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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게 허벌나게 웃기는 일이지라잉∼
[두부독감21]전라도 모항 막걸리집 안주는 사람씹는 맛이제
 
두부   기사입력  2003/12/10 [09:39]

삼형제 썩은 물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시인 신경림의 [농무] 한 대목이다. 이 '어떤 녀석'들은 농사를 짓는 농투성이들이지만, 건강한 우리네 민중의 모습이다. 이제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간다는 말은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치들은 그곳에서 삶을 갈고 있었다.

저자 박형진이 사는 곳은 전라도 변산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나오는 '모항'이다. 모항은 서해 바다와 면해 있어 농사를 짓는 사람과 고기를 낚는 사람이 공존하며 살고 있다. 그곳에서 태어난 저자는 40여 년 동안 한 번도 떠나지 않고, 농사를 짓고 살고 있다. 이 책(『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 디새집, 2003년)에서 저자는 그곳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사투리와 함께 곰삭은 농촌의 언어로 풀어낸다.

면사무소에서 30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한 서금용은 막걸리 먹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그가 하루에 먹은 최대의 막걸리는 백 잔, 무려 두말 반 리터니 45리터가 되겠다.그가 오랫동안 민원실 호적계에서 일한 덕분(?)에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면서 권커니 잣커니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더란다. 한번은 밥을 먹고 술자리에 끼인 사람에게 서금용이 이렇게 말했더란다. "저런 멍청한 놈, 야 임마 콩 한 말에다 깨 한 말 섞으면 깨가 콩 속으로 들어가디야 안 들어가디야?" 일명 '술배 따로 밥배 따로'라는 말이다.

그러나 술(밥과 누룩과 물이 썩으면 술이 된다고 해서 이 동네에서는 '삼형제 썩은 물'이라고 한다)을 먹으면 술버릇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노릇, 저자가 이야기 하는 동네 사람들의 술버릇은 가관이다. 한밤중 냉장고에서 물을 벌꺽벌꺽 마셨는데 알고 보니 참기름을 마셨다는 보안 남포리 사람 허석모, 어두운 방 안에서 물을 찾다가 요강을 집어 들고 자신이 밤새 눈 오줌을 마셨다는 저자의 큰형님 박공진, 술만 먹으면 집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는 삼거리댁 남편 등 술 먹은 대가를 톡톡히 치른 사람들이 많더란다.

곽 아무개가 '오처녀'라는 이름을 얻었던 데는 남다른 내력이 있다. 산의 나무를 해서 먹고 살던 시절 어느 날 오처녀가 산지기에서 들켜더란다. 그 산지기가 누구냐고 묻자,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꿍하고 있다가 "오처녀요" 하고 느닷없이 둘러댔는데, 그게 진짜 같은 이름이 되었더란다. 이 오처녀가 난생처럼 차를 타고 나들이를 가게 되었는데, 돌아올 때 차장과 시비가 붙은 것이다. 그런데 오처녀가 하는 대꾸가 기상천외하다. "올 때 주었는디 갈 때 뭔 놈의 차비를 또 달란디야?" 그렇게 해서 오처녀는 갈 때 차비를 내고 올 때는 공짜(?)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나 워쩌다나!

▲위도 큰애기 머리빗고 치마 터는 바람도 오늘은 잠잠하다.     ©두부
배꼽 떨어지고 주먹댕이만 해서부터 술을 마셨다는 격포에 사는 '정달원', 동네에서 키가 제일 큰데 얼굴이 얽은 곰보라서 천연기념물로 불리는 '면장님', 남의 줄 것을 주지 않고 미적거려서 오징어처럼 질긴 사람인 '오징개', 머리통에 고자리(구더기)가 꾸물거리듯 흉터가 있어 '고자리 밥'이라는 별명이 붙은 '용채', 남의 배를 타고 삯을 받으면 술집에 붙어살며 술로 다 먹어조져서 '조기기', 또래 중에서 가장 작지만 뺑돌뺑돌하게 생긴 '뺑돌이', 앞이마가 골망둥이처럼 툭 불거져서 '골망둥이'라고 불리는 '정섭', 육십 평생 쟁기질만 한, 콜라를 그렇게 좋아한 '영만', 얼굴이 살짝 얽었으나 허리가 가늘고 얼굴이 갸름하여 예쁜 '나이롱 참외',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고 낳아 1년 가까이 포대기 속에 업고 다녔지만, 젖도 주지 않고 똥오줌을 치우지도 않아 결국에는 자신의 자식을 죽게 한 '미친년 조막녀', 자맥질 선수 '석태', 몽치처럼 똘똘 뭉친 '박몽칠' 등 저자와 한 동네에서 동거동락한 사람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저자는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가감없이 그려내지만, 농촌에서 그만그만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삶의 애환, 그리고 말 못할 속내들을 덧붙인다. 그들의 희노애락은 우리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그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눈길은 따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삶을 통해 모두의 삶의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남자의 열등감

농촌에서는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을 자랑 아닌 자랑으로 삼는다. 물론 지금은 두 명도 낳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지만, 어디 농촌에서랴. 딸 아홉을 낳고 열을 채우기 위해 자식을 보았는데, 딸 쌍둥이를 낳은 보아면 흥산 '김 아무개', 내리 딸만 넷을 낳고 마지막에 아들을 보았는데, 기저귀를 갈 때마다 아기 불알이 떨어질까봐 만져보지 못했던 '장이뿐', 딸을 다섯 낳고 마지막 딸을 해산하고 몸조리 대신 소주 두 병을 마셔버린 '수태 씨 부인'. 이들은 모두 노동력이 필요한 농촌의 현실적인 선택이었겠지만, 아들을 보기 위해 얼마나 여성들이 고통을 당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첫째(푸짐이)와 셋째(아루) 딸은 농민회 일로 바빠서 보지 못하고, 둘째(꽃님이) 딸은 아내가 친정에 머물며 병원에서 나서 보지 못했다. 첫째 딸을 낳고 그 태를 항아리에 담아서 나무 밑에 묻었는데, 몇 년이 지나 썩어 불그스름하고 맑은 물만 남은 물을 허리 아플 때 마시면 그만이라고 한다. 으레 시골에서 전해지는 민간약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막내 아들을 낳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앞의 세 딸을 낳을 때 아내 혼자 남겨 두었는데, 이제는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일까? 산통이 시작된 아내를 트럭에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진통이 그렇게 심하지 않아 농협까지 들른 후에 피서 차량을 피해 조금은 먼 길로 병원을 간 것이다. 차를 몰고 가다보니 인적이 드물고, 아내의 진통은 심해졌다. 그런데 이를 어째, 양수가 터져 차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고, 애기의 머리가 나온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아내는 가까스로 포대기를 밑을 받치고 애를 낳고 사내는 나오는 애를 자신의 팔에 안았다. 순식간에 아빠는 산파가 된 것이다. 그렇게 애를 받고 근처의 집 주인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출산 사건을 겪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요즈음 들어 난생 처음 안식구에 대한, 아니 여자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 저렇게 이쁜 것을 낳아놓은 여자의 자부심을 무엇에 비교할 것이란 말이냐? 살과 피로 연결되고 마음과 마음으로 연결된 저 일치된 인간관계인 모성애보다 더 완전한 게 또 어디 있단 말이냐? 하늘이 두 조각나고 천지가 개벽하여 음양이 뒤바뀌지 않는 한 영원히 남자는 그것을 느낄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 애기를 꼭 내 배 아퍼서 한번 낳아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나의 시새움을 또 어쩌하지 못하는 것이다."

▲보리, 수수, 옥수수, 콩 등     ©두부

땅을 부쳐먹는 농부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와 생명을 낳는 '여성'이라는 두 여신을 모시고 살아야 할 운명인가 보다.
이 책에는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들어 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농촌의 아름다움, 농촌의 생활방식, 고구마, 보리밥, 콩, 팥, 녹두, 누룽지, 서숙, 수수, 옥수수, 메밀, 율무, 기장 같은 우리네 농촌에서 자식 키우듯 키우는 곡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잔잔하게 자식들에게 들려 주고 있다. 저자의 자식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루 세 끼 밥과 옷 몇 벌, 몸을 누일 수 있는 집이면 마침맞다. 그것이 모자란다면 인간의 훈훈한 마음으로 벌충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러한 풍족함에 욕심을 덧붙여 이러구러한 것들을 가지게 만든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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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12/10 [09:3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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