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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중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진보 논쟁] 우석훈의 홍윤기 ‘중도’ 비판은 논점 일탈, 보다 신중했어야
 
황진태   기사입력  2007/03/06 [01:25]
우석훈 박사(아래 호칭 생략)가 쓴 ‘초과혁명과 과소체계의 모순 - 홍윤기의 중도?’(2월 26일자)는 자신의 블로그에 자유롭게 썼던 것이 <대자보>에 실린 것이었다. 이처럼 블로그에서 가볍게 쓴 글을 두고서 진지하게 대하는 것도 어째 모양새가 어색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공적매체에 실린 만큼 몇 가지만 구차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우석훈은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아래 호칭 생략)에 대해서 서두에 이름조차 낯설다고 할 정도로 잘 모른다고 했는데 <황해문화>에 실린 홍윤기의 글만 가지고서 한 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차원에서도 어긋난다. 우석훈의 글에서 홍윤기의 중도발언이 다른 진보적 인사가 전향한 것처럼 못마땅한 뉘앙스를 쉽게 거두지 않았는데 우석훈의 블로그에 달린 댓글에서도 “(우석훈)님이 소개하신 내용을 보니 19세기말 20세기 초 서구 제국주의를 만난 한중일의 지식인들이 생각나는군요. 특히 일본의 많은 지식인들이 비슷한 궤적을 따라 동양평화론-초극근대론으로 나아갔던 것이 아닐까요?”라면서 누리꾼들이 홍윤기를 변절자 가깝게 오해하고 있다.

강단좌파보다 실천적 중도가 낫다

홍윤기는 그간 진보적 담론에서 꽤 용기 있는 발언을 해온 축에 든다. 진보를 자임하는 학자들 중에서도 강단좌파로만 남아서 논문에서나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오는 것에 비해서 시민사회의 기본적 가치를 중시하는 중도를 표방하여 실제 이러한 가치가 뭉그러질 때 이를 지키고자 양심적이고 용감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것은 강단좌파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중도 지식인이 소중할 수 있다.

우석훈 또한 대학사회 안에 교수들 간의 침묵의 카르텔을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밥통 앞에서 논문에서 떠드는 좌냐 우냐는 소용없다. 실제 자기 밥통과 직결되는 대학사회 내에서는 철저히 자기 보신만을 위해서 행동하는데 동국대 강정구 교수 사건의 경우에 이러한 밥통지키기와 본인의 이데올로기와의 불일치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리트머스 종이였다. 수백 명이 되는 동국대 교수들 중에서 매체를 통해서 제대로 부조리를 고발한 교수는 장시기와 홍윤기 뿐이었다. 그 중에서 돋보이는 것은 홍윤기인데 그는 강정구 교수 관련 TV 토론에 나가서도 학교재단의 눈엣가시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사건 하나만 가지고서도 좌냐우냐로 갈라서 그가 변절된 지식인이라는 판단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은 충분히 반증된다.

비단 이러한 홍윤기의 이론과 실천의 결합에 치열했던 경로는 돌발적인 것도 아니었다. 어느덧 8년 전 이야기이지만 강준만과 <당대비평>간에 벌어진 ‘일상적 파시즘’ 논쟁에서도 홍윤기는 <당대비평> 창간 멤버였음에도 불구하고, 동료 편집위원이었던 임지현, 문부식과 선을 긋고 편집위원직을 탈퇴하여 ‘원고망명’(자세한 내막은 <말>지 2000년 11월호 참조)을 했었다. 최근에 윤평중의 리영희 비판에 대해서도 <한겨레>를 통해서 반론을 가한 것도 상당히 발 빠르게 한국사회의 의제를 제시한 점에서 철학자로서는 갖기가 힘든 실천과 기지였다.

또한 지난해 천규석의 저서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를 둘러싼 <교수신문>에서 벌어진 논쟁에서도 홍윤기는 이정우의 천규석 비판에 대해서 “그런 “최소한의 예의”조차 표시하지 않는다면 나(홍윤기)는 논쟁을 포함해 더 이상 그(이정우)와 일체의 학문적, 인간적 교류를 하지 않을 것이다.”면서 사적 관계의 포기를 감안하면서까지 날선 비판을 한 것은 각종 인적교류를 중요시하는 한국사회에서는 결심하기 힘든 판단이었다.(천규석에 대한 논쟁 초창기에 우석훈이 <녹색평론> 88호에 기고한 ‘한국 자본주의와 유목주의’를 읽어보면 우석훈이 본격적인 논쟁으로 발전한 이정우-홍윤기 논쟁에 관심을 가졌을 법한데 -정말 홍윤기를 알았냐 모르냐를 떠나서- <녹색평론>을 통해서 천규석에 대한 이정우 비판에 관심을 갖게 한 독자들에게도 우석훈이 불은 지르고 이후에 무관심, 혹은 무책임(?)이 난감했다.)    

홍윤기의 극우적 요소

“중도라는 것이 원래 극우파인지, 아니면 홍윤기가 전개했던 몇 가지 요소 중에 그런 게 들어갔던 것인지, 예를 들면 '국가' 혹은 '경쟁' 등등, 그런 개념에 극우파의 요소들이 묻어서 들어온 것인지 내 능력으로는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중도라는 것이 원래 극우파인지...” 이렇게 쉽게 말하면 정말 곤혹스럽다. 글의 말미에 우석훈은 “하여간 내 능력으로 독해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텍스트이기는 한데, 시간이 나면 홍윤기의 어떤 논리 속에서 극우파의 요소들이 갑자기 들어오게 되었는지, 훨씬 더 정성들여서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우석훈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의 다른 글과 책들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기존의 기자가 지녔던 맹점들을 제거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받고 있다는 점은 알아주시길 바란다. 하지만 원래 “내 능력으로 독해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텍스트”였다면 좀 더 고민하고서 글을 썼어야지 “시간이 나면” 홍윤기의 논리에 극우파 요소가 들어있는 것을 분석한다는 것은 공인으로서 무책임한 발언이다. 감히 말하건 데 우석훈이 글의 서두에서 밝혔던 “상당히 송구스럽다. 이건 순전히 내 무식의 소치이다.”는 발언은 진심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우석훈이 경제학자의 시선에서 홍윤기의 ‘국가’, ‘경쟁’을 강조함을 ‘뭉치면 산다’는 식의 ‘극우파의 요소’로 보는 것은 자유겠지만 이러한 싸잡아 비판하는 포지션이라면 그 이후의 건강한 논의가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국가개념의 해석을 두고서도 한 트럭의 논문이 쌓일 만큼의 논쟁이 있었으니 여기서 국가를 강조하면 극우냐를 반론하자는 것도 아니다.)

계몽의 세례를 받고, 하버마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홍윤기가 그간 제출한 논문과 글들을 읽어보면 기자조차도 이번의 중도발언에서 국가, 경쟁 등의 개념 강조가 사실 곤혹스럽지만, 홍윤기의 중도선언이 본인이 말하는 대로 “나의 학문적 결론이었지만 세기초를 살아가는 한 사회적 실존체로서 나의 정치적 양심을 표현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설정한 화두이기도 했다.”는 점을 존중한다면 그의 강한중도 실험을 극우로 매도하기 전에 시간을 두고서 지켜보고 싶다.
 
최소한 홍윤기의 강한 중도 발언은 정치권에서 이미 너덜해진 개혁중도, 중도연합, 등등 중도 남발에 비해서는 진정성(우석훈이 ‘진정성’을 상당히 거북해하는 것은 알지만, 딱히 대체할 단어가 없었음을 이해해주시라.)이 엿보인다.

홍윤기가 그간 박정희를 비롯한 한국판 파시즘을 연구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사유의 대상이었던 박정희를 닮은 것일까. 앞서 <당대비평> 사건을 잠깐 언급했지만 홍윤기는 박정희 신드롬을 둘러싼 한국의 파시즘 논의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먼저 박정희 신드롬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논의(「다극적 현대성 맥락 속의 미완의 파시즘과 미성숙 시민사회」,『사회와 철학』제2집(2001))와 일상적 파시즘 논쟁에서는 <당대비평> 원고망명 사건과 함께 월간 <인물과 사상>을 통해서 활발하게 논쟁에 참여한바 있다. <내일을 여는 역사>에서 ‘국민교육헌장, 왜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졌나?’는 제목의 기고 또한 한국의 파시즘 회로를 아는 데 유용한 분석틀을 제공해준다. 최소한 한국의 파시즘 논의에 있어서 진앙지인 박정희 신드롬에 대한 분석과 진보진영 내부에 파시즘적 요소에 대한 분석, 양 지형에 대한 논의의 발전에 홍윤기가 기여했다는 점만큼은 강조하고자 한다.

조금 구차하게 홍윤기 대변인이 된 마냥 그의 성과를 줄줄이 언급했다. 우석훈이 인쇄매체에 갇히지 않고, 인터넷 매체에서도 활발한 글쓰기를 보여주는 센스를 감안한다면 최소한 누군가에 대해서 언급할 때 최소한 인터넷 검색을 이용해서 홍윤기 이름 세 글자를 검색했더라면 홍윤기가 발언한 강한 중도에 대해서 동의는 못하더라도 얼마나 고민을 했을 지에 대해서 ‘진정성’을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홍윤기의 중도는 다른가

우석훈의 강한중도에 대한 반감은 진보성향이라서가 아니라 한국사회에 사는 서민들이라면 누구나가 갖는 반감의 작동과 비슷하다. 이데올로기에 좌우되지 않고 무슨무슨 중도를 표방해서 민심을 구한다는 정치인들의 행태 때문에 기자 또한 환멸은 동일하다. 하지만 홍윤기의 중도는 다르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사실 <황해문화>에 문제적 발언이 실리기 전에 홍윤기가 책임 번역한 스티븐 룩스의 <자유주의자와 식인종>(개마고원 펴냄)이 지난해 출간되었다. 이 책의 발간취지는 한국의 보수가 자유주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복거일 수준에서나마 논의가 확산되지 않았고,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채 반공주의 단체나 군부정권의 잔존세력들이 ‘자유’를 그저 자신들의 정치적 몸에 붙이는 레테르로 도용되는 현실(자유당, 자민련, 자유총연맹, 자유주의연대 등등)에서 그는 사민주의(이렇게 구분하는 것도 애매하지만)보다는 자유주의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는데 여기서 중도로의 징후를 짐작할 수 있었다.(스티븐 룩스 번역서에 대한 지난 서평 참조)

홍윤기가 앞으로 현실정치에 개입을 할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시민사회, 지식인층의 현실정치참여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커다란 논의이기에 여기서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겠다.
 
홍윤기와 마찬가지로 계몽의 세례를 받은 황태연(2004)은 김대중 정권시절 민주당에 참여하면서 “좌익정당은 노동자 중심성을 고수하다가 스스로 시대착오적인 극좌정당 또는 자본주의의 ‘하수종말처리장’ 같은 말단 군소정당으로 쇠락하든가 아니면 노조와의 연관성을 완화하면서 사회적 기반을 확대, 중도개혁주의적인 국민정당으로 자기지양과 변신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면서 (극우)보수정당과 함께 진보정당에 대해서 양비적으로 몰아붙였다.
 
황태연의 중도와는 차별화된 진보정당에 귀 기울이는 열린 강한중도(이 또한 무슨무슨 수식어를 단 중도로 추락하지 않길 바라면서)를 향해야 한다는 것은 본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홍윤기의 강한중도 발언이 진보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은 그간의 학문적 행보에 비춰서 기대한 바가 적지 않았다는 반증이리라. 홍윤기의 강한 중도 수준의 한국사회라면 진보가 열망하는 사회 또한 가까워질 것이다.

이후에 홍윤기에 대한 극우적 요소를 뽑아내고, 또는 개량주의로 비판할 때에는 보다 정치한 작업이 선행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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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3/06 [01:2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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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애편지 2007/03/06 [22:53] 수정 | 삭제
  • 자유롭게 쓰는 글이 아닐까 싶네요. 그분을 꾸준히 보았던 사람으로 레디앙이니 대자보 오마이 같은 진보쪽 매체에 블로그적인 글을 올리는게 솔직히 별루라고 생각이 드네요. 본인이 올리든 매체에서 올리든 좀더 신중하게 올리는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 N 2007/03/06 [13:45] 수정 | 삭제
  • 좀 더 신중하게 글을 썼어야했던건 아닐까란 자문을 본인에게 해보시길. 당신이 황해문화와 인물과 사상에 실린 홍선생의 글들을 찾아 읽어는 보셨는지도 궁금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