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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kDoo의 소름돋기] 왼편 마지막 집
베르히만의 '처녀의 샘', 미국 중산층 가부장제의 공포와 조롱으로 개작
 
김정곤   기사입력  2004/10/01 [18:08]

잉그마르 베르히만 60년 작 <처녀의 샘>에서 무지로부터 발생한 방종과 증오로부터 발생한 살인에 대한 구원을 담고 있었지요. 하지만 웨스 크레이븐 S. 커닝햄 그리고 스티브 마이너라는 훗날 슬래셔slasher 영화판을 이끌어갈 이들에게 사실상 구원은 거추장스러운 문제였기에 실화라는 명목 하에 저 유명한 <처녀의 샘>을 끌어 와서 유혈낭자의 복수극으로 환골탈태 시켜 버립니다.

그러니까 근대의 이성이 10년 후 미국의 극단적 자본사회로 넘어왔을 때 이는 현대의 이기로 탈바꿈하는 바, 쇼 비즈니스에서는 구원보다는 수익을 위한 복수극이 더욱 적절했더라는 말이지요. 그리하여 처녀의 샘에서 카린의 죽음과 아버지의 회개로부터 솟아나온 물줄기는 잉태와 생명의 상징으로서의 구원으로 등장하지만 <왼편 마지막 집>에 와서 이미 호수를 이루고 있는 물은 생명을 집어 삼키는 죽음의 이미지로 나타나며, 살인자들의 피를 감추고 씻어주는 죄의 근원을 감춰주는 장막으로 기능합니다.

 

▲왼편 마지막 집 中     ©김정곤
살인과 폭력으로 점철된 도시에서 도피한
콜린우드 家에서 17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메리는 이미 초경은 진작에 지나버렸고 넘쳐나는 육욕(肉慾)에의 갈망은 결국 처녀막을 꿰뚫는 유혈에의 욕망Bloodlust으로 변질되어 마리화나로 거론되는 청춘의 방종에 힘입은 채 살육에 굶주린 아귀들의 입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갑니다. 

이는 비록 처녀의 샘을 기둥 이야기로 삼되 불을 밝히기 위한 영적 여행이 아니라 불을 태우기 위한 육체의 여행으로, 그리하여 처녀의 샘이 이성과 죄의식의 갈피에서 결국에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아냈지만, <왼편 마지막 집>에서는 성폭행에는 과도한 죄의식을 느끼되 살인은 즐거운 놀이로 취급되는 이 이상한 상황을 가져옴으로써 20세기를 관통하며 근대 이성에 내재된 인간심리의 속사정을 무자비하게 파헤친
프로이드를 역사상 최고의 성범죄자로 지칭하기에 이릅니다.

또한, 여성잡지나 뒤적이던 페미니스트 레즈비언은 어머니에게 죽음을, 메리를 강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상징적 아버지는 진짜 아버지에게 죽음을 당하며 메리의 반대편에 위치한 그녀의 도플갱어인 아들은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날려버리며 상류층에 대한 무한한 반감을 드러내던 어리석은 노동자의 동생은 자신의 남근을 먹혀 버립니다.

 

해피한 엔딩 따위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그리고 온통 반동적 내용으로 무장한 이 영화는 그러나 사실은 메리가 죽던 호숫가를 두둥실 떠다니던 부유물처럼 살인과 폭력으로 도배된 거대도시에 살며시 드러낸 단편적 이야기일 뿐입니다. 부유물의 양을 압도하는 퇴적물의 무게는 호수에 가득 찬 물의 두께만큼 절대 외부로 드러나지 않으며 붕 뜬 마음에 머리를 비운 가벼운 퇴적물들이 무게를 잊은 채 가끔 떠올라 호숫가를 더럽히기는 하지만 이네 그들에 대한 적절한 응징은 그들의 뿌리를 잘라내고 가슴을 파해지며 목소리를 끊어버리지요.

 

▲왼편 마지막 집 中     © 김정곤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과 함께 벌어지는 이들의 유혈낭자 극은 그러니까 사실은 너무도 반동적인 이야기를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호수에 담겨진 물처럼 파 헤치지 못하는 미국사회에 내재한 무의식과 중산층의 심리적 불안감을 구원의 반대편에서 다룬 이야기임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중산층 가부장 사회를 뒤업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개를 발로 차 죽이며 짐승 같은 외모를 소유했다는 여성을 입을 통해 난 그냥 여자일 뿐임을 외치게 하며 그녀의 행동을 통해 페미니스트 = 레즈비언이라는 등식을 만들어낸 뒤 어머니라 불리우는 여성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만듭니다. 그것도 목소리가 아주 컸던 그녀의 목을 베어내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데 바로 직전에 이루어지는 또 다른 살해에서 어머니는 남근을 입으로 끊어내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목소리가 외부로 들어나는 걸 차단합니다. 그러니까 메리의 죽음 이후에 단절되듯 갑작스레 반전한 상황에서 보여지는 살해의 행위들은 여성은 제2의 질로 기능하는 입을 사용하며, 아버지는 제2의 남근인 총과 전기톱을 사용해 살인을 자행하지요. 그리하여 여성은 여성의 기능에, 남성은 남성의 기능에 충실하도록 위치 지어진 이러한 장치들은 중산층 가부장제의 무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이렇게 너무도 반동적 내용을 가진 이 영화는, 그러나 끊임없이 화면을 가로지르는 흥겨운 음악들을 통해 이러한 가부장적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무가치한 농담인지를 드러냅니다. 더불어 영화 내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찰들은 결국 닭(멍청이)보다도 무가치한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러한 농담은 영화가 파국에 맞은 직후 아무런 제지도 하지 못한 체 단지 중산층의 살육을 결과적으로는 방조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바, 국가권력이란 쓸모 없는 집단은 중산층의 살육을 막을 힘도 없을 뿐더러 그 원인을 해결할 능력조차도 없음이 밝혀집니다.

 

프로이드를 거론하며 미국인들의 심층을 농담처럼 풀어낸 이 영화 이후 웨스 크레이븐은 80년대에 들어와 자기 비판적인 영화 <나이트메어>를 통해 초기의 소름 끼치는 농담을 너무도 진지하게 그러나 약간의 장난기를 섞어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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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10/01 [18:0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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