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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세계 최고인가? 한글에 대한 오해
[정문순 칼럼] 봉건적 심성과 서울 패권주의가 낳은 한글과 세종 우상화
 
정문순   기사입력  2013/10/09 [20:29]
매년 한글날만 되면 이런 저런 기관에서 우리말과 관련한 조사 결과가 쏟아져 나온다. 국립국어원은 초·중·고등학생들이 욕설을 입에 달고 산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고, 한글학회는 아름다운 우리말 상호를 쓴 가게를 선정함으로써 토박이말 사랑을 북돋웠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욕설과 우리말은 한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너무나 지당하게도, 한글은 말이 아니라 말을 문자로 나타낸 표기법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욕설을 즐긴다고 하여 우리 글자가 오염되는 것도 아니며, 토박이말 상호를 쓰는 가게가 늘어난다고 하여 우리 글자가 정화되는 것도 아니다. 권위 있는 한국어 연구기관조차 말과 글이 다른 줄 모르거나 무시하는 실수를 남발하니, 일반인들 중에는 세종 임금이 우리 말을 만들었는지 우리 글자를 만들었는지 헷갈리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 세계적인 문화유산. 민족문화의 최고 걸작품. 한글에 바쳐지는 찬사들은 하나같이 더 높이 올라갈 데 없는 최극상이다. 물론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평가는 아니다.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글자라는 평판은 한국인만이 아니라 외국의 언어 연구 기관이나 연구자들 중에도 인정하는 이들이 있다. 한글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는 찬사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으로 간접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 유네스코에서는 문맹 퇴치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상의 하나로 세종임금 문해상도 제정하였다. 

그러나 한글에 대해 ‘세계 최고’ 운운하는 평가를 붙일 때 돌아봐야 할 것이 있다. 당연히 한글은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글자보다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이라는 점에서 우월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한글은 세상의 여느 글자처럼 기원을 알 수 없거나 오랜 세월에 걸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이 아니라 일부러 만든 글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국가의 막대한 인적·제도적 자원의 투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글 창제에 참여한 집현전 학자들은 한문만 잘한 것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들이기도 했다. 한글 창제에 공헌한 신숙주는 중국 운소학에도 능한 일급 학자였으며 중국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한글이 세계 최고의 글자라고 말하고 싶다면 비교 대상이 세계 전체 글자가 아니라 베트남어 등처럼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창조된 글자에 국한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글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글자 중에서 1등이라는 평가는 들어 본 적이 없다. 한글이 세계 제일이라는 평가가 객관성을 획득하려면 비교 대상도 자신과 태생이 비슷한 것에 국한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한글이 세계적이라는 평가에는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인식도 한 몫을 차지한다. 한글은 자모 제자 원리와 구성에서 주역의 음양오행설과 천·지·인 삼재(三才) 이론을 따랐다. 주역의 논리는 중국 주나라를 이상형으로 삼았던 봉건 국가의 빈틈없는 신분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우주 만물이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리며 돌아간다는 발상은 물 샐 틈 없이 견고한 신분제 사회와 일치하는 것이다. 곧 주역의 철학적 바탕은 지배 계급이 선호할 만한 것이지 당대 민중의 처지와는 무관하다. 정음 창제 당시에는 ‘과학적’ 운운하는 평가가 합당했을지 모르지만, 지금도 그렇게 본다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무릅써야 할 것이다.

한글은 애민사상의 소산인가?

객관성의 관문을 넘지 못한 한글에 대한 오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글에 대한 한국인 일반의 인식과 관련하여 가장 큰 의문은 한글의 창제 의도가 과연 무엇이냐는 데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한글이 세종대왕이 백성을 사랑한 결과물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글이 태어난 배경은 다음과 같은 객관적 근거를 엄연히 무시할 수 없다. 1. 쿠데타로 성립한 왕조의 정통성을 마련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2. 1번 목적의 일환인 <용비어천가> 제작 3. 유교 통치 체제 확립을 위한 신흥 국가의 정치적 목적 4. 3번 목적의 일환인 <삼강행실도> 제작 5. 중국어에 우리 음운 체계 끼워 맞추기

한글 창제는 정통성 없는 국가의 통치 규범을 마련하기 위한(1+3번) 목적이 가장 컸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용비어천가>와 <삼강행실도>를 만들었다는 데서 이는 입증된다. 특히 6대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선대의 업적을 찬양한 <용비어천가>는 정음 창제 이후 가장 먼저 세상에 나온 한글 작품이다.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만들기 위해 정인지를 시켜 전국 각지에서 개국의 정당성을 뒷받침할 만한 설화를 샅샅이 수집하게 했다. 거듭된 쿠데타로 손자 대에 이르도록 안정을 찾지 못했던 새 왕조로서는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해서라도 신흥 왕조의 성립을 합리화한 것 하나만으로도 한글 창제의 목적은 충분히 성취했는지 모른다. 또 <삼강행실도>도 조선 왕조가 유교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백성들을 유순하게 계도하고 순치할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흔히 간과되고 있지만, 정음 창제의 배경으로는 5번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세종은 우리말에서 한자 발음을 중국어 음운 체계에 가깝게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한글 창제 당시 우리 한자음 표기를 중국어처럼 초-중-종성 체제로 만들고 우리말에서 발음이 불가능하여 실생활에서 전혀 쓸 수 없는 자모를 만든 것도 한자어 발음을 중국어 원 발음에 가깝게 구현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세종 스스로 밝힌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운운의 주체 의식과는 전혀 무관하며 중화를 섬긴 소국의 사대주의로 봐야 한다. <동국정운>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동국’(조선)의 음운 체계를 중국에 맞추어 정리한 책이다. 조선 왕조가 유교적 종주국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언어학에서도 구현하기 위해 우리 음운 체계를 중국에 끼워맞추려고 한 노력은 한글 창제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

한글 창제가 권력자의 통치 목적에서 나왔다면, 세종이 신하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글자를 만들면서까지 통치 대상으로 삼으려고 했던 백성은 정확하게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세종이 어린 백성을 가엾게 여겨서 창제한 것이 훈민정음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세종이 생각한 백성의 정체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어가 권력의 도구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면 지배계급이 지배 대상에게 자신의 통치 기반 중의 하나이기도 한 글자를 만들어 주었다는 정설에 대해 의심해 볼 만하다.

세종의 딸 중에 언어학에 정통한 이가 있었는데, 한글 창제에 큰 공을 세우자 아버지 세종은 노비 수십 명을 딸에게 선물로 하사했다. 말이나 소가 백성이 아니듯이 ‘말하는 가축’에 불과했던 최하층 노비는 조선의 신분제 개념에서 백성 축에도 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사·농·공·상 계급 중에 농·공·상을 뭉뚱그려 백성이라고 알고 있지만, 한자는 모르더라도 한글이라도 알아야 통치가 수월했던 백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백성과는 개념이 다를 것이라는 연구가 있다. 전근대사회까지만 하더라도 글자는 철저하게 지배 계급의 전유물이었기에, 지배 계급이 ‘무지렁이’ 백성이 글자 모르는 게 안타까워서 없는 글자를 일부러 만드는 수고를 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세종이 말한 백성은 백성 중에서 ‘무지렁이’ 수준을 면한 층인가? 조선시대에 백성들은 조세와 공납, 군역을 통해 국가와 농토에 얽매인 신분이었다. 자작농이나 부호, 요민이 출현한 것은 조선 후기 신분제가 느슨해지면서 발생한 일이다. 조선 전기에 통치를 위해 글자를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었던 백성들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백성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불편한 이두나 구결을 써왔던 중인 같은 하급 기술 계급 아니면 서얼에 가까운 부류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가능하다. 

자고로 통치 대상에게 자기 권력을 유지하게 하는 기반을 가르쳐주는 권력자는 있을 수 없다. 봉건 왕조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백성이 똑똑해지는 것이다. 글을 안다는 것은 지식의 첫 관문이요 요체이다. 백성을 불쌍히 여길 수는 있어도 똑똑한 사람으로 만들 궁리를 했던 봉건 군주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한글을 세종대왕의 백성 어여삐 여김의 산물로 보거나, 세종을 희대의 성군으로 떠받드는 사람에게서 민주적 소양을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안타깝다. 세종이 아무리 뛰어난 군주라고 하더라도, 정통성 없는 왕조를 미화하거나 백성을 유교 통치의 대상으로 삼았던 봉건 통치자가 그의 본질적 정체성이었음은 부정하지 못한다. 21세기 한국인들이 봉건 왕조시대에나 어울릴 듯한 심성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것은 자국 것을 세계 최고로 인정받고 싶은 한국인들의 고질적인 콤플렉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한글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무심코 말할 때, 은연 중에 어떤 봉건 군주와 더불어 도덕적 기반 없는 서울 도읍 왕조를 알게 모르게 찬양하는 결과도 낳게 되는 것 같아 적잖이 불편하다. 한글은 새롭게 보아야 한다. 봉건적 심성을 탈각하거나 서울 패권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난다면 다른 모습이 보일지도 모른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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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0/09 [20:2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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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가이 2020/02/01 [03:43] 수정 | 삭제
  • 한글 자체에 대한 걸 보지 않고 늘 정치와 연관시켜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지식인 같은줄 아나 보네. 참 덧없고 한심하다. 아름다운걸 그냥 아름답다고 보는건 순진한 바보가 아니라 순수해서다. 니가 지식인 운운 할려면 좀 순순해져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