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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시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강준만의 세상이야기] 한국 사회 선진화의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인가?
 
강준만   기사입력  2008/06/26 [16:05]
‘우리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
 
한동안 촛불시위와 관련해 ‘10대 예찬론’이 쏟아져 나오는 걸 지켜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영 불편했다. 부모가 했어야 할 일, 해야 할 일을, 10대 자녀들이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하려는 게 아닌가. 미안하고 죄스러울 뿐, 잘한다고 칭찬하는 건 민망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10대를 어린애로 취급하는 낡은 생각일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사회적으로 각자 맡은 일들이 있을 텐데, 그들이 촛불시위를 하게 만든 일은 기성세대의 책임이 아닌가. 10대를 ‘희망’이라고 말하기 전에 왜 기성세대는 ‘절망’이 된 건지 그 고백과 분석을 먼저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이번 사태의 원인이 무엇일까? 너무 기회주의적일망정 보수 신문들조차 뒤늦게나마 이명박 탓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이 점에 대해선 만장일치를 본 것 같다. 그러나 그건 반쪽짜리 답이다. 왜 이명박이 그런 최악의 결정을 밀어붙였을까 하는 데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자 시절, 국정홍보처 간부가 ‘우리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라고 말한 게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비웃거나 개탄한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말인즉슨 옳다. 현 대한민국 시스템이 그걸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다른 나라 시스템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단점도 많겠지만, 일사불란(一絲不亂)이라는 장점은 있으니, 그냥 있는 그대로의 우리 현실을 인정하자는 뜻이다. 다만 그게 앞으로도 계속 우리에게 도움이 되겠느냐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또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자 시절, 한나라당 공천 갈등의 와중에서 한나라당 대표 강재섭은 “걸핏하면 당선자 팔고, 당선자 뜻인 것처럼 하며 당선자의 맑은 영혼을 이용해 자기 이익 차리는 건 있을 수 없다”며 “기군망상(欺君罔上), 임금 속이고 지금 말로 하면 간신”이라고 말한 바 있다.2)

당시 ‘당선자의 맑은 영혼’이라는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던 기억이 난다. 이명박의 영혼이 맑다고? 맑지 않다! 맑을 수 없다! 굳이 이명박 개인의 특수성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 한국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에서 맑은 영혼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오를 순 없다는 걸 지적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리더십이란 ‘영혼 통제술’이기 때문이다. 남의 영혼을 통제하려는 사람의 영혼이 어찌 맑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중요한 건 과연 간신이 임금을 속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임금은 속아 넘어갔는지 몰라도 대통령은 그럴 수 없다. 다른 나라 대통령은 몰라도, 한국의 대통령은 그럴 수 없다. 정보 채널이 많아진 탓도 있지만, 한국 유권자들은 과거 이승만의 노령(老齡)에 덴 탓인지 간신들의 휘둘림에 놀아나지 않을 화끈한 독선과 오만의 소유자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런 지도자를 추종하는 간신들은 그저 대통령의 입맛을 미리 알고 거기에 따르는 것일 뿐, 감히 새로운 걸 개발해내진 못하는 법이다.
 
‘아첨 권하는 사회’
 
잘 생각해보자. 대통령은 내각과 참모의 보좌를 받는다. 이론은 그렇다. 그런데 정말 받는가? 받지 않는다!  주요 결정은 혼자 내린다. 이명박만 그런 게 아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다 그렇게 해왔다. 우리는 ‘고독한 결단’을 지도자의 최고 자질로 여기는 문화에 익숙한 유권자들이다. ‘고독한 결단’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때에만 문제를 삼을 뿐이다. 우리는 대통령직에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과부하를 걸어놓고 대통령들이 망가지는 모습에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표현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내각과 참모는 대통령의 최악의 결정엔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이론은 그렇다. 대통령은 신(神)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다! ‘영혼 없는 공직자’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국연구개발원(KDI) 연구위원 임원혁이 잘 지적했듯이, “쇠고기 협상 타결 그 자체가 우리 협상단의 목표가 되자 미국 측은 쇠고기를 대량으로 수입하는 대다수 국가에서 수용된 적이 없는 조건들을 들이밀었다. 스스로를 국민의 머슴이 아니라 대통령의 머슴이라고 생각하는 영혼 없는 공무원들은 검역주권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이 조건들을 받아들였다.”3)

바로 이게 진실이다. 그런데 ‘영혼 없는 공직자’라는 기본 원리는 이명박 정권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역대 모든 정권들은 물론 한국 사회의 전 분야에 걸쳐 관철되고 있는 사실이다. 그간 우리는 그 문제를 지도자 탓으로만 돌리는 오류를 반복해왔다. 이번 사태의 원인도 이명박에게서만 찾으면 마음은 편해질지 몰라도, ‘영혼 없는 공직자’라고 하는 사실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즉, 이명박이 최악의 결정을 내렸다는 점에 대한 비난은 옳지만, 한국의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은 내각과 참모의 보좌를 받게 돼 있다고 하는 대원칙이 실종돼 버린다는 말이다.

리영희가 간결하게 정리했듯이, “한미 쇠고기 협상은 이명박 정부가 미국의 체면을 먼저 생각하고 권력자들에게 아첨하기 위해 준비한 선물이다.” 공직자들에게 최소한의 영혼이 있었다면, 이명박의 ‘아첨’에 브레이크를 걸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공직자들의 지적 역량이나 도덕적 수준이 그 정도는 충분히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왜? 일찍이 현진건은 일제 강점기의 한국을 ‘술 권하는 사회’라고 했지만, 오늘의 한국은 ‘아첨 권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현진건은 “정신이 바로 박힌 놈은 피를 토하고 죽을 수밖에 없지”라며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고 했다.4) 지금은 피를 토하고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아첨을 거부할 정도로 정신이 바로 박힌 공직자는 살아남을 순 있을망정 공직 서열의 높은 곳에 오르긴 어렵다.
 
김선주의 ‘노무현 옹호론’
 
이걸 드라마틱하게 입증해 보이고 있는 것이 최근 이명박 정권이 밀어붙이고 있는 ‘물갈이 독재’와 ‘공직의 이권화’다. “당신 노무현 때 임명됐지? 무조건 옷 벗어! 당신은 지난 대선 때 무슨 일 했지? 그 정도면 이거 먹어!” 줄서기와 줄대기의 기본 정신이라 할 아첨을 창궐케 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정권은 ‘과학’마저 줄서기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5월 23일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첨단환경연구실에서 일하는 연구원 김이태는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 ‘대운하에 참여하는 연구원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한반도 물길 잇기 및 4대강 정비계획의 실체는 운하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잘못된 국가 정책에 대해 국책연구원 같은 전문가 집단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영혼 없는 과학자가 되라 몰아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5)

공정하게 말해보자. 이명박 정권의 경우 정도가 심하다는 것일 뿐, 이건 역대 정권들이 모두 해온 일이다. 그간 우리는 각자의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달리 반응함으로써 이런 관행과 풍토를 지속시키는 데에 일조해왔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아첨’을 ‘코드’로 착각하거나 정당화해온 것이다.

2008년 3월 언론인 김선주는 노무현이 살고 있는 봉하 마을에 관광객이 몰려드는 걸 거론하면서, 공격적인 ‘노무현 옹호론’을 펼쳤다. 김선주는 노무현의 문제를 “정치적이지 못하고 스킨십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간단히 정리한다. 그건 ‘결정적인 단점’이라면서도 “그러나 정치적이라는 말의 부정적인 요소를 생각하면 그것은 장점으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더 들어보자.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했다. 영혼이 잠식되면 이성이 마비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 후보 시절부터 노골적으로 적의를 보였던 거대 언론은 사회 각 계층의 기득권 세력들과 힘을 합쳐 대통령을 신나게 왕따시켰다. 길들여지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를 길들이려고도 하지 않는 노무현이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불안했기 때문에 이성이 마비된 탓이다. 이미지를 걷어내고 나면 실체가 보인다. 그 이미지 때문에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던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평가는 그러니까 이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6)

잔인할 정도로 낭만적인 이야기다. 이명박에게 정권 넘겨준 책임은 쏙 빼고, 이제부터 평가가 시작된다니, 강의실에서나 할 법한 이야기다. ‘영혼’이 그런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기득권 보수파가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노무현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건 굳이 ‘영혼’을 들먹일 것 없이 당연지사(當然之事) 아닌가? 그거야 이성이 펄펄 살아 있다는 증거지, 왜 마비된 증거란 말인가? 그 말은 오히려 노무현을 지지했다가 돌아선 사람들에게나 어울릴 말이지만, 이 경우엔 좀 더 정교한 논리를 개발해야 하는 게 아닐까? 노무현만 살리려고 할 게 아니라 통합민주당을 봐야 할 게 아닌가.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죽을 쒀도 통합민주당의 지지율은 오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들 역시 ‘영혼이 없는 집단’이라는 게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대중은 평소엔 공직자의 영혼의 있고 없음에 아무런 반응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이 공정한 것도 아니다. 결과에 따라 춤을 춘다. 결과가 나쁠 경우, 영혼 없음은 치명적인 악행(惡行)으로 간주된다. 그저 기회 잡아 이벤트나 벌이려는 3류 악극단, 이게 통합민주당에 씌워진 이미지다. 실체일지도 모른다.
 
‘영혼 있는 공직자’를 위하여
 
영혼 문제는 여야,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어느 한쪽에만 책임을 전가시킬 경우,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당파성의 최대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당파성은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세상만사를 공정하게 보는 걸 방해한다. 그래서 올바른 답을 찾아내지 못한다. 오직 우리 편이 이기는 게 답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올인’ 했다가 우리 편이 이기지 못했을 땐, 그때라도 공정성을 회복하는 게 좋지 않을까? ‘편 가르기’ 게임에 참여하지 않은 일반 민중이 최대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여야,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존재하는 엘리트의 출세 욕망이다. 진보파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라고 해서 연봉 적게 주거나 권한이 제약받는 게 아니질 않은가. 줄 서고 줄 대는 것도 똑같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내용’으로 무엇이 좋다거나 싫다고 말할 뿐, 좋은 쪽과 싫은 쪽이 똑같이 공유하고 있는 기반은 외면하고 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한겨레』는 “아무리 정권이 영혼 없는 공무원을 요구한다지만, 부하 직원을 파리목숨 취급하는 그런 장관 밑에서 제대로 일할 사람은 없다”고 했다.7) 제대로 일할 사람은 없지만 일하겠다고 ‘저요 저요’ 손드는 사람은 많다는 게 문제다. ‘부하 직원을 파리목숨 취급’하는 건 한국 정치·행정의 오랜 관행이다. 세계에서 장관 수명이 가장 짧은 나라들 중의 하나인 한국에선 장관이야말로 ‘파리목숨’이지만, 그래도 그걸 해보겠다고 줄 서고 줄 대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 걸 어쩌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아첨 이외에 자기 생각을 말할까? 아니 자기 생각은 있는 걸까? 헌법 이전에 대통령의 독선과 오만을 숙성시키는 기존 관행과 풍토가 문제다. 줄서기와 줄대기로 고위 공직을 차지한 사람이 대통령에게 직언을 할 리 만무하잖은가. 대통령은 인사권으로 대통령 권력의 위대함을 만끽하지만, 바로 그게 늘 자해(自害)의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공직자들에게 영혼을 돌려주지 않으면 한국의 대통령제는 늘 필패(必敗)할 수밖에 없다. ‘영혼 있는 공직자’를 보장하기 위한 방안은 많다. 이걸 실현하기 위해 애를 써보자. 이게 촛불시위의 최대 교훈이 아닐까?

나는 『한국일보』 2006년 10월 4일자에 「‘방송의회’를 구성하자」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제목은 좀 엉뚱한 것 같지만, 내가 이 칼럼에서 말하고자 했던 건 한국 사회의 역량과 한국인의 능력에 대한 신뢰다. 방송인들에게도 영혼을 돌려주자는 것이다. 최근 이명박 정권의 방송 장악 의지와 실행이 너무도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칼럼 내용에 지금은 공감하리라. 실례를 무릅쓰고, 제목을 바꿔 다시 소개한다.
 
방송인들에게 영혼을 돌려주자
 
1987년 6월 항쟁을 전후로 방송의 공정성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20년간 계속돼왔다. 처음 10년간 공영방송 노조는 일일이 세기조차 힘들 정도로 많은 파업을 했다. 많은 노조원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개혁·진보 세력은 방송노조의 투쟁에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다음 10년은 모든 게 뒤집어졌다. 그간 공정성을 생명처럼 여기던 지식인들은 나를 포함하여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공정성 문제에 대해 입을 닫았다. 자기들이 원하는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제 공정성은 보수파의 신앙이 되었다.

만약 내년 대선(2007년)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어떻게 될까? 공정성 문제에 입 닫고 살던 사람들은 계속 입을 닫을까? 공정성을 외치던 보수파는 계속 공정성을 외칠까? 공정성이란 무엇인가? 그건 당파성인가? 내 맘에 들면 모른 척하고 내 맘에 안 들면 문제 삼아야 하는 그런 것인가? 우리는 언제까지 공정성을 둘러싼 이 얄팍한 정략 게임을 계속할 것인가?

나부터 반성하겠다. 정치권도 여야(與野)를 막론하고 모두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자세로 이 문제에 정직하게 대응하면 좋겠다. 방송을 권력으로부터 완전 독립시키는 대원칙에 합의하자.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목격하고 있듯이 공정성 갈등 비용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야당(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은 지금이 딱 좋은 시기다. 한 세대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절호의 기회다. 여당(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으면 여당이 목숨 걸고 반대하겠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다. 야당은 집권 가능성이 높다 해도 내심 불안에 떨고 있는 만큼 내년 대선에서 방송 공정성을 확실하게 이뤄낼 수 있는 방안을 결사반대할 처지는 아니다.

방송을 시민사회에 돌려주자. 가칭 ‘방송의회’를 구성하자. 방송위원회 위원과 공영방송사 사장에 대한 인사권을 방송의회에 넘겨주자. 행여 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방송의회를 구성하는 방송의원은 교통비조차 받지 않는 완전 무보수 명예직이다. 방송의원들은 방송위원회 위원 및 방송사 사장 등을 선출하는 투표권만 행사하면 된다. 선출 후 중대 사안에 국한하여 결정을 내리는 추가 투표도 있을 수 있겠다.

방송의원 규모는 사회 각계를 대표하고 외부 압력과 로비를 거의 무의미한 수준으로 만들 수 있게끔 수천 명으로 하자. 선출은 완전 자유경쟁 공모제로 하자. 후보자들은 수천 명의 방송의원 앞에서 자신의 비전과 소견을 역설해 본격적인 검증을 받도록 하자. 공정성 안전장치도 그런 검증 과정을 통해 마련하도록 하자.

기존 시스템과 비교하여 방송의회에 문제가 없을 리 없다. 적잖은 부작용도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처럼 정치권의 정략적 갈라먹기 싸움에 늘 이전투구(泥田鬪狗)로 전락하곤 하는 공정성 갈등을 유발하는 기존 방식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선출만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일 뿐 방송이 국가체계상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게끔 하는 기존 시스템은 그대로 가져가는 만큼 ‘독립’에 대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방송의회는 한국 시민사회의 수준을 반영할 것이다. 그 수준이 낮아 문제가 되는 건 감수하자. 지금 우리가 현 시스템에 대해 분노하는 건 그것이 한국 사회 전반의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 아닌가.

방송의회 구성은 기존 법과 제도를 상당 부분 바꿔야 하는 일인 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연구 검토해보되 그 취지와 의미만큼은 지금 당장 받아들이자. 방송계를 눈만 뜨면 싸움질하기에 바쁜 정치권의 대리전쟁터로 만들거나 볼모로 잡아두는 건 우리 모두의 자학(自虐)이다. 다른 정부 유관 기관들도 이런 인사 방식을 원용하자. 이런 식으로 우리 사회의 중립적 영역을 넓혀가지 않는 한 한국은 내부 당파 싸움에 역량을 소진시켜 주저앉고 말 것이다.
 
영혼을 느끼면서 살자
 
위 글에 대해 뒤늦게나마 자평을 해보자면, 중립적 영역을 넓혀가자는 건 말은 좋지만, 현실적으론 어려운 일이다. 속된 말로 장사가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이쪽이건 저쪽이건 어느 한쪽에 서야, 그것도 강경노선을 부르짖어야, 지지자들이 몰리는 법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염두에 두고 몰리는 사람들도 많지만 카타르시스 해소를 위해 몰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중립적 영역의 확대’가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정녕 선진화를 원한다면, 중립적 영역을 확대하는 길을 거쳐 가지 않고선 답이 없다. 촛불시위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아름답고 통쾌할망정,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 참담하지 않은가? 이명박 정권의 고위 공직자들에게 최소한의 영혼이 있었다면 그런 일이 벌어졌겠는가?

‘중립적 영역의 확대’란 다름 아닌 ‘영혼 회복 운동’이다. 줄서기와 줄대기를 하지 않고서도 시민사회의 상식과 양식에 의해 공직을 맡을 수 있는 기회의 부여다. 그렇게 해서 공직을 맡은 이들이 무엇이 두려워 자신의 영혼을 '줄’에 팔겠는가? 자나 깨나 줄 타령 하다간 이 나라가 목에 줄이 감겨 죽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줄부터 찾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게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데에 공감할 게다. 진정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

영혼 문제에 집착한 때문일까? 『경향신문』에서 가수 이상은의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영혼’이라는 말에 눈이 갔다. “일관되게 담으려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어떤 인터뷰에서 ‘어떻게 해서든 영혼을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했던데”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상은은 이렇게 답했다.

“아름다움이요. 20대 때 느낀 아름다움과 30대 때 느낀 아름다움은 다른 것이었지만, 아름다운 음악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을 담겠다’는 이야기는 자기 영혼을 느끼면서 작곡을 하고, 그런 노래를 통해 삶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다는 뜻이었죠. 저는 사람이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들이 삶에 치여서 죽어버리지 않도록 여행도 다니고 해요.”8) 

자기 영혼을 느낀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사치스러운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영혼 불감증에 걸려야만 성공하고 출세하는 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걸 바꾸자는 것이다. 결코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낭만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나는 특정 인물에 열광하는 ‘빠’들이 늘 아쉽다. 여야,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아쉽다. 그들은 늘 ‘중립적 영역의 확대’와 ‘영혼 회복’에 적대적이거나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세계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온통 KBS나 MBC나 SBS나 공개방송 수준으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농후하다. “오빠!” 하고 외치면서 말이다. 선의는 그게 아닐망정, 결과는 늘 그렇다.

‘영혼 회복’이란 그런 게 아니다. 그건 영웅주의와 영웅사관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름 없는 보통 사람들의 최종적 역량을 믿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신뢰 운동이다. 특정인에 열광할 힘을 아껴 지속가능한 풍토와 시스템을 만들자는 운동이다. 지도자가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운동이다. 한국 사회 선진화의 첫 번째 조건은 민관(民官)을 막론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는 것이다. 1년 365일 내내 자신의 영혼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여전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다면, 생각을 더욱 다듬어 앞으로 계속 말씀드려 보겠다.  

[각주]

1)『한겨레』 2008년 6월 9일자에 기고한 칼럼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2) 문일, 「간신론」, 『국민일보』, 2008년 2월 6일.
3) 임원혁, 「공기업 민영화 졸속 안 되게」, 『한국일보』, 2008년 5월 5일.
4) 장석주,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 1: 1900-1934』, 시공사, 2000, 263쪽.
5) 이정훈·최원형, 「대운하 연구원 “4대강 정비 실체는 운하 계획”」, 『한겨레』, 2008년 5월 24일.
6)  김선주, 「“노무현씨, 나와 주세요”」, 『한겨레』, 2008년 3월 7일.
7)「사설: 김도연 장관, 추한 모습 그만 보이고 사퇴하라」, 『한겨레』, 2008년 5월 28일.
8) 이용욱, 「이상은 “다운로드 염증… 3년은 음반 내고 싶지 않다”」, 『경향신문』, 2008년 5월 23일.

 
* 본문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8년 7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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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6/26 [16:0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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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2008/06/26 [21:54] 수정 | 삭제
  • 이명박 대통령 시절?......
    필자는 수십년 지난 역사를 애기하고 있는 것인가?...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거기에 따른 바른 행동을 해야하기 때문에 짐승과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남용 하거나 오용하면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명박 정부 시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글의 서두부터 악의적인 글을 올리고자 하는 흔적을 남기면서 현실을 왜곡하고 호도하고 있다. 머리 글부터 비판으로 일관 하고자 하는 자의 글은 보지 않아도 이미 그 내용은 나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로 인하여 사회가 혼탁하고 위기에 설때도 많았으며, 피를 흘리고 귀한 생명까지 빼앗기며 역사가 왜곡 된적도 많았다. 펜을 잡는 자들은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하고 인간적인 양심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탈만 쓰고 있으면 먹고 살아야 하는 생각만 들어 있는 본능적인 야생 짐승이 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자리에 앉아서 일 하기도 전에 물고 흔들고 씹어 댓다. 그러한 자들의 입에서 이 명박 정권 시절 이라는 유치원생도 안쓰는 문자로 혼란을 부추긴다. 먼저 한글 공부를 더 하든가 국어에 대한 사용 언어를 더 배운 다음에 시절이라는 단어는 어느때 사용해야 하는지 부터 습득하고 글을 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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