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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민요에 차세대 '별' 뜨다, 흥겨움·애절함 드러나
[명반순례] 남자경기명창 희문/야국 고주랑 명창, "전통 바탕된 퓨전 추구"
 
김영조   기사입력  2008/12/23 [10:44]
▲ "남자경기명창 희문/세파에 시달린 몸 만사에 뜻이 없어 고주랑 명창" 시디 표지     © 신나라
 
경기민요(京畿民謠)는 서울 ·경기 지방에 전승되어 오는 민요을 말하는데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었다. 장단은 주로 굿거리 ·자진타령 ·세마치장단 등이 쓰이며, 무가(巫歌)류의 노랫가락·창부타령. 속요류의 아리랑·이별가·도라지타령·태평가·닐리리야·군밤타령, 선소리[立唱]류의 양산도·방아타령·한강수타령·경복궁타령 등이 있다. 서도나 남도 민요에 견주어 맑고 깨끗하며, 경쾌하고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이 경기민요는 여성 소리꾼이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기 드문 남성 소리꾼 이희문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바로 그 이희문이 “남자경기명창 희문”이라는 음반을 신나라(회장 김기순)에서 냈는데 어머니 고주랑 명창의 30년 전 녹음한 음반 “세파에 시달린 몸 만사에 뜻이 없어”를 같이 발매했다. 
 
하지만, 이희문의 등장은 사실 갑작스러운 것이기보다는 희문에게 존재하는 두 사람의 어머니 내공이 낳은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희문에게 낳아주고 대선배가 되어준 친어머니 무형문화재 제57호 이수자 야국(野菊) 고주랑 명창과 희문이 경기소리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도록 적극적으로 이끌어준 소리 어머니 무형문화재 제57호 예능보유자 이춘희 선생이 그들이다.  
 
음반에서 희문의 소리가 울린다. 희문의 목소리에서는 무슨 애절한 사연이 응축되었는지 절절한 회한의 소리 곧 애원성(哀寃聲)이 보인다. 또 남자 소리꾼 특유의 젊고 패기 넘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순간 앳되고 연약하며 묘한 서정성이 함께 하는 아름다움이 들린다. 그의 이런 목소리는 경기민요 특유의 흥겨움과 맑음 그리고 애절함을 잘 드러낸다는 평을 듣는다.  
 
▲ 음반을 녹음한 고주랑 명창(왼쪽)과 남자경기명창 이희문     © 신나라

같이 들어 있는 어머니 고주랑 명창의 음반은 30여 년 전 녹음한 것을 복원해서 발매하는 것이다. 고주랑 명창은 이창배, 정득만, 묵계월 선생에게서 공부했다. 고주랑 명창의 소리는 과거 김옥심 명창의 소리와 흡사하다고 최종민 교수와 탑예술기획 양정환 대표는 말한다. 
 
동국대학교 예술대학원 최종민 교수는 이 음반에 대해 “고주랑이 오래전 녹음한 음악들이지만 지금 들으면 훨씬 새로운 맛이 날 것으로 생각한다. 민요도 연도에 따라 반주형태나 녹음방식이 달라서 1970년대 후반의 녹음과 1980년대 초반의 녹음을 들어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 같아 많은 사람이 들어보기를 권한다.”라고 추천한다. 
 
예전 남성 소리꾼이 드문 요즈음 희문과 같은 남성 소리꾼의 등장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지금 젊은이들이 우리 음악을 홀대하고 관심을 두지 않을 때 희문은 경기소리에 대해 우리가 정성스럽게 보존해야 할 귀중한 재산임을 굳게 믿고 있다. 그가 혜성이 아니라 붙박이 행성이 되도록 모두가 나서야 할 일이 아닐까? 
 
경기소리를 일부 사람들은 마치 기생소리 대하듯 한다. 하지만,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전승해온 무형문화재임이 분명한 경기소리를 기생소리라고 말하는 것이 스스로 우리 문화를 깎아내리는 부끄러운 행위는 아닌지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경기소리를 좋아하는 일이야말로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의 발전을 이끄는 일이 될 것이다. 
 
해가 저무는 양력 설밑을 맞아 희문과 고주랑 명창의 음반을 사서 듣는 일이야말로 작지만 우리 문화를 살리는 소중한 일이 될 것이다. 송년회를 그저 술과 음식만으로 맞을 일이 아니라 경기민요를 들으며 의미를 새기는 날로 만들어 볼 일이다. 
 
경기민요란 나에게 사명감이자 팔자이다
[대담] 경기민요 음반을 낸 이희문과 고주랑 명창

 
대담은 음반을 함께 낸 이희문과 고주랑 명창이 같이했다. 따라서 두 사람이 번갈아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 고주랑 명창은 예전 묵계월 선생님께 사랑을 받았고, 이춘희 명창 등과 함께 공부를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한동안 소리를 멀리 한 까닭이 무엇인가?
 
<고주랑, 이하 “고”>“20살쯤 경서도소리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청구고전성악학원에서 이창배 정득만 선생님에게 현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예능보유자인 이춘희 그리고 보유자 후보 김혜란 등과 함께 친자매처럼 지내면서 경기소리를 배웠다. 그러다 1983년 남편이 있던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88년 귀국했다. 그때 무형문화재 전수조교 문제로 갈등이 있었고, 상처를 받아 공연 활동을 접게 되었다.” 
 
- 그럼 음반을 낸 계기로 다시 소리를 시작하는가?
 
<고>“소리를 접은 뒤에도 나를 필요로 하여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치긴 했었다. 앞으로도 가르치는 일은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음반을 낸 것은 아들이 권유한 때문이지 나이 먹은 내가 공연을 다시 하는 일은 없다. 이제 소리 세계에 나선 아들 희문을 돕는 일이 내겐 중요한 몫이 될 것이다.”
 
▲ 대담 중인 고주랑 명창(왼쪽)과 이희문     © 김영조

- 희문은 어떻게 경기민요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되었는지? 또 소리를 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의 반대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희문, 이하 “이”>“어렸을 때는 소리를 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일본에 살 때도 늘 민요시디를 가지고 다녔고, 명창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자연스럽게 경기소리에 빠지게 되는 일이었음은 뒤늦게야 알았다. 늘 경기민요를 흥얼거리며 다녔는데 한번은 어머니와 아주 절친한 이춘희 선생님의 공연에 가게 되었다. 그때 우연히 나의 흥얼거림을 들은 이춘희 선생님께서 ‘네가 소리를 해야겠다. 학원에 한번 오너라’라고 하셨다.  
 
그 뒤 선생님의 학원에 들러 ‘긴아리랑’을 했더니 선생님은 적극적으로 나서시며, 힘을 실어 주셨다. 하지만, 국악을 하는 것이 고행의 길임을 뼈저리게 느끼는 어머니께서 반대를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와 가깝던 여러 경기명창의 반대에도 이춘희 선생님의 고집에 이상하게 끌려가는 나를 어머니는 더는 말리지 않으셨다. 아마도 운명이라 생각하신 듯했고,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고>“처음 희문이가 경기민요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자식이 고행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찬성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받았던 어려움, 상처를 아들이 받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아주 절친하게 지내던 이춘희 명창의 강권과 그에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가던 아들을 말리기가 어려웠다. 결국, 아들이 경기소리 세계에 빠진 것은 운명이라는 생각이다.” 
 
이때 희문은 얼마 전 러시아 공연 때 이춘희 선생이 해주었던 말을 들려주었다. 선생은 “네 엄마와 함께 경기소리를 공부할 때 네 엄마가 해주던 음식을 늘 먹은 탓에 그 음식 맛이 입에 배어 있다. 이제 네 엄마에게서 받은 거 내게 돌려준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희문은 이춘희 선생이 스승이기 전에 “소리 어머니”라고 말한다.  
 
- 평론가 윤중강은 희문에게 “황금분할 희문”이라고 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그 말씀은 내게 과분한 칭찬이다. 앞으로 경기민요계를 이끄는 훌륭한 소리꾼으로 자라라는 채찍이 아닐까?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나는 더욱 분발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경기민요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예전 안비취·이창배 선생님이 계실 때는 경기민요계가 단합이 잘 되고 힘이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점에서 조금 취약하다고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이 판소리 못지않게 경기민요의 매력에 흠뻑 빠지도록 하려면 그런 점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머니 대신 소리판에 뛰어들었으면 제대로 해야 할 것이고, 또 남성 소리꾼으로서의 장점을 살려야 할 것이다.
 
또 많은 젊은 소리꾼들이 전통보다는 퓨전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전통이 바탕이 되지 않는 퓨전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은 우리에게 전통이 정말 큰 힘이 아닐까? 이것은 외국공연 때 더욱 실감하기에 지금은 민요의 뿌리인 굿에도 관심이 많다.” 
 
희문은 현대무용가 안은미 선생과 함께한 외국 공연에서 무용수·정가·판소리·경기민요가 같이 했는데 사설을 알아듣지 못한 외국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제대로 된 전통은 세계인을 감동시킬 수 있음을 절감했다고 한다. 
 
또 그는 지금 공연들은 품앗이 수준에 머물 때가 많지만 어차피 관객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며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절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김영임 명창 이후의 스타 특히 남성스타가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려워도 청중과 맞대고 하는 공연을 부단히 하는 것이 발전의 지름길이라는 생각도 얘기했다. 판소리도 천대받으며 불렀던 아픔이 있었기에 오늘처럼 세계 소리가 되었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아픔이 마음에 와 닿는 소리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전통을 모른다. 같은 젊은이로서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 문제는 전통을 접할 수 없었던 젊은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사실 나도 민요를 하기 이전엔 전통이란 걸 잘 몰랐었다. 나는 그나마 국악 하는 집안에서 자랐기에 좀 더 관심을 둘 수 있었다. 젊은이들이 전통을 알고 좋아하게 하려면 어렸을 때부터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전통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 희문에게 있어서 경기민요란 무엇인가?
 
<이>“경기민요는 내게 사명감이며, 운명이다.” 간단한 답에 어머니 고주랑 명창도 크게 공감한다고 화답을 했다. 
 
- 앞으로 계획은?
 
“얼마 전 나는 이춘희 선생님의 사랑 속에서 무형문화재 이수자가 되었고, 선생님께서는 내게 (사)한국전통민요협회 기획실장 일을 맡기셨다. 따라서 내 공연 이전에 선생님과 경기민요의 공연을 전통이지만 좀 더 세련되게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게 노력할 것이다. 김영임 선생님은 “효”, 김혜란 선생님은 “서울굿”이란 브랜드를 가지고 계신다. 하지만, 이춘희 선생님은 아직 브랜드가 없는데 이를 만들어 드릴 생각이다.“ 
 
이희문은 본인보다 “소리 어머니”로 모시는 이춘희 선생님을 위한 고민을 먼저 하고 있었다. 아니 경기민요의 폭넓은 발전을 도모한다고 해야 할까? 누가 희문을 “스타일리스트”라고 했던가? 희문의 옷차림, 머리 맵시가 세련됐다는 생각으로 임한 나는 그가 젊은이답지 않은 내공과 철학을 소유한 대단한 인물이라는 결론으로 대담을 끝냈다. 대담은 그를 통한 경기민요의 커다란 발전이 눈에 그려지는 그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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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12/23 [10:4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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