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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恨)
[인물과 사상의 눈] 한풀이의 동력을 받은 '단일 이슈 정치' 슬픈 운명
 
강준만   기사입력  2007/02/26 [11:35]
아비투스’에 의한 ‘단일 이슈 정치’

‘단일 이슈 정치(single issue politics)’라는 게 있다. ‘단일 이슈 정치’란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열악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해 한 가지 이슈에만 ‘올인’하면서 다른 이슈들을 그 메인 이슈에 종속시키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메인 이슈에 대한 의견만 같다면, 또는 메인 이슈를 실현할 수 있는 출구만 열린다면, 이념적으로 자신의 정반대편에 있는 정치세력과 연대연합하기도 한다. 심지어 극우와 극좌가 연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국가를 책임진 집권세력이 단일 이슈 정치에 몰두한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희귀하다. 그 희귀한 사례가 양상을 좀 달리한 채 한국에 나타났으니, 바로 노무현 정권이다.

노 정권의 행태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는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恨)’이다. 한이란 적어도 한 세대 이상 되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그 어떤 ‘아비투스(습속)’다. 아비투스는 논리와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자신이 그 아비투스를 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아무리 논쟁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

돌이켜보면, 영남 민주화 세력만큼 가시밭길을 걸은 사람들도 없다. 1961년 박정희 집권 이래 민주화 세력은 늘 영남에선 ‘찬밥’이었다. 온갖 서러움을 다 당해야 했다. 특히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제7대 대통령 선거(1971년 4월 27일)가 그들에겐 ‘재앙’이었다.

4·27 대선은 영남 지역주의가 강하게 드러난 선거였다. 이후 영호남 지역구도가 강고하게 형성되면서 영남 민주화 세력은 영남에선 ‘고향을 배신한 세력’으로까지 낙인찍혔다. 김영삼이라는 영남 출신 민주화 지도자마저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화 세력의 반대편에 서게 됨으로써 영남 민주화 세력의 고립과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반면 호남 민주화 세력은 독재정권들의 모진 탄압은 받았을망정 고향에선 대접받았다.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도덕적 우월감까지 누릴 수 있었다. 민주화 세력 내에선 호남인이 압도적 다수를 점함으로써 헤게모니까지 장악했다. ‘민주화’는 사실상 ‘호남화’였다. 영남 민주화 세력의 고립과 고통은 배가되었다. 고향에서 버림받은 동시에 민주화 진영에선 호남세에 눌려 지내야 했다.

수도권에서 김대중 정당에 소속돼 국회의원 배지를 단 비호남 출신 의원들은 호남 출신 유권자들의 비위마저 맞춰야 하는 ‘호남화’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른바 ‘향우회’ 그룹을 지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호남 출신 유권자들의 행태는 결코 고상하지 않았다. 추태를 부린 사람들도 많았다. 결코 겉으로 표출할 순 없었을망정 민주파 비호남 출신 의원들 사이에서 독재정권들과는 다른 종류의 반(反)호남 정서가 싹트지 않을 수 없었다. 독재정권은 내내 영남이 장악했지만, 정치권 야당의 헤게모니 세력은 호남이었다는 사실, 이건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사실임에도 간과되고 있다.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恨)과 지역구도 타파

영남 민주화 세력의 고립과 고통은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돼 대통령 임기를 끝내면서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지만, 의식과 문화는 하루아침에 사라지거나 청산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영남 지역주의라는 장벽에 여러 차례 도전을 함으로써 호남인의 호감과 신뢰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은 자신이 영남 민주화 세력의 오랜 한(恨)을 풀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 한풀이엔 ‘지역구도 타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을 푸는 게 지역구도가 타파되는 것이고, 지역구도가 타파되는 것이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을 푸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건 같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건 차별받은 호남의 한을 푸는 것이 지역구도 타파로 연결되지 않았던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지역구도 타파’를 먼저 생각하는 것과 그러지 않고 그간 맺힌 한을 푸는 걸 앞세운 뒤 그 일에 ‘지역구도 타파’라는 명분을 갖다 붙이는 건 선후가 바뀐 정도를 넘어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이제 시간이 흘러 분명해졌지만, 노무현은 지역주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나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한화갑의 증언이다.

“2002년 민주당 후보 경선 때 노무현 후보가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도 경선에 나가야 할 입장인데 어쩌겠느냐’ 했더니 ‘내가 전라도 DJ 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또 더하란 말이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인간적인 실망이 들었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이해의 폭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머슴살이란 말입니까! 겉으로는 지역감정을 타파한다면서 속으로는 지역감정에 휩싸인 사람입니다. 도대체가 전라도 머슴살이였다는 게 뭡니까. 자신도 ‘광주 사람들이 내가 좋아서 찍었겠느냐, 이회창이 싫으니까 찍은 거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1)

유종필의 주장이다.

“노 대통령의 후보 시절 ‘동서화합 국민통합’의 기치에 감동해 노무현 캠프에 참여했으나, 지금은 노 대통령의 머리와 가슴속에 뿌리깊은 지역 우월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영남 출신 노 대통령의 ‘호남당’ 운운에는 호남에 대한 멸시와 비하 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2)

그러나 한화갑과 유종필의 생각은 적어도 한동안 다수 호남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또 여전히 많은 호남 엘리트들이 노무현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노무현은 오히려 한화갑·유종필의 생각을 지역주의로 몰아붙였고, 이게 힘의 논리에 의해 먹혀 들어갔다. 누가 옳건 그르건 정치 현실만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한화갑·유종필의 생각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무엇보다도 모양새가 너무 우습기 때문이다. 호남인들이 동의하지 않는 ‘호남 차별론’을 역설한다? 그게 정치적으로 현명한 처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호남이 최근 일련의 선거에서 열린우리당보다는 민주당에 기운 걸 그 성과로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이 선사해준 것일 뿐이다. 더욱 중요하게 생각할 일은 왜 민주당의 전국 지지율엔 아무런 변함이 없는가 하는 점이어야 한다.
 
민주당의 배신론이 실패한 이유

민주당이 노무현의 ‘호남에 대한 멸시와 비하 의식’을 공격한 건 잘못된 노선이었다. 그건 호남인에게 지난 총선에서 무슨 이유에서였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걸 인정하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월간 <인물과사상> 2005년 8월호에 쓴 "김대중노무현의 매트릭스: ‘역사의 배신’인가?"라는 글에서 김욱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더욱 고통스러운 건 ‘가혹한 비판’을 각오하는 김욱의 ‘정면 대결’의 상대가 영남 패권주의이기 이전에 호남 실용주의라고 하는 사실일 것이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는데, 도무지 싸움이 되질 않거니와 무의미하거나 자학적인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자. 호남인들이 김대중은 물론 노무현에게도 90%가 넘는 몰표를 주었을 때 그들은 심약했던가? 아니다. 그들은 전혀 심약하지 않았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어떻게 보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대담무쌍했다. 그런데 왜 그런 호남인들이 갑자기 심약해진단 말인가? 오래 생각할 것 없다. 답은 ‘실용성’에 있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은 호남인들에게 실용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대담할 수 있었지만, 실용성이라곤 눈을 비비며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민주당에게서 무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민주당의 배신론이 먹혀들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열린우리당이 해체되거나 사분오열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민주당의 명예회복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유권자의 선택은 늘 옳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민주당은 몰락의 책임을 노무현보다는 자신들에게 돌리는 게 옳았다. 민주당이 할 일은 시종일관 자신들의 무능과 과오를 참회하면서 다른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했다.

어찌됐건 지역주의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노무현에게 우선적인 건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을 풀고 자신의 고향에서 인정받고 싶은 인정욕구 충족이었다는 점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 전엔 그게 분명하게 드러나기 어려웠다. 그는 지역구도 때문에 피해를 본 희생자로만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예컨대, 양동주는 “반(反)DJ 반(反)호남 정서의 본질은 노무현 자체이며 그 점은 그가 걸어온 상대적으로 짧은 정치경력 속에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강준만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고 애써 눈감고 보지 않았을 따름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노무현의 20년 정치 여정의 이정표는 강준만 자신이 왜곡된 지역주의의 아류로 숱하게 비난하여온 ‘3김 청산’이었다. 노무현과 그의 조숙한 386 참모들은 대권을 쟁취하기 위한 여정에서 교묘한 위장술을 성공적으로 구사하였다.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도 노무현은 DJ에게 철저히 아부하였고 그 대상은 동교동 구주류라면 누구든 상관없었다. 노무현은 실질적으로 김근태 의원이 이끈 당정 쇄신운동에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고 같이하자는 권유도 단호히 뿌리쳤다. 노무현의 위장술에 대한 공개된 혹은 공개되지 않은 사실과 증언들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 노무현에게 ‘올인’한 <한겨레> 신문이 일부러 감추었다고 해도 모든 미디어들을 꼼꼼히 살펴보는 강준만이 이를 무시한 것은 솔직히 말해서 그의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의심케 한다.”3)

양동주의 비판에 대해선 월간 <인물과사상> 2005년 8월호에 자세한 답을 했으므로, 하던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겠다. 양동주의 주장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노무현의 ‘교묘한 위장술’이다. 노무현이 ‘교묘한 위장술’을 쓴 건 분명하지만, 김영삼김대중도 그런 정도의 위장술은 구사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문제는 위장술의 결과다.
 
노무현의 ‘교묘한 위장술’

김영삼은 5·6공 세력을 지켜줄 것처럼 위장했다가 그들을 숙청했고, 김대중은 JP에게 권력을 줄 것처럼 위장해 성사시킨 DJP 연합으로 집권한 후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김영삼김대중은 정치 도의적으론 비난받을 짓을 했지만, 민주화 세력의 박수는 받았다. 노무현도 ‘민주당 죽이기’로 처음엔 박수를 받았지만, 박수를 오래 치긴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다. 노무현의 위장술은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대연정으로까지 치달았기 때문이다. 지역구도 때문에 피해를 본 희생자로만 여겨졌던 노무현이 대통령 권력을 누리면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게 분명해진 것이다.

노무현이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을 풀기 위해 구사한 3대 이슈는 ‘대북 송금 특검’ ‘민주당 죽이기’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등이었다. 모두 다 상상을 초월하는 파격이었다. 세 번째의 파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의 파격이 모두 성공했는데, 왜 세 번째의 파격은 안 된단 말인가? 노무현은 이 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늘 자신의 모든 걸 거는 ‘치킨 게임’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다수당까지 만들어낸 노무현은 자신이 늘 시대를 앞서간다는 확신으로 무장한 채 ‘국민은 20세기, 대통령은 21세기’라는 말마저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째의 실패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채 장관직을 선거에 이용하는 등 국정 운영마저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을 풀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네 번째 파격을 연출했지만,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노무현은 5·31 지방선거의 참패 결과도 수긍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는 일은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풀이’가 아니라 ‘지역구도 타파’라고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늘 내세우는 게 ‘역사로부터의 보상’이다. 하지만 그런 보상은 ‘최악의 방법론’이라는 그늘에 묻힐 가능성이 높다.

‘지역구도 타파’의 선결 조건은 권력자의 출신 지역이 어디냐에 따라 정책인사가 좌우되지 않는 공정투명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정반대로 나아갔다. 조급한 한풀이 욕망이 앞선 나머지 오히려 시스템을 엉망으로 만든 건 물론이고 급기야 영남 표 얻겠다고 스스로 ‘부산 정권’임을 주장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노무현은 당당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1987년 지역구도로 가기 전의 여야구도로 돌아가야 한다나. 이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감동시킨 노무현표 지역주의의 면죄부다. 길게는 36년, 짧게는 20년 묵은 그 역사의 업보를 자신이 단칼에 해치울 수 있다고 믿는 만용도 놀랍지만, 1987년 지역구도를 김영삼김대중만의 문제로 보는 그 발상의 단순함이 낭만적이다. 이건 노무현만 탓할 일은 아니다. 의외로 많은 지지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지역주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1987년 이전에 무엇이 있었나? 한 세대 기간에 걸친 독재만 있었다. 1987년에서야 최초로 제도권화를 이룬 민주세력의 분열이 왜 일어났나? 박정희전두환이 원흉이었다. 권력자의 출신 지역이 어디냐에 따라 정책인사가 극편향되는 시스템이 문제였다. 따라서 그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지, 그 시스템을 악화시키면서 인위적으로 정당 구성원들을 뒤섞는 건 답이 아니다. 하수 중의 하수다. 성사되지도 않을뿐더러 아무런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

노무현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김대중 정당에 들어간 뒤 ‘교묘한 위장술’을 쓰느라 한 번도 그 생각을 밝힌 적이 없다. 검증은커녕 논의된 적조차 없다. 민주당의 계승발전을 이루겠다는 충성 맹세만을 수없이 외쳤을 뿐이다. 광주에선 그 맹세의 일환으로 큰절까지 했다. 그래놓고서 대통령이 되자 표변하여 자기만이 모든 답을 안다는 듯 선구자 노릇을 하려 들었다. 이게 과연 온당한가? 이건 지역주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 기본 원리에 관한 문제다. 인간으로서의 진정성 문제다.

우리가 염원했던 민주화란 시스템 교정의 기회이기도 했다. 시스템이 교정되면 지역주의가 약화되면서 이념정책이 살아날 것이다. 이건 오랜 시간과 더불어 인내가 필요한 과정이다. 조급한 모험주의영웅주의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악덕이다. ‘부산 정권’임을 내세워 해결하려는 건 최악의 수법이었다.

‘부산 정권’은 노무현의 최측근인 전 청와대 민정수석 문재인의 발언이었지만, 노무현도 지역에 따라 말을 바꾸는 이상한 행태를 드러내곤 했다. 노무현은 2004년 7월 9일 전북 군산에서 열린 혁신토론회에서 “선물을 주러 온 게 아니다. 전북 스스로 지역 혁신 역량을 키워라”고 발언한 반면 그로부터 20일 후인 7월 29일 전남 목포에선 “광주전남은 직접 챙기겠다. 큰 판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하나둘이 아니다. 지역주의에 도전하다 지역주의에 중독된 비극이라고나 할까?

문재인·노무현의 발언을 선의로 해석하자면,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恨)이 판단 장애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 한에 의해 형성된 아비투스를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남 탓을 하고 세상을 원망한다. 자신들의 진정성을 몰라준다고 억울해 한다. 아마 진심으로 그럴지도 모른다.
 
임원혁의 ‘영남 민주화 세력의 고민’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恨)’이라는 표현 대신 ‘영남 민주화 세력의 고민’이라는 부드러운 표현으로 이 문제를 지적해 반향을 일으킨 사람은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임원혁이었다. 임원혁은 2005년 8월 대연정 파동을 노무현이 영남 민주화 세력 출신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 역사적인 관점에서 분석했다.

임원혁은 “2002년 대선은 맹목적 지역주의에서 벗어나 이념과 가치 중심으로 정치권이 재편될 계기를 마련해주었지만, 실제 정계개편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다. 집권당 내 소수파로서 정권을 잡은 영남 민주화 세력이, 민주화라는 가치보다는 영남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양극화 해소와 같이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책보다 영남발전특위처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제안이 선거대책으로 더 중시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나라당에 대한 대연정 제안은 영남 민주화 세력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라도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선거구제 개편이나 개헌 논의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현실 정치인인 영남 민주화 세력에게는 절박한 문제일 수 있지만, 국민 대다수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뿐이다.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지 못하는 정치 공학적인 논쟁으로 참여정부의 후반기를 시작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울 뿐이다.”4)

노무현의 대변인이라 할 수 있는 유시민이 <한겨레21> 인터뷰에서 굳이 임원혁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반박한 건 임원혁의 지적이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는 걸 시사한다. 유시민은 대연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호남에서 왜 그리 많이 밀어줬나. 저 사람이 영남에서도 많이 득표할 수 있다, 적자로 가업 계승이 안 되니 양자를 들여서 밀어주기만 하면 이회창을 이길 수 있다, 한나라당이 다시 집권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러한 기대로 노무현 후보를 광주에서 확 밀어준 것 아니냐. 이것은 비극적이다. 암 환자에게 모르핀 주사를 놓은 것과 똑같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모르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투약된 모르핀 약이 암을 뿌리 뽑겠다고 지금 나선 것이다. 지금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인가. 그런데 호남에서는 ‘니가 뭔데?’ 하고, 임원혁 박사는 이것을 ‘영남 민주화 세력의 고민’이라 표현했다. 이것은 사태를 완전히 잘못 보는 것이다.”5)

유시민의 이 주장은 “호남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찍었나요. 이회창이 보기 싫어 이회창 안 찍으려고 나를 찍은 거지”라는 노무현의 2003년 9월 발언의 복사판이다. 이게 잘못 알려진 발언이니 뭐니 하는 논란이 있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유시민이 입증해준 셈이다.

유시민은 대연정을 역설하면서 그간 잘 위장해온 자신의 지역주의관을 엉겁결에 스스로 폭로하고 말았다. 그간 유시민은 영남 출신이면서도 호남을 옹호하는 사람인 것처럼 알려져 왔지만, 알고 봤더니 그게 아니다. 그게 꼭 위장이었을까?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비투스의 문제일 수도 있다.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을 푸는 일에 도움이 되거나 장애가 되지 않는 한 진보적 인사로서 상식적인 수준의 판단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표변하는 것이다.
 
이영성의 ‘노무현 이해하기’

노무현에게 표를 준 사람들이 노무현을 ‘모르핀’으로 이용했다? 일부 사람들의 경우,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렇게만 보는 건 폭력이다. 우리 인간의 생각이란 건 늘 복합적이다. 지역구도가 타파되면 누구에게 이익인가? 그 이익의 실현을 위해 노무현이 기여하리라는 기대가 없었을까? 노무현이 생각하는 방법만이 옳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노무현이 생각한 방법은 민주적 논의 과정을 거친 것인가? 앞서 지적했듯이, 적어도 공론장엔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생각이 아닌가? 그런데 그 생각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렇게 험한 말을 들어야 하는가?

사실 자기만이 선하고 정의롭고 현명하다는 독선독단독주야말로 노 정권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평가는 개혁진영 내에서도 양극을 달린다. 노 정권하에서 벌어지는 많은 갈등은 예전처럼 단순하지 않다. 개혁세력이라도 평소 과정과 절차의 중요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노 정권에 너그러울 수 있지만, 과정과 절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가 막힌다. 이 기막힘은 스타일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말로 격하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에도, 노 정권 사람들은 그것마저 ‘기득권 대 반기득권’ ‘귀족 대 서민’의 구도로 몰아간다.

그들의 선의를 이해하려 애를 쓴다면, 다시금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이 그만큼 처절하다는 깨달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임원혁에 이어 그 문제를 지적한 이는 <한국일보> 정치부장 이영성이었다. 그는 노무현을 이해할 만한 사람들을 찾아 물어보았더니, 노무현의 진정성을 믿는 사람들은 ‘영남 민주화 세력의 소외’라는 답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어린 시절에도, 젊은 시절에도 고향에서 소외된 그룹에 속해 있었다. YS를 통해 정치에 입문했을 때도 상도동의 변방 인물이었을 뿐이었다. 1990년 3당 합당을 거부하면서 고단한 야당의 길을 걸었지만 고향은 그를 ‘호남(DJ)에 붙은 배신자’로 손가락질했다. 몇 번이고 출마했지만 정치적 고향인 부산은 그를 외면했다. 대통령이 돼 금의환향했지만 그래도 부산은 지난해 총선에서, 금년 재선거에서 노무현의 사람들을 우수수 떨어뜨렸다. 형편이 어렵지만 의지가 강한 사람들은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 친구들로부터, 친척들로부터, 짝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겠다는 꿈을 갖는다. 노 대통령도 그랬을 법한데 고향은 대통령으로 돌아온 그를 여전히 냉대한 것이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을 뽑아주면서 자신의 동지들은 떨어뜨리는 부산을 보면서 그는 모순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외치는 지역구도 극복은 호남의 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 대통령과 그 주변의 영남 측근들에게는 영남 민주화 세력의 소외와 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다고 한다. 영남에서, 아니면 부산에서라도 노무현의 사람들이 국회의원으로, 시장으로, 구청장으로 당선되는 변화가 생긴다면 대통령직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6)


이영성은 이어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노 대통령은 대선과 총선을 기적적으로 두 번이나 이긴 대단한 전략가이자 승부사이기 때문에 소외와 한만으로 대통령직을 걸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분명 내년 지방선거와 개헌 정국을 염두에 둔 전략적 구상이 있을 것이다”라고 토를 달긴 했지만, 그건 예의상 한 말로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그 이후 벌어진 일은 모두 ‘소외와 한’으로 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경태 사건’

오히려 문제는 영남 민주화 세력의 ‘소외와 한’은 공론화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깊고 처절하다는 데에 있다. 이걸 잘 보여준 게 이른바 ‘조경태 사건’이다. 2005년 8월 29일 열린우리당 의원 워크숍에서 조경태(부산 사하을)가 전 대통령 김대중과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을 비유하며 연정의 당위성을 강조한 발언 내용이 뒤늦게 알려졌다.

조경태는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 제안은 지역주의 문제가 절박하기 때문”이라며 “내가 한 가지 예를 들겠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때 부산 어르신들이 ‘김정일은 선글라스도 멋있고 걸음걸이도 씩씩하다. 그런데 DJ는 걸음걸이도 그렇고 창피하다’고 했다”면서 “그때 부산에서 DJ와 김정일에 대한 투표를 했으면 김정일 지지율이 더 높게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역주의가 이데올로기보다 상위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연정 당위성을 역설했다.

<국민일보>에 따르면, “순간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지고, 대부분 의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고 한다. 한 의원은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사회를 보던 구논회 원내부대표가 부랴부랴 ‘표현이 부적절하다. 그 발언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회의록에서도 빼자’고 좌중에 동의를 구했다. 조 의원은 수긍했고, 다른 의원들도 문제의 발언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기로 암묵적 공감대를 이뤘다.”7)

보라. 영남 민주화 세력의 ‘소외와 한’은 열린우리당 의원들조차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의 것이다. 그러나 조경태의 생각이 곧 노무현의 생각임을 어이하랴. 그런 실상은 공론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꾸 나오는 게 ‘지역구도 타파’라는 명분이고, 이 명분만으론 설득력이 떨어지니까 유시민식의 폭력적 강공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늘 말을 학술적으로 하는 최장집은 “노무현 정부의 경우 지역주의를 통하여 정치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수준에 가깝다”면서 노무현이 지역주의 의제를 내놓는 것은 “실제의 중심 문제를 회피하게 될 때 그저 많은 사람들이 나쁜 것이라고 인식하는 어떤 문제를 과장하거나 극화하여 실제의 현실을 전치시키고자 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오늘의 시점에서 지역 문제가 정권의 운명을 걸고 청산해야 할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진 정치적 알리바이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8)

그 ‘다른 의도’가 바로 한풀이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이걸 노 정권이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유시민은 최장집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한겨레신문이 최 교수의 글을 무비판적으로 인용 보도한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사실이 아닌 주장을 무책임하게 중계방송 했다”며 “당신들의 확고부동해 보이는 논리도 알고 보면 분열이라는 질병의 한 증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9) 유시민에 대해 절망하지 않으려면, 아무래도 영남 민주화 세력의 한은 그 주체에 의해 스스로 자각되지 못하고 있다는 쪽을 믿어야 할 것 같다.

그 한은 노 정권의 판단력 장애를 가져왔다. 모든 비극은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한풀이의 동력을 받은 ‘단일 이슈 정치’의 슬픈 운명이다.
 
노 정권이 기여한 ‘다원성의 축복’

그러나 노 정권은 한국 사회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큰 기여를 했다. 그건 바로 단일대오의 해체다. 다원성의 진작이다. 노무현 덕분에 이제 더 이상 민주화 세력은 하나가 아니다. 호남도 하나가 아니다. 물론 오래전부터 내부 이견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서로 갈등하다 못해 적대적으로까지 대립한 적은 없었다. 이는 노무현 시대의 확실한 업적이다. 이를 부정적인 분열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성장통으로 볼 수도 있거니와 민주화 세력 전체가 자기성찰을 잃어버리는 최악의 사태보다는 더 나은 현상일 수도 있다.

▲강준만 교수가 주도하는 1인 저널룩의 효시 월간 <인물과 사상>     © 인물과 사상 2007년 3월호 표지
노무현의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은 야당과 보수언론에 대한 증오심이 강한 세력과 과거사 청산 세력이다. 노무현이 가장 확실하게 해낸 업적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최장집의 경우처럼 민생을 중시하는 진보파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지지했던 세력과 노무현 정부를 구별해야 한다”면서 민주세력이 노 정부와 결별할 것을 요구한다.10) 크게 보아 ‘과거사 청산 진보파’와 ‘민생 진보파’의 분화가 확실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기질에 따른 차이도 있다. 노무현의 가장 확고한 지지세력은 ‘아웃사이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여전히 목숨 걸다시피 하면서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 매우 강한 아웃사이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노무현을 비판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아웃사이더 기질파의 노무현 지지도는 더욱 강고해진다. 이유는 없다. 그건 아웃사이더 기질파의 본능이다.

아웃사이더 기질과 진보성은 같은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다. 아웃사이더 기질파는 ‘책임 윤리’가 박약하다. 그간 미분화된 채로 진보의 우산 밑에 같이 머무르던 아웃사이더 기질파가 그 모습을 확실하게 드러낸 것도 노무현 시대의 공이라면 공이다. 이 다원성의 축복을 어떻게 사회발전에 활용할 것인지가 남겨진 숙제라 하겠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써야 한다는 건 비극이다. 어쩌면 모두 다 잘해보자는 뜻이었을 텐데 이토록 소통 불능 상태에 처하게 된 건 민주적 훈련의 부족 탓인지도 모른다. 독선적 소신이 존경받던 세월이 너무 길었다. 자신이 누리게 된 새로운 권력의 무게는 의식하지 않은 채 예전에 하던 그대로 내지르고 보는 관성을 고집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비극, 한때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 비극이 비극인지도 모르고 환호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행태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역사의 업보치곤 가혹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독재정권 탓만 할 순 없는 일이다. 모두 다 ‘내 탓’부터 하는 게 필요하다. 사랑과 용서도 다원성을 전제로 할 때에 가능해진다. 누군가의 독선독단독주가 혐오감을 넘어 징그럽게 여겨진다면, 나도 그런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랑·용서·관용·화해·양보·성찰·역지사지(易地思之) 등 아름다운 개념이 흘러넘치는 2007년이 되길 기대해본다.

< 각주 >


1) 엄광석, 『3월 9일부터 5월 14일까지: 탄핵, 그 혼돈의 내막』, 청어, 2004, 194쪽.

2) 박석원, 「“노 대통령 머릿속엔 뿌리 깊은 지역주의”: 민주 유종필 대변인 책 펴내」, 『한국일보』, 2007년 1월 19일, A4면.

3) 양동주, 「노무현 살렸다가 죽이는 ‘강준만의 대(對)국민 사기극’: 강준만식 노무현론의 오류 몇 가지」, 『민족 21』, 2004년 3월호.

4) 임원혁, 「영남 민주화 세력의 고민」, 『한겨레』, 2005년 8월 30일, 31면.

5) 신승근, 「“3김이 만든 앙시앵레짐 날려버리자”: 대연정 논란 연쇄인터뷰 유시민 의원」, 『한겨레21』, 2005년 9월 13일, 16~24면.

6) 이영성, 「노무현 이해하기」, 『한국일보』, 2005년 9월 2일, A26면.

7) 김호경, 「“6․15 남북회담 때 DJ 걸음걸이 등 창피 김정일 부산서 출마했으면 지지율 앞서”」, 『국민일보』, 2005년 9월 3일, 5면.

8) 김남중, 「“지역주의 망국론 비논리적”」, 『국민일보』, 2005년 9월 3일, 5면; 정충신, 「“노 대통령 지역주의 극복 연정론 다른 의도 가진 정치적 알리바이”」, 『문화일보』, 2005년 9월 3일, 19면.

9) 정우상, 「범여권 내부 ‘연정’ 난타전」, 『조선일보』, 2005년 9월 7일, A5면; 이지은, 「연정론 논쟁」, 『한겨레』, 2005년 9월 8일, 4면.

10) 손제민, 「“노 대통령은 개혁리더 아니다/ 민주세력 현정권과 결별해야”: 최장집 교수 경향 60돌 기념 인터뷰」, 『경향신문』, 2006년 9월 28일, 1면.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07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이며, 출판사의 허락하에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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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2/26 [11:3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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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0 2007/03/19 [01:06] 수정 | 삭제
  • 영남민주화세력의
    어려운 처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탁월한
    글입니다.


  • X-맨 2007/02/26 [16:32] 수정 | 삭제
  • 이 시대 최악의 뻔뻔-맨
    이 시대 진정한 X-맨 노무현 역대 정권중 최악의 정부!
  • 당산대형 2007/02/26 [14:47] 수정 | 삭제
  • 강준만 대형의 글을 읽고 가히 요즘 강호를 제대로 보는 인간들이 없다 했는데 이제야 좀 머리속의 사산했던 글들이 정리되는 군요. 박근혜를 지지한다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이나 박근혜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끝없이 지지하고 그러면서도 생뚱맞게 열린우리당에 기웃거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동당에 애정공세를 펼치는 희한한 현상들이 오늘날일어나고 있죠.
    이를테면 김대중이라는 인물은 한국정치사의 대표적 인물로 김대중은 또하나의 한국사회의 스펙트럼으로 볼 수 있겠지만, 노무현은 그도 저도 아닌데 너무 큰 의미를 두고 있지요.
    노사모는 대선으로 모든 임무가 끝났음에도 그 조직을 이용하려는 자들로 인해 노사모는 존재하게 됐고 노무현의 비극인 여기서 시작됐죠.
    결국 정치인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은 서로 구분되지 않은 동일한 몸체로 치부됐고 결국 노무현 이데오로기가 탄생한 것이죠. 이는 이어서 이른바 '관변'저리가라 할 정도로 '홍위병'이 시작됐고...
    어제 노무현이 '1+1=2'라고 했을지라도 오늘 노무현이 '1+1=1'이라고 말을 바꾼다면 기꺼이 '어제도 맞고 오늘도 맞다'라는 식으로 가치판단의 기준을 노무현 자체에 두는 자칭 개혁파들도 생겨났습니다.
    황우석 사태도 그런 연장선상에 하나죠.
    노무현지지자들가운데 이른바 '극우와의 연합'의 한 모습이 황우석지지자들로 나타난 '황빠현상'이며 홍위병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노빠현상'입니다. 노무현을 추종하는 세력의 상당수는 자신들의 이념적 지지기반이 무척 약하다는 걸 보여줍니다. 도덕적 우월감도 낮습니다.
    김병준이나 박기영같은 인물의 사태를 봐도 그렇습니다.

    진보 개혁파들에게 더더욱 박탈감을 안겨준 것은 유시민이 장난질 친 개혁당 사태나 비리를 저질렀음에도 여전히 노무현 주변에 있는 이광재 등 측근들 때문입니다.

    호남이 열린우리당에게 박탈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도덕적으로도 정책적으로도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자신들의 기대와는 너무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김대중은 노무현처럼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은 말따로 정책따로여서 더더욱 실망이 컸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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