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우리 가슴에 세종이 최고 인물로 담겨 있기는 한가
[답사기] 15일은 '세종대왕 탄신일', 2007년에 이어 영릉을 다시 돌아보다
 
김영조   기사입력  2009/05/15 [10:21]
 
▲ 세종 영릉의 세종대왕 동상 아래 비문에는 "나라에 독특한 글자가 없음을 한탄하시어"라는 어처구니 없는 문구가 보인다.     ©김영조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한다.” 

누구나 다 잘 아는 훈민정음 서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 아니 공무원이면서도 이 서문을 읽어보지 못한듯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세종 영릉을 관리하는 문화재청과 관리사무소 직원들이다. 나는 지난 2007년 8월 영릉을 방문하고 문제점을 확인한 뒤 문화재청에 질의를 했고 어렵사리 답을 받아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영릉의 가장 큰 문제점이 세종 동상 아래의 비문에 있다고 보았다. 그건 위와 같은 서문과 달리 “나라에 독특한 글자 없음을 크게 한탄하시어”라고 쓰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문화재청에 이를 고쳐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각계각층의 의견 청취 등을 통하여 보다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라는 대답뿐이었다.  

그 뒤로부터 두 해가 다 되어 가는 지난 4월 15일 영릉에 들러 비문을 다시 확인한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중요한 사안에 아직도 각계각층의 의견수렴을 못 했단 말인가? 내용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다. 초등학생들도 누구나 아는 내용을 문화재청 사람들만 모른다니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비문에 있는 또 다른 문제는 1975년을 한자로 ‘一九七五年’으로 쓴 것과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 분부를 내리셨다. ~ 이 뜻을 받들어”라는 글이 보이는 것이다. 아무리 군사독재 시절의 작품이라 하지만 아부의 정도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도 여전한 모습이다. 

▲ 오목해시계(앙부일구), 백성이 쉽게 시각을 알 수 있도록 했다는 12지신 그림이 없다.     ©김영조
 
 
▲ 자격루 모형. 세종 당시에는 분명히 자동시보장치가 있었는데 이 모형에는 자동시보장치가 없다. 아래 설명문에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새로 복원한   자동시보장치 달린 자격루가 보인다.  ©김영조
 
영릉엔 비문 만 문제가 아니다. 세종실록 77권 19년(1437년) 4월 15일 자 기록에 보면 “무지한 남녀들이 시각에 어두우므로 앙부일구(仰釜日晷, 오목해시계) 둘을 만들고 안에는 시신(時神)을 그렸으니, 대저 무지한 자로 하여금 보고 시각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하나는 혜정교(惠政橋) 가에 놓고, 하나는 종묘 남쪽 거리에 놓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글씨를 모르는 백성을 위해 12지신 그림을 넣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영릉에 있는 오목해시계(앙부일구)는 12지신 그림이 아직도 없다. 어떤 이는 16세기 복원품은 12지신 그림이 없으므로 지금 복원품이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엉터리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영릉이나 세종임금과 관련한 시설에 있어야 할 오목해시계는 분명 세종 당시의 것이어야 한다. 

또 자동시보장치가 달렸기에 당시로는 가장 뛰어난 시계로 평가받는 자격루는 자동시보장치가 없다. 2007년 기사에도 분명히 똑같은 지적을 했던 것인데 여전히 그대로인 채이다. 자동시보장치가 없는 자격루는 흔히 말하는 팥소 없는 찐빵이다.  

전에는 그 본 모습을 알 수 없었기에 자동시보장치를 생략할 수밖에 없었더라도 지난 2007년 자동시보장치 달린 자격루를 국립고궁박물관에 복원해 놓았기에 이를 토대로 모양만이라도 자동시보장치를 붙였어야 했다. 


▲ 잘 생긴 한옥 툇마루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문화재 보호"란 팻말만 있고, 잘 모셔진 소화재가 거슬린다.     © 김영조
 
 
▲ 분명히 가운데 길은 임금님만 가야하거늘 사람들은 무심코 그냥 걷는다.     © 김영조
 
 
▲ 분명히 훈민문 앞에는 "동입서출"이란 팻말이 있건만 서입동출하는 사람도 많다.     © 김영조
또 영릉 입구 오른편에 사당같이 생긴 한 건물이 있는데 사람들이 들어가도록 해놓고 뭐하는 건물인지 설명이 없다. 한옥을 잘 지어 놓은 건물 툇마루에는 "문화재 보호“라는 팻말만 덩그라니 놓여있다. 이 건물이 어떤 문화재일까? 그리고 마루엔 “문화재 보호”라는 팻말 말고도 소화기 두 대가 떡 하니 놓여있다. 물론 문화재를 화재로부터 보호하는 건 중요하지만, 소화기를 문화재의 전면에 놓는 것은 거슬리는 모습이 아닐까? 

관람객들의 아무 생각 없는 통행도 문제로 보였다. 임금과 관련된 곳에는 분명히 가운데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며, 문도 “동입서출(東入西出)” 곧 동쪽으로 들어가서 서쪽으로 나온다는 법도가 있지만 그를 지키려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다만, 칭찬해주고 싶은 것은 당시 유물을 보호하기 위한 철책이 높이 90cm에 검붉은 빛깔을 칠해 유물이 아닌 철책만 보인다고 지적했는데 이제 철책은 30여 cm로 낮아지고 한글 자모를 활용한 아름다운 철책으로 바뀌었다. 또 정문 기둥에 치우천황 상이라는 귀면와 무늬장식 전등이 가려져 있었는데 전등을 치운 것도 잘한 일이었다.

▲ 유물 모형의 둘레에는 한글자모를 활용한 아름다운 디자인의 낮은 울타리가 돋보였다.     © 김영조

▲ 영릉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엔 용머리 아래에 아름다운 초롱등이 달렸고, 세종이 친근하게 맞아준다.     ©김영조
 

그와 함께 영릉 경내로 들어가는 길에 설치한 가로등은 용머리 아래에 달린 초롱등과 세종이 반갑게 맞이하는 듯한 느낌의 그림이 영릉의 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이는 여주군청의 훌륭한 작품일 것이다. 그런 가로등과 함께 신록의 아름다움은 세종대왕 동상의 비문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조금은 덜어주었다.
 
오늘은 세종임금 탄신이다. 세계 최고의 글자로 인정받는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임금은 태조 6년(1397년) 4월 10일(양력 5월 15일) 태종(이방원)이 그저 왕자의 신분일 때 경복궁 옆 준수방이란 곳의 사가에서 태어났다. 

그 준수방은 현재 종로구 통인동 137번지로 경복궁 서쪽문인 영추문길 맞은편 의통방 뒤를 흐르는 개천 건너편이다. 3호선 경복궁 전철역 2번 출구를 나와 북쪽으로 200여m쯤 올라가면 성동역사 터 비석과 같은 크기의 작은 비석으로 세종임금이 태어나신 곳을 표시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준수방이 어디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버려두고 있다. 


▲ 영릉 경내엔 꽃들만이 아니라 아름답고 눈부신 신록이 관람객을 반겨준다.     ©김영조
 
 
또 매년 5월 15일을 우리는 스승의 날로 지낸다. 하지만, 이날은 1965년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RCY)가 세종의 탄신을 '스승의 날'로 정하기로 결의한 뒤부터이다. 어쩌면 이 단체가 세종임금을 영원한 스승으로 생각한 것인지 모르나 유감스럽게도 이 날이 세종대왕 탄신인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홍보 부족이라면 더 알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종을 최고의 인물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하지만, 실제 우리 가슴에 세종이 최고의 인물로 담겨 있는가? 최소한 세종 탄신을 기리고 탄신지 준수방을 확인하여 세종임금 기념관이라도 지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영릉의 비문은 하루속히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로 시작하도록 고쳐야만 한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9/05/15 [10:21]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