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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 흉기난입과 조승희 사건의 닮은점과 차이점은?
복장, 범행수법 유사...소통 부족에 사회불만 가득
 
조은정   기사입력  2008/10/21 [09:27]
 
“온통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서바이벌 게임에서 쓰일 법한 복면과 고글까지 착용하고, 흉기를 든 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 논현동 고시원 3층 계단에서 정모(30)씨가 휘두른 흉기에 찔렸던 한 피의자는 그때 정씨의 외관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복장 차려 입고 치밀히 범행
 
미리 갖춰 입은 까만 '복장'에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살인 수법까지. 이번 사건은 여러가지 면에서 지난해 4월 미국 전역을 뒤흔든 재미교포 조승희의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우선 범행 당시의 복장이나 수법이 닮았다. 정씨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색으로 통일된 복장을 갖춰 입었으며 피해자들을 잘 보기 위해 머리에 고글과 소형 플래시까지 장착했다. 또 범행에 사용했던 40cm의 긴 회칼 이외에도 양다리에 칼집을 연결해 과도 2개를 차고 있었고, 가스총도 주머니에 따로 소지했다. 범행을 위해 완벽한 복장을 갖췄던 셈.
 
조승희도 검은 계통의 옷과 장갑에 양손에 권총을 드는 등 복장을 갖춰 입었다. 범행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실탄 200여발도 발견됐다. 또 당시 유행했던 컴퓨터 게임인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등장 캐릭터와 비슷하다며 완벽한 ‘킬러복장’ 자체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범행 수법에서도 유사한 면이 발견된다. 일단 사람들을 좁고 밀폐된 공간에 가둬놓고 차분하게 범행을 저질렀다. 정 씨는 자신의 방에 불을 지른 뒤 3층에서 정복을 한 채 기다리고 있다 복도를 빠져나온 피해자들을 향해 흉기를 휘둘렀다. 당시 3층에서 정씨가 휘두른 흉기에 찔린 피해자는 “정씨가 밖으로 나오려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고 진술하고 있다. 조승희도 당시 강의실에 문을 걸어 잠그고 학생들을 감금한 뒤 차례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임준태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정씨의 범행은 특정 지역에서 짧은 시간 안에 범죄를 저지르는 ‘대량 연쇄살인’으로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 등과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캠퍼스나 레스토랑에서의 범행처럼 일시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유사점을 설명했다. 피의자 정 씨가 고시원이라는 특성을 파악하고 화재를 일으켜 사람들을 한꺼번에 복도로 유인한 뒤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또한 범행이 1차에서 그치지 않고, 2차로 확대됐다는 점도 유사점이다. 정씨는 3층에서 흉기를 휘두른 뒤 바로 4층으로 올라가 고립돼 있던 나머지 피해자 5, 6명을 찔렀다. 조승희도 오전에 기숙사에서 두 명을 살해하고 오후에는 장소를 이동해 강의실에서 수십 명을 살해하는 2차 범행을 저질렀다.
 
이번 사건은 미리 계획된 범죄였을 정황이 높다. 경찰은 브리핑에서 “정씨가 2005년쯤에도 범행을 저지르려고 했다”고 밝혔다. 정씨가 소지하고 있던 가스총이나 흉기도 2004년에서 2005년 사이에 동대문에서 구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승희도 사건 전말을 담은 비디오카메라까지 제작해 방송국에 보내는 등 사전에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전형적인 '외톨이'에 사회불만 가득, 자살 택하지 않은 점은 달라
 
마지막으로 주변인들이 진술하는 평소 성격이나 생활 태도가 닮은 꼴이다. 정씨 주변 인물들은 “전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세상이 뒤집어 졌으면 좋겠다 등 부정적인 말을 많이 했다”면서 “주로 혼자서 생활해 평소에는 과묵했으나, 한번 말을 시작하면 정치 등 사회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많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조승희의 기숙사 방에서 발견된 노트에도 “부잣집 자식들”(rich kids) “방탕”(debauchery), “기만적인 협잡꾼들”(deceitful charlatans) 등 사회를 비판하는 글귀가 발견되기도 했다. 조씨는 인종차별이 심한 지역 분위기에서 위축된 생활을 하며 외톨이로 살아왔었고, 정씨도 주로 야간 배달업에 종사해서 말동무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모두는 평소에도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정황이 발견된다. 조승희는 범행 전 기숙사 방에 불을 지르고 일부 여성을 스토킹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과 폭력 성향을 보였다. 정씨도 중학교 때 한 차례 자살을 시도했으며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극심한 두통에 시달려왔다고 경찰에 진술하고 있다.
 
전문의들은 당시 "대인관계가 좋지 않고, 고립된 생활을 하다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조 씨와 김 씨가 성격장애와 편집증 같은 정신불안, 만성 우울증 우울증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조승희는 살인을 저지른 뒤 자살을 한 반면 정씨는 자살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양상의 대량 연쇄살인의 피의자는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은데 정씨는 고시원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 체포된 점에서는 기존과 다르다”고 분석했다.
 
또 조씨는 이민생활에서 인종차별 등 주로 사회적인 고립에 시달렸지만 정씨는 월세 등 경제적인 압박이 심했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개인적으로 원인은 다르지만, 둘 다 심리적으로 압박을 느낀 상태에서 자신의 스트레스를 엉뚱한 방향으로 분출했다는 점은 같다.
 
범행 수법에서부터 범행 동기까지 유사한 논현동 고시원 참사와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외톨이 생활을 하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을 키워왔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소통이 부족한 사회적 분위기가 이들을 '외톨이 범죄자'로 키운 것이다.
 
표창원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우리 나라의 경우 묻지마 살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사회적 대책이나 제도적인 개선책 없이 그저 개별적 사건으로 봐 왔다”며 “소외 계층 가운데 정서나 성격 면에서 불완전한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제도적 조치가 이뤄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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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10/21 [09:2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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