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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철한 기자정신’의 신화, 로버트 카파의 일생
[최을영의 시사인물 포커스] 사진으로 전쟁의 참상 고발한 보도사진가
 
최을영   기사입력  2007/07/03 [02:24]
오마하 해변
 
모두 알다시피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루고 있는 영화다. 정확히 말하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된 1944년 6월 6일 오마하 해변에 상륙한 미군 제1보병사단의 상륙기를 담고 있다. 비록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담고 있는 함의에는 별로 동의하진 못하지만 이 영화의 오프닝 장면에는 열광했던 기억이 있다. 1998년 어느 때쯤인가 친구들과 전주에 있는, 지금은 없어진 명보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주인공 라이언이 찾아간 알링턴 국립묘지에 펄럭이는 성조기를 바라보며 불편함을 느낄 즈음 화면은 바뀌었다. 바다 한 가운데의 상륙정 안에서 긴장한 채 해변을 응시하고 있는 주인공 존 밀러 대위(톰 행크스 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고, 그의 손 떨림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던 기억이 난다. 긴장감이 미처 절정에 치닫기 전에 상륙정의 문이 열렸고, 그와 함께 빗발치는 총탄에 대원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오마하 해변을 점령하기까지, 난 화면 안으로 빨려드는 듯한 느낌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빗발치는 총탄 소리와 비명 소리, ‘쉬익’ 소리를 내며 강렬한 폭발음을 내는 박격포와 잘려 나간 팔과 다리가 내 눈과 귀를 가득 채웠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혹은 두려움에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엄마’를 찾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돌리고 싶어질 즈음 오마하 해변은 점령되었다. 한숨을 돌린 나는 내 손에 쥐어진 음료수 캔이 찌그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영화를 보면서 겁을 먹은 내 모습이 찌그러진 음료수 캔에 투영되어 있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지옥을 담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2007년 5월. 서울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로버트 카파전을 관람했다. 전쟁을 담은 수많은 사진 중에 오마하 해변이 있었다. 거친 파도 안에서 총탄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미군들이 있었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보았던 구조물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완전군장을 한 채 해변으로 달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이름 모를 병사의 멍한 얼굴이 있었다. 카메라는 사정없이 흔들렸고, 초점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이 찍은 사진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그만큼 생생한 전쟁 현장에 몸서리를 쳤다. 당시의 긴박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사진을 보며 전쟁에 대해, 전장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정리하려 애쓰고 있을 때 다음과 같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전쟁의 참상을 전한 미군의 오마하 점령작전. 훗날 <라이언일병 구하기> 영화 모티브가 됐다.     © 로버트 카파
 
오마하 해변에서 찍은 사진이 1944년 6월 19일 미국 『라이프』지에 발표될 때 쓰였던 이 문구는 D-day 당일의 상흔을 여실히 보여준다. 종군기자 중 유일하게 노르망디 상륙작전 현장을 찍은 로버트 카파의 사진은 훗날 “인간이 만들어낸 지옥을 담아냈다”는 평을 받았다. 전설적인 종군 사진기자이자 20세기에 일어난 격랑의 전쟁 현장을 누벼온 로버트 카파는 이 사진을 찍고 배로 돌아와 실신했다. 로버트 카파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눈을 뜬 곳은 침상이었다. 벌거벗은 내 몸에 까칠까칠한 담요가 덮여 있었다. 목에는 ‘탈진, 신원 미상’이라고 적힌 종잇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카메라를 보고서야 나는 내가 누구인지 생각이 났다.”1)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방인
 
▲유태계로 전쟁의 참상을 알려 현대 보도사진의 지평을 연 로버트 카파     © 로버트 카파
로버트 카파는 가명이다. 그의 진짜 이름은 앙드레 프리드만(Andre Friedman)으로 1913년 10월 22일 양복점을 운영하는 유대인 재단사의 아들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유럽에서 유대인은 차별받는 존재였고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그는 17세 때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헝가리에서 추방당해 독일 베를린에 정착한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망명 생활은 평생에 걸친 떠돌이 생활로 이어진다. 그는 1954년 4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전쟁터로,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그 첫걸음이 17세 때 시작된 것이다.
 
1931년 베를린에서 정착한 카파는 베를린대학에 다니면서 생계를 위해 한 통신사의 암실 조수로 일을 하게 된다. 이때 그는 틈틈이 어깨너머로 사진을 공부하게 됐고, 18세 때 사진가가 된다. 그가 처음으로 찍은 사진 속 주인공은 트로츠키였다. 당시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박해를 피해 유럽을 떠돌며 강연을 하고 있었다. 이 노(老)혁명가는 사진에 찍히는 걸 극도로 꺼려했지만 카파는 소형 사진기를 품속에 숨긴 채 강연장에 들어가 트로츠키의 말년 모습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슈피겔』지에 게재되었다.
 
카파가 사진가의 길로 막 나섰을 무렵 독일은 파시즘의 광기가 온 나라를 휘감기 시작했다. 헝가리 출신에다가 유대인이기도 했던 그가 지내기에 독일은 최악의 조건이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 카파는 파시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여의치 않았지만 그는 이 즈음 첫 연인인 사진가 게르다 타로를 만나게 된다. 그녀와의 만남은 카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즈음 카파는 헝가리 출신 유대인인 앙드레 프리드만이라는 이름으로 사진을 게재하기에는 보수가 너무 적다고 생각하고 가상의 미국인인 로버트 카파를 만들어 그의 이름으로 사진을 잡지에 게재한다. 보수는 곧 3배나 뛰었다. 그렇게 로버트 카파는 만들어졌다.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Spank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
 
1936년 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카파는 게르다 타로와 함께 스페인으로 향해 인민전선파에 합류한다. 그리고 이해에 20세기 보도사진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작품인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을 촬영한다. 참호에서 일어나 막 달려 나가는 순간 머리에 총을 맞고 뒤로 쓰러지고 있는 인민전선파 병사의 모습을 촬영한 이 작품은 때마침 창간된 『라이프』지에 실리면서 카파에게 전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다.
 
이 작품은 훗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와 함께 스페인 내전을 표현한 3대 걸작으로 칭송받게 된다. 그러나 이 사진은 순간적인 장면을 포착했다는 이유로 진위 논란이 계속되어 왔다. 일각에서는 카파가 사진을 조작했다고 주장했고, 또 일각에서는 조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파는 생전에 이와 관련해 운이 좋게 순간을 포착해 촬영한 것이라고만 말했을 뿐 그 진위 논란에 대해서 특별한 해명을 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카파는 이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은 진위 논란과는 무관하게 스페인 내전의 상황을 사진 한 장으로 극명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로버트 카파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 병사의 죽음. 진위 논란은 있지만, 전쟁의 참혹함을 잘 포착한 불후의 명작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 로버트 카파
 
스페인 내전은 카파에게 행운과 불행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행운은 스페인 내전으로 유명해졌다는 것이었고, 불행은 그의 첫 연인 게르다 타로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1937년 카파가 잠시 파리에 가 있는 사이 게르다 타로는 사진촬영을 하던 중 아군의 탱크에 깔려 숨지게 된다. 카파는 이 충격적인 소식에 망연자실하며 “이것이 바로 전쟁이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첫 연인을 잃고 깊은 상심에 빠진 카파는 이후 평생 독신으로 지내게 된다.
 
1938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카파는 중국으로 향해 일본군의 잔학한 학살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후 미국에 정착한 카파는 헝가리 출신이라는 이유로 적성 국민으로 분류돼 카메라를 압수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때마침 도착한 『콜리어스』지의 취재 요청으로 2차대전의 치열한 현장인 유럽으로 향하게 된다.
 
카파이즘(Capaism)의 탄생
 
2차대전의 현장에서 그가 가장 먼저 간 곳은 북아프리카였다. 사막의 여우라 불린 독일의 롬멜에 맞서 미국의 패튼이 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사막의 전쟁 현장은 물론 출격하는 Flying Fortress(나는 요새)라 불린 B-17 폭격기를 찍었다. 어느 날 카파는 폭격임무를 마치고 공군 기지에 불시착한 B-17 폭격기로 달려가 카메라를 들이댄다. 부상자가 실려 나오고 있는 중이었고, 그 비행기의 조종사가 카파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카파는 그때 심각하게 보도사진가에 대해 고민을 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수염을 깎으면서, 보도사진가로 산다는 것과 다정한 마음을 잃지 않고 간직한다는 것이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자문자답을 해보았다. 병사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장면은 빠뜨린 채 그저 한가하게 비행장 주변에 앉아 있는 모습만 찍은 사진은 사람들에게 진실과는 동떨어진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려면, 전사자와 부상자까지도 여과 없이 찍은 사진을 보여줘야 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내가 감상에 빠지기 전에 그런 장면들을 한 통의 필름에 담아두길 잘했다는 판단이 섰다.”2)
 
카파의 이런 관점은 이전의 보도사진가와 대비되는 것이었다. 카파 이전에도 전쟁 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댄 사진가는 여럿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의 참상 ― 부상자, 선혈이 낭자한 시체, 기아와 난민 ― 을 찍지 않았다. 카파가 이전 세대와 다른 점은 바로 전쟁의 참상을,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고자 했던 데 있다. 이것이 카파가 보도사진가로 명성을 높이게 된 이유다.
 
카파는 카파이즘(Capaism)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보통 ‘투철한 기자정신’으로 번역되는 카파이즘은 카파의 평소 신조에서 기인한다. 그는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전쟁의 현장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한 발짝 다가선다는 것은 죽음과 더욱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죽음의 경계에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 싶은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카파는 두려움 속에서도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찍고, 기록하기 위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들었다.
 
북아프리카 전선 다음으로 그는 공수부대와 함께 낙하산을 타고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다. 그리고 선봉부대와 함께 이탈리아 심장부로 나아간다. 전쟁은 지루하게 계속됐고, 사상자는 끊임없이 늘어갔다.
 
D-day, 1944년 6월 6일 오마하 해변
 
이탈리아 전선 다음에는 프랑스였다. 카파는 종군기자 중 유일하게 제1보병사단과 함께 제1차로 오마하 해변에 상륙한다. 어쩌면 6시간에 걸쳐 오마하 해변에서 보낸 시간이 카파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던 때인지도 모르겠다. 카파의 저서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를 보면 그 당시의 숨 막히는 현장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독일군에게는 아직 탄약이 충분했다. 나는 미친 듯이 기도했다. 잠시 땅속으로 꺼졌다가 나중에 다시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상황은 내 기도와 전혀 반대되는 방향으로 악화 일로를 걸을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바로 코 옆에 어젯밤 함께 포커를 쳤던 중위가 있었다. 그가 물었다.
 
“내가 방금 뭘 봤는지 알아?”
“내 머리가 자네 시야를 가리고 있어 아무것도 못 봤을 것 같은데.”
그러자 그가 중얼거렸다.
“우리 엄마가 현관문에서 내 보험증권을 들고 흔드는 걸 봤어.”3)

 
 6시간 동안 카파는 필름 4통을 소비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사진은 고작 10장이다. 『라이프』지의 암실 조수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현상한 필름을 빨리 말리려고 하다가 필름을 녹여버렸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간 유일한 사람이 찍은 사진 중 남아 있는 게 10장이라는 사실이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카파는 이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당시 카파의 사진을 태운 암실 조수는 1963년과 1965년 로버트 카파상을 두 차례나 수상하고, 베트남전에서 헬기 추락으로 숨진 보도사진가 래리 버로즈다.)4)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어쨌든 성공으로 끝났다. 이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은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카파는 상륙부대와 함께 파리에 입성했다. 파리 시민들은 미군을 열광적으로 맞았지만, 나치에 협력한 사람들에게는 냉혹했다. 특히 독일군의 자식을 낳은 프랑스 여성들은 머리를 삭발당한 채 조리돌림을 당했고, 카파는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전쟁의 또 다른 참상이었다.
 
전장에서 죽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고 카파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그리고 마침 프랑스를 방문한 잉그리드 버그먼을 만나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한동안 할리우드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의 사진 찍는 작업을 하던 카파는 1947년 동료 사진기자인 프랑스 출신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폴란드의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기치 아래 일종의 사진 에이전시인 매그넘(Magnum)을 창립했다. 매그넘은 ‘샴페인을 담는 큰 술병’이란 뜻으로 기존의 사진 유통방식을 바꿔보자는 의미로 탄생한 것이었다. 매그넘은 잡지사의 청탁을 받아 잡지사의 요구대로 사진을 찍기보다는 사진기자가 찍고 싶은 사진을 찍어서 공동으로 모아두었다가 이 사진을 원하는 잡지사에 판매하는 구조를 갖게 되었다.
 
창립 이래 매그넘은 수많은 유명 사진기자를 탄생시켰고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베를린장벽 붕괴, 천안문 사태 등 2차대전 이후 현대사의 주요 현장에는 매그넘의 사진기자들이 함께했다.
 
매그넘을 만든 이후 카파는 존 스타인 벡과 함께 냉전이 시작된 소련에 들어가 그들의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1948년에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을 취재하러 갔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행한 유대인들의 잔혹 행위를 보고, “이렇게 옹졸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기록하지 않겠다”며 돌아오고 만다.
 
그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나 로버트 카파는 전장으로 향하지 않았다. 전쟁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그는 전쟁으로 유명해졌지만 전쟁을 혐오했다. 그는 “실직한 종군기자라서 행복하다” “다시 전쟁에 가야 한다면 난 총으로 자살을 해버릴 거야. 난 너무 많은 걸 봤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전장에서 죽을 운명이었다.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던 때 로버트 카파는 FBI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분류됐고 감시를 받았다. 그리고 재정적으로도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그를 전장으로 다시 몰아넣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의 요청으로 일본에서 사진작업을 하고 있던 1954년, 카파는 『라이프』지의 요청으로 인도차이나 전쟁을 취재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리고 이해 5월 24일 그는 프랑스 전투부대원들을 찍던 중 지뢰를 밟고 폭사한다. 그의 나이 41세 때였다.
 
세계적인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는 그렇게 카파이즘과 매그넘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존 스타인 벡의 말처럼 “카메라가 차가운 기계에 불과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 증명해 보였다.”5) 
 
로버트 카파 전문사이트 안내 : http://www.robertcapa.co.kr/

[참고문헌] 
1) 로버트 카파, 우태정 옮김,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필맥, 2006, 199-200쪽.
2) 로버트 카파, 우태정 옮김,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필맥, 2006, 47쪽.
3) 로버트 카파, 우태정 옮김, 『그때 카파의 손을 떨리고 있었다』, 필맥, 2006, 185-194쪽.
4) 전성원, 「떨리는 손으로 전장을 증언하다」, 『씨네21』, 2007년 4월 6일.
5) 알렉스 커쇼, 윤미경 옮김, 『로버트 카파 - 그는 너무 많은 걸 보았다』, 강, 2006, 9쪽. 

 
* 본 기사는 월간 <인물과사상> 7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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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7/03 [02:2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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