓰는 모범을 보인 참된 경제인이었다. 경제는 열심히 일하고 알뜰하게 살림을 하면 좋아진다.
 
3. [사회 문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베푼 분이었다.
 
  공 박사가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고 돈을 쓴 분임은 잘 알려져 있다. 눈이 아프거나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고쳐주고 돈을 벌었기에 번 돈을 그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천호동에 맹아학교를 만들고 장님을 위한 타자기를 만들고 공부도 시켜주었다. 50년대인가 미국에 갔을 때 가족이나 자식에 줄 선물은 하나도 사오지 않고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흰 지팡이를 많이 사 가지고 와 보급한 일은 그 분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는 일이다.

  자신은 헌 옷을 입고 다녀도 한글단체나 민주화운동단체 들에 성금을 내시는 데는 아끼지 않으셨다. 한겨레신문 창간 때도 미국에서 어렵게 살면서도 기쁘게 참여하셨다. 어떤 사람은 공병우 박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데 인정이 넘치는 분으로서 어려운 사람이나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도우려 하고 고마워하시는 분이었다.

  민주화운동과 사회개혁을 하다가 감옥에 가고 목숨까지 바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고마워하고 이 나라는 희망이 있는 나라라고 하셨다. 예식은 낮에 하지말고 밤에 하자고 하고,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 장례식도 하지 말라고 하셨고 당신의 육신을 의학도 실험용으로 바치셨다. 할 일은 많은 데 죽을 날이 가까워짐이 안타까워서 친구를 만나거나 다른 이의 장례식, 결혼식장에 가는 시간도 아끼셨다. 반포에 있는 집에서 출근하다보면 길도 막히고 시간을 낭비한다고 사무실에서 자면서 일했다. 88살 할아버지가 날마다 피시통신에 글을 올리셨다. 70살만 되어도 노인정을 기웃거리고 공원에서 빈둥대는 분들이 많은데 님은 그렇지 않았다. 당신이 아는 걸 많은 한국인에게 글로 알려주려고 애쓰셨다. 그 삶과 생활 방식 속에 교통문제, 노인복지문제 해결책도 있다.

  가족과 자신에겐 가혹할 정도로 아꼈지만 사회와 어려운 사람을 위한 일엔 아낌없이 주셨다. 그리고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으셨다. 생색내고 거드름 떨지 않으셨다. 장기 기증, 유언장 쓰기, 허례허식 안 하기, 헛돈 쓰지 않기, 어려운 사람 도와주기, 시간 아끼기, 자동차 덜 타기, 철저한 건강관리 들을 실천했다. 일반 세속에 살았지만 절의 스님이나 성당의 신부처럼 성스럽게 사셨다. 뜨겁게 멋있게 사시다가 깨끗하게 가셨다. 힘있고 돈 많은 사람들, 정치인과 경제인, 언론인과 학자들이 공 박사의 정신과 삶을 본받고 따라하면 사회가 많이 밝아질 것이다. 저만 알고 제 이익만 챙기는 사람들이 판치는 이 세상에 공박사의 삶은 교훈이고 빛이다.
 
4. [문화 문제] 앞서가는 사람, 새 길을 만들고 가는 분이었다.
 
   님은 자주문화 창조자였고 선구자요 선각자, 개척자였다. 님이 한글을 사랑하고 한글타자기를 만들고 온 국민에게 한글과 타자기를 즐겨 쓰자고 한 것도 자주문화를 꽃피려는 뜻에서 한 일이다. 남보다 먼저 한글이 훌륭함을 깨닫고 그 장점을 살리고 잘 이용하게 했다. 보통사람보도 20년은 앞서 가다보니 외롭고 힘들었을 뿐이다. 나이는 80살이어도 마음과 하는 일은 20살 젊은이였다. 님은 멀리 앞을 내다보고 일을 하고 앞서가는 데 보통사람들이 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따라가지  않으니 힘들고 답답해 하셨다. 또래의 노인들이 한자만 숭배하고 한글은 천대하니 기계화로 증명하려 힘쓰셨다.

  님은 “우리 한글은 금이고 영문 로마자는 은이고 일본글자 가나는 동이고 중국 한자는 철이다. 우리가 한글을 잘 이용하면 한자를 쓰는 중국과 일본은 말할 거 없고 미국보다 더 잘 살고 자주문화가 꽃필 수 있다”고 침이 마르게 한글사랑을 강조하셨다. 그 말은 맞았다. 우리가 지금 정보통신, 인터넷강국이 된 것도 한글 덕이고 님은 그걸 알고 터를 닦으셨다.

  또 님은 과학기술과 발명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그걸 우습게 여기는 풍토, 우리 문화를 깔보는 세상을 안타깝게 여겼다. 한글이 한자나 로마자에 비해 과학성이 뛰어나기에 훌륭한 것이고 이 한글을 잘 살려 쓰면 우리 문화가 엄청나게 발전하는 데 그걸 모르니 가슴아파했다. 연필로 쓴 편지보다 타자기나 셈틀로 쓴 편지를 더 좋아하고 꼭 답장을 하셨다. 새로운 문화창조에 실천이 중요함을 강조하셨고 그에 철저하셨다. 신문기자나 취재를 와서 한자 명함을 내놓았을 땐 그의 물음에 답하기보다 그 잘못을 침이 마르게 설명하는 데 시간을 다 보내기도 했다.

   과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과학자라 불러주는 걸 가장 좋아하셨다. 신문에 과학 기사가 나온 날 내게 전화로 “ 이 선생이오. 오늘 신문 보았오. 아 글쎄 우리의 과학지수가 수십 등이라오. 그러니 한글이 천대받고 나라가 어렵지요. 정치인이나 학자가 과학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아야 하는 데 큰 일이오.”라고 걱정하시는 말씀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 하다. 내가 1992년에 여성동아 청탁으로 공박사에 대해 쓴 글을 쓴 일이 있는데 “공병우 박사는 과학자요 발명가다”라고 쓴 것을 보고 “나를 과학자라고 본 사람은 이 선생뿐이오”라며 기뻐하고 좋아하셨다.
 
5. [나라 문제] 겨레와 나라를 끔찍하게 사랑한 분이었다.
 
  님은 책상 앞에 “한글 사랑, 겨레 사랑, 나라 사랑”이라고 큼직하게 써 놓고 일하셨다. 마치 학생이 공부할 때 “ 필승, 성공” 등 자기의 다짐과 바람을 써놓고 공부하듯 말이다. 그런데 시간을 돈보다 더 아끼고, 한글 기계화 연구와 발전에 몸 바친 게 모두 자기만 잘 살고 편하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온 겨레와 나라가 잘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말로는 나라와 겨레를 사랑한다면서 자기 출세와 이익을 보려고 발버둥치거나 나라의 돈까지 떼먹는 사람들과는 근본이 다른 분이었다. 자주화, 민주화, 개혁을 외치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니 거드름이나 떨고 진짜 자주, 민주국가로 가는 첫걸음이고 참된 개혁인 한글 세상은 만들지 않고 한자와 영어 조기교육과 영어 공용화나 지껄이고 기러기 아빠를 만드는 이들과는 사상과 인물됨이 다르다.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할 때도 자기만 출세하고 돈벌려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우리 국민과 나라에 도움이 될까 생각하고 머리를 싸매고 연구하고 공부한 뒤 돌아와서 꼭 실천했다.

  외국에 가보니 눈먼 장님에게 흰 지팡이가 좋겠다는 걸 깨닫고 사다가 보급하고, 엠블런스를 보고 그걸 수입해 전국을 돌며 이동병원을 차리고 무료 진료를 하고, 콘텍트렌즈를 보고 와서 최초로 만들어 보급하고, 공병우가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며 부뚜막이 없는 입식부엌으로 바꾸고 화장실을 집안에 만들고, 셈틀 글짜꼴을 만든 일들이 모두 자신만 좋자고 한 게 아니라 먼저 깨달은 사람으로서 온 국민이 함께 잘 살자고 한 일이었다. 

  외국의 좋은 것은 배워 우리 것으로 만들려 하고 우리의 자랑스런 것은 더욱 발전시키려 했다. 안과학은 외국인이 발전시키고 그걸 우리가 배우면 되지만 한글을 갈고 닦는 것은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안과 공부나 돈버는 병원 일은 하지 않고 한글기계화 연구와 한글운동을 한 것이다.  남의 글자 한자세상을 우리 글자 한글세상으로 만드는 게 가장 큰 개혁이고 좋은 세상 만들기임을 깨닫고 실현하려고 발버둥 치셨다.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과 한글세상을 만들려 힘쓴 공병우 박사는 참된 개혁자였다. 이런 분을 정치인, 과학자, 언론인은 말할 거 없고 온 국민이 알아모시고 기리지 않으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고 본다.
 
  말글은 총칼보다 강하고 세다.
 
  백범 선생도 우리나라가 정치 군사강국이 되는 것보다 문화강국이 되길 바란다고 하셨다. 공 박사도 “말글은 총칼보다 강하고 세다”시며 우리나라가 우리말글을 잘 갈고 닦아 쓰면  잘먹고 잘 사는 힘센 문화국가가 된다고 믿었다. 한글이 세계에서 으뜸가는 문화창조 연모요 문화경쟁 최신 무기이니 이를 잘 이용하자고 외치셨다. 그래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하자고 했고 신문도 책도 한글로 만들자고 하셨다. 살아있는 우리가 이어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제정하고 한글세상을 만들어  우리 후손은 우리 말글로 자주문화를 창조해 잘 살게 해야겠다.

  한글은 셈틀과 찰떡 궁합이니 한국인들이 셈틀로 한글을 잘 쓰면 자주문화도 꽃피고 한글운동도 잘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당신 생전에 이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과 온 국민에게 그걸 알려주고 한글 꽃이 피는 걸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 일이  매우 큰 일이어서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돌아가실 날은 가까워지는데 세상은 더 거꾸로 돌아가니 힘들어하셨다. 그새서 돌아가시기 전 해인 1994년 나를 불러 “나는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른다. 빨리 셈틀 글쓰기를 배워 전자통신으로 국어운동을 하라. 네가 셈틀을 배우고 글을 쓰면 잘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 부탁이다”시며 나를 삼청동 박사님 댁으로 오라고 하셨다.

  나는 더 이상 거역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무척 더운 여름날 밤 11시부터 12시까지 삼청동 댁으로 찾아가 님으로부터 셈틀 글쓰기와 전자통신 하는 법을 배웠다. 독수리 타법으론 안 된다며 내 손가락을 잡고 건반을 두드리게 하셨다. 눈을 감고 글을 쓰게 하셨고 진짜 한글운동을 잘 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병원에 입원하시고 그 다음 봄날 이 세상을 떠 나셨다. 나는 님이 돌아가신 다음날 피시통신에 가입해 “청개구리 이대로, 오늘부터 님의 뒤를 어어 죽을 때까지 국어독립운동을 하겠으니 편히 쉬소서”라고 첫 글을 올리고 오늘까지 전자통신으로 국어운동을 하고 있다. 다시 한번 죽는 날까지 님의 가르침과 뜻을 이어갈 것을 다짐한다.

  내 년이 공 박사님이 이 땅에 오신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새해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알 수 있는 추모행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떤 이는 당신에게 당장 이익이 되지 않는 운동을 하는 선생님을 어린애처럼 세상도 모르는 어수룩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나 석가 같은 성인의 모습을 느낀다. 님은 우리 겨레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서 한글이 살고 빛나야 한다고 생각해 그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불살랐다. 마치 촛불이 제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히듯이 말이다. 우리가 딴 나라에 짓밟히지 않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기 바라는 분이나 남북이 하나가 되고 참된 문화강국이 되길 바라는 분은 함께 국어독립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이 글꼴은 공박사님이 만드신 글꼴이다. / 본지 고문
 
* 필자는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입니다.
 

[알림] 공병우 박사 10주기 추모 모임   

 
  반갑습니다.
  한글 기계화의 선구자이자 한글 운동가이신 공 병우 박사께서 이 땅을 떠나신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공 병우 박사는 오늘날 우리가 정보통신 강국이 되는 기초를 닦은 분이고 그 분의 삶은 우리 겨레뿐만 아니라 온누리의 사람들이 배우고 본받아야 할 표본이 되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글의 기계화와 정보통신의 이기를 잘 이용하고 있으면서도 그 동안 우리 삶에서 그 분을 잠시 잊고 살지 않았나 하는 자책을 합니다.

  조금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 분의 삶을 떠올리며 그 분의 뜻에 따라 시간과 돈을 아끼고 기계 통신을 최대한 이용하여 조촐하게 추모식을 갖고자 합니다. 그래서 한글 학회와 한글 문화원에서는 공 병우 박사가 돌아가신 지 10돌이 되는 2005년 3월 7일에 공 병우 박사의 정신과 업적을 되새기고 기리는 모임을 아래와 갖기로 하였습니다. 이 날 추모식에는 공 병우 박사와 가까이에서 함께 했던 분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준비하였습니다.

  아직 살갗을 스치는 바람은 차갑지만 봄을 여는 3월입니다. 많이 오셔서 자리를 빛내어 주시고 이 소식을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함께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때: 2005년 3월 7일 (월) 오후 5시
 곳: 한글 회관 5층 강당(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
 행사 내용(사회: 유 운상 한글 학회 사무국장)
 인사말씀: 김 계곤(한글 학회 회장)
 추모말씀: 문 제안(한글집 임자)

 추모 글 발표

      - 한글 기계화 선구자 공병우 박사: 송현(한글 문화원 원장)
      - 아래아한글 탄생과 공병우 박사: 박흥호(고누 소프트 대표이사)
      - 공 병우 박사의 삶과 한글사랑 운동: 이대로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대표)
    * 행사 문의: 02-2217-9658(한글 문화원), 02-738-2236(한글학회)
 
2005년  3월  3일
     한글학회  회장  김계곤
     한글문화원  원장  송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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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3/07 [10:4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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