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를 향한 열망 한국 사회의 독특한 풍경이라 할 치열한 '원조(元祖)' 경쟁은 비단 음식점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니다.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벌어진다. 자신이 새 시대를 여는 원조로 기록되고 싶어 하는 지도자들의 야망 경쟁은 한국정치의 익숙한 모습이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라는 딱지가 바로 그런 야망을 웅변해준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는 부풀려진 딱지일망정 그렇게 부를 만한 그럴듯한 역사적 사건과 의미나 있었지만, '참여정부'는 그것마저 없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최초'를 찾아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참여정부 사람들은 노무현을 향해 '최초의 탈권위주의 대통령' '혁명적으로 민주주의를 실제로 하는 최초의 대통령' 등과 같은 '최초 시리즈'를 양산해내기 시작했다. 그런 시도가 나쁜 건 아닐망정, 문제는 그런 '최초를 향한 열망'이 민생은 물론 전반적인 국정운영이라는 의제의 가치를 압도했다는 데에 '참여정부'의 비극이 있었다. 아니 국정운영 의제마저도 '최초'를 향한 고려가 최우선시되었다. 사람들은 그걸 가리켜 '과욕(過慾)'이라고 했지만, 그건 엄밀히 말하면 과욕도 아니었다. 뒷감당은 생각하지도 않고 일단 저질러놓고 보자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2003년 대통령직인수위 정치개혁연구실장을 맡았던 고려대 정경학부 교수 임혁백은 2008년 2월 "참여정부는 레토릭이 너무 많았다. 급진적인 정책이 아닌데도 급진적인 것으로 포장해서 반발을 자초했다"고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게 바로 '최초 병' 또는 '원조 병' 때문이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두었을 때에도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민주개혁 세력이 의회권력을 교체했다"며 감격하기만 했지, 이후 프로그램은 빈약했고 추진방식은 엉망이었다. '참여정부'라는 딱지가 내세운 '참여'는 대표성과 균형을 상실한 채 골수 마니아 지지자들만의 참여로 전락함으로써 오히려 대(對)국민 소통을 어렵게 만들었다. 사정이 이와 같으니, '원조' 찾다가 본전도 못 찾은 셈이다. 대통령만 원조에 집착하는 건 아니다. 모든 조직의 우두머리는 다 원조가 되고 싶어 한다. 경찰청장이 바뀔 때마다 새 청장의 지휘방침을 적은 현판을 새로 만들고 그 비용으로 매회 4억 8000만 원가량을 사용했다는 보도로 인해 경찰청이 구설수에 휘말렸지만, 그게 어디 경찰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민중의 나라'와 '엘리트의 나라' 이명박 정부는 그 어떤 딱지도 내세우지 않기로 했다. 원조 경쟁을 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다. 원조임을 과시하는 딱지의 값이 땅에 떨어진 현실을 감안한 것일 뿐, 역사에 원조로 기록되고 싶어 하는 이명박 정부의 '원조 콤플렉스'는 역대 정부들을 능가할 조짐이 농후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명박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선진화 원년'을 선포했다. 2007년은 '후진화 말년'이란 뜻인가? '원조 콤플렉스'가 나쁜 건 아니다. 야망이 없었다면 어찌 지도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중요한 것은 야망을 옳은 방향으로 발휘하는 지혜이지 야망 자체는 탓할 게 못 된다. 그런데 우리 지도자들의 '원조 콤플렉스'는 과거와 디지털식 단절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이전 정부들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고 모든 걸 '정치화'하려는 특성이 있다. 바로 이게 성공을 어렵게 만드는 주요 이유다. 뭐든지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의욕은 과거를 부정하면서 기존 질서를 때려 부수는 걸로 시작한다. 주로 국민의 불만을 산 것들을 건드리기 때문에 처음엔 뜨거운 박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박수는 오래갈 수 없다. 실망과 저주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모든 국민을 만족시킬 수 있는 국정 의제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의제건 어느 정도의 불만은 필연이다. 불만의 최소화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 일을 위해선 이전 정부의 경험에서 배우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원조 콤플렉스'는 이런 자명한 상식을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혁명이 가능할 것 같은 착각을 심어준다. 이런 착각은 이른바 '인(人)의 장막'으로 인해 악화된다.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겠지만, 대한민국은 두 개의 나라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어떤 정부가 들어서건 자신의 삶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절대 다수의 국민이 사는 나라다. 둘은 어떤 정부가 들어서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과 가문의 영광이 좌우되는, 수천에서 수만에 이르는 엘리트가 사는 나라다. '민중의 나라'와 '엘리트의 나라'라고나 할까? 진짜 나라는 '민중의 나라'이지만, 언론매체는 '엘리트의 나라'를 진짜 나라로 간주하는 듯한 보도를 홍수처럼 쏟아낸다. 누가 장관이 되고 청와대 수석이 되느냐 하는 게 민생에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하다는 게 언론의 판단이다. 대서특필로도 모자라 온갖 설(說)까지 미주알고주알 보도해대는 걸 보면 분명히 그렇다. 중요해서라기보다는 야망이 강한 언론인들의 독특한 아비투스(습속) 때문일 수도 있다. 언론인 하다가 정치인이나 관료를 할 수도 있지만, 한국의 경우엔 해도 너무한다. 정권교체기나 선거 시엔 엑소더스(대탈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수많은 언론인들이 정관계 진출을 시도하니 말이다. 평소 그런 자세로 정치 보도에 임한다고 생각해보라. 이들이 '엘리트의 나라'에 중독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게 아닐까? 실제로 새로운 정부의 출범은 수천, 수만의 엘리트에겐 혁명과 다를 바 없다. 춥고 배고팠던 세월을 오래 보내다가 하루아침에 고위직을 꿰찬 사람들에겐 문자 그대로 혁명이다. 노무현의 386 동지들이 5·16 쿠데타를 들먹이면서 "우리는 노사모와 노란 목도리를 매고 한강을 건넜다"고 큰소리를 쳐댄 것도 바로 그런 충격적인 감격을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하긴 춥고 배고팠던 실업자 신세에서 하루아침에 정권을 잡았는데 눈에 뵈는 게 있었겠는가? '인(人)의 장막'의 자기기인(自欺欺人) 이명박의 동지들은 입버릇처럼 '잃어버린 10년'을 외쳐댄다. 알 것도 같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그들은 지난 10년 동안 얼마나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가. 평소에 경멸했던 사람들이 모든 권력을 독식하면서 떵떵거리는 모습에 얼마나 고통스럽고 참담했겠는가. 노무현과 그 일행이 놀던 자리는 쓰레기차를 동원해 치우는 걸로도 모자랄 것이다. 포클레인을 동원해 다 뒤집어놓는다 한들 사무친 한(恨)이 풀리겠는가. 한나라당에 18대 총선 공천 신청자가 너무 몰려 번호표까지 나눠줄 정도였다는 것도 바로 그런 한풀이의 열기가 그만큼 뜨겁다는 걸 말해준 게 아니겠는가. 사실 이명박은 물론 그의 동지들의 최전성기는 바로 대선 직후였다. 권력에 대한 안팎의 기대감이 최고조에 오를 때가 피크다. 이제부턴 내리막길이다. 조선일보 정치부장 김민배가 2007년 12월 30일자 칼럼에서 그걸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표현했다. "지금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주변의 '신(新)권력자'들은 최고의 상종가를 누리고 있다. …… 새 정부가 취임하는 2월 25일부터 권력이 시작되는 게 아니다. 대선 바로 다음 날부터 권력은 시작된다. 이때 실력자나 실세, 권력자의 주변에 접근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이 방면에서 프로들이 모두 동원돼 선두다툼을 벌이기 때문에 생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를 따름이다. 공직 세계에선 이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온갖 인맥, 학맥, 혈맥과 동원 가능한 '빽'과 연줄이 총동원된다." 이게 나쁜가? 이건 좋고 나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바뀌기 어려운 권력의 속성이다. 그럼에도 우리 언론은 짐짓 그게 나쁘다고 호통을 쳐댄다. 예컨대, 『국민일보』 2007년 12월 31일자 사설은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일부 인사들은 비열하고 치졸한 방법들도 서슴지 않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독설을 퍼부었다. "몇몇 사람은 업무를 작파한 채 휴대전화만 쳐다보고 있다고 한다. 인수위에서 연락이 오지 않을까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권력만 좇아 다니는 이들 부나방이 기용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 해충은 한시라도 빨리 박멸하는 것이 최선이다. 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처럼 이들의 명단을 공개해 아예 공직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을 못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 선의는 알겠지만, '해충 박멸'이라거나 '성범죄자처럼 명단 공개' 운운은 해도 너무 했다. 역설 같지만, 그 '소리 없는 전쟁'이 차라리 '탐욕의 대경연'이라면 다행이다. 더욱 큰 문제는 한(恨)에 이념까지 동원되면 '탐욕'은 순식간에 '시대정신'이라는 포장을 둘러쓰고 모든 사람을 속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자기를 속이고 남도 속인다는 뜻을 가진 자기기인(自欺欺人)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교수신문』은 2007년의 사자성어로 '자기기인'을 꼽았지만, 2008년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야망이나 출세욕에 사로잡힌 데다 이념이라는 외투까지 걸친 나머지 자신도 알게 모르게 자기기인을 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인의 장막'에 갇힌 지도자가 택할 길이 '원조의 길'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원조 경쟁은 족발집들에 이명박이 노무현의 닮은꼴이라는 것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무엇이 닮았는가? 기질도 기질이지만, '드라마 주인공'이라는 게 가장 닮았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일어나 가장 드라마틱한 '코리언 드림'을 이뤘다는 게 같다. 이런 드라마틱한 자수성가형의 가장 위험한 점은 "나는 밑질 게 없다"거나 이른바 '치킨게임'에서 끝장 보려는 성향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노무현은 그간 좋은 이미지였던 '아웃사이더'와 '자수성가형'에 비수를 꽂은 격인데, 이명박은 그런 현실을 수정할 것인가 아니면 완성할 것인가? 이들의 드라마는 정계 입문 후에도 계속되었다. 2008년 1월 31일 대통합민주신당 의원 김부겸이 대정부질문에서 그 점을 잘 지적했다. 김부겸은 "노 대통령의 비극은 한 편의 드라마처럼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라며 "민주당 경선 돌풍,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대통령 탄핵 역시 드라마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람이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행운을 세 번 연속 겪게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아마도 그것은 엄청난 자기 확신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노 대통령 비극의 교훈은 이 당선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며 "이 당선인 역시 엄청난 행운의 연속으로 대통령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미 저는 이 당선인에게서 엄청난 자기 확신의 기세를 느낀다"며 "하지만 이 당선인은 부디 '나의 행운이 곧 나의 옳음을 입증하는 하늘의 뜻'이라는 착각만은 말아 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김부겸의 주문은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노무현을 보면 안다. 노무현은 아직도 억울하다고만 생각할 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퇴임 후 사이버전쟁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쳐대고 있다. 그러니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지 않은 이명박에게 무슨 말을 하건 씨알이 먹힐 리 만무하다. 그러니 남은 건 이명박식 혁명 사업밖엔 없다. 이명박의 절친한 동지인 보수 신문들은 "규제 깨기만 제대로 해도 정권 성공의 절반은 보장"이라고 부추기고 있으니, 이명박은 불도저로 밀고 해머로 깨는 데에 열과 성을 다할 게 틀림없다. 그런 혁명 사업에 열심히 임하더라도,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으려 하고 있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보는 게 좋겠다.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라며 '원조 콤플렉스' 중증(重症)을 드러내는 일도 반복하지 않으면 좋겠다. 원조 경쟁은 족발집들에나 맡겨두고, 겸허한 자세로 이전 정부의 경험을 공부해보는 게 어떨까? * 본문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8년 4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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