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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덕지(體德智)’로 순서 바꿔 아이들을 살려내자
[강상헌 글샘터] 교육이념 지덕체가 가진 ‘우리가 몰랐던 해독’ 씻어내기
 
강상헌   기사입력  2012/06/08 [16:43]
사람 모여 사는 동네의 여러 규범(規範)은 세상을 제대로 돌게 하는 도구다. 그런데 이 규범이 시간이 지나거나, 생각의 틀이 바뀌면 블랙코미디처럼 망가지곤 하는 것을 역사는 자주 보여준다. 이 규범을 구성하는 언어 또한 고도의 상징성으로 시민들을 옥죄기도 하는데, 때로는 하릴없이 공기 빠진 풍선이 된다.

엄혹한 독재자 박정희가 정권을 흔들고 있을 때 우리는 ‘사회 전반’을 이르는 개념으로 마치 공식처럼 ‘군관민(軍官民)’이라고 썼다. 별다른 뜻이나 정치적인 함의(含意)없이도, 가령 “군관민이 합심하여 수해지구 이재민을 도웁시다.”하는 식으로 말을 만들 듯, 이 단어를 썼다. 물론 이 단어의 생산과정은 ‘자연스럽게’ 정치적이었을 터다.

첫째는 군대(軍隊)고, 둘째는 관청(官廳)이다. 국민(國民)은 세 번째, 즉 꼴찌였다. 군관민은 당시에는 너무도 당연했다. 다른 순서의 낱말은 없었다. 이런 ‘우선순위(優先順位)’는 당시의 규범이었고, 이를 표시하는 언어는 당연히 그 순위를 나타내야 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정권을 따라 국민이 주인이 되기도 하고 ‘졸(卒)’이 되기도 하지만, 최소한 공식적인 어법은 ‘민관군(民官軍)’으로 바뀌어 정착됐다. 요즘에는 ‘군관민’이란 단어를 접해보지도 못한 이들도 있다. 특히 정치인들, 선거 때 사탕발림인지 항상 그런 마음인지는 헷갈리지만, 국민이 최우선이라고 한다. 투표권 가진 유권자(有權者)를 이르는 것이리라.

우리 사회가 개안(開眼)을 넘어 개벽(開闢)의 상황을 맞고 있다. 나라의 경제력은 튼실해지고, 재빨리 진보하는 세계의 기술문명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며 우리는 산다. 국운(國運) 또는 나라의 품격(品格)이란 자랑찬 어휘도 가끔 듣는다.

또한 ‘군관민’이 ‘민관군’이 된 것은 큰 보람이다. 그런데 하필 이 단어 ‘지덕체(智德體)’와 그 뜻만은 왜족(倭族) 치하 식민지의 굴레를 한 자락도 벗지 못한다. 교육의 규범 중 하나,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어떤 사람으로 키워낼 것인지의 우선순위에 관한 생각이다. ‘지덕체’라는 말, 그 아래 숨은 우리 사회의 ‘잠재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지덕체 교육’이 현재까지의 사고(思考) 구조다. 지적한 대로 여러 개념이 낱말을 이룰 때 순서는 이념을 나타낸다. 지식과 지략(智略)이 우선이고, 덕(德)은 다음이며, 신체의 바른 성장을 이르는 몸 즉 체(體)는 꼴찌다. 많이 알고 꾀가 많은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체육을 제대로 공부한 이들 아니면, 건강한 신체가 교육의 우선이자 으뜸가는 목표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분위기다. 그러나 체육은 아름다운 학문, 으뜸 공부다.

일부 소수, 건강한 신체가 으뜸임을 믿는 ‘용감한’ 이들을 제외한 우리 사회 구성원의 거의 모두는 좋은 대학과 출세를 실질적인 교육의 과녁으로 삼는다. 특히 자신의 자녀를 끔찍이 사랑해 마지않는 엄마와 아빠들, ‘역시나’다. ‘체육인’들마저도 상당수가 이 ‘역시나’에 포함된다. 왜? ‘현실’이니까. 아 그렇구나, 현실이구나.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틀을 대강이나마 짓는 것은 학교에 다니는 기간까지의 활동(活動)이다. 활동은 ‘살아 움직임’이다, 생동(生動)이다. ‘교육’이라고 일컫는 이 과정은 신체의 단련으로 튼튼함을 얻고, 튼튼함이 주는 여유로움으로 어진 성품(性品)을 얻으며, 어진 성품을 세상사를 걸러내는 거름망으로 삼아 보배로운 지식을 얻는 것이다.

‘건강한 신체에 깃드는 건강한 마음’(A sound mind in a sound body)은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1632~1704)가 남긴 금언이다. 우리에겐 이 말이 ‘체육대회’의 슬로건이지만 그는 이를 ‘세상이 행복한 모습’이라고 했다. 존 로크의 세계관인 것이다.

인용한다. ‘... 암기식 주입주의를 반대하고, 체육(體育) 덕육(德育) 지육(智育)과 수학적 추리를 강조하며, 그 사람의 소질을 본성에 따라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존 로크가 썼다고 한다. 그런데 큰 아이러니다. 이를 설명한 우리 교육관련 서적 대부분은 이 순서를 굳이 ‘지, 덕, 체’로 바꿔버린 것이다.

사전은, 체육을 ‘건전한 몸과 온전한 운동능력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이라고 풀이한다. 몸만을 위한 것이다. 몸의 생동과 마음의 관계를 몰각(沒却)한 것이다. 몸과 마음의 연결고리가 없다. 제대로 된 새김이 아니다.

이 역시 지덕체의 어그러진 순서와 한 가지의 이데올로기를 품고 있다. 음모다, 음습(陰濕)하다. 아는 것과 꾀가 많아야 인정받는 사회가 만드는 참혹한 모습을 우리는 날마다 보고 신음한다. ‘잘난 이’는 많은데, ‘어진 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 잘난 이들의 기득권을 상징하는 것이 이 망조 든 ‘지덕체’인가?

교육이론을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래 굳은 이 숙어(熟語)가 품은 뜻이 우리 사회의 곧지 못한 모습을 혹은 상징하거나, 혹은 조장(助長)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뜻 깊은 이들과 전문가 여러분들에게 정중하게 묻고자 하는 것이다.

해답이 눈앞에 있다. 아이들을 사람답게 키우는 것이다. 사람은 생명이다. 생명은 하늘이다, 섭리(攝理)다. 몸이 건강하면 마음이 건강하다. 체덕지가 맞다. 그렇지 않다면, 마침내 생동이 아닌 사멸(死滅)이다. 살펴보자, 우리 아이들이 그 나이에 맞게 몸을 단련하는가? 아니 움직이기라도 하는가? 아이들을 생동하게 하는 길은 운동밖엔 없다.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운동으로 자신의 어려움 극복한 얘기 숱하게 듣는다. 정작 이 사례와 우리 아이의 심신(心身)의 건강을 연결해 생각하지 못한다. 체덕지의 순리(順理)가 우리 마음에 없기 때문이다. 왜 우리의 자식들이 날마다 쓰러지는가? 누구 탓인가?

▲ 강상헌 시민의 자연 발행인     © 대자보
골목 농구 한 시간만으로도 얽히고설킨 마음이, 그 끈끈한 갈등이 푸른 하늘처럼 탁 터진다. 모른다면, 당신부터 경험하라, 그리고 아이들을 운동으로 이끌라. 아이들이 운동을 밥 먹듯이 하는 학교, 그 터전 위에서 교육을 생각하라. 살아 움직이지 않는 몸은 덕(德)도 지(智)도 낳지 못한다.

생동하지 못하는 몸과 마음을 이끌고 마침내 승리자가 된 이들에게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저’(패배자)들은 무엇일까? 승리자들 또한 ‘지덕체’의 자궁(子宮)이 생산한 선천성 기형아(畸形兒)가 아닌가? 승리자마저 영예롭지 못한 비뚤어진 세상은 정의가 아니다. 묻자, 자기 혼자만, 제 가족만 잘 살면 무슨 재미인가.

“단결하라! 지덕체를 체덕지(體德智)로 바꾸는 명예로운 ‘무혈(無血)혁명’에 나서라! 아이들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자.” 어진 뜻 가진 시민 여러분, 전국의 체육인, 체육교육자, 부모된 이들 모두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모두 기적을 짓자, 함께 신화를 만들자, 마침내 어진 세상을 이루자.
언론인 / 시민의 자연 발행인, 한자탑어학원(www.hanjatop.com)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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