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더나은 세상으로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무책임한 언론, '정선희 죽이는' 보도 그만하라
[하재근 칼럼] 가혹한 루머보도는 개인에 대한 테러, 선정적 보도 그만둬야
 
하재근   기사입력  2008/12/24 [15:50]
23일 오전에 한 포털 메인에 이런 기사가 떴다.

“안재환 유가족, ‘정선희, 사람의 도리는 아냐’”

무슨 일이 난 줄 알았다. 기사를 보니 정선희가 이사를 했다는 얘기다. 유가족이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이유다. 무슨 죄 짓고 외국으로 도망간 것도 아니고 이사 좀 한 게 사람의 도리랑 무슨 상관이 있나? 정선희에게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도 밝혀진 바가 없다.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데 왜 자꾸 이런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나?

신문에서 편집권이 무서운 것은 기사의 제목과 배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제목에서 받은 인상으로 사태를 파악한다. 세부적인 기사 내용은 잘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편집과 제목이 중요하다.

정선희가 사람의 도리를 못 했다는 제목이 매체와 포털에 편집돼 올라가면, 정선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와 상관없이 나쁜 인상이 강렬하게 남게 된다. 그 정도로 난도질하려면 무슨 확실한 증거가 나온 다음에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증거가 나와도 그렇다. 천인공노할 중죄도 아니고, 정치인의 파렴치한 행위도 아니라면 세상 살면서 할 수 있는 일 정도로 한 사람을 저렇게 몰아세우면 안 된다.

밤에는 또 이런 제목의 기사가 한 포털 메인에 떴다.

“안재환 유가족 ‘정선희가 남편을 노숙자로 만들었다‘“

정선희를 죽일 셈인가? 매체는 자신들이 단지 유가족의 주장을 전했을 뿐이라고 보도 행위를 정당화할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 세상엔 전할 말이 있고, 전할 필요가 없는 말이 있다.
 
▲     © CBS노컷뉴스

- 개그맨 정선희를 죽이지 마라 -

정선희는 연예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개그맨이다. 개그맨은 웃기는 사람이다. 과거에 한 개그맨은 추문으로 인해 자신이 ‘웃기는 사람이 아니라 우스운 사람’이 됐다며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다. 추문이 잇따르면 사람이 우스워진다. 그러면 웃기기 힘들어진다.

우스운 사람 정도가 아니다. 매체들이 하이에나처럼 달라붙어 안재환-정선희 보도를 지겹도록 해대는 바람에, 정선희는 보도 내용과 상관없이 대중에게 ‘불쾌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정선희의 실체나 사건의 실상과는 전혀 별개로, 점철되는 불쾌한 보도의 이미지가 그 이름에게로 옮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럴 수밖에 없다.

매체가 개그맨으로서의 정선희를 죽이고 있다. ‘개그인격살인’이다. 사실인용 보도를 했다고 해서 매체의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건 말건 대중의 호기심을 이용해 기사 장사만 하면 그만인 게 매체의 윤리인가? 사실 보도 그 이상의 성숙한 보도태도가 요청된다. 

연예인은 좋은 느낌, 좋은 이미지, 좋은 기억과 연결돼야 하는 존재다. 매체가 정선희를 안 좋은 기억에 결박 짓고 있다. 설사 나중에 정선희의 결백이 밝혀진다 해도 정선희의 ‘웃기는’ 연예활동은 타격을 받을 것이다.

연예인은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이미지가 망가질까봐 쉬쉬하는 존재다. 매체가 바로 그런 이미지를 부숴버리고 있다. 조폭인가?

-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기다려라 -

그렇게 이 사건이 보도하고 싶다면 최소한 사실관계가 명확히 밝혀질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야 한다. 밝혀진 것이 없는데 극단적인 주장만 자꾸 보도해봐야 불쾌한 인상만 남길 뿐이다.

정선희도 보호 받아야 할 시민이고, 대중 연예인이 직업이라는 점이 중시되어야 한다. 정선희의 사생활은 국민의 알 권리가 아니다. 가혹한 루머보도는 개인에 대한 테러나 마찬가지다.

‘아님 말고’식 보도로 평생 상처 받을 사람이 있다. 정치인이나 권력자같은 공인이라면 한 점의 의혹이라도 철저히 규명하는 것이 맞으나, 한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의혹 까발리기는 사회적 공해다. 당사자에게 상처가 되고 사회적으로도 공해인 보도를 언제까지 봐야 하나? 정선희 보도 이제 그만 좀 하자.
* 필자는 문화평론가이며 <학벌없는사회> 사무처장을 역임했습니다. 블로그는 http://ooljiana.tistory.com, 저서에 [서울대학교 학생선발지침 - 자유화 파탄, 대학 평준화로 뒤집기]등이 있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8/12/24 [15:50]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솔선수범 2008/12/24 [19:31] 수정 | 삭제
  • 진중권의 무식함을 폭로한다 (1)

    진중권에 필요한 건 겸손이 아니라 실력


    김휘영 / 문화평론가, bignews@bignews.co.kr 등록일: 2008-12-22 오후 10:59:27


    옛날 어느 마을 동굴에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살았다. 이 지네는 해마다 처녀를 요구했는데, 그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마을에 그 지네의 횡포로 큰 재앙이 닥쳤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섣달그믐이면 처녀 한 명을 제비뽑기로 받쳤는데 그 해에도 한 처녀가 뽑혀 지네의 제물로 바쳐질 운명이었다. 처녀는 곧 제단에 바쳐졌고 무수히 많은 발이 달린 거대한 지네가 처녀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디선가 두꺼비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지네와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싸움을 계속하더니 결국 둘 다 죽고 말았다. 그 덕에 목숨을 구하게 된 처녀는 두꺼비 장례를 잘 치러 줬고 그 이후 더 이상 마을에 지네의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이 라는 설화에 나온 서사구조다.

    이 설화를 영화 와 비교해서 분석해보자. 발이 숱하게 달린 지네는 악한 이무기인 부라퀴에, 처녀는 이든과 사라에 마지막에 지네를 죽이고 처녀를 구한 두꺼비는 선한 이무기 역할에 절묘하게 들어 맞는다. 이 설화를 소개한 의 저자는 현직 대구교대 교수인 이강엽 교수다. 그는 설화 속의 그 처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싸우든지 또는 야반도주라도 해야 하지 않았을까 라고 자문하고 있다.

    설화 속의 지네는 그의 요구를 듣지 않으면 한 동네를 끝장낼 만큼 대단한 존재이다. 즉 영화 의 부라퀴와 같은 존재다. 진중권의 표현대로라면 설화 속 처녀는 강력한 악(惡)인 지네에 대항해서 특별히 한 일이 없다. 이든과 사라 더러 하는 일 없이 도망만 다닌다고 지적했는데 이 설화에 나온 주인공은 그 도망조차도 하지 않는다. 사실 영화 속의 이든과 사라는 선한 이무기가 나타날 때 까지 여의주를 보존해야 하는 천명을 가진 사람들이었지 그 여의주로 적극적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진중권은 도망만 다닌다고 표현했지만 그들의 도망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선한 이무기가 올 때까지 여의주를 보존하는 매우 중요한 행위였고 세계를 암흑에 빠지는 불행을 막는 절체절명의 의미를 가진 행동이었음은 를 본 사람은 다 안다. 오히려 제대로 도망 다니지 못해서 부라퀴에게 여의주를 뺏긴다면 선한 이무기의 승천도 불가능하고 온 세상이 암흑의 세상으로 빠지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오죽했으면 그들의 전신인 나린과 하람이 가장 극단적인 저항인 자살까지 감행했겠는가?

    지능이 좀 모자라는 진중권은 사라와 이든은 하는 일이 없이 도망만 다녔고 마지막에 선한 이무기가 나타나서 일거에(?) 해결했으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이며 그래서 엉망진창이라고 혹평했다. 진중권의 지적대로라면 설화는 처녀가 그 도망조차도 안다니고 또 난데없이 두꺼비가 나타나서 지네를 해치우는 구조로 끝났으니 분명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지능수준이기에 당연히 진중권의 수준을 벗어나 있는, 그래서 정상적인 사고구조를 가진 사람이면 이 지네장터 설화를 보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 이론적으로 딱 꼬집어 설명하는 사람들은 드물지라도 하여간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가 아니라는 것 쯤은 직감적으로 안다. 속의 그 처녀는 도망 다니는 일조차도 안했으니 영락없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고 해야 할텐데 왜 그럴까? 이를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일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고 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조금 깊은 차원에 관계되는 논증이다.

    마땅히 지식인이라면 바로 이 의문에 해당하는 이유(reason)부분을 일반인들에게 명료하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부분을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규명해 낼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인문학을 탐구할 수 있는 남다른 자질(資質)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느끼다시피 설화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데우스 구조와 비슷한 듯 보이겠지만 전혀 아니다. 더구나 영화 속의 사라와 이든은 설화 속의 처녀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했으니 더욱 더 아닐 수 밖에 없다. 영화 를 두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고 말한 건 순전히 진중권의 무식함,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중권의 낮은 지능지수 때문이다. 진중권이 챙피한 줄도 모르고 신문지상을 통해 말한 소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사건은 진중권 스스로가 자신의 낮은 지적능력(IQ)을 만천하에 드러내고만 어처구니없는 자기 고백적 해프닝일 뿐이다.

    설화와 가 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가 아닌지를 알기 쉽게 논증해 보겠다. 여기서 필자가 하필이면 진중권의 지능지수(IQ)를 거론할 수 밖에 없는가 하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용어를 접하고 그 내용의 윤곽을 아는 건 누구나 배움이나 학습으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떤 작품에 그걸 적용하여 규명하는 건 응용의 능력, 즉 상당한 지적(知的)능력이 요구되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수학 공식을 달달달 외우는 것과 그 외운 공식을 바르게 적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된다. 외우는 건 노력으로 될 일이지만 문제해결능력은 지능지수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진중권이 재수하고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다고 알려져 있는 걸로 보아서, 아마도 필자와 같은 해에 학력고사를 치고 서울대에 입학했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그 당시 학력고사에서 언어영역(국어)에서 만점을 받았다. 특별히 국어를 좋아한 탓도 있었지만 학력고사와는 다르게 다소 애매한 문제도 많이 출제된다는 전국 모의고사에서도 수차례나 만점(滿點)을 받으면서 전국 수석을 차지한 적이 있다. 이런 까닭에 적어도 언어(한국어)로 구성된 텍스트의 해석이나 응용 능력에서 필자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정도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런 필자가 진중권이 쓴 글을 보고 내린 결론은 진중권은 일단 국어, 즉 언어영역에 대한 자질(資質)이 한참이나 딸리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개념 파악이나 응용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음을 너무나 많이 확인했는데 이를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이에 대해 궁금한 사람들은 필자가 몇 년 전에 대자보에 쓴 칼럼인 '진중권의 박정희콤플렉스와 지적 사기'라는 글을 참고로 하기 바란다. 그 글을 보면 진중권이 얼마나 개념파악이 안되는 사람인 줄 파악할 수 있다. 사람들이 진중권의 글에 "비꼼은 있으되 내용은 없다" 또는 "치졸하고 저급한 비방은 있되 그 이유나 대안은 없다"고 간단하게 혹평하는 이유도 알 수 있다. 이런 일도 한결같이 진중권의 낮은 지능지수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건으로 자신의 지능수준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만 사건은 진중권으로서는 필연적인 결과지만 사실 이건 약과다. 진중권이 필자의 이 지적에 억울하다면 진중권이 쓴 어떤 책이라도 좋으니 무작위로 가져오면 당장 그 오류들을 대중 앞에 드러내 줄 용의가 있다 필자에겐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 심심풀이 땅콩처럼 쉬운 일임을 먼저 밝혀둔다. 대신에 진중권은 자신에 대한 주제파악이 안돼서인지 아무데나 나대면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과대망상 증세는 충분히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좀 더 자세히 논하겠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성립조건 2가지

    어떤 서사물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를 가졌다고 진단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아마 이 부분은 어느 책에서도 말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는 필자의 독자적인 논증이다. 하지만 별로 어려운 내용이 아니므로 이 글을 읽는 순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신(해결사)의 비의존성

    어떤 서사물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구조라고 말하려면 첫째 미궁처럼 복잡한 구조에 빠진 극을 단번에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해결사, 즉 신은 그 극 속의 등장인물들과 특별한 인연(karma)이나 연관성이 없어야 한다. 이것을 학문적 용어로 말하면 신(神)의 비의존성(independency)이다. 즉 돌쇠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전설의 고향 같은 설화에서 돌쇠가 봉착한 난관을 해결해 줄 해결사로 등장한 산신령이 있다 치자. 그런데 그 산신령이 과거 어느 시점에 돌쇠에게 큰 도움을 받아서 곤경을 헤쳐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 산신령의 등장이 과거 돌쇠에게서 받았던 그 은혜나 빚을 갚기 위해서 등장했다면 이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될 수 없다. 물론 돌쇠가 산신령을 도와주는 상황은 관객들이 알 수 있도록 스토리 속에 미리 명시되어져 있어야 한다. 지네 장터 설화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가 아닌 이유는 바로 해결사로 등장한 그 뚜꺼비가 제물로 바쳐진 처녀와 특별한 연관이 있는 존재(creature)이기 때문이 그 첫째다. 그 뚜꺼비는 처녀가 제물로 받쳐진 동굴을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두꺼비가 아니다. 다 알다시피 처녀가 우연히 보게 된 뚜꺼비가 불쌍해서 밥찌꺼기를 주는 선행을 베풀었던 뚜꺼비라는 '특별한 관계(special relationship)'가 이미 설정되어 있던 존재였던 것이다.

    속의 해결사로 등장한 선한 이무기도 이든과 사라와 아무런 인연도 없이 길가에서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가벼운 인연을 가진 관계가 아니다. 500년 전에 지네보다 더 흉폭한 부라퀴의 마수에서 세상을 구하고 선한 이무기의 승천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린 적이 있는 '아주 특별하고 끈끈한 인연이 설정된 관계'다. 게다가 선한 이무기가 승천을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환생격인 사라와 이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말하자면 운명적인 관계로 설정되어 있는(doomed) 존재가 선한 이무기다. 그리고 그런 운명은 영화 전반부에 무려 몇 번이나 관객들에게 명시적으로 표현되었다.

    능력의 초월성

    두 번째로 해결사로 무대에 등장하는 신은 등장인물들과 그 능력 측면에서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현격한 차이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극의 복잡한 구조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해 특별초빙한 신(神)이 처치해야 할 적(antagonist)과 싸우면서 오히려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지경에 처하거나 보는 사람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투쟁을 해야 하는 구조라면 그것 자체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라는 논리 자체를 허물어뜨리고 마는 모순(矛盾)을 초래하게 됨을 누구나 쉽게 알게 된다. 즉 그런 해결사는 데우스가 아니다. 그건 극을 구성하는 또 다른 등장인물의 역할(role)을 맡아 극의 완성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전혀 다른 차원의 서사구조를 가진 극(劇)이 되고 만다.

    보통 데우스적 역할을 하는 해결사는 예를 들어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는 등의 방식으로 도술을 부리거나 악한 존재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권능(힘)으로 능히 상대를 제압하고 상황을 종료시키는 가히 초월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극의 말미에 나타난 신이 적과 싸우면서 힘겨워서 외려 낑낑대야하는 구조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랄 수 없다. 설화 속의 해결사 두꺼비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속의 데우스와 같은 존재가 될려면 뚜꺼비가 처리해야 할 상대가 거대하고 막강한 지네괴물이 아니라 기다랗게 뻗어나가는 단 한 번의 혓바닥 놀림으로도 해결되는 파리 정도여야 논리에 부합한다. 그런데 설화에 나오는 지네 괴물은 파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다. 두꺼비는 악의 존재인 지네를 손쉽게 해치우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힘겨운 상대와 싸워야 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즉 이 두꺼비는 바로 앞에서 말했듯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의 해결사가 아니라 이 설화가 주려는 주제의식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가진 또 다른 캐릭터일 뿐이라는 뜻이다. 이런 차이점을 명료하게 표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모종의 이질감을 느끼기 때문에 설화에서 비록 주인공인 처녀가 아무 일도 없고 게다가 도망조차도 가지 않았고 결말에 두꺼비가 해결사로 나타나서 악의 존재인 지네를 해치우지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구조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직감(直感)이야 말로 보통 천재들에게 발달했다고 하는 선험적 직관이라고 한다.

    논의를 좀 더 진행시켜 보자. 여기서 말한 주제의식은 무엇일까? 바로 권선징악이다. 서양의 캐럴 송에도 나오는 '우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안 주고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들에게만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준다'는 식의 권선징악적 주제는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널리 이용되는 서사구조인데 이 구조가 널리 이용되어 온 이유는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기껏 수단적 차원에 불과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규정한 예술작품의 궁극적 목적인 감정순화 즉 카타르시스에 매우 유리한 구조이기 때문임과 관계가 깊다. 생각해 보라. 선행을 쌓은 자가 복을 받지 않고 오히려 더 비참해지고 또 악행을 저지른 자가 징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복(福)을 받는 구조로 카타르시스라는 목적을 달성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누리꾼들에게 '서울대 나온 사람답지 않게도 학습능력이 모자란다고 평가받는 진중권'을 위해서 좀 더 자세히 강의해 줄까 한다. 그것도 진중권이 이해하기 쉽게 진중권 자신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결말을 맺는 구조로 예를 들었던 헤라클레스가 등장하는 경우로 설명하겠다. 물론 무료 강의다. 진중권이 예를 든 고대 연극에서 헤라클레스가 등장해서 일거에 해결하는 방식의 연극에서 진중권 학생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다. 그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헤라클레스와 맞장을 뜰 상대가 있는가? 당연히 없다. 헤라클레스와 맞장을 뜨면서 엎치락뒤치락 할 정도의 악역이 존재해서, 그 복잡한 구조를 헤라클레스가 일거에 해결할 수 없다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용어 자체의 존립근거가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그렇게 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광분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처음부터 없지 않는가? 놀랍게도 헤라클레스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가 일거에 해결할 수 없는 막강한 상대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스토리 구조가 있다. 바로 헤라클레스가 신이 되기 위한 과제를 그린 12가지 공역(노역)을 그 내용으로 하는 신화(神話)인데 이것 또한 당연히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가 아니다. 이 신화들은 헤라클레스가 주연이 되는 서사구조이지 이를 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는 바보들은 없다. 혹시 진중권은 그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 진중권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본질적 속성이 뭔지도 모르고 있는 까닭에 그걸 판단할 능력자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지상에서 난리를 일으키는 악한 이무기를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가 내려와서 가볍게 응징하고 사라와 이든을 구해주고 끝내는 구조라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울 수 있다. 문두에 밝힌 설화와 영화 는 결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필자가 밝힌 해결사(神)의 비의존성 조건과 능력의 초월성 조건 중 어느 한 가지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진중권이 이 논증에 이의 있다면 그 반 예를 들어 필자를 깨우쳐 주기를 요구한다. 아마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또 한번 진중권의 지능수준을 명백하게 확인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만일 이 가 영화화된다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어떤 대목일까? 당연히 지네와 뚜꺼비 간의 치열한 싸움이 될 것이다. CG 등 최첨단의 영상 기술력도 이 대목에 가장 신경을 쓰서 활용해야 한다. 따라서 해결사 헤라클레스가 등장하자마자 싱겁게 끝나버리는 구조가 될 수 없다. 영화 의 마지막 대목의 부라퀴와 선한 이무기의 전 세계의 운명을 건 건곤일척의 승부처럼 오히려 최고의 하이라이트 장면으로 부각될 수 밖에 없다.

    영화 속의 두꺼비, 즉 해결사라 할 수 있는 선한 이무기도 그랬다. 그는 아직 절대적 존재인 용(龍)이 되지 못한 미완(未完)의 존재였기에 미합중국의 초현대식 무기와 군대로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인 부라퀴를 손쉽게 처치하지 못한다. 오히려 부라퀴와 싸우면서 목숨을 잃을 것 같은 패배 직전의 위기에 까지 몰린다. 게다가 해결사인 선한 이무기는 사라의 도움을 받아야만 진정한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할 수 있는 존재다. 이는 진중권이 말한 극중에 해결사로 등장한 헤라클레스가 자신이 구해주러 온 처녀가 가진 구슬(여의주)을 얻어야만 신이 되어 올림푸스 산에 올라갈 수 있다는 설정과 같다. 이 경우 어느 누구도 이를 두고 헤라클레스에 의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구조라고 하지 않는다. 그가 정말 백치(idiot)가 아니라면. 이런 구조라면 헤라클레스 자신의 12가지 공역을 다룬 신화적 구조처럼 전혀 다른 서사구조로 자리매김할 뿐이다.

    게다가 마을 처녀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올림푸스 산으로 갈 수 있게 된 헤라클레스가 고마워서 다시 돌아와서 눈물까지 흘리는 구조를 보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IQ(지능지수)가 과연 세 자리를 넘어서는 사람인지 의심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시중에 진중권의 아이큐에 대한 논란이 생기는 건 결코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진중권의 싸가지

    진중권의 글이나 말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진중권의 태도를 문제 삼고 있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진중권의 무식함과 지능에 있다. 진중권이 진짜로 똑똑한 사람이라면 그까짓 것 진중권의 비매너나 싸가지 없는 태도 정도는 지식인의 지적 오만 정도이겠거니 하고 충분히 참아 줄 수 있다. 하지만 진중권의 낮은 지능지수로 인해 엉터리 논리나 틀린 말을 마구잡이로 쏟아낼 때, 더군다나 그런 주제에 다른 사람들을 보고 " 너희들은 이런 것도 몰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어쩌구 저쩌구.... 하는 식의 중권의 황당한 발언을 들어야 하는 진중권보다 똑똑한 사람들은 정말 어이가 없어서 벌어진 입이 안 다물어진다. 정말 "어디서 저렇게 무식하고 황당한 인간이 생겨났을꼬? 항간에 떠도는 진중권의 아이큐가 두 자리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군!" 이게 대한민국 진중권에 대한 지식인들의 태도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적어도 내 주위에 있는 서울대 동문들이 진중권을 보고 "아이큐 두자리" 라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다.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서울대가 낳은 대 망신 케이스로 생각한다는 사람도 있다. 학벌지상주의가 얼마나 큰 폐해를 끼치고 있는지 대한민국 사람들이 진중권을 보면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중권의 불행은 그런 지적 수준으로 미학을 하겠다고 덤빈 일에 있다. 사실 미학과가 소위 말하는 비인기 학과라서 법정대나 필자가 전공한 경제학부보다 커트라인 자체는 낮지만 실제로는 경제학부나 법학계열을 전공하는 사람들보다 아이큐가 더 높은 사람들이 파고들어야 하는 학문이다. 인문학 계열이 거의 다 그렇지만 특별히 미학은 언어에 대한 미묘한 감각까지도 타고 나야 유리한 학문이다.

    진중권 보고 좀 겸손해져라고 주문하는 분들도 더러 있는 모양인데 이 분들도 뭔가 크게 잘못 짚고 있다. 진중권은 아직까지 겸손할 자격을 못 갖춘 사람이다. 겸손이란 뭔가 특정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만이 비로소 가질 수 있는 특권인데 지능 자체가 낮은 진중권이 어떻게 겸손할 자격을 가진 사람인가? 피겨요정 김연아나 박태환 선수처럼 특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겸손할 수 있는 자격을 비로소 갖추게 되는 것이지 등위권에도 못드는 선수에게 겸손하라고 요구한다면 진짜로 황당한 개그가 되고 만다. 진중권은 차후에라도 겸손할 자격을 가질 수 있도록 일단 공부부터 한참 더 해야 할 사람에 불과하다.( 세상 일이 노력만으로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태까지 드러난 진중권의 내적한계 즉 지능수준으로 볼 때, 진중권이 그럴 자격을 갖출 가능성은 거의 절망적이다)

    이를 모르고 진중권의 싸가지를 문제 삼거나 겸손 운운하는 건 진중권의 술수에 말려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진중권에게 다른 사람들이 참고로 할 만한 실력이 있고 거기에다가 겸손까지 갖추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현 상태의 진중권에게 필요한 건 실력을 갖추는 일이지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실력을 갖추고 나서야 비로소 갖추던지 말든지 할 사항이다. 거듭 밝혀왔지만 진중권 현상의 출발점은 그 근원이 진중권의 무식함에 있는 것이지 태도나 싸가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진중권이 워낙 터무니없이 비매너를 일삼고 싸가지 없이 굴어서 그 부분만이 특별히 대중 앞에 부각되는 바람에 더 근원적 문제인 그의 무식함이 그 뒤로 숨겨져 조명을 못 받아 왔을 뿐이다. 사실 태도나 싸가지가 비위에 거슬려도 진중권이 하는 말이 옳고 바르다면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처럼 충분히 들어 줄 용의가 있다. 한데 진중권의 경우 정말 어처구니 없이 무식한 말을 하면서 자신이 하는 말이 몸에 좋은 쓴 말이라고 우겨대고 있으니 정말 개그다. 개그로 쳐도 너무나 뻔뻔한 개그다. 정확하게 말하면 진중권이 내뱉는 말들은 쓴 맛을 가진 약이 아니라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와 진배없다. 혹시 진중권이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이다. 무식과 기침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진중권의 경우 앞으로도 계속해서 무식하고 황당한 개그로 우리를 한껏 웃겨 줄 것이다. / 김휘영(문화평론가)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