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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운동은 없고 남성만 남으려는가
[정문순 칼럼] 내부에 도사린 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집단은 자멸
 
정문순   기사입력  2009/02/09 [21:34]
민주노총과 성폭력과의 인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가 성폭력 가해자들로 실명 공개한 16명 중 5명이 민주노총 소속이었다. 그때 민주노총은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던가. 지도부는 철저한 진상조사를 다짐했지만 이미 실명이 공개된 마당에 가해자의 이름을 감추려고 했으며 지도위원으로 있던 가해자에게 사퇴를 권고하는 것으로 조용히 마무리 지었다. 사건 처리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지연되는 사이 가해자 중 한 사람이 민주노총 부위원장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반성폭력운동의 대열로 나아가자', 사회화와 노동 78호)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때도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이 옹호를 받고 되레 자신들이 공개적으로 지목당하여 비난받는 상황에 내몰림으로써 성폭력 피해보다 더한 후속 피해를 당해야 했다. 개인 차원의 성폭력 피해를 공개한 경우 여성 피해자는 남자 앞길을 가로막는 몹쓸 여자라는 가해자측의 비난에 시달리기 십상인데, 이 경우에는 사소한 일로 조직의 앞길을 망치는 여자들이라는 책임 전가가 횡행했다.  
 
비단 ‘100인위’ 사건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민주노총을 포함한 운동조직에서 성폭력 풍문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는 건 부인하기 힘들다. 다만 이번 경우는 피해자가 민주노총 지도부의 비도덕적인 태도에 침묵하지 않았기에 없던 일인 양 덮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지도부가 얌전히 있었거나 피해자가 입을 다물었거나 둘 중의 하나였어도 이 사건 역시 십중팔구 피해자만 가슴에 멍이 든 채 풍문으로만 남아 사람들의 입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     © 민주노총

소문이든 진실이든 성폭력 사건이 드물지 않게 드러나고 있음에도 민주노총 문화에서 성범죄는 일어날 수도 없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출적인 사건으로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진보 진영 중에 있는 듯하다. 성폭력이 일어난 것도 모자라 지도부가 사건을 은폐하고 피해자를 압박하는 일이 과연 평지돌출의 일로 보이는가?   
 
남성=투쟁=노동자라는 등식

민주노총에 조금이라도 불신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노동자에게 자본의 종으로 살라고 요구하는 보수세력만이 아니다. 민주노총의 마음자세와 이들이 쓰는 언어가 전형적인 남성우월적인 것이라는 점은 여성계에서 종종 지적돼왔다. 금속노조연맹 같은 대기업 남성 노동자 조직에 무게를 두고 있는 민주노총에서 비정규직과 여성 등 약자의 노동문제는 사업 비중에서도 훨씬 후순위로 밀려나 있다. 사실 민주노총의 남성중심적 사고는 어제오늘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산업구조가 다변화되고 있음에도 저임금으로 노동자를 후려치려는 자본에 대해 남성의 자존심으로 맞섰던 1980년대 전노협 시절의 정서에 맥이 닿아 있기 때문이다.  
 
남자답게 씩씩하게 살기 위해서라도 부당한 억압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연약한 여자를 보호하는 데 자신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 이해보다 자존심 가진 남자이자 한 가정의 생계 책임자로서 무릎 꿇고 살 수 없다는 정서가 더 강하게 지배해온 것이 전노협을 거쳐온 민주노총의 문화다. 이 경우 노동운동의 동력이 자본-노동보다 남자다움-남자답지 못함의 대립 관계에 두어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도 뿌리 뽑히지는 않았지만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80년대 중후반 이전만 해도 사업장에서 관리자의 폭언이나 구타  등 심각한 인권침해는 다반사였다. 범죄조직이나 군대가 아니고서야 구타는 남자가 남자를 다루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군대의 경우 가혹 행위는 아직 남자로 대우받지 못한 ‘비남성’이 남성으로 길들여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때리는 자본가는 노동자를 남자로 대우하지 않으면서 자신만 남자로 생각한다. 자신을 못나고 말 안 듣는 자식인 노동자를 보살피는 아버지로 상정하고 가부장적 사고방식으로 노동자를 통제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 방식은 스스로 남성이라는 자의식을 곧추세우는 것이었으며 이는 자신들이 대립하는 자본가와 동질적인 정서 체계에 있는 것이었다. 노동운동사를 거칠게 단순화시켜 말하면 누가 더 남성다운지를 놓고 자본과 노동이 대립각을 세워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와중에서 이기는 쪽이 남자였으며 깨어지더라도 비굴하지 않아야 남자였다.  
 
현대중공업의 골리앗이 상징하는 것은 불굴의 노동자 정신뿐만이 아니라 비바람에 단련된 강인한 남성이며, “사나이 한평생 노동자로 태어나 투쟁과 투쟁으로 살아온 우리 이것이 나의 길 노동자의 길”이라는 노동가요 가사에서 말해주듯 사나이, 노동자, 투쟁은 같은 맥락에서 얽혀 하나가 된다. 여기에는 싸움과 노동자는 남자에게 속한 것이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이 노래가 확인해주는 건 노동자는 곧 투쟁하는 사나이라는 것이다. 싸우지 않는 노동자는 사나이가 아니라는 이 폐쇄적인 도돌이식 언어 구조 안에서 여성 노동자가 헤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진다. 심지어 노래운동가 김호철은 여성 노동자의 각성을 촉구하는 노래를 지으면서도 “딸들아, 일어나라”라고 함으로써 여성을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어버이의 딸로 부르는 반여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 특유의 남성중심 문화에다 대규모 공장의 조직화된 남성 노동자에 의존적인 토대에서 노동조직이 성장할 경우, 여성 노동자는 철저히 주변으로 밀려나고 위계화되는 처지를 면할 수 없다. 주변부를 강요받는 여성 노동자의 처지는 임금 체계에서뿐만 아니라 남성 동료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파업 등으로 남성 노동자들이 농성에 들어갈 경우 여성 가족들은 밥을 싸들고 와서 지원한다. 이 경우 아내가 남편에게 밥을 나르는 것은 굶는 식구를 돕는다는 가족애 차원을 넘어 남자의 노동운동을 보완하는 여성의 보조노동으로 변모하거나 그렇게 비치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가 보수화할수록 여성 등 정치적 소수자의 의제는 약해지기 쉽다. 그래서 독재-반독재의 단순한 80년대식 대립은 여성에게 좋은 것만이 아니었다. 90년대 이후에 성장한 소수자 운동도 앞 시대에 쟁취해낸 민주화라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눈앞에 닥친 일을 이겨내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사건 은폐 시도를 낳았던 민주노총의 태도도 독재 정권과 싸워야 하는데 ‘사소한’ 일에 힘을 소진할 수 없다는 강박증에 기인했다. 독재 정권만 적일 뿐 자신의 내부에 도사린 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집단에게 그 ‘사소함’을 무시하다가는 안에서부터 무너지는 자멸의 길밖에 없음을 경고하고자 한다.
 
이미 노동운동은 민주노총이 기대고 있는, 자본에 타협적이거나 무력한 남성 정규직과, 정규직 노동 조직의 외면 속에 악전고투하고 있는 비정규직 운동으로 갈라서고 있으며 힘의 중심도 후자에 기울어가고 있다. 이러다가는 노동자 조직률 10%대의 민주노총이 비타협적인 투쟁의 전통도 잃어버리고 남성우월주의 조직으로만 남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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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2/09 [21:3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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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흠흠흠 2009/02/10 [21:10] 수정 | 삭제
  • 이 글이 교육운동 합답시고 나대며 실제로는 학생과 청년들 그리고 당당한 인민 대중들에 대해 서열질 하고 가치질 하면서 그들을 객체로 주변화시켜 내고, 서울대 패권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계급(계층)들을 비판하는 플레임으로 인민대중에게 열패감과 자기비하를 내재화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그런 얼치기 풋내나는 진보 운동꾼들에게 어떤 힌트를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