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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 2년, 시민사회는 어디에 있는가?
[비나리의 초록공명] '반이명박 전선'의 기획보다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야
 
우석훈   기사입력  2009/05/21 [14:27]
지금, 시민사회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의 유행문화는 참 독특하다. 국가적 특징이라고 할까, 사회적 특징이라고 할까, 유행은 한국 사회가 지닌 하나의 특징인 것 같다. 단, 좋은 것은 어지간해서는 잘 유행하지 않고, 속물적인 것은 누가 꼭 시키지 않아도 잘 유행한다. ‘사치재’라는 의미인 luxury good이라는 말을 ‘명품’이라는 단어로 슬쩍 바꾸어, 기껏해야 스노비즘(snobbism, 속물주의)에 불과한 것에 명예와 존중의 의미까지 부여하는 것도 거의 한국이 유일한 듯싶다. 어디 그뿐인가? 사교육은 헌재의 선언 이후 불과 5년 만에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추세로, 작게는 한국 중산층 크게는 한국 경제 전체를 먹어 들어가는 중이다. 뭐든지 유행이 일단 생기면 그야말로 시스템 현상인 것처럼 순식간에 움직여가는 것이 한국적 속성이다. 심지어는 나눔, 돌봄과 같이 시민사회에서 만들어진 단어들조차도 일단 한 번 가져다 쓰기 시작하면, 정신없이 자본의 품으로 들어가 포장지처럼 사용되고는 한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아마 한국에서 한 번쯤 유행을 타지 않은 거의 유일한 아이템은 ‘좌파 정당’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괜찮은 스타일의 좌파 정당이 건전한 상식인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 같은 것으로 유행할 법도 한데, 이런 것은 어지간히도 유행하지 않는다.

한국 내 많은 것들의 유행 주기는 강력하기는 하지만 너무 짧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어찌 됐든 굴욕과 부침 속에서도 든든하게 버텼던 한나라당은 (오랫동안 그 명성을 유지하며 유행을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명품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는 한 것 같다. 『조선일보』 역시 그런 명품이며 동시에 약간은 사치재로서의 ‘머스트 해브’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어쩐지 ‘간지’ 나지 않는 오래된 유행 같기는 하지만, 여전히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엇인가 끊임없이 기획하고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늘 대세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50~60대 남성의 느낌, 한국식 부패한 보수의 느낌, 한국의 지배자의 느낌, 그리고 ‘어쩐지 대세’의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 지난해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모습.     ©청와대

명박력 2년, 확실히 한국은 이런 방향으로 내부적 대세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제 정권 2년, 한나라당 필(feel)의 50~60대 남성들의 지배권은 확실히 대세이다. 여기에 ‘CEO 필’ 하나를 더해주면, 한국에서 어떤 집단 혹은 문화권의 세력들이 돈과 사회적 흐름을 장악하고 있는지 보다 명확해진다. 세계적인 금융위기 속에 탈시장, 탈미국이라는 두 개의 질문을 받아들고 새로운 논의를 시작하고 있는 글로벌 사회와는 달리, 시장-CEO-대세와 같은 말들을 키워드로 뽑아들고 있는 한국 지배층의 ‘리더십’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공고해 보인다.

사실 이러한 리더십이 자발적이며 시민적 각성 같은 것과 연결되어 있다면, ‘보수 한국’의 미래가 그렇게 어두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한나라당-『조선일보』의 50~60대 리더십의 본질은 탐욕적이며 돈을 따라 움직이는, 어둡고도 음습한 권력을 상징할 뿐이다. 이들의 앞을 지키는 것은 경찰이고, 뒤를 지키는 것은 ‘시장’이라는 학술용어다. 경찰로 때리고, 돈으로 막는 한국의 리더십은 폭력의 리더십이고 검은 리더십이며 퇴행적 리더십이다.

이 흐름이 사회적으로 나쁜 것은 “대중은 대체적으로 바보들이다”라는 대전제하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1990년대, 또 하나의 유행이라고 할 수 있었던 ‘시민사회’가 일종의 비전처럼 꿈꾸었던 사회상과는 정반대로 가는 흐름이다.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주고 다양성을 만들어나가는 방향과는 반대로, 누구든 알아서 기지 않으면 ‘시범 케이스’로 만들어 언제든지 손봐줄 수 있다는 ‘내재화된 공포’로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의 흐름이 경제적으로 나쁜 것은, 이 일련의 변화과정이 끝나고 나면 한국에서는 중산층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부자는 더욱 부자로,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한 사람으로 완벽하게 갈려, 두 개의 극단 간 교류가 사라진 경제로 전환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명박과 그의 동료들이 경찰과 시장, 물리적 힘과 금권적 힘이라는 두 가지 장치를 가지고 일종의 ‘힘의 정치’를 펼치고 있는 지금, 그들의 힘은 40%대의 지지율을 회복하면서 클라이맥스로 달려가고 있다. 이 순간, 철학적 측면이나 지향하는 비전이나 사실상 저들의 정반대에 서 있는 시민사회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혹은 어떤 위기에 처해 있을까?

하나의 유행, 그리고 2세대의 위기

1990년대 초반, 1987년 체제 속에서 한국의 민중단체가 등장하고 있을 무렵, 이와는 약간은 궤를 달리하는 또 다른 사회운동이 등장했다. 보통은 그걸 시민운동이라고 불렀다. 물론 시민운동이 늘 긍정적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시민 없는 시민운동’ ‘명망가 중심의 운동’ 혹은 ‘중앙형 운동’과 같은 활동방식에 관한 비판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산층운동, 부르주아운동 혹은 ‘탈계급화운동’과 같은 본질적 한계에 대한 비판이 존재했다. 당시 시민단체 지도부들의 상당수가 반노조 혹은 반계급운동에 대한 생각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민중운동이 전부 담아낼 수 없던 새로운 사회적 의제들을 중심으로 시민단체들은 급격하게 세를 늘려나갔다. 덕분에 한때 NGO는 Next Government Officer, 즉 ‘다음 번 정부 관료’라는 의미로 불리기도 했으며, 실제로 지나친 권력화와 관료화로 인한 회의적 시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큰 조직을 중심으로 보자면, 환경운동과 여성운동과 같은 부문운동이 하나의 주류를 형성했고, 참여연대와 같은 일종의 시민권운동과 같은 대리인운동이 또 한 주류를 이루었다. 지역의 풀뿌리 시민단체들도 유사한 시절에 등장했지만, 지역 단체들은 한국 특유의 중앙/지역의 이분법 구도에 밀려 중앙 단체들이 했던 약진과 같은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      ©각골명심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이러한 시민단체들의 힘이 클라이맥스에 달했던 것은 2002년 지방선거에 즈음한 시점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한일 월드컵과 한나라당의 압승이 시작된 지방선거 정도로 기억하는 이 순간이 풀뿌리운동의 절정이었다. 실제로 풀뿌리 지방자치를 내건 시민단체 출신 후보 10여 명이 기초의원으로 직접 당선되기도 하였다. 이 순간이 한국 시민단체가 중앙형 조직에서 생활정치와 풀뿌리정치를 모토로 내건 분산형 조직으로 본격적인 하방이 가능했던 시점으로 이해한다.

2003년 초반, 새로운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일부 시민단체의 역할이 주목받기도 한 것 같지만, 실제로 시민단체의 위기는 이때부터 생겨났으며 2004년 즈음에는 ‘시민사회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각종 토론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이전보다 단체들의 자금 흐름은 원활했지만, 이 당시 시민사회는 실제로 위기를 겪고 있었다. 초록행동단과 같은 환경단체는 좀 더 어려웠고, 여성단체는 상대적으로 좀 나은 모양새를 보였지만, ‘소통 실패’와 남성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 확산 등으로 문제는 밑에서 곪아가고 있었다.

당시 이러한 소위 시민단체의 힘을 가지고 새로운 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흐름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시민정당과 녹색당, 두 개의 흐름이 그 당시 시민운동이 머금고 있는 사회적 에너지를 배경으로 정치세력화를 기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개의 흐름 모두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데에는 실패한 것 같다. 정대화 교수를 중심으로 했던 시민담론 중심의 정치세력화는 결국 2007년 대선에서 일부는 민주당에 흡수되고, 일부는 문국현 후보의 선거캠프에 참여하면서 사실상 종료되었다. 또 2002년 지방선거에서 기존 정당에 소속되지 않고 시민후보로 나서 당선된 기초의원들이 당시 30대, 40대 활동가들과 결합, 녹색정치준비모임과 초록정치연대를 거쳐 녹색당을 창당하고자 했으나 상당한 가능성을 보이는 데 그쳐야 했다. 녹색당 창당 흐름의 실패에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는데,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2006년 지방선거에 즈음하여 기초의원 정당공천제가 실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녹색당이나 네트워크정당 같은 후발주자가 참여할 수 있는 문은 사실상 그때 닫혔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민중단체들 옆에 유행처럼 생겨난 한국에서의 약간 특수한 시민단체의 흐름은 이제 어느 정도 한 사이클을 돌아선 듯싶다. 민주주의와 함께 ‘참여’라는 또 다른 메뉴를 올렸던 시기는 어떤 의미로든 한 사이클을 돌아 명박시대와 함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위기의 국면을 지나는 중이다.

지금의 시민운동이 위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자발적 회원으로 참여하려는 시민들이 줄어들었다거나, 정부의 지원의 줄어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정말로 위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소위 최열, 박원순으로 대표되는 1세대 지도자 다음에 2세대 지도자들이 제대로 등장하거나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만약 다음 흐름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어느 한순간에 혜성처럼 등장한 명망가의 시대가 종료됨으로써 하나의 흐름이 끝난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2세대라고 학술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문화연대의 지금종, 환경운동연합의 양장일,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하승창 등은 대체로 시민운동 내부에서 2세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세대의 시대가 끝나고 자연스럽게 2세대들이 지도부로 등장하게 되면서 유행의 시대가 끝나고도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운동방식으로 이어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사태는 그렇게 진행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야말로 리더십의 위기인 셈이다. 시민운동에도 리더가 필요한가? 세상의 어느 조직이라도 완벽한 분산형이 아닌 이상, 어떤 유형으로든 리더 없이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지금은 시민운동 판에서 20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정열적으로 움직이는 20대는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30대는? 그야말로 도시빈민으로, 자신과 가족의 재생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많은 시민운동 조직들은 지금 우울하다. 활동가들의 일부는 정신 상담이라도 받거나, 아니면 ‘치유 프로그램’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할 정도로 힘든 상황이다. 앞은 보이지 않고, 세상은 점점 어려워지는 중인데, 생활마저 어렵다. 한국 시민운동의 활동가들 상당수가 지금 겪고 있는 삶의 질곡이다.

사회적 경제, 사회적 기업, 그리고 새로운 모델?

나는 한국 경제에 사회적 경제의 요소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백 아닌 고백을 하자면, 최근의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1990년대 초반부터 줄곧 이렇게 생각해왔다. 시민단체가 좀 더 지역에 착근하고, 지역 복지와 사회적 서비스 그리고 지역 경제의 한 축에서 실질적인 경제 주체로서 대기업과 경쟁하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가질 수 있는 형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경제에 ‘사회적’ 요소가 더 많이 필요하고, 그런 것들이 가능하면 실질 경제의 한 축으로 기능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이러한 사회적 경제의 흐름이 생겨날 때까지, 지난 10년 동안을 꾹 참고 보낸 셈이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 나로서는 시민운동 출신자들의 조언을 받으면서도 더 많은 시장 근본주의가 작동하고 사회가 점점 더 신자유주의의 흐름으로 갔던 김대중-노무현의 시기를 이를 악물고 버텨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역설적이지만, 이명박 정권하 많은 시민단체들이 지금 자의반 타의반,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적 경제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물론 기존에 있던 환경단체들이나 여성단체가 한꺼번에 그렇게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새로 생겨나는 작은 단위의 조직들, 즉 넓게 보면 시민운동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조직들은 주로 사회적 기업에 대한 ‘인큐베이팅’ 역할이나 그 스스로 사회적 기업을 내걸고 만들어지는 중이다. 준정당처럼 작동하면서 시민들의 대변인 역할을 해주었던 역할에서 벗어나 지역 경제나 문화 경제에 존재하는 작은 틈새를 찾으면서 사회적 경제 쪽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 규모에 대해 논하기는 좀 시기상조이나, 시민운동의 흐름은 5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생협을 한 축으로 하여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 지난해 6월 10일 민주항쟁 기념 촛불 문화제.     © 대자보
 
이 흐름이 자의반일 수 있는 것은, 지금의 20대들이 많은 경우, 큰돈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활동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념과 희생 위에 서 있던 민중단체 모델이나, 언론을 통한 대변활동으로 ‘빅 마우스’ 역할을 했던 시민단체 모델이나, 지금의 20대들에게는 잘 맞지 않는다. 한때 대규모 시위로 세를 과시했던 민중단체든, 비록 삶은 고달프지만 화려함은 충족시켜주었던 시민단체든, 현재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새로 생기는 조직들이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적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경제기관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지금 뉴라이트 외에는 한국에서 새로운 조직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시민 동력 혹은 민중 동력을 움직일 수 있는 운동이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계획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새로 생기는 조직이 사회적 경제 주체의 형태를 띠는 것은 자발적 선택에 가깝다.
물론 타의에 의한 요소도 존재한다. ‘촛불단체’라는 낙인을 당한 단체들이 순수 시민들의 회비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규모를 아주 줄이거나 다른 작동 방식을 찾아야 하는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활동가’가 아닌 ‘사회적 기업의 사원’ 위상을 갖게 되는 모델을 찾아내게 된다. 이건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지금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의 중심 키워드는 ‘사회적 기업’이다. 시민단체의 싱크탱크를 자임하는 희망제작소의 키워드 역시 사회적 경제와 사회적 기업이다. 생명평화운동의 주축이나 기존의 시민단체로 분류하기는 좀 어려운 한살림을 비롯한 생협에서도 사회적 경제는 중심 키워드다. 최근에는 흙살림 같은 곳에서 사회적 기업 인증을 받기도 했다. 그뿐인가? 하자센터의 창 프로젝트에는 영화감독을 비롯한 밴드들이 사회적 기업을 활용한 활동모델에서 새로운 비전을 찾고자 모색 중이며, 대학교 내에서도 ‘스펙 쌓기’와 ‘대기업 취업’의 대안으로 사회적 기업이 새로이 모색되고 있다.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른 시기이나, 1990년대 시민단체의 창립 초기 흐름과 유사하게 사회적 경제라는 새로운 키워드가 지금 바닥에서부터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새로운 시민의 흐름, 어떤 위상을 가질 것인가?

이제 시민들의 회비를 통해서 단체를 운영하는 1990년대식 시민운동의 경제적 작동방식 모델은 어느 정도 한계에 부딪힌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민운동이나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시민운동이 전성기였던 시절에도 한국은 끊임없이 신자유주의로 질주하고 있었다. 환경문제는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고, 여성문제는 해결된 것이 거의 없다. 한나라당을 맹신하는 사람들과의 더 많은 대화를 통해 “최소한 우리 이 정도는 합의하자”는 변변한 담론이 나온 것도 아니고, 문화와 다양성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제시된 것도 아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실현했으니 이제 ‘실질적 민주주의’로 가면 된다고 몇 년 동안 사람들이 외쳐왔지만, 이런 절차적 민주주의의 공고함에 대한 믿음조차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는, ‘명박력 2년’을 겪으면서 처절하게 보지 않았는가?

자, 이제 이 상황을 진단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자본주의란 원래 이렇다”라고 말하는 방식이 하나 있고, 조금 이를 세련되게 표현해서 “신자유주의는 원래 이렇다”라고 말하는 방식이 또 하나 있다. 시민운동의 활동가들은 이렇게 얘기하기보다는 각 부문의 문제를 지적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10년을 보냈다. 그러나 ‘소통’의 문제를 수없이 이야기해온 지난 10년 동안,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사이에서조차 별반 아무런 소통이 없었다. 단체 내부 정파 사이의 소통 실패는 더 심각했다. 이런 경험에 비추어볼 때, 새로 생기는 사회적 경제의 흐름이 만들어낼 소통의 실패는 사실 불을 보듯 뻔하다.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붙이고는 있지만, 어쨌든 기업이라는 형태로 움직이는 작은 단위들에 대해서 기존 활동가들이 내리게 될 평가는 그야말로 “안 봐도 비디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지난해 6월 10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 세워졌던 이른바 '명박산성'.     ©CBS노컷뉴스

그러나 지금 한국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책, 더 많은 잡지, 더 많은 문화 창작물, 그리고 지역에서의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것들은 획일적이며 때때로 마초적인 문화마저 가지고 있는 기존의 민중단체가 만들어내기 어렵고, 중앙의 명망가 집행위원들의 기획에 의해서 움직이던 시민단체가 만들어내기도 어렵다. 시민단체가 위기란 말도 맞고, 더 이상 폭발적인 동력을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말도 맞다. 그렇다고 한국을 언제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 놓아둘 수는 없다. ‘불도저 리더십’을 믿고 참고 견디면 다시 고도성장이 오고 선진화가 될 것이라는 말도 아닌 담론에 대해, 아무런 대항능력도 갖추지 못한 채 “제2의 촛불”만을 목매달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선거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이다. 지역에서 크고 작은 지역 경제에 대한 대안들을 모색하면서 실제로 뭔가 경제적 흐름들의 물꼬를 터 나가는 노력 없이는, 한국은 토건주의, 신자유주의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모색을 만날 조합원 투표로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기획회의만 하던 민중단체가 하기도 어렵고, 매달 활동가들 생계비 마련하느라고 노심초사하는 시민단체의 중앙 기획자들이 하기도 어렵지 않겠는가?

나는 기존의 민중단체의 사람들이나, 1990년대 시민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자의반 타의반 어쩔 수 없이 사회적 경제 모델을 선택하려는 사람들에게 조금만 따스한 시선을 보냈으면 좋겠다. 지금 ‘구국의 강철 대오’를 시민들이나 국민들에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어차피 어마어마한 표차로 이명박을 지지한 사람들이지만, 또 그들이 바로 촛불을 든 바로 그 사람들이기도 하다. 왜 저들은 계급투표를 하지 않는가라고 아무리 타박을 해도, 그런 타박 듣는다고 자신의 투표성향을 바꾸기는 어렵도록, 지역과 계층, 문화가 심하게 황당하게 작동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이걸 2~3년 새에 바꾸어낼 그런 영웅적 기획자나 매력의 선동가가 과연 한국에 존재할까? “나도 오바마처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대단히 미안하게도 그들 중 누구에게서도 오바마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가진 사람은 보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1990년대 시민단체의 모델에서 벗어난 지금, 사회적 경제라는 흐름 말고는 별달리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분명히 한국에는 ‘반이명박’ 정서나 탈신자유주의에 대한 목마름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깃발 꽂으면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이던 1980년대와 1990년대식의 흐름을 또 만들어낼 가능성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 2기가 출발할 때, 미국의 진보세력이 더 밑으로 내려가 더욱 구체성을 띄었던 흐름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자. 지금은 하향식 ‘바람’을 기다릴 때가 아니라, 상향식 ‘흐름’에 대해서 고민할 때가 아닐까.

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울 것 같고, 나 또한 고통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대안실험을 하는 작은 단위가 더 밑바닥에서부터 분산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이지, ‘반이명박 전선’의 바람을 위한 기획에만 몰두할 때는 아닌 듯싶다. 모두들 지금의 새로운 흐름에 대해서 조금만 더 따스한 시선을 보내주면 좋겠다. 바로 지금이 20대와 10대들이 “하고 싶은 일”처럼 보이는 일을 찾아내거나 만들어낼 때라는 사실을 좀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09년 6월 호에 실렸습니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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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5/21 [14:2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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