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버트 카파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알림판 © 경향신문 | |
누구나 한 번쯤 접해봤을 전쟁 보도사진의 거장 로버트 카파(1913-1954)의 사진들이 한국 전시장에서 관객과 만난다. 경향신문과 사진기획전문기업 DtoC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로버트카파 탄생 100주년 사진전’(robertcapa.co.kr)이 8월 2일부터 10월 28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다. 로버트카파 탄생 100주년과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해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로버트카파 기념재단인 뉴욕 국제사진센터가 소장한 160여점의 오리지널 프린트가 전시된다. 또 로버트 카파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과 로버트 카파의 다양한 소품들도 함께 전시된다.
로버트 카파(본명 앙드레 프리드먼)는 1913년 10월 22일 헝가리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1년 정치적 박해와 반유대주의자들을 피해 베를린으로 피신한 그는 그곳에서 사진 에이전시 데포트의 암실조수로 취직하면서 사진과 조우했다. 이후 사진가로 생계를 꾸린 그에게 여자친구가 유태인식 이름 아닌 미국식 로버트 카파로 개명을 권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부터 노르망디 상륙작전, 인도차이나 전쟁 등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쟁터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전쟁을 싫어한 전쟁 사진작가 로버트카파의 사진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전쟁에 대한 혐오가 내포돼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저널리즘 사진의 속성인 충격적인 고발과 폭로로 흐르는 것을 막아주었고, 그가 신화로 자리잡는 데 일조했다.
가장 유명한 사진인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은 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전선에서 돌격하려던 그의 친구 병사가 머리에 총알을 맞고 즉사해 쓰러지던 순간을 찍었다. 순교자처럼 팔을 벌리고 약간 찡그린 표정으로 무너져 내리기 직전의 순간을 카파가 포착했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애인이었을 그가 막 이 세상과 작별하는 찰나의 시간을 카파는 렌즈로 담아낸 것이다. 그의 사진은 늘 우아하면서도 비장하다. 마치 인간들의 풍속화를 흑백의 담백한 붓 터치로 그려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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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 병사의 죽음. 진위 논란은 있지만, 전쟁의 참혹함을 잘 포착한 불후의 명작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 로버트 카파 |
누구나 사진기를 휴대하고 다니는 시대, 그 서막의 선봉에서 카메라를 들고 전쟁터를 누볐던, 또 끝내 그 전쟁터의 한가운데서 짧은 삶을 마감한 로버트카파. 그는 현대 사진역사의 새 경지를 개척했으며, 평생지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시모어와 손잡고 다큐사진가 모임 ‘매그넘’을 만들면서 저널리즘 사진의 지존으로 군림하고 있다.
자기희생과 위험을 무릅쓴 취재정신의 대명사가 된 ‘카파이즘’도 그의 치열했던 작가정신의 산물이다. 동시에 카파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들의 권익과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침 시모어 등과 보도사진 통신사인 <매그넘>을 설립해서 잠시 경영을 맡기도 했다. 그는 치열했던 삶만큼이나 유명인들과 당대의 교유도 활발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윈 쇼, 존 스타인벡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고, 피카소와 마티스 등 화가들과도 예술적 교감을 나누었다. 또 스페인 내전 당시 탱크에 치여 숨진 첫사랑 게르다 타로와의 뭉클한 사랑이야기도 유명하다. 뛰어난 외모와 예술가적인 풍모 때문에 세계적인 여배우 비비안 리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고, 잉그리드 버그만의 청혼까지 뿌리친 일화도 있다.
그의 치열한 사진 정신은 훗날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부에 나오는 전투장면은 스필버그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찍은 카파의 사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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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상을 전한 미군의 오마하 점령작전. 훗날 <라이언일병 구하기> 영화 모티브가 됐다. © 로버트 카파 |
최근에는 로버트 카파와 게르다 타로의 애잔한 사랑을 다룬 영화가 제작되고 있다. 영화 <토르:다크 월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배우 톰 히들스턴이 카파역을, 여배우 헤일리 엣웰이 여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영화 <카파>(가제)가 그것이다. 인도차이나반도 전쟁터에서 사진을 찍다가 사망한 카파의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의 지갑 속에는 게르다 타로의 사진이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 마이클 만 역시 로버트 카파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웨이팅 포 로버트 카파>를 준비하고 있다.
1954년, 카파는 라이프 잡지의 다른 사진작가를 대신해서 한 달 동안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기로 했다. 전쟁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고 프랑스 군은 후퇴하고 있었다. 5월 25일, 카파는 프랑스 군의 마지막 철거 작전에 참여했다. 길 곳곳이 지뢰투성이었다. 카파는 다른 기자 몇몇과 함께 호송차량에 타고 있었다. 군인들은 카파에게 차량을 떠나지 말라고 경고했다. “단 한 곳이라도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난 무조건 그곳에 갈 거야.”라든 카파는 호송차량이 잠시 멈춘 사이, 길에서 벗어나 병사들과 아주 가까이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는 대인지뢰를 밟고 숨졌다. 로버트 카파는 베트남에서 죽은 최초의 미 종군 기자였다.
“If your picture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충분히 다가서지 않아서다.” 마흔 한 살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했지만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세상을 살았던 예술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로버트 카파가 남긴 명구는 단지 사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로버트 카파는 당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로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ICP : 뉴욕 국제 사진센터(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를 말한다. 미국 뉴욕시 맨해튼 중심부에 위치한 사진 박물관, 학교, 연구센터다. 1974년, 로버트 카파의 동생이며 보도 사진계의 선구자인 코넬카파가 설립했다. 뉴욕 국제 사진센터는 보도 사진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 로버트 카파 전문사이트 안내 :
http://www.robertcap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