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촛불집회와 한국정치 1. 촛불집회의 배후는 '잃어버린 15년' 2. 촛불집회는 '정당없는 민주주의'의 결과 3. 촛불집회 계속 운동? 정당이 중요하다 4. 카리스마적인 리더를 기대한다 |
무능한 대의제가 아니라 ‘무능한 리더의 대의제’다 이번 글은 기자가 대학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촛불논쟁의 초점인 직접민주주의냐 대의제민주주의냐 혹은 정당정치냐 운동정치냐를 논하고자 한다. 오창은, 손석춘 등의 직접민주주의론자들은 대의제를 ‘무능한 것’으로 말하지만 현재 한국정치의 문제는 대의제가 무능한 것이 아니라 ‘무능한 리더’가 문제였다는 것이 기자의 논지다. 오창은이 “잘못된 정당정치로 인해 파생된 문제를 정당정치로 수렴하고 해결하자는 것”이라고 한 것은 한국정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기자는 타 학과의 수업을 수강하곤 하는데 타 학과에서의 일이다. 시험 날인데 교수는 시험시간이 15분이 지나가도 오지 않았다. 시험날을 착각해 이미 치뤘던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교수는 오기 힘든 상황이었다. 교수가 전화통화에서 제시한 대책은 오픈북 혹은 레포트였다.
타과생들은 7명밖에 되지 않아 교수와 가이드라인만 내놓고 40명으로 압도적 다수였던 해당학과 학생들에게 넘겼는데 정확하게 말해서 그들의 대표(대학은 한 학년의 대표를 ‘총대’라고 한다)에게 처리하라고 넘겼다. 여기서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일부 학생들은 그냥 가버리고 교수가 제시한 안이 나오자마자 몇 학생들의 반대 주장이 시작된다. 즉, 통제하나 못하는 ‘무능한 리더’였던 것이다.
그 결과 다수 의견 수렴도 제대로 못하게 되는데 지금 시점에서 정당들이 특히 야당이 아무런 역할을 못해 무능함을 보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리더가 무능한 결과 학생들 사이에서 설전이 오가고 시간이 10분, 20분씩 지나가도 해결되지 않았다. 내내 그 자리 그대로였고 교수와의 통화가 몇 번을 더 오갔지만 그 자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반정치, 반정당 담론, 신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모두 공유하고 있어 이런 상황을 정치적으로 대입해본다면 학생들은 분명 반정치, 반정당적 담론을 담을 수밖에 없다. 지금의 촛불 역시 강력한 반정치, 반정당 담론을 담고 있다. 강준만은 <한겨레> 기고 칼럼에서 기자와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데 “촛불집회는 ‘반(反)정치’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정치의 무덤’ 위에 핀 꽃이다. 그간 정당들이 해온 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지만, 이후 정치권이 더 큰 불신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답답해진다.”고 말한다.
오창은 역시 반정치, 반정당 담론에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최장집을 ‘상상력의 빈곤’이라고 지적하면서 “여의도 국회와 무관하게 아름다운 촛불을 그 낡아빠진 ‘이론’의 안경을 벗고 볼 수는 없는 걸까”면서 낭만주의적 정치관을 보여주는데 반정치적 사고방식도 볼 수 있다. 반 여의도는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적 반정치, 반정당 담론으로 반 여의도를 했던 이들의 결과는 참혹했다. 노무현의 당정분리가 낳은 결과는 보고서 정치, 위원회 정치였고 이명박은 반 여의도 100일 만에 여의도에 SOS를 청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여의도에 대한 불신감으로 가득 찼던 문국현은 그 결과 자유선진당과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하면서 자신의 본모습을 쉽게 드러냈다.
즐거운 주권혁명? 직접민주주의는 오히려 괴롭고 허상일 뿐 리더가 무능한 상황에서 사실상 대의제는 무의미해지는 것이며 사실상 대의제가 아닌 지금의 촛불과 같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직접적인 충돌, 교수와 학생들의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진다. 그 결과는 역시나 교수와 학생들의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지는데 지금의 촛불집회가 국가와 운동의 평행선이라면 여기서는 교수와 학생의 평행선이었다. 그 결과 극소수의 몇 학생들이 오로지 시험을 주장하면서 멀리 갔던 교수를 학교로 오도록 만든다.
다수의 학생들 상태로 봐서는 사실상 시험은 불가능했고 간 학생들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서야 무능한 리더는 다수의 의견을 확인해보나 교수에게 다수가 어떤 의견인지 말도 못한다. 처리할 가망도 없고 결국 교수가 학교로 1시간 내로 오겠다는 통보를 하자 절망을 하며 운동에서의 갑작스런 탈동원화를 불러온다. 현재 촛불이란 전국적인 운동이 언제 사그러들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 이전의 활발하다 못해 치열했던 교수와 학생들의 직접적인 충돌은 물론이며 학생과 학생들의 충돌마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절망의 얼굴을 띄고 말이다.
그 때 기자는 그 ‘무능한’ 리더를 학생의 의견을 수렴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을 통해 타협시켜 교수에게 전달하는 게 아닌 교수와 일반학생을 직접 통하게 한 점, 의견 수렴도 제대로 못해 어떻게 할지 머뭇거린 점, 학생들을 가지 못하게 막지 못한 무능한 리더십을 호되게 질타했다.
지금의 촛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왔기 때문에 싫어도 해야 되는 상황이다.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촛불을 끄고 싶어도 끌 수 없는 지금의 괴로운 상황, 진보진영이 그렇게 외쳐대던 노동담론, 소수자담론 모두 배제 당했고 그런 담론 다 내팽겨치고 촛불집회에 들어왔다. 기자가 제시한 한 사례에서도 즐겁다기보다 괴로웠다. 그러나 오창은은 “이렇게 즐겁게 시위한 적 있었나”며 낭만만능주의적 시각을 여실히 드러냈다.
국가와 시민사회(혹은 운동), 교수와 학생이 직접 부딪치는 것은, 혹자들이 촛불집회가 직접민주주의적인 하나의 유형으로 볼만큼, 무능한 리더로 인한 대의제의 무능화에 주목받는 직접민주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기회에 손석춘 등의 직접민주주의론자들은 촛불집회와 같은 직접민주주의를 “즐거운 주권 혁명”이라고 하나 과연 즐거운 주권혁명인가에는 심각한 물음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촛불집회와 같이 타협없이 어느 누구하나가 죽어야 할 정도로 ‘끝없는’ 성격의 촛불집회가 과연 즐거운가? 기자가 겪었던 일에도 즐거운 주권혁명일까. 제도권 정치가 빠지고 국가와 시민사회의 직접적인 충돌이 ‘주권’을 찾는 개념으로 말할 수 있는 건가.
직접민주주의란 건 없어…‘카리스마적 리더’가 나와야 결국 또 일부학생들은 가거나 다른 강의실에 가서 시험대비를 한다. 해당 강의실에 남은 학생들에게서 기자를 지칭하며 “저 분에게 맡기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결국 다시 대의제를 찾는 것이다. 아니, 자신들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할 리더를 찾는 것이다. 최장집의 말대로 “카리스마적 리더”를 찾고 있는 것이다. 상처만 준 주권혁명으로 인한 절망에 다시 찾은 것은 ‘다시 대의제’였지만 이전과 달리 “확실한 리더”를 원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실패한 결과 자신들을 대변할 사람을 구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기자는 그 ‘무능한’ 리더를 코치했고 기자에게 맡기려는 제안은 거부했다. 교수는 오고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견이었던 레포트를(처음에는 오픈북이 압도적인 다수의견이었으나 몇 학생들의 반발로 레포트로 선회했다. 그래도 몇 학생은 시험을 고집했다) 관철하기 위해 자신들을 대표할 수 있다고 판단한 사람에게 전화통화를 맡겼다.
기자는 이 전화가 사실상 마지막 전화라고 분석했고 새로운 리더는 잘 풀어나가는 듯 했으나 말문이 막히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다수의 의견은 관철될 수 없었다는 판단이 들었고 직접민주주의로 인한 절망을 대의제로도 회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기자가 전화를 이어받아 10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교수와 ‘레포트’로 관철시켰다. 이 일이 발발해서 해결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7~80분가량이었다. 반면 카리스마적 리더가 있었다면 10분 내로 해결될 문제였다.
교수와 통화에서 교수의 핵심적인 이야기는 두 가지로 몇 학생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전화해 시험 아니면 안 된다며 시험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과 자신은 학생 다수의 의견이라면 수용하겠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교수와 통화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말한 것이 다수의 의견이었고 기자가 지칭하는 ‘무능한’ 리더는 다수의 의견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다. 그리고 몇 학생의 교수와의 직접적 대화는 리더를 거치지 않은(혹은 정당을 거치지 않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직접소통은 특정이익집단, 가진 자들에 의해 민의가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대안을 내는데 있어서도 국가와 시민사회, 여기서는 교수와 학생의 직접적인 충돌에서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이 내놓은 대안은 몇 개 되지도 않았으며 그 대안들 역시 교수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시험을 치지 말자는 것이나 교수의 성격상 절대 허용할 수 없는 대리감독은 ‘대안’으로 여길 수도 없었다. 최장집이 말하듯 운동은 대안을 내는 데 능력이 부족하다. 지금의 촛불보라, 사회경제적 문제로 촉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목소리에서 대안은 없지 않은가. 최장집의 말처럼 운동은 잘못된 정책에 대해 강력한 반대의 조직을 가능하게 하지만 찬반을 뛰어넘는 구체적 대안을 형성하거나 이해관계 조정을 통한 결정을 이끌어낼 능력이 부족하다. 촛불 5대담론 속 민영화도 담겨있지만 이에 대한 대안담론은 나오고 있지 않은 것이 이를 보여준다.
‘정당’없는 직접민주주의론자들의 가치관은 중산층적 운동관 기자는 최장집이 진단한 것처럼 이명박 정부 내에서의 한국 민주주의는 무능한 정당이 뒤로 밀려나고 국가와 시민사회(운동)의 충돌이며 시민사회 대 시민사회의 충돌로 벌어진다고 본다.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 촛불집회는 국가와 운동의 직접적인 충돌을 보여주고 있다. 운동은 ‘청와대로’ 혹은 쇠고기 재협상을 정부에 직접적으로 원하고 있고 국가는 이에 물대포로 직접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 시민사회 대 시민사회의 충돌 또한 만만찮다. 이른바 보수 대 진보론과 같은 것이다. 조갑제와 진중권이, 보수단체 대 진보단체가 직접적인 충돌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정당은 온데간데없다. 야당들은 그저 촛불집회의 한 부류로 참가했다. 기자가 한 사례를 통해 지적했던 ‘무능한’ 리더와 다를 바 없다. 야당이 할 일은 ‘실질적인 대안’을 내놓는 것이다. 이재영처럼 제도권은 불리하니 들어가지 말아야 된다는 주장은 정당정치를 잘못 이해한 결과다.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제대로 된 대안을 내놓느냐에 달린 것이다. 야당은 국민들의 뜻에 부응하고 대표해야 된다는 개념으로 생각해야 된다.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오창은의 눈에도 정당은 없다.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권력을 위임받는 쪽에서 주권자의 요구와 무관하게 행동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은 주권자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는 오창은의 말에는 국가 대 운동, 국가 대 시민사회로만 그가 정치를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갈등은 폭발했지만 이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매듭지을 리더(정당)가 없기 때문에 국가와 시민사회, 시민사회와 시민사회의 직접적 충돌은 ‘끝없는’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기자가 여기에 직접민주주의론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언제까지 촛불을 들고 있어야 하는가, 촛불을 언제 들고 나와야하는가, 언제 열망이 들끓고 또 언제 절망으로 가는가.
직접민주주의와 운동은 정당을 대신할 수 없어 근본적인 문제는 아무리 운동을 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한다고 한들 기존 제도권 정당은 변하지 않는다. 계속 운동에 ‘올인’할수록 보수정치구도는 더 강해지고 공고화된다.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해줄 수 있는 곳이 정치이고 정당임에도 냉전반공수구적 가치만 반영하도록 고착화된다. 지금의 한국정치처럼 운동 역시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하기도, 운동에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반영할 수도 없다.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가 계층적 차이가 크지 않은 상대적으로 매우 동질적인 집단이었듯 일종의 직접민주주의로 규정되는 촛불집회 역시 계층적 차이가 크지 않은 매우 동질적 집단이다. 이번 촛불집회로 봐도 노동자들은 배제되었고 그 노동자 중에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참가는 저조했다. 즉 중산층적 운동관이란 것이다. 운동에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정당’이다. 운동이 정당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당민주주의에서는 정당이 국민들에게 이러한 정책이 가져오는 결과와 긍정적, 부정적인 측면을 잘 설명할 수 있지만 직접민주주의에서는 그런 기능이 불가능하며 그 결과 인기는 없어도 장기적으로 좋은 정책은 나오기 힘들어지고 잘 조직된 특정이익집단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다. 정당이 없어지고 직접민주주의가 들어선 자리에는 상층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집단들의 이익과 엘리트주의 등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정당이 중요하다 결론을 정리하기 앞서 촛불논쟁을 촉발한 오창은의 시선의 문제점에 대해 두 가지 지적할 것이 있다. 그는 “급진적 시각”을 주장하는데 우리나라의 냉전반공이데올로기나 민주화 이후 개방된 정치시장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매우 좁았다는 것이다. 좁게 개방된 이념적 스펙트럼은 새로운 세력의 창출을 막아왔고 기존의 민주화 이후에도 냉전반공세력을 건재하게 만들어줬다.
그 결과 촛불집회에서도 ‘반미’, ‘빨갱이’ 등으로 일반인들을 쉽게 규정할 수 있었다. 제도권 정치지형으로만 보아도 비교적 합리적인 보수로 평가받는 원희룡, 남경필 등은 초선일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나라당 ‘소장파’이며 중도파마저 ‘빨갱이’로 몰아붙여 제도권 정치에 뿌리내리기 어려웠다. 중도좌파 성향의 사람들마저 한국정치에 뿌리내리기 어려운 마당에 급진적인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기득권의 반발, 민심이 과연 급진적인 것에 동의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다. 현대한국정치가 걸어온 과정만 보아도 급진주의는 어려운 논지인데 기자가 보기엔 오창은의 “급진적 담론”은 아직도 변혁의지를 못 버린 증거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최장집을 보수적 시각으로 보는 관점은 지금 문제의 근본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보수인가 진보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며 최장집을 공격하고자 하는 논리 이상으로 보기 어렵다.
기자가 결론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본 문제인 정당체제를 내버려둔 채 반정치, 반정당 담론으로 직접민주주의 개혁을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으며 운동이 정당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정당정치를 하지 않아서 일어난 지금의 결과를 정당정치의 실패로 보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잔여적 복지국가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 가운데 복지국가들이 산에서 내려오고 있다고 내려가자는 신자유주의 주장들과 겹친다.
촛불과 같은 운동은 참여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의 담론을 담아낼 수 없으며 이들은 정당이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의 한 사례를 기자가 들었듯이 지금 필요한 것은 ‘카리스마적 리더’이며 이들은 어디서 ‘반짝’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카리스마적 리더’를 원하는 것은 기자만의 주장이 아니다. 최근 <SBS>드라마 ‘일지매’에서 주인공 이준기가 보여주는 모습이나 과거 역사적으로 나타난 영웅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이 나타나기 위해 훈련되는 과정 등이 필요했고 거쳐 왔으며 이 역할은 결국 정당이 할 수 있다. 결국 ‘좋은 정당’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금의 결과는 잘못된 민주주의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갈 길 간다는’ 이명박 대통령을 지금의 허약한 정당, 허약한 야당으로서는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주의를 더 강화하고 이를 통해 제대로 된 새로운 정당의 출현으로 이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