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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음, 까치를 위해 홍시를 남겨두다
[새해소망] '혼돈' 무자년 보내고, 2009 기축년에는 이웃을 돌아보며 살자
 
김영조   기사입력  2008/12/31 [19:33]
▲ 기축년 소띠해     © 이무성

이제 무자년 한 해가 저물고 기축년 소띠해를 맞았다. 지난 무자년을 새롭게 맞으면서 우리는 무자년이어서 “무지하게 좋은 해”가 되리라 덕담을 했었다. 그런데 무자년은 온 세상에 우울한 소리가 차지해 버린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무지하게 좋은 해”가 아니라 “무지하게 우울한 해”로 마감하게 되는 우리네 심정은 쓸쓸하다. 
 
하지만, 지난해 구세군 자선냄비에 들어온 돈을 더 늘었다든가? 그것도 큰돈이 준 대신 작은 돈이 십시일반 모여들었다고 했다. 어려울 땐 부자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이 이웃을 더 걱정하고 있음이라! 어려운 이가 남의 어려운 사정을 더 잘 헤아리고 있다는 얘기렸다. 
 
우울한 무자년을 넘어 새해를 맞으며 나는 우리 문화의 “더불어 사는” 풍속을 되돌아보려고 한다. 예전 내가 어렸을 때 들었던 얘기로는 적어도 시골에 가면 어느 집에서든지 밥 한 끼 얻어먹는 건 예사로운 일이었다고 했다. 그만큼 우리 겨레는 넉넉한 마음씨를 지니고 살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런데 우리 겨레의 세시풍속에는 그런 심성을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 세시풍속을 살펴보자. 
 
먼저 “담치기” 풍속이란 게 있다. 섣달 그믐날 아이들이 집집이 돌아다니며 풍물을 치면(애기풍장) 어른들은 쌀이나 잡곡을 내주었다. 이를 자루에 모아 밤중에 노인들만 계신 집, 환자가 있거나, 쌀이 없어 떡도 못하는 집들을 찾아다니며, 담 너머로 던져주곤 했다. 누가 던져 넣었는지 아무도 몰랐고, 알고도 모른 체했다고 한다. 이 풍속이 바로 “담치기”이다.  
 
이웃의 고통을 나눠 가지려는, 그러면서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하는 아이들의 따뜻한 마음일 것이다. 옛 아이들의 이런 세시풍속을 오늘에 되살리면 얼마나 좋을까? 
 
▲ 섣달 그믐날의 담치기 풍속     © 이무성

또 입춘이나 대보름날 전날 밤에 하는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도 있다. 이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을 꼭 해야 일 년 내내 나쁜 일을 면한다는 풍속이다. 예를 들면 밤중에 몰래 냇물에 가 징검다리를 놓는다든지, 거친 길을 곱게 다듬어 놓는다든지, 다리 밑 거지 움막 앞에 밥 한 솥 지어 갖다 놓는다든지 등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그것도 아무도 몰래 해야만 했다. 
 
상여 나갈 때 부르는 상엿소리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입춘날 절기 좋은 철에 /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공덕(救難功德) 하였는가 /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越川功德) 하였는가 /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活人功德)하였는가” 우리 겨레는 이처럼 죽어서 입춘날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을 했는지를 염라대왕으로부터 심판받는다는 생각마저 했다.  
 
그뿐인가? 조선시대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의 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을 보면 봄가을로 양로잔치 곧 “치계미(雉鷄米)”를 베풀었다. 이는 특히 입동, 동지, 섣달 그믐날 밤에 나이가 드신 노인들에게 선물을 드리는 일이었다. 논밭 한 뙈기도 없는 가난한 집에서도 한 해에 한 번은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기꺼이 금품을 내놓았단다.  
 
그와 비슷한 풍속으로 정월 초이렛날의 ‘이레놀음’이란 것도 있었다. 이 풍습은 여자들이 아침부터 쌀자루를 메고, 집집이 돌아다니며, 생활 정도에 따라 쌀을 거두어들인다. 거둔 쌀 중에 밥할 것만 남기고, 모두 팔아 김, 조기 등 반찬거리를 사고 약간의 술을 마련했다. 그것을 마을 어른들에게 바치고, 동무들끼리 오순도순 한자리에 모여 모둠밥을 해먹고 윷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냈는데 이를 “이레놀음”이라 했다. 
 
한 가지 더 살펴보자. 겨울철로 들어서는 동지 풍속으로 고수레가 있다. 팥죽을 쑤어 사람들이 먹기 전 대문이나 담 등 집 둘레에 뿌리며 악귀를 쫓았던 풍속이다. 그런데 이 고수레는 악귀만 쫓았던 게 아니다. 겨울철 먹을 것이 부족했던 짐승들에게 너희도 같이 먹자는 배려가 아니었던가? 
 
우리 겨레의 “더불어 살기”는 콩농사에서도 있었다. 우리 겨레는 콩을 심을 때 한 구멍에 세 알씩 심었다. 한 알은 날아다니는 새를 위해, 한 알은 기어다니는 벌레를 위해, 한 알만 자신의 몫으로 심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만 모두가 행복하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런 아름다운 우리 겨레의 세시풍속, 철학을 생각하면서 잡지 <좋은생각> 2005년 1월호에 실렸던 효림스님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어 본다. 
 
“달빛이 희미한 그런 밤, 노스님은 진작부터 곳간 문 열리는 소리, 쌀 퍼담는 소리, 부스럭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니 비쩍 마른 한 사내가 쌀 한 부대를 가지고 비비적댈 뿐 지게 발을 땅에서 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허기진 탓일 것입니다. 발소리도 없이 가만히 뒤로 돌아간 스님은 쌀 지게를 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는 사내에게 빨리 가라는 손짓만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도둑이야”하고 소리를 질렀거나 도둑을 때려잡았겠지만 노스님은 그냥 지게를 밀어주고, 가라고 손짓만 했단다.  
 
또 어떤 스님은 내게 이런 말씀을 들려 주셨다. “남에게 보시를 많이 하십시오. 그러면 다 내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남에게 내 것을 나눠주는 것이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더 많은 이익이 되어 돌아온다는 말씀이었다. 설령 물질적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남에게 나눠준 다음에 오는 마음의 평화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지 않을까? 
 
▲ 김남주 시인은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라고 노래한다.     © 김영조

보시를 하고 남과 더불어 사는 것이야말로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바탕이리라. 우리 겨레가 멍청해서 더불어 산 것이 아니라 바로 더불어 사는 일이야말로 남을 위한 일이기 전에 모두가 내게 다시 복으로 되돌아오는 일이었음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김남주 시인은 <옛 마을을 지나며>라는 시에서 감나무에 남은 홍시의 의미를 이렇게 노래했다.  
 
시인 김광욱의 노래처럼 절집 처마 밑을 스치는 시린 바람에 풍경이 아파서 대댕대댕 울고 있다. 어찌 풍경만 울겠는가? 세상엔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파 우는 많은 이웃이 있다. 내가 배부르고 등 따뜻하다고 방바닥을 둥글고 있으랴? 이제 우리는 김남주 시인이 외친 조선의 마음을 되찾아 기축년 한해를 살아가면 좋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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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12/31 [19:3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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