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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경제모델 논의, 공상 아닌 현실담론으로
[책동네] 새사연이 만든 <베네수엘라, 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다>
 
황진태   기사입력  2007/03/11 [11:53]
지난해는 가히 진보적 싱크탱크의 붐이었다. 대표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하 새사연), 희망제작소, 세교연구소 등을 들 수 있는데 최근엔 이들 싱크탱크들이 모여서 합동토론회를 개최하여 현재 진행 중에 있다. 이들 연구소 중 새사연은 이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이라는 단행본을 출간하여 소위 ‘새사연 모델’이라고 불리는 대안경제모델을 화두로 던진 바 있는데, 이번에 발간된 두 번째 신서 <베네수엘라, 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다>는 그들이 내놓았던 대안경제모델이 유토피아적 망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가능함을 예증하고자 한 것이다.
 
남미에 대한 보수언론의 장막부터 걷어내야

새사연 정희용 미디어센터장은 본서를 출간하기 위한 자료수집을 하면서 국내학계의 남미 관련 자료와 논문의 축적이 얄팍함을 토로했었다. 필자도 남미 관련 서적 중에 60년대 종속이론 서적을 제외하고, 현재 남미정세를 알 수 있는 단행본으로는 2003년 개마고원에서 펴낸 <콜롬버스에서 룰라까지>가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다. 이 책도 당시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시기와 맞물린 분위기(룰라와 노무현을 비교하는 등)에 편승되어 출간된 측면이 강한데, 저자인 전북대 송기도 교수가 2006년에 콜롬비아 대사로 임명된 것 또한 달리 생각하면 남미 전문가가 국내에 드물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대선이후에 브라질 룰라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포개어서 보는 시각의 보도기사를 통해서 대중들에게도 남미에 대한 약간의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남미정치를 포퓰리즘 하나로 보는 보수, 진보를 망라한 언론의 단선적인 보도프레임은 국내에서 남미에 대한 균형적인 이해를 돕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국내의 메마른 남미 연구 풍토에 이번 저서의 출간 자체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김병권 외 6명 지음, <베네수엘라, 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다> 책표지     © 시대의창, 2007년 02월
본서는 이러한 국내의 왜곡된 남미 상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컨대 보수언론이 차베스를 “정치적 후진국의 독재자”, “포퓰리스트”로 몰아가고 있는 등의 왜곡보도에 대해서 응당 독재자라면 지난 군부독재정권의 우리의 기억처럼 언론이 정부 통제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할 텐데 차베스는 지난 2002년 일어난 반차베스 쿠데타 세력과 자본파업에 동조한 보수언론에 대해서 이후 지금까지 어떠한 정치적 보복도 가하지 않고 있다.

더불어 차베스 정부 이전에 이미 대안은 없고 인기에 편승한 포퓰리즘 정부를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충분히 맛보았다. 차베스가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98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부터 변함없는 지지를 받는 것은 단순히 포퓰리즘에 기댄 공허한 인기가 아니라 일부 기득권층에게만 유리했었던 헌법을 바꾸고, 침체된 경제를 부활시키는 개혁프로그램이라는 명확한 비전을 국민들에게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이러한 개혁의 실행주체로 민중들이 있었기 때문임은 본서는 물론이고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에서도 일관되게 관통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책의 본론은 먼저 베네수엘라 혁명이 어떻게 발생하게 됐는지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짚어보고, 혁명의 핵심 축으로 민중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가능케 한 볼리바리안 서클, 주민자치위원회 등의 조직을 분석한다. 그리고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를 지향하는 공동경영제도와 협동조합의 사례들로 엮어졌다. 이러한 베네수엘라 혁명은 과거 종속이론처럼 남미로 퍼져나가고자 하는데 바로 ALBA(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을 위한 볼리바르 대안) 구상이 그러한 시도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구성은 제헌의회와 국민투표를 통해서 새롭게 만든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헌법을 부록으로 실은 건데 저자들의 막노동에 가까운 노력이 배어있다는 이유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겠지만 필자조차도 대한민국 헌법을 대학에서 헌법 강의를 듣다가 읽어본 게 전부인 경험을 상기한다면 베네수엘라 민중들이 그들의 헌법을 소지하면서 왜 읽고, 토론을 하는 지에 대해서 공감했음 바람이다. 본 부록은 87년 체제의 위기 논의와 개헌 논의가 활발한 요즘 한국사회 구성원에게도 대한민국 헌법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발칙한 상상력은 실천으로

소개하고 싶은 책에 대한 요약문을 쓰려는 것이 서평의 미덕은 아니다. 그보다 주민자치위원회와 같은 직접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것이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반문에 대해서 왜 동의하고, 주저해야 하는 지를 느낀 것을 이야기 하는 게 유익하다고 본다.

그동안 타국의 직접민주정치사례로 스위스와 같은 소국이나 아직은 공상과학소설에서 나오는 정보통신기술로써 가능한 ‘원터치 투표’ 행사가 전부인 줄 알아서 일까. 책을 읽는 내내 번지점프대 앞에 서 있을 때의 비슷한 긴장감을 느꼈다. ‘우리도 정말 할 수 있을까?’

사실 차베스가 처음부터 선거 민주주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아직 정치신인일 때는 군부출신의 한계로 군대를 우선한 혁명을 주장했었지만, 보수적 관료제와 부딪히면서 그것을 우회하는 방법으로 민중의 의중을 직접적으로 살피는 방법을 모색하던 와중에 선거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특히 차베스가 정치인의 재신임을 물을 수 있는 법안을 만들었는데 기묘하게도 반차베스 쿠데타 당시에 차베스 본인에게 이 법안을 적용받게 되고, 결국 재신임 국민투표를 치르고서 다시 대통령 권좌로 복귀하게 되자 그는 국민의 의중이 촉각적으로 정치에 침투되어야 함을 보다 굳건히 인식하게 되고, 주민자치위원회라는 아이디어까지 발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차베스의 재신임 국민투표와 유사하게 탄핵정국에서 재신임을 받은 노무현 대통령은 출발점은 같으나 핀트가 엇나가고 있다. 그를 회생시켜준 국민들에 대해서 ‘참여’정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한미 FTA 협상, 대추리 사태 등에서 국민들의 목소리에 더더욱 귀를 닫은 정치일정를 추진한 것이다. 정부의 눈에 여전히 국민은 몽매한 우민이며, 계몽의 세례를 받아야할 객체일 뿐이다.

그러나 주민자치위원회는 해외사례만이 아니다. 이미 한반도 역사에서 경험한 바 있다. 해방 직후, 몽양 여운형 선생을 필두로 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이끌었던 조선인민공화국(지금의 북한체제가 아니다)의 바탕이었던 전국 각 지역의 민중들의 자발적 조직인 인민위원회를 체험한 바 있다. 하지만 우익과 미국의 이들 국가기구에 대한 정통성 부정으로 익히 잘 알고 있듯이 이후 배척당하게 된다. 발칙해 보일지 모르는 상상력은 실천으로 승화되어야 의미를 갖는다. 아직도 점프대에서 뛰어내리기를 주저하는가.  

한미 FTA와 ALBA 구상, 교환가치에서 사용가치로

한국보다 이미 10년 앞질러 신자유주의의 광풍을 맞았던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학습효과는 反신자유주의와 대안경제를 주창한 차베스를 선택했다.

차베스는 본국의 혁명을 남미 전역으로 퍼뜨리기 위해서 ALBA 구상을 내놓았다. 이 구상은 “회원국가의 주권을 존중해 상호 이익을 위한 경제적 보완성을 중시, 국내 사업의 진흥과 국내 시장의 민감한 영역을 보호, 사회적 공공 서비스의 국가개입을 중시, 빈곤, 문맹 퇴치 등의 사회 통합 프로그램 중시, 원주민이나 중소기업, 환경보호에도 초점을 맞”(351쪽)추고 있다.

실제 사례를 들면 쿠바는 베네수엘라에 2만 여명의 의사들을 파견해서 무료 건강 진료를 시행해주고, 아르헨티나는 쇠고기를 제공하여 그 대가로 베네수엘라는 두 국가에 석유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마치 어린 시절 오일장에서의 물물교환처럼 말이다.   

맑시즘 경제학자 마이클 레보위츠는 이러한 대안적 지역협력 모델을 목격하면서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가 압도된 사례라며 극찬했다. 그러니까 <자본론>에서 맑스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교환가치의 폭증은 물신주의로 치달아 상품에서 인간의 온기는 식어버리게 되는 자본주의 폐해에서 다시 옛날 장에서의 물물교환처럼 인간의 온기로 덮인 상품으로 교환되는 장으로 교정된다. 이는 이론상의 메타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인간적인 경제로의 귀환을 상정한다.

FTA만이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교리에 사로잡힌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관료들에게 10년 동안 신자유주의의 광풍을 맞았던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고귀한 선행학습효과는 쉽게 무시되고 있는 지금, 서비스 경제의 강화를 주장하며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 경제가 도약된다는 참여정부의 상상력은 민중의 삶을 향한 살상력으로 전도 될 확률이 농후하다.

ALBA 구상이 동북아 경제의 이식 적합성은 떨어질지 모르더라도, 금융모델을 비롯하여 동북아 지역협력모델 구상 논의가 앞으로 보다 실체성을 띠어야 하며,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당위성만큼은 베네수엘라 경험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은 본서를 읽는 내내 독자들도 강하게 느낄 것이다.    

본서에 대한 몇 가지 지적

마지막으로 본서에 대한 몇 가지 지적을 하자면 새사연의 두 번째 신서는 작년에 출간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에서 제시한 노동주도모델, 통일민족경제모델 그리고 국민직접정치모델에 대한 실현가능성을 베네수엘라를 통해서 모색한 분석서다.

새사연 연구원들도 베네수엘라 모델을 모범답안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고, 차베스도 복지정책은 유럽 복지모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번 발간은 한국적 대안경제모델을 제시하기 전에 해외사례를 검토한 첫 단추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안태환 객원연구원이 이미 <레디앙>을 통해서 민주노동당 김정진 변호사와 대안경제에 대한 남미 사례 관련 논쟁을 펼쳤지만 유럽모델에 대한 연구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중점 산업인 석유산업과 부존자원이 빈약한 한국경제 지형을 기계적으로 비교하는 것 또한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베네수엘라도 석유산업 위주에서 최근 통신업 등 다변화를 추구하지만 국내경제는 혁신 창출을 통한 도약 밖에는 딱히 대안이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혁신 창출과 관련하여 ‘새사연 모델’에서는 기술혁신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애용하는 관용어와 사유들로 채워진 불분명한 방법으로 기술되어 있음은 필자가 계간<신진보리포트>(2006년 가을호)에 기고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에 대한 서평에서 그리고 이재영은 <레디앙>(2006년 11월 27일자)을 통해서 지적한 바 있는데 이는 베네수엘라라는 사례연구에선 빠진 부분이다. 오히려 이 부분은 유럽모델에서 참고할게 많을 것이다.

한 가지 더 구차한 지적을 하자면 본서 224쪽에는 몰수를 expropriation으로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재산법상으로 보상 없는 사적 자본의 압류를 의미하는 몰수는 confiscation이 적합하다. 한미 FTA의 핵심사안인 투자자-국가소송제에 있어서 expropriation이 핵심개념이라 굳이 보론 하자면 expropriation은 수용(收用) 즉, 보상 있는 사적 자본의 압류로 보는 것이 선명한 번역이다.(홍기빈,2006:64참조) 혹시라도 통상법을 공부하는 독자가 본서를 읽다가 혼란을 겪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사소하지만 차후 수정을 했으면 바람이다.

대안경제, 현실이 되려면 공론화 불부터 지펴야

새사연 손석춘 원장이 얼마 전 한 TV토론회에 나와서는 진보는 대안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  진보진영에서도 대안모델이 있다면서 ‘새사연 모델’을 언급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서 주저한 모습을 보고는 측은지심을 느꼈다. 그의 말대로 그동안 언론에서 대안모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논의의 장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으니까 ‘글로벌 스탠더드’ 한미 FTA에 반대하더라도 그것 말고는 대안이 없지 않느냐는 의식이 대중을 지배하는 것이리라. 진보는 대안이 없다는 기존의 선입견을 깨고자 한다면 앞으로 공중파 토론회에서도 대안경제모델을 주제로 한 토론을 한번쯤은 해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더불어 대안경제모델에 대한 대중매체의 직무유기만을 탓할 수는 없다. 이러한 대안모델을 둘러싼 담론의 장을 심화, 확장시킬 책무가 있는 학계에서의 논쟁의 기피 또한 지적받아야 한다. 학계에서의 대안모델 검토는 신정완 교수와 김형기 교수가 있지만 제대론 된 비판담론은 아직까지는 시들하다. 비판학문을 하는 학계에서 조차도 논쟁이 사라진 것은 자성해야할 부분이다. 대표적으로 정성진 교수의 최근작인 <마르크스와 트로츠키>가 촉발시킨 트로츠키 논쟁에서 언론인과 운동가 외에 관련 국내학자들의 참여가 없었다는 점은 매우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하자면 사실 이 책의 저변확대는 힘들듯 싶다. 본서는 서두에서부터 ‘조중동’을 일반명사로 사용하면서 출판계와의 커넥션이 견고한 보수언론을 상대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모한(?) 언급을 굳이 연구원에서 사용한 것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베네수엘라에서 볼 수 있듯이 기득권화, 권력의지대로 작동하는 언론권력의 개선이 그만큼 중요함을 감안한 서술로 보아야겠다.

“본 연구를 깊이 있게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 못지않게 핵심 맥락을 빠르게 전달하여 이후 학계의 풍부한 연구와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일차 목표로 삼는 게 타당하다고 보았”다는 김병권 연구센터장의 말처럼 본서가 학계에서는 사라진 논쟁이 부활되고, 이 논쟁이 공허한 말들의 놀이로 증발하는 게 아니라 현실의 태엽과 맞물려 한국이 나아가야 할 비전으로 작동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실천적인 몽상가들에게 본서의 일독을 적극 추천한다. 
   
 
 
*정책대안사이트 <이스트플랫폼>,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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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3/11 [11:5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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