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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리더의 대의제, 카리스마적 리더 나와야
[진단] 촛불 속 직접민주주의와 대의제, 문제는 무능한 리더와 정당
 
안일규   기사입력  2008/07/04 [16:58]
[기획연재] 촛불집회와 한국정치
1. 촛불집회의 배후는 '잃어버린 15년'
2. 촛불집회는 '정당없는 민주주의'의 결과
3. 촛불집회 계속 운동? 정당이 중요하다
4. 카리스마적인 리더를 기대한다
 
무능한 대의제가 아니라 ‘무능한 리더의 대의제’다

이번 글은 기자가 대학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촛불논쟁의 초점인 직접민주주의냐 대의제민주주의냐 혹은 정당정치냐 운동정치냐를 논하고자 한다. 오창은, 손석춘 등의 직접민주주의론자들은 대의제를 ‘무능한 것’으로 말하지만 현재 한국정치의 문제는 대의제가 무능한 것이 아니라 ‘무능한 리더’가 문제였다는 것이 기자의 논지다. 오창은이 “잘못된 정당정치로 인해 파생된 문제를 정당정치로 수렴하고 해결하자는 것”이라고 한 것은 한국정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기자는 타 학과의 수업을 수강하곤 하는데 타 학과에서의 일이다. 시험 날인데 교수는 시험시간이 15분이 지나가도 오지 않았다. 시험날을 착각해 이미 치뤘던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교수는 오기 힘든 상황이었다. 교수가 전화통화에서 제시한 대책은 오픈북 혹은 레포트였다.

타과생들은 7명밖에 되지 않아 교수와 가이드라인만 내놓고 40명으로 압도적 다수였던 해당학과 학생들에게 넘겼는데 정확하게 말해서 그들의 대표(대학은 한 학년의 대표를 ‘총대’라고 한다)에게 처리하라고 넘겼다. 여기서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일부 학생들은 그냥 가버리고 교수가 제시한 안이 나오자마자 몇 학생들의 반대 주장이 시작된다. 즉, 통제하나 못하는 ‘무능한 리더’였던 것이다.

그 결과 다수 의견 수렴도 제대로 못하게 되는데 지금 시점에서 정당들이 특히 야당이 아무런 역할을 못해 무능함을 보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리더가 무능한 결과 학생들 사이에서 설전이 오가고 시간이 10분, 20분씩 지나가도 해결되지 않았다. 내내 그 자리 그대로였고 교수와의 통화가 몇 번을 더 오갔지만 그 자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반정치, 반정당 담론, 신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모두 공유하고 있어

이런 상황을 정치적으로 대입해본다면 학생들은 분명 반정치, 반정당적 담론을 담을 수밖에 없다. 지금의 촛불 역시 강력한 반정치, 반정당 담론을 담고 있다. 강준만은 <한겨레> 기고 칼럼에서 기자와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데 “촛불집회는 ‘반(反)정치’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정치의 무덤’ 위에 핀 꽃이다. 그간 정당들이 해온 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지만, 이후 정치권이 더 큰 불신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답답해진다.”고 말한다.

오창은 역시 반정치, 반정당 담론에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최장집을 ‘상상력의 빈곤’이라고 지적하면서 “여의도 국회와 무관하게 아름다운 촛불을 그 낡아빠진 ‘이론’의 안경을 벗고 볼 수는 없는 걸까”면서 낭만주의적 정치관을 보여주는데 반정치적 사고방식도 볼 수 있다. 반 여의도는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적 반정치, 반정당 담론으로 반 여의도를 했던 이들의 결과는 참혹했다. 노무현의 당정분리가 낳은 결과는 보고서 정치, 위원회 정치였고 이명박은 반 여의도 100일 만에 여의도에 SOS를 청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여의도에 대한 불신감으로 가득 찼던 문국현은 그 결과 자유선진당과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하면서 자신의 본모습을 쉽게 드러냈다.

즐거운 주권혁명? 직접민주주의는 오히려 괴롭고 허상일 뿐

리더가 무능한 상황에서 사실상 대의제는 무의미해지는 것이며 사실상 대의제가 아닌 지금의 촛불과 같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직접적인 충돌, 교수와 학생들의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진다. 그 결과는 역시나 교수와 학생들의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지는데 지금의 촛불집회가 국가와 운동의 평행선이라면 여기서는 교수와 학생의 평행선이었다. 그 결과 극소수의 몇 학생들이 오로지 시험을 주장하면서 멀리 갔던 교수를 학교로 오도록 만든다.

다수의 학생들 상태로 봐서는 사실상 시험은 불가능했고 간 학생들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서야 무능한 리더는 다수의 의견을 확인해보나 교수에게 다수가 어떤 의견인지 말도 못한다. 처리할 가망도 없고 결국 교수가 학교로 1시간 내로 오겠다는 통보를 하자 절망을 하며 운동에서의 갑작스런 탈동원화를 불러온다. 현재 촛불이란 전국적인 운동이 언제 사그러들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 이전의 활발하다 못해 치열했던 교수와 학생들의 직접적인 충돌은 물론이며 학생과 학생들의 충돌마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절망의 얼굴을 띄고 말이다.

그 때 기자는 그 ‘무능한’ 리더를 학생의 의견을 수렴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을 통해 타협시켜 교수에게 전달하는 게 아닌 교수와 일반학생을 직접 통하게 한 점, 의견 수렴도 제대로 못해 어떻게 할지 머뭇거린 점, 학생들을 가지 못하게 막지 못한 무능한 리더십을 호되게 질타했다.

지금의 촛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왔기 때문에 싫어도 해야 되는 상황이다.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촛불을 끄고 싶어도 끌 수 없는 지금의 괴로운 상황, 진보진영이 그렇게 외쳐대던 노동담론, 소수자담론 모두 배제 당했고 그런 담론 다 내팽겨치고 촛불집회에 들어왔다. 기자가 제시한 한 사례에서도 즐겁다기보다 괴로웠다. 그러나 오창은은 “이렇게 즐겁게 시위한 적 있었나”며 낭만만능주의적 시각을 여실히 드러냈다.

국가와 시민사회(혹은 운동), 교수와 학생이 직접 부딪치는 것은, 혹자들이 촛불집회가 직접민주주의적인 하나의 유형으로 볼만큼, 무능한 리더로 인한 대의제의 무능화에 주목받는 직접민주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기회에 손석춘 등의 직접민주주의론자들은 촛불집회와 같은 직접민주주의를 “즐거운 주권 혁명”이라고 하나 과연 즐거운 주권혁명인가에는 심각한 물음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촛불집회와 같이 타협없이 어느 누구하나가 죽어야 할 정도로 ‘끝없는’ 성격의 촛불집회가 과연 즐거운가? 기자가 겪었던 일에도 즐거운 주권혁명일까. 제도권 정치가 빠지고 국가와 시민사회의 직접적인 충돌이 ‘주권’을 찾는 개념으로 말할 수 있는 건가. 
 
▲     ©대자보

직접민주주의란 건 없어…‘카리스마적 리더’가 나와야

결국 또 일부학생들은 가거나 다른 강의실에 가서 시험대비를 한다. 해당 강의실에 남은 학생들에게서 기자를 지칭하며 “저 분에게 맡기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결국 다시 대의제를 찾는 것이다. 아니, 자신들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할 리더를 찾는 것이다. 최장집의 말대로 “카리스마적 리더”를 찾고 있는 것이다. 상처만 준 주권혁명으로 인한 절망에 다시 찾은 것은 ‘다시 대의제’였지만 이전과 달리 “확실한 리더”를 원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실패한 결과 자신들을 대변할 사람을 구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기자는 그 ‘무능한’ 리더를 코치했고 기자에게 맡기려는 제안은 거부했다. 교수는 오고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견이었던 레포트를(처음에는 오픈북이 압도적인 다수의견이었으나 몇 학생들의 반발로 레포트로 선회했다. 그래도 몇 학생은 시험을 고집했다) 관철하기 위해 자신들을 대표할 수 있다고 판단한 사람에게 전화통화를 맡겼다.

기자는 이 전화가 사실상 마지막 전화라고 분석했고 새로운 리더는 잘 풀어나가는 듯 했으나 말문이 막히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다수의 의견은 관철될 수 없었다는 판단이 들었고 직접민주주의로 인한 절망을 대의제로도 회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기자가 전화를 이어받아 10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교수와 ‘레포트’로 관철시켰다. 이 일이 발발해서 해결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7~80분가량이었다. 반면 카리스마적 리더가 있었다면 10분 내로 해결될 문제였다.

교수와 통화에서 교수의 핵심적인 이야기는 두 가지로 몇 학생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전화해 시험 아니면 안 된다며 시험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과 자신은 학생 다수의 의견이라면 수용하겠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교수와 통화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말한 것이 다수의 의견이었고 기자가 지칭하는 ‘무능한’ 리더는 다수의 의견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다. 그리고 몇 학생의 교수와의 직접적 대화는 리더를 거치지 않은(혹은 정당을 거치지 않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직접소통은 특정이익집단, 가진 자들에 의해 민의가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대안을 내는데 있어서도 국가와 시민사회, 여기서는 교수와 학생의 직접적인 충돌에서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이 내놓은 대안은 몇 개 되지도 않았으며 그 대안들 역시 교수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시험을 치지 말자는 것이나 교수의 성격상 절대 허용할 수 없는 대리감독은 ‘대안’으로 여길 수도 없었다. 최장집이 말하듯 운동은 대안을 내는 데 능력이 부족하다. 지금의 촛불보라, 사회경제적 문제로 촉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목소리에서 대안은 없지 않은가. 최장집의 말처럼 운동은 잘못된 정책에 대해 강력한 반대의 조직을 가능하게 하지만 찬반을 뛰어넘는 구체적 대안을 형성하거나 이해관계 조정을 통한 결정을 이끌어낼 능력이 부족하다. 촛불 5대담론 속 민영화도 담겨있지만 이에 대한 대안담론은 나오고 있지 않은 것이 이를 보여준다.

‘정당’없는 직접민주주의론자들의 가치관은 중산층적 운동관

기자는 최장집이 진단한 것처럼 이명박 정부 내에서의 한국 민주주의는 무능한 정당이 뒤로 밀려나고 국가와 시민사회(운동)의 충돌이며 시민사회 대 시민사회의 충돌로 벌어진다고 본다.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 촛불집회는 국가와 운동의 직접적인 충돌을 보여주고 있다. 운동은 ‘청와대로’ 혹은 쇠고기 재협상을 정부에 직접적으로 원하고 있고 국가는 이에 물대포로 직접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 시민사회 대 시민사회의 충돌 또한 만만찮다. 이른바 보수 대 진보론과 같은 것이다. 조갑제와 진중권이, 보수단체 대 진보단체가 직접적인 충돌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정당은 온데간데없다. 야당들은 그저 촛불집회의 한 부류로 참가했다. 기자가 한 사례를 통해 지적했던 ‘무능한’ 리더와 다를 바 없다. 야당이 할 일은 ‘실질적인 대안’을 내놓는 것이다. 이재영처럼 제도권은 불리하니 들어가지 말아야 된다는 주장은 정당정치를 잘못 이해한 결과다.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제대로 된 대안을 내놓느냐에 달린 것이다. 야당은 국민들의 뜻에 부응하고 대표해야 된다는 개념으로 생각해야 된다.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오창은의 눈에도 정당은 없다.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권력을 위임받는 쪽에서 주권자의 요구와 무관하게 행동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은 주권자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는 오창은의 말에는 국가 대 운동, 국가 대 시민사회로만 그가 정치를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갈등은 폭발했지만 이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매듭지을 리더(정당)가 없기 때문에 국가와 시민사회, 시민사회와 시민사회의 직접적 충돌은 ‘끝없는’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기자가 여기에 직접민주주의론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언제까지 촛불을 들고 있어야 하는가, 촛불을 언제 들고 나와야하는가, 언제 열망이 들끓고 또 언제 절망으로 가는가.

직접민주주의와 운동은 정당을 대신할 수 없어

근본적인 문제는 아무리 운동을 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한다고 한들 기존 제도권 정당은 변하지 않는다. 계속 운동에 ‘올인’할수록 보수정치구도는 더 강해지고 공고화된다.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해줄 수 있는 곳이 정치이고 정당임에도 냉전반공수구적 가치만 반영하도록 고착화된다. 지금의 한국정치처럼 운동 역시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하기도, 운동에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반영할 수도 없다.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가 계층적 차이가 크지 않은 상대적으로 매우 동질적인 집단이었듯 일종의 직접민주주의로 규정되는 촛불집회 역시 계층적 차이가 크지 않은 매우 동질적 집단이다. 이번 촛불집회로 봐도 노동자들은 배제되었고 그 노동자 중에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참가는 저조했다. 즉 중산층적 운동관이란 것이다. 운동에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정당’이다. 운동이 정당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당민주주의에서는 정당이 국민들에게 이러한 정책이 가져오는 결과와 긍정적, 부정적인 측면을 잘 설명할 수 있지만 직접민주주의에서는 그런 기능이 불가능하며 그 결과 인기는 없어도 장기적으로 좋은 정책은 나오기 힘들어지고 잘 조직된 특정이익집단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다. 정당이 없어지고 직접민주주의가 들어선 자리에는 상층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집단들의 이익과 엘리트주의 등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정당이 중요하다

결론을 정리하기 앞서 촛불논쟁을 촉발한 오창은의 시선의 문제점에 대해 두 가지 지적할 것이 있다. 그는 “급진적 시각”을 주장하는데 우리나라의 냉전반공이데올로기나 민주화 이후 개방된 정치시장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매우 좁았다는 것이다. 좁게 개방된 이념적 스펙트럼은 새로운 세력의 창출을 막아왔고 기존의 민주화 이후에도 냉전반공세력을 건재하게 만들어줬다.

그 결과 촛불집회에서도 ‘반미’, ‘빨갱이’ 등으로 일반인들을 쉽게 규정할 수 있었다. 제도권 정치지형으로만 보아도 비교적 합리적인 보수로 평가받는 원희룡, 남경필 등은 초선일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나라당 ‘소장파’이며 중도파마저 ‘빨갱이’로 몰아붙여 제도권 정치에 뿌리내리기 어려웠다. 중도좌파 성향의 사람들마저 한국정치에 뿌리내리기 어려운 마당에 급진적인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기득권의 반발, 민심이 과연 급진적인 것에 동의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다. 현대한국정치가 걸어온 과정만 보아도 급진주의는 어려운 논지인데 기자가 보기엔 오창은의 “급진적 담론”은 아직도 변혁의지를 못 버린 증거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최장집을 보수적 시각으로 보는 관점은 지금 문제의 근본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보수인가 진보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며 최장집을 공격하고자 하는 논리 이상으로 보기 어렵다.

기자가 결론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본 문제인 정당체제를 내버려둔 채 반정치, 반정당 담론으로 직접민주주의 개혁을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으며 운동이 정당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정당정치를 하지 않아서 일어난 지금의 결과를 정당정치의 실패로 보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잔여적 복지국가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 가운데 복지국가들이 산에서 내려오고 있다고 내려가자는 신자유주의 주장들과 겹친다.

촛불과 같은 운동은 참여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의 담론을 담아낼 수 없으며 이들은 정당이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의 한 사례를 기자가 들었듯이 지금 필요한 것은 ‘카리스마적 리더’이며 이들은 어디서 ‘반짝’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카리스마적 리더’를 원하는 것은 기자만의 주장이 아니다. 최근 <SBS>드라마 ‘일지매’에서 주인공 이준기가 보여주는 모습이나 과거 역사적으로 나타난 영웅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이 나타나기 위해 훈련되는 과정 등이 필요했고 거쳐 왔으며 이 역할은 결국 정당이 할 수 있다. 결국 ‘좋은 정당’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금의 결과는 잘못된 민주주의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갈 길 간다는’ 이명박 대통령을 지금의 허약한 정당, 허약한 야당으로서는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주의를 더 강화하고 이를 통해 제대로 된 새로운 정당의 출현으로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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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7/04 [16:5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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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기사 2008/12/25 [14:03] 수정 | 삭제
  • 진중권의 무식함을 폭로한다 (1)

    진중권에 필요한 건 겸손이 아니라 실력


    김휘영 / 문화평론가, bignews@bignews.co.kr 등록일: 2008-12-22 오후 10:59:27


    옛날 어느 마을 동굴에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살았다. 이 지네는 해마다 처녀를 요구했는데, 그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마을에 그 지네의 횡포로 큰 재앙이 닥쳤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섣달그믐이면 처녀 한 명을 제비뽑기로 받쳤는데 그 해에도 한 처녀가 뽑혀 지네의 제물로 바쳐질 운명이었다. 처녀는 곧 제단에 바쳐졌고 무수히 많은 발이 달린 거대한 지네가 처녀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디선가 두꺼비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지네와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싸움을 계속하더니 결국 둘 다 죽고 말았다. 그 덕에 목숨을 구하게 된 처녀는 두꺼비 장례를 잘 치러 줬고 그 이후 더 이상 마을에 지네의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이 라는 설화에 나온 서사구조다.

    이 설화를 영화 와 비교해서 분석해보자. 발이 숱하게 달린 지네는 악한 이무기인 부라퀴에, 처녀는 이든과 사라에 마지막에 지네를 죽이고 처녀를 구한 두꺼비는 선한 이무기 역할에 절묘하게 들어 맞는다. 이 설화를 소개한 의 저자는 현직 대구교대 교수인 이강엽 교수다. 그는 설화 속의 그 처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싸우든지 또는 야반도주라도 해야 하지 않았을까 라고 자문하고 있다.

    설화 속의 지네는 그의 요구를 듣지 않으면 한 동네를 끝장낼 만큼 대단한 존재이다. 즉 영화 의 부라퀴와 같은 존재다. 진중권의 표현대로라면 설화 속 처녀는 강력한 악(惡)인 지네에 대항해서 특별히 한 일이 없다. 이든과 사라 더러 하는 일 없이 도망만 다닌다고 지적했는데 이 설화에 나온 주인공은 그 도망조차도 하지 않는다. 사실 영화 속의 이든과 사라는 선한 이무기가 나타날 때 까지 여의주를 보존해야 하는 천명을 가진 사람들이었지 그 여의주로 적극적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진중권은 도망만 다닌다고 표현했지만 그들의 도망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선한 이무기가 올 때까지 여의주를 보존하는 매우 중요한 행위였고 세계를 암흑에 빠지는 불행을 막는 절체절명의 의미를 가진 행동이었음은 를 본 사람은 다 안다. 오히려 제대로 도망 다니지 못해서 부라퀴에게 여의주를 뺏긴다면 선한 이무기의 승천도 불가능하고 온 세상이 암흑의 세상으로 빠지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오죽했으면 그들의 전신인 나린과 하람이 가장 극단적인 저항인 자살까지 감행했겠는가?

    지능이 좀 모자라는 진중권은 사라와 이든은 하는 일이 없이 도망만 다녔고 마지막에 선한 이무기가 나타나서 일거에(?) 해결했으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이며 그래서 엉망진창이라고 혹평했다. 진중권의 지적대로라면 설화는 처녀가 그 도망조차도 안다니고 또 난데없이 두꺼비가 나타나서 지네를 해치우는 구조로 끝났으니 분명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지능수준이기에 당연히 진중권의 수준을 벗어나 있는, 그래서 정상적인 사고구조를 가진 사람이면 이 지네장터 설화를 보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 이론적으로 딱 꼬집어 설명하는 사람들은 드물지라도 하여간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가 아니라는 것 쯤은 직감적으로 안다. 속의 그 처녀는 도망 다니는 일조차도 안했으니 영락없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고 해야 할텐데 왜 그럴까? 이를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일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고 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조금 깊은 차원에 관계되는 논증이다.

    마땅히 지식인이라면 바로 이 의문에 해당하는 이유(reason)부분을 일반인들에게 명료하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부분을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규명해 낼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인문학을 탐구할 수 있는 남다른 자질(資質)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느끼다시피 설화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데우스 구조와 비슷한 듯 보이겠지만 전혀 아니다. 더구나 영화 속의 사라와 이든은 설화 속의 처녀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했으니 더욱 더 아닐 수 밖에 없다. 영화 를 두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고 말한 건 순전히 진중권의 무식함,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중권의 낮은 지능지수 때문이다. 진중권이 챙피한 줄도 모르고 신문지상을 통해 말한 소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사건은 진중권 스스로가 자신의 낮은 지적능력(IQ)을 만천하에 드러내고만 어처구니없는 자기 고백적 해프닝일 뿐이다.

    설화와 가 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가 아닌지를 알기 쉽게 논증해 보겠다. 여기서 필자가 하필이면 진중권의 지능지수(IQ)를 거론할 수 밖에 없는가 하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용어를 접하고 그 내용의 윤곽을 아는 건 누구나 배움이나 학습으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떤 작품에 그걸 적용하여 규명하는 건 응용의 능력, 즉 상당한 지적(知的)능력이 요구되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수학 공식을 달달달 외우는 것과 그 외운 공식을 바르게 적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된다. 외우는 건 노력으로 될 일이지만 문제해결능력은 지능지수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진중권이 재수하고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다고 알려져 있는 걸로 보아서, 아마도 필자와 같은 해에 학력고사를 치고 서울대에 입학했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그 당시 학력고사에서 언어영역(국어)에서 만점을 받았다. 특별히 국어를 좋아한 탓도 있었지만 학력고사와는 다르게 다소 애매한 문제도 많이 출제된다는 전국 모의고사에서도 수차례나 만점(滿點)을 받으면서 전국 수석을 차지한 적이 있다. 이런 까닭에 적어도 언어(한국어)로 구성된 텍스트의 해석이나 응용 능력에서 필자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정도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런 필자가 진중권이 쓴 글을 보고 내린 결론은 진중권은 일단 국어, 즉 언어영역에 대한 자질(資質)이 한참이나 딸리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개념 파악이나 응용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음을 너무나 많이 확인했는데 이를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이에 대해 궁금한 사람들은 필자가 몇 년 전에 대자보에 쓴 칼럼인 '진중권의 박정희콤플렉스와 지적 사기'라는 글을 참고로 하기 바란다. 그 글을 보면 진중권이 얼마나 개념파악이 안되는 사람인 줄 파악할 수 있다. 사람들이 진중권의 글에 "비꼼은 있으되 내용은 없다" 또는 "치졸하고 저급한 비방은 있되 그 이유나 대안은 없다"고 간단하게 혹평하는 이유도 알 수 있다. 이런 일도 한결같이 진중권의 낮은 지능지수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건으로 자신의 지능수준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만 사건은 진중권으로서는 필연적인 결과지만 사실 이건 약과다. 진중권이 필자의 이 지적에 억울하다면 진중권이 쓴 어떤 책이라도 좋으니 무작위로 가져오면 당장 그 오류들을 대중 앞에 드러내 줄 용의가 있다 필자에겐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 심심풀이 땅콩처럼 쉬운 일임을 먼저 밝혀둔다. 대신에 진중권은 자신에 대한 주제파악이 안돼서인지 아무데나 나대면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과대망상 증세는 충분히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좀 더 자세히 논하겠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성립조건 2가지

    어떤 서사물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를 가졌다고 진단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아마 이 부분은 어느 책에서도 말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는 필자의 독자적인 논증이다. 하지만 별로 어려운 내용이 아니므로 이 글을 읽는 순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신(해결사)의 비의존성

    어떤 서사물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구조라고 말하려면 첫째 미궁처럼 복잡한 구조에 빠진 극을 단번에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해결사, 즉 신은 그 극 속의 등장인물들과 특별한 인연(karma)이나 연관성이 없어야 한다. 이것을 학문적 용어로 말하면 신(神)의 비의존성(independency)이다. 즉 돌쇠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전설의 고향 같은 설화에서 돌쇠가 봉착한 난관을 해결해 줄 해결사로 등장한 산신령이 있다 치자. 그런데 그 산신령이 과거 어느 시점에 돌쇠에게 큰 도움을 받아서 곤경을 헤쳐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 산신령의 등장이 과거 돌쇠에게서 받았던 그 은혜나 빚을 갚기 위해서 등장했다면 이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될 수 없다. 물론 돌쇠가 산신령을 도와주는 상황은 관객들이 알 수 있도록 스토리 속에 미리 명시되어져 있어야 한다. 지네 장터 설화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가 아닌 이유는 바로 해결사로 등장한 그 뚜꺼비가 제물로 바쳐진 처녀와 특별한 연관이 있는 존재(creature)이기 때문이 그 첫째다. 그 뚜꺼비는 처녀가 제물로 받쳐진 동굴을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두꺼비가 아니다. 다 알다시피 처녀가 우연히 보게 된 뚜꺼비가 불쌍해서 밥찌꺼기를 주는 선행을 베풀었던 뚜꺼비라는 '특별한 관계(special relationship)'가 이미 설정되어 있던 존재였던 것이다.

    속의 해결사로 등장한 선한 이무기도 이든과 사라와 아무런 인연도 없이 길가에서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가벼운 인연을 가진 관계가 아니다. 500년 전에 지네보다 더 흉폭한 부라퀴의 마수에서 세상을 구하고 선한 이무기의 승천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린 적이 있는 '아주 특별하고 끈끈한 인연이 설정된 관계'다. 게다가 선한 이무기가 승천을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환생격인 사라와 이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말하자면 운명적인 관계로 설정되어 있는(doomed) 존재가 선한 이무기다. 그리고 그런 운명은 영화 전반부에 무려 몇 번이나 관객들에게 명시적으로 표현되었다.

    능력의 초월성

    두 번째로 해결사로 무대에 등장하는 신은 등장인물들과 그 능력 측면에서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현격한 차이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극의 복잡한 구조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해 특별초빙한 신(神)이 처치해야 할 적(antagonist)과 싸우면서 오히려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지경에 처하거나 보는 사람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투쟁을 해야 하는 구조라면 그것 자체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라는 논리 자체를 허물어뜨리고 마는 모순(矛盾)을 초래하게 됨을 누구나 쉽게 알게 된다. 즉 그런 해결사는 데우스가 아니다. 그건 극을 구성하는 또 다른 등장인물의 역할(role)을 맡아 극의 완성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전혀 다른 차원의 서사구조를 가진 극(劇)이 되고 만다.

    보통 데우스적 역할을 하는 해결사는 예를 들어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는 등의 방식으로 도술을 부리거나 악한 존재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권능(힘)으로 능히 상대를 제압하고 상황을 종료시키는 가히 초월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극의 말미에 나타난 신이 적과 싸우면서 힘겨워서 외려 낑낑대야하는 구조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랄 수 없다. 설화 속의 해결사 두꺼비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속의 데우스와 같은 존재가 될려면 뚜꺼비가 처리해야 할 상대가 거대하고 막강한 지네괴물이 아니라 기다랗게 뻗어나가는 단 한 번의 혓바닥 놀림으로도 해결되는 파리 정도여야 논리에 부합한다. 그런데 설화에 나오는 지네 괴물은 파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다. 두꺼비는 악의 존재인 지네를 손쉽게 해치우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힘겨운 상대와 싸워야 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즉 이 두꺼비는 바로 앞에서 말했듯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의 해결사가 아니라 이 설화가 주려는 주제의식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가진 또 다른 캐릭터일 뿐이라는 뜻이다. 이런 차이점을 명료하게 표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모종의 이질감을 느끼기 때문에 설화에서 비록 주인공인 처녀가 아무 일도 없고 게다가 도망조차도 가지 않았고 결말에 두꺼비가 해결사로 나타나서 악의 존재인 지네를 해치우지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구조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직감(直感)이야 말로 보통 천재들에게 발달했다고 하는 선험적 직관이라고 한다.

    논의를 좀 더 진행시켜 보자. 여기서 말한 주제의식은 무엇일까? 바로 권선징악이다. 서양의 캐럴 송에도 나오는 '우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안 주고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들에게만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준다'는 식의 권선징악적 주제는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널리 이용되는 서사구조인데 이 구조가 널리 이용되어 온 이유는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기껏 수단적 차원에 불과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규정한 예술작품의 궁극적 목적인 감정순화 즉 카타르시스에 매우 유리한 구조이기 때문임과 관계가 깊다. 생각해 보라. 선행을 쌓은 자가 복을 받지 않고 오히려 더 비참해지고 또 악행을 저지른 자가 징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복(福)을 받는 구조로 카타르시스라는 목적을 달성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누리꾼들에게 '서울대 나온 사람답지 않게도 학습능력이 모자란다고 평가받는 진중권'을 위해서 좀 더 자세히 강의해 줄까 한다. 그것도 진중권이 이해하기 쉽게 진중권 자신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결말을 맺는 구조로 예를 들었던 헤라클레스가 등장하는 경우로 설명하겠다. 물론 무료 강의다. 진중권이 예를 든 고대 연극에서 헤라클레스가 등장해서 일거에 해결하는 방식의 연극에서 진중권 학생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다. 그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헤라클레스와 맞장을 뜰 상대가 있는가? 당연히 없다. 헤라클레스와 맞장을 뜨면서 엎치락뒤치락 할 정도의 악역이 존재해서, 그 복잡한 구조를 헤라클레스가 일거에 해결할 수 없다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용어 자체의 존립근거가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그렇게 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광분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처음부터 없지 않는가? 놀랍게도 헤라클레스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가 일거에 해결할 수 없는 막강한 상대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스토리 구조가 있다. 바로 헤라클레스가 신이 되기 위한 과제를 그린 12가지 공역(노역)을 그 내용으로 하는 신화(神話)인데 이것 또한 당연히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가 아니다. 이 신화들은 헤라클레스가 주연이 되는 서사구조이지 이를 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는 바보들은 없다. 혹시 진중권은 그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 진중권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본질적 속성이 뭔지도 모르고 있는 까닭에 그걸 판단할 능력자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지상에서 난리를 일으키는 악한 이무기를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가 내려와서 가볍게 응징하고 사라와 이든을 구해주고 끝내는 구조라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울 수 있다. 문두에 밝힌 설화와 영화 는 결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필자가 밝힌 해결사(神)의 비의존성 조건과 능력의 초월성 조건 중 어느 한 가지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진중권이 이 논증에 이의 있다면 그 반 예를 들어 필자를 깨우쳐 주기를 요구한다. 아마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또 한번 진중권의 지능수준을 명백하게 확인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만일 이 가 영화화된다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어떤 대목일까? 당연히 지네와 뚜꺼비 간의 치열한 싸움이 될 것이다. CG 등 최첨단의 영상 기술력도 이 대목에 가장 신경을 쓰서 활용해야 한다. 따라서 해결사 헤라클레스가 등장하자마자 싱겁게 끝나버리는 구조가 될 수 없다. 영화 의 마지막 대목의 부라퀴와 선한 이무기의 전 세계의 운명을 건 건곤일척의 승부처럼 오히려 최고의 하이라이트 장면으로 부각될 수 밖에 없다.

    영화 속의 두꺼비, 즉 해결사라 할 수 있는 선한 이무기도 그랬다. 그는 아직 절대적 존재인 용(龍)이 되지 못한 미완(未完)의 존재였기에 미합중국의 초현대식 무기와 군대로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인 부라퀴를 손쉽게 처치하지 못한다. 오히려 부라퀴와 싸우면서 목숨을 잃을 것 같은 패배 직전의 위기에 까지 몰린다. 게다가 해결사인 선한 이무기는 사라의 도움을 받아야만 진정한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할 수 있는 존재다. 이는 진중권이 말한 극중에 해결사로 등장한 헤라클레스가 자신이 구해주러 온 처녀가 가진 구슬(여의주)을 얻어야만 신이 되어 올림푸스 산에 올라갈 수 있다는 설정과 같다. 이 경우 어느 누구도 이를 두고 헤라클레스에 의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구조라고 하지 않는다. 그가 정말 백치(idiot)가 아니라면. 이런 구조라면 헤라클레스 자신의 12가지 공역을 다룬 신화적 구조처럼 전혀 다른 서사구조로 자리매김할 뿐이다.

    게다가 마을 처녀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올림푸스 산으로 갈 수 있게 된 헤라클레스가 고마워서 다시 돌아와서 눈물까지 흘리는 구조를 보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IQ(지능지수)가 과연 세 자리를 넘어서는 사람인지 의심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시중에 진중권의 아이큐에 대한 논란이 생기는 건 결코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진중권의 싸가지

    진중권의 글이나 말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진중권의 태도를 문제 삼고 있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진중권의 무식함과 지능에 있다. 진중권이 진짜로 똑똑한 사람이라면 그까짓 것 진중권의 비매너나 싸가지 없는 태도 정도는 지식인의 지적 오만 정도이겠거니 하고 충분히 참아 줄 수 있다. 하지만 진중권의 낮은 지능지수로 인해 엉터리 논리나 틀린 말을 마구잡이로 쏟아낼 때, 더군다나 그런 주제에 다른 사람들을 보고 " 너희들은 이런 것도 몰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어쩌구 저쩌구.... 하는 식의 중권의 황당한 발언을 들어야 하는 진중권보다 똑똑한 사람들은 정말 어이가 없어서 벌어진 입이 안 다물어진다. 정말 "어디서 저렇게 무식하고 황당한 인간이 생겨났을꼬? 항간에 떠도는 진중권의 아이큐가 두 자리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군!" 이게 대한민국 진중권에 대한 지식인들의 태도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적어도 내 주위에 있는 서울대 동문들이 진중권을 보고 "아이큐 두자리" 라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다.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서울대가 낳은 대 망신 케이스로 생각한다는 사람도 있다. 학벌지상주의가 얼마나 큰 폐해를 끼치고 있는지 대한민국 사람들이 진중권을 보면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중권의 불행은 그런 지적 수준으로 미학을 하겠다고 덤빈 일에 있다. 사실 미학과가 소위 말하는 비인기 학과라서 법정대나 필자가 전공한 경제학부보다 커트라인 자체는 낮지만 실제로는 경제학부나 법학계열을 전공하는 사람들보다 아이큐가 더 높은 사람들이 파고들어야 하는 학문이다. 인문학 계열이 거의 다 그렇지만 특별히 미학은 언어에 대한 미묘한 감각까지도 타고 나야 유리한 학문이다.

    진중권 보고 좀 겸손해져라고 주문하는 분들도 더러 있는 모양인데 이 분들도 뭔가 크게 잘못 짚고 있다. 진중권은 아직까지 겸손할 자격을 못 갖춘 사람이다. 겸손이란 뭔가 특정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만이 비로소 가질 수 있는 특권인데 지능 자체가 낮은 진중권이 어떻게 겸손할 자격을 가진 사람인가? 피겨요정 김연아나 박태환 선수처럼 특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겸손할 수 있는 자격을 비로소 갖추게 되는 것이지 등위권에도 못드는 선수에게 겸손하라고 요구한다면 진짜로 황당한 개그가 되고 만다. 진중권은 차후에라도 겸손할 자격을 가질 수 있도록 일단 공부부터 한참 더 해야 할 사람에 불과하다.( 세상 일이 노력만으로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태까지 드러난 진중권의 내적한계 즉 지능수준으로 볼 때, 진중권이 그럴 자격을 갖출 가능성은 거의 절망적이다)

    이를 모르고 진중권의 싸가지를 문제 삼거나 겸손 운운하는 건 진중권의 술수에 말려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진중권에게 다른 사람들이 참고로 할 만한 실력이 있고 거기에다가 겸손까지 갖추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현 상태의 진중권에게 필요한 건 실력을 갖추는 일이지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실력을 갖추고 나서야 비로소 갖추던지 말든지 할 사항이다. 거듭 밝혀왔지만 진중권 현상의 출발점은 그 근원이 진중권의 무식함에 있는 것이지 태도나 싸가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진중권이 워낙 터무니없이 비매너를 일삼고 싸가지 없이 굴어서 그 부분만이 특별히 대중 앞에 부각되는 바람에 더 근원적 문제인 그의 무식함이 그 뒤로 숨겨져 조명을 못 받아 왔을 뿐이다. 사실 태도나 싸가지가 비위에 거슬려도 진중권이 하는 말이 옳고 바르다면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처럼 충분히 들어 줄 용의가 있다. 한데 진중권의 경우 정말 어처구니 없이 무식한 말을 하면서 자신이 하는 말이 몸에 좋은 쓴 말이라고 우겨대고 있으니 정말 개그다. 개그로 쳐도 너무나 뻔뻔한 개그다. 정확하게 말하면 진중권이 내뱉는 말들은 쓴 맛을 가진 약이 아니라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와 진배없다. 혹시 진중권이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이다. 무식과 기침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진중권의 경우 앞으로도 계속해서 무식하고 황당한 개그로 우리를 한껏 웃겨 줄 것이다. / 김휘영(문화평론가) -(다음 호에 계속)
  • 인권신장 2008/08/21 [10:39] 수정 | 삭제
  • 카리스마적 인물 중심의 정당체제가
    대의제를 민주주의를 망친다고 비판했던 최 교수가 이제 와서
    카리스마적 인물이 나와서 대의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전에 본인이 했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는 발언 밖에 안 되는 것
    같습니다...

  • 레인맨 2008/07/05 [11:28] 수정 | 삭제
  • 안녕하세요
    저는 박건규 라는 사람입니다

    한때 레인맨 이라는 필명으로 조잡한 글로 악명을 날린 사람입니다.

    월간말 창간 독자의 자격으로 월간만 전현준사장과 이종태 편집장의 비열행위에 분노 이들을 제거 해버렸던
    사람이지요
    안일규님의 통찰력과 의사에 전적으로 공감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제 연락처는 011-202-9900 입니다
    현재 가칭 촛불당 결성하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님의 지식이 필요해서 연락 드리오니
    꼭 연락 부탁 드립니다.
    몇날 몇일 날을 새어가면서 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지금까지 단 한번 알리지 않는 저의 실명과 전화 번호를 공개하오니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박건규 올림.

    촛불당 주소 : candleparty.or.kr

    혹여: 제가 요즘 너무 바뻐서 전화를 받지 못하게 되면 이메일로 연락을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