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지난 10일 밤 KBS에서 방영하는 ‘인물현대사’에 문익환 목사의 삶과 죽음이 소개되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은퇴해서 여생을 편안히 즐길만한 나이에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투신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재능과 열정을 연소시켰던 위대한 실존을 어렴풋이나마 지켜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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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원로가 아쉬운 시대, 늦봄 문익환 목사가 사무치게 그리운 시절이다. 독서하기 좋은 이때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김형수 시인의 '문익환 평전'을 추천한다. © 실천문학사 |
존경받는 신학자이자 목사로서 목회와 저술에 전념하면서 안온하고 평탄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문익환 목사가 거의 환갑이 다 된 나이에 민주화운동에 몸을 던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참으로 엄혹했던 시기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방북을 감행하게 만든 용기와 결단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수난의 현장에서 언제나 사회적 약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의 아버지였던 그를 이끌었던 동력은 과연 무엇이었나?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그가 누구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설파하던 목회자였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의 벗이었고 그들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이 그에게 끼친 영향력은 실로 지대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의(義)를 구하라고 소리높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의 내면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의 내면을 형성하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가르침은 질곡많았던 한국 현대사의 구비구비에서 그를 민주투사이면서 고난받는 자들의 벗, 그리고 통일운동의 선구자로 변모케 하였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한 후 한국사회는 동토(凍土)의 왕국으로 변했다. 민주주의는 교살당했고 노동자와 농민들의 권리는 철저히 억압되었으며 폭력과 야만이 지배하게 되었다. 누구나 숨을 죽였고 사람들은 서로 눈이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일찍이 헤겔은 "아시아에서는 한 사람만 자유롭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봉건시대도 아닌 현대의 대한민국에서 헤겔의 통찰이 현실화된 것이다. 유신 시대 한국사회에서는 박정희 한 사람만 자유로웠다.
문익환 목사가 신학을 공부하고 구약을 한국어로 번역한 후 민주화 운동에 전념한 때는 바로 유신의 칼바람이 한국사회를 휘감던 시기였다. 유신체제가 박정희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후 그는 박정희의 후예인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독재정권과 고단한 대결을 계속하였다.
한편 민주화 운동에 매진하던 그가 통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분단체제가 민주화운동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장애물이라는 인식때문이었다. 그가 보기에 남과 북의 집권자들은 독재정권 유지를 위해서 분단체제를 서로 이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한 내의 민주화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분단체제의 해소는 시급한 과제였고 이를 위해서는 남과 북 사이에 대화와 교류의 물꼬를 트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는 것이 그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그의 방북은 이러한 인식에 바탕한 비상한 용기와 결단의 소산이었다. 비록 그의 방북이 공안정국을 불러오게 했고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선도적인 통일운동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앞서 걸어간 한 걸음을 따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남과 북 사이를 오가고 있고 이러한 남북 교류가 한반도 긴장완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을 거침없이 실천한 문익환 목사의 통찰과 용기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불과 1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광기와 야만의 시대에 역사와 민족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한 순결한 영혼의 감동적인 고투를 목도할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불의에 당당히 맞서고 고통받는 자들을 자신의 몸처럼 섬겼던 문익환 목사의 삶은 해방 이후 기회주의자들과 출세주의자들만이 득세하였던 한국사회가 얻은 소중한 자산이자 발전의 자양분이다.
문익환 목사의 삶은 물신숭배와 전투적 이기주의만이 팽배한 현금의 한국사회에 실로 소중한 귀감이 되고 있다. 그의 삶은 사람이 무슨 가치를 추구하며 어떻게 살아야 진실로 사람다운가 하는 것에 대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평양을 방문한 후 봉수교회에서 열린 부활절 예배 시간에 문익환 목사가 목메어 부르던 ‘마른 잎 다시 살아나’라는 노래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역사의 유물들, 궐기하다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국사회를 좌지우지하던 각계의 명망가들이 애끓는 우국충정(?)을 이기지 못한 채 노구를 이끌고 서울 도심에 집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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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대문기사에 나온 "한국, 이미 친북 반미 세력이 장악"이라는 제목은. 조선일보의 그 유명한 따옴표 제목이다. ©조선일보 9월 10일자 PDF |
지난 9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기 위해 모인 이들의 면면은 가히 눈이 부실 지경이다. 일별해 보아도 전직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전 장관, 전 정당대표, 전 국회의원, 예비역 장성 등이 망라되어 있다.
이들이 발표한 선언문의 제목도 자못 의리의리하다. 이른바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9.9 시국선언”이란다. 누가 들으면 이들이 민주화운동을 하는 재야인사거나 운동권 학생들인줄 착각하기 좋은 선언문의 제목이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현재 대한민국은 모든 분야에서 위기를 맞아 정체성과 국가 이념이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현 정부는 경제와 안보 등의 국정현안은 뒤로 미뤄 놓은 채 과거사 진상규명으로 이념대립만 부추키고 있다" 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국론분열적이고 정쟁 유발적인 소모적 현안, 즉 수도이전과 국가보안법 폐지, 친일등 과거사 청산, 언론개혁 등의 일방적 추진을 중단하고 대신 모든 국력을 경제와 안보에 집중하라"고 요구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이들의 활약상을 대서특필하였음은 불을 보듯 환한일이다. 조선과 동아가 이들을 대하는 태도도 극진하여 이들을 일컬어 ‘원로’라는 표현을 공공연히 사용하고 있다.
봄날은 다가고 사세가 불리함을 느낀 조선과 동아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한국사회에서 지난 9일 프레스센터에 모인 사람들을 ‘원로’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얼마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생물학적 의미에서 나이가 많음을 들어 원로라고 주장한다면 그런 주장에는 일면의 설득력(?)이 있겠지만 말이다.
한마디만 하자! 조선과 동아가 원로라고 칭하던 이들은 60년대와 90년대까지 한국사회의 각 부면을 주름잡던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 한국사회는 폭력과 야만 아래 신음하고 거짓과 불의에게 능욕당하였다.
민주주의가 철저히 파괴되고 국민의 기본권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시절,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여 마음대로 조정하던 시절 이들 중 단 한명이라도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시장경제를 소리 높여 외치고 투쟁한 사실이 있었던가!
국민들의 힘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자리를 잡아가는 지금, 무리를 지어 나타나 뜬금없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수호를 외치는 이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혹시 자신과 가족들만을 위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아닐지 의심스럽다. 부디 자칭, 타칭의 원로들은 그 동안 누린 영화가 족한 줄 알고 자중자애하길 바란다. 이들이 그나마 한국사회에 기여하는 길은 남은 여생 동안 집안에서 손주들을 돌보는 것 뿐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자칭, 타칭의 원로들에게 충고한다. 비록 사람되기는 어려워도 괴물이 되지는 말자! /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