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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재벌과 황태자만이 할수있다?
'파리의 연인'등 드라마에 보이는 '핏줄 집착, '상대적 빈곤감' 격화시키기
 
미둥   기사입력  2004/07/27 [01:10]
형제가 한 여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핏줄은 못 속인다.’는 평범한 진리의 재확인. 이것이 요즘 벌어지고 한국드라마의 주된 소재이다. 형제는 비슷하다가 아니라, 꼭 닮아야만 한다는 절대성을 부여하는 듯싶다.

유난히 ‘핏줄’에 집착하는 드라마들
 
한참 뜨고 있는 <파리의 연인>은 김정은을 놓고 벌어지는 형제간의 사랑 다툼이다. 여기에 <황태자의 첫사랑>도 형제간의 사랑 다툼이다. 둘 다 배다른 형제 사이에 벌어진다. 그래도 핏줄은 통해야만 한다. 무조건. 심지어 <사랑을 할거야>에서는 세대를 뛰어 넘는 ‘핏줄’을 확인한다.
 
▲파리의 연인중 한장면     © SBS


과연 그럴까? 핏줄만 같으면 그렇게 잘 통할까? 이렇게 핏줄에 대한 동경이나 확신, 아니 집착은 다분히 ‘한국적 정서’이다. 어떤 과학적 근거가 약한 한국만의 집단정서(망딸리떼)이다. 핏줄은 중요하고, 바꾸기도 힘들다는 한국적 상황이 진리가 돼버리는 순간이다.
 
이러한 내용이 ‘한국만의 정서’라는 것에 반발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한중일은 비슷하니, 그곳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을 것이다. 맞다. 핏줄은 세계 각지에서 중요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폐쇄적인 내용은 아니다.
 
잊혀져가는 핏줄에 대한 회귀
.
일본에는 ‘형제는 남남이다’라는 속담이 있고, 중국에는 ‘분가한지 3년이면 이웃과 같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몇 십 년 헤어져 있어도 핏줄을 확인하는 순간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모든 걸 뛰어 넘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초한지>나 우리가 두는 장기의 유래인 중국 진秦나라 말기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에게 패하고, 포위되어 결국 자살한다. 이 때, 유방은 항우를 죽이는 자에게 거액의 상금을 건다. 때문에 항우의 몸값을 노린 이들이 그를 잡으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원체 1대 1 싸움을 잘하는 항우인지라 다가서지 못하다가. 그가 자결하자 그 시체를 서로 뜯어갔다고 한다.
 
그 무리 중에 ‘핏줄’이 섞인 친척도 있었음은 물론이요. 항우가 절대절명에 몰린 순간에도 주의를 지켜주고 같이 죽어갔던 몇 백 명의 병사들은 모두 아무런 상관없는 ‘핏줄’이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몇 천 년 전인 그 시절에도 ‘핏줄’의 허망함을 탄식했을까나.
 
핏줄에서 가장 가까운 핏줄은 쌍둥이일 것이다. 쌍둥이처럼 가까운 형제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쌍둥이는 매번 한 연인을 놓고 난리 브루스를 춰야 하고, 겹사돈은 넘쳐나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거의 같은 시기에 두 개의 드라마, 아니 3개의 드마가 핏줄을 신봉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2004년 한국의 단면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한국적 도덕 파기인가 고착화의 반영인가.
 
불황일수록 서민의 삶을 그린 드라마보다 신데렐라가 뜬다. 그렇게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뭔가 대리만족을 얻고 싶은 심정이다. 그만큼 삶이 각박하다는 말일 것이다. 로또처럼 단 한방으로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탈출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욕망의 분출은 당연하다.
 
단순한 신데렐라 스토리에 왜 꼭 ‘핏줄’을 강조해야 할까? 그것은 우리 사회를 감싸고 있는 도덕관념에 대한 도전일 수 있다. 뭐 성스러운 도전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금기를 건드리는 것으로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극이기도 하다. 이제 한국의 도덕관념은 겉은 멀쩡할지 모르나, 이미 망가질 때로 망가져 겨우 형제를 건드려야 자극이 되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 만큼 혼란스러운 우리 사회의 도덕관념이 묻어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더 이상 꿈은 없다’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가 확실히 고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반증이다. 그 상류층에 끼려면 이런 ‘핏줄’이 아니면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의 반영인 것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공하는 미국식 성공 스토리는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된 것이다.
 
이제 자기만 공부 잘하는 가능했던 시대가 아니라, 공부하려면 최소한 뒷받침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족집게 과외가 만능인 시대, 이와 같은 사교육비 과다 지출이 반영하는 것은 바로, 이제 더 이상 공부도 ‘기회의 평등’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핏줄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파리만의 여인과 황태자만의 첫사랑.
 
한국의 빈부격차는 너무 무서운 수준으로 고착화되어가고 있다. 한국 특유의 편견으로 더욱 무서운 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생후의 노력이 아니라, 생전의 선택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방향일까?
 
“파이를 키워야 나눠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성장을 우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파이가 크면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많겠지. 그렇게 하도 세뇌되어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파이는 커져도 먹을 것은 오히려 줄어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바로 절대적 빈곤보다 사람을 말려 죽이는 것이 상대적 빈곤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연구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상대적 빈곤이 사람을 더 자극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이 연봉을 2천만 원 받는데, 3천만 원을 받을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연봉 6천만 원을 받는데 연봉을 5천만 원을 받겠는지를 조사하면 3천 받겠다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바로 상대적 지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능력 있는 자가 성공’한다고 믿게 하는 자본주의의 정글이라는 미국도 이런데, 한국에서 이런 상대적 빈곤은 더욱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제 더 이상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상황에서 “파이를 먼저 키우자”는 논리가 국민을 움직일 수는 없다. 지나친 부의 집중으로 나라 전체가 잘 안돌아가는 이상 '국부비대'를 치료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이른 것이다.
 
한국의 연인을 찾아서.......
 
질곡의 한국 현대사는 아마 지금이 처음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시점일 것이다. 정신없던 개항, 그리고 극일, 내전, 반독재로 이어지는 극한 상황의 연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파리를 꿈꾸었고, 그렇게 우리는 황태자를 꿈꿔왔다.
 
한국 개화기의 계몽가 유길준은 “일본은 아시아의 영국이 되었다. 우리(조선)는 프랑스가 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질곡의 역사에서 결국 한국은 한국일 뿐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고, 깨닫고 있는 순간이다. 사랑마저도 파리를 가야만 할 수 있고, 황태자만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서글픈 일이겠는가?
 
함께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나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나라가 부강하면 국민도 부강해질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삼성이 잘나가니 삼성 임직원만 잘 살더라는 말이다. 오히려 핸드폰으로 삼성이 배부르니, 농민만 죽어나더란 말이다. 사회적 환원이 거의 없다보니, 이제 남남인 셈이다. 이젠 바꿔야 한다. 성장만큼 분배도 중요하다. 더 이상 일방적 희생은 없다. 그래야 제2의 발전이 있다.
 
이제 다시 우리의 생활이 묻어나는 드라마를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경도되어 편견으로 굳어진 가치관이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같이 사는 사회다. 이 평범한 진리조차 통하지 않는, 그렇게 “내 자식만”이라는 핏줄이 당연시되는 사회라면 TV를 통해 그 척박한 생활을 다시 확인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기에....... /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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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7/27 [01:1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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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곰둥이 2004/07/27 [17:22] 수정 | 삭제
  • 대자보에서 자주 뵈니 좋네요.
    여전히 잔잔하게 쓰시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게 핵심을 집어넣으시는 기술^은 여전하시고요..
    정치, 노짱 관련 글을 요구하지는 않겠지만, 좀 답답합니다.
    미둥님의 청량한 글을 기대하는 심정도 헤아려 주시길 부탁드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