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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야만의 시간을 직시할 때
[창비주간논평]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사고의 책임, 근본 다시 생각하자
 
최원식   기사입력  2014/05/01 [01:00]
세월호 앞에서는 모든 말길이 끊어진다. 묵묵히 그분들 곁에서 봉사하는 무명(無名)의 헌신만이 빛나거늘, 침묵이 예의다. 그럼에도 벌거벗은 대한민국, 이 야만의 시간을 직시하는 것도 살아남은 자의 피할 수 없는 책무.

"다음 생에는 다른 나라에서 만나요." 안산분향소에 붙여진 추모쪽지다. 이를 뉴스에서 처음 발견한 순간 내 가슴은 덜컥 무너졌다. 분향소를 뒤덮은 추모의 노란 포스트잇들이 갑자기 대한민국을 떠나는 거대한 노랑나비떼로 환시(幻視)하던 것이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사고의 책임

세월호 앞에서 우리가 돌연한 벙어리로 돌아앉은 것은 누구도 이 참사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크든 작든 우리 안에 세월호를 기르고 있거늘, 지금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고등학생들의 참변에 나라의 어른들이 다 부끄러워하는 판에, 우리 교원들의 마음이야 가이없다. 더구나 울산에서 대학 신입생들이 변을 당한 게 엊그제가 아닌가. 수학여행 또는 신입생환영회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대규모 단체여행에 따라다니곤 하는 추문들을 상기할 때, 진즉 이를 개혁하지 못한 관행이 시한폭탄이었던 것이다.

청해진해운은 인천 소재다. 내 사는 고장에 괴물이 활보하고 있었다니 등잔 밑이 어둡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언젠가는 이 배를 타고 서해를 종단하여 제주에 가리라, 그런 꿈을 꾸기도 했으니, 인천시민들은 고연히 부끄럽다.

어린 희생들 앞에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은 목하(目下) 총참회 중이다. 그러나 패전 직후 일본이 내건 '1억총참회'란 구호가 결과적으로 전범들에게 면죄부를 발행한 꼴이 된 전철을 밟아서는 아니된다. 최근 한국사회 최고의 병폐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이 무너진 것이다. '상을 줄 자에게는 꼭 상을 주고 벌을 줄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준다.' 보도에 의하면 청해진해운의 수상실적이 짜하다. 벌 받을 회사가 상을 연속 탔으니, 중앙/지방정부가 사고를 부추겼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게다. 이러니 이 엄청난 사태가 발생해도 누구 하나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고, 어느 누구 충심으로 책임지는 자가 없다. 커녕 정객, 장관, 국장 들이 하루 걸러 '개콘'이다.

각계가 되새겨야 할 뼈아픈 잘못

무책임의 정치를 견지한 대통령의 책임이 무겁다. 내각에서 무슨 짓을 해도 책임을 물어 사퇴시키기는커녕 감싸고도니, 이런 내각을 자작(自作)한 셈이다. 하긴 대통령이 앞장이다. 이름이 무슨 대수라고 행정안전부를 굳이 수억을 낭비하며 안전행정부로 바꾼 끝에, 규제를 강화할 데는 오히려 풀어 이 사단을 불러오고도 모르쇠다. 그렇다고 야당은 책임에서 면제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해수부가 만들어진 게 문민정부 때이고, 그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 장장 10년에 걸친 집권기간에도 불구하고 해운은 이토록 부패했으니 야당도 정말 손을 얹고 반성해야 마땅하다.

언론의 소나기 보도로 웬만한 건 대강 알려진바, 이제 책임의 소재는 분명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언론이야말로 참회해야 한다. 언론이 살아 있었다면 저런 회사가 백주에 나다닐 수 있을까? 언론의 재건, 특히 지방언론을 살리는 일이 관건이다. 지방에는 오히려 뜻을 지닌 젊은 언론인이 적지 않다. 다만 여건이 워낙 열악하다. 지방언론의 재생이 대한민국을 부패로부터 건지는 지름길임을 새기며, 이 참사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 총참회를 완성하는 일임을 더욱 명념(銘念)할 때다.

이 사고가 특별한 것은 얼마든지 방지할 수 있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 이전의 비리들에도 불구하고 그날 출항허가만 내주지 않았어도 참사는 없었다. 설령 사고가 났더라도 선원, 회사, 해경, 해수부, 청와대가 효율적으로 대처했더라면 이런 대형사고로는 번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기자의 한탄대로 그 많은 확인․감시 기제들이 어쩌면 곳곳에서 그렇게 작동하지 않을 수 있을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사고 이후의 황당한 발걸음, 온 국민을 일거에 무기력상태로 몰아넣은 정부의 무능은 여기서 다시 뇌일 필요도 없다.

1차 책임이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에 있음은 물론이다. 가면 갈수록 한심한 작태가 어처구니가 없다. 저 지경으로 '내 배(my ship)'라는 의식이 실종일 수 있을까? 한국인 특유의 공동체 감각에 이처럼 심각한 장애가 발생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충격적이거니와, 과연 주인을 닮았다. 유병언 일가의 행태는 우리 눈을 의심케 한다. 부패한 자본가, 아니 파렴치한이라고 해도 모자란다. 언제적 세모가, 5공의 망령이, 이처럼 부활하다니.

그나저나 그 작명이 기이하다. 세월호의 한자가 世越號란다. 세상을 넘는다, 배 이름으로는 참으로 상서롭지 못하다. 청해진해운의 최대주주 천해지의 한자가 天海地, 하늘과 바다와 땅이요, 무슨 사진 찍을 때 이름이라는 아해는 야훼로 추정된다니, 말세에 드글대는 가짜 예언자의 종류다.

근본을 다시 생각하며 견딜 때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그의 횡행을 처처에서 방조했을 그 검은 고리들이다. 세월호 선원, 청해진해운, 해운조합, 해경, 항만청, 해수부, 교육부, 안전행정부, 그리고 청와대에 이르기까지의 이 긴 사슬. 이뿐인가. 여당, 야당, 금융권, 지방정부 등등조차 가로놓였으니, 아득한 저 밑바닥에서 아이들이 자지러진 것이다. 그러니 1차 책임자 선원들과 회사는 하수인에 불과하고 참사의 진짜 주인은 2차 책임자 유씨 일가와 3차 책임자 그 배후의 긴 고리들이다. 요컨대 2차 책임자를 철저히 수사하여 3차 책임자의 구조를 백일하에 밝히는 것이 관건이다.

이번에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이지만, 우리가 여객선을 못 만드는 나라란다. 세계적인 조선강국 대한민국이 퇴역 즈음의 일본 배를 들여와 여객선으로 이용한다? 수출 중심 경제가 국민경제를 왜곡한다는 옛말 그대로다. 연안을 연결하는 여객선을 잘 만든 연후에 그 연장에서 수출용 대형선박 건조로 나아가는 게 정상일진대, 돈 따라 그냥 월반한 꼴이다. 국민의 안전과 연계된 국민경제의 탄탄한 구축을 외면한 박정희개발독재시대의 기제가 지금도 여전한 것인가? 그처럼 민생을 외우고 다니는 정객들 중 그 누구도, 과문한 탓인가, 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 박정희의 후예들은 물론이고 박정희 반대자들도 이 근본적 문제를 건너뛰었다. 우리 사회는 이처럼 기초가 부실하다.

아직은 희망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미담을 기릴 때도 아니다. 재난 속에서도 도움의 용기를 발휘한 분들의 고결한 도덕성은 추장(推獎)해 마땅하지만, 이는 이 재난의 전형이 아니다. 충무공의 승전만 강조하는 일이 임진왜란의 진상, 조정과 군대의 무능으로 인민을 도탄에 빠뜨린 그 끔찍한 7년의 기억을 가리는 일이 되는 것과 멀지 않으매, 지금은 절망의 시간을 견딜 때, 그리하여 그 밑바닥에서 그런 시간만이 허락하는 근본을 다시 생각하는 기도의 때. 어린 나비들이시여, 명목(暝目)하소서.

* 글쓴이는 문학평론가,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입니다.
* 본문은 디지털 창비(http://weekly.changbi.com) 2014년 4월 16일자 주간 논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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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5/01 [01:0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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