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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구독도 안하면서 장렬한 최후 요구?
[기자의 눈] 언론을 향한 자본의 포섭에 대해 치열한 고민과 해법 찾아야
 
황진태   기사입력  2006/08/11 [13:13]
얼마 전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가 의뢰한 광고에 삼성과 포스코라는 문구가 포함되었다는 이유로 광고 게재를 거절하여 물의를 빚은바 있다. 
 
일찍이 <한겨레> 편집기자 박경만은 그의 저서 <조작의 폭력>에서 <한겨레>에서 보도한 현대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한 기사를 예로 들며 신문의 의미생산에는 "정치권력과 시민단체, 독자, 광고주 등 언론사 외부의 압력이 작용한다"고 손꼽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사 내부의 비판 이후에 실질적 개선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언론을 향한 자본의 포섭에 대한 딜레마가 얼마나 강하게 작동하는 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8월 10일자 <한겨레>는 삼성이 개발한 와이브로 기술을 미국 이동통신업체 스프린트와의 제휴하게 된 사실을 "한국이 '만년 기술 수입국'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분명한 신호"라며 '사설'로까지 다루었다.

▲불량신문의 여론조작을 실증적으로 파헤친 박경만 한겨레 편집기자의 역서,     ©개마고원, 2005
한미 FTA가 체결되면 기술강대국 한국이 될 것이라는 망상을 깨고서 실질적인 기술강대국으로 도약하기 위하여 앞으로도 제2, 제3의 와이브로 기술들은 계속 나와야 하고 이에 대한 <한겨레>의 보도와 논평은 의미 있는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안연대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한국에서 형성되어 있는 독특한 기업구조인 재벌에 대해서 재벌의 전면적인 해체보다는 개선의 수준을 밟는 것을 긍정하고, 기술개발을 위한 재벌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은 필요하지만 이러한 대안연대의 주장 또한 재벌의 개선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즉, 삼성의 이면에 대한 드러내기에 주저한다면 와이브로 기술에 대한 사설은 '자본의 주구' 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지 의문이 갈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가령 "삼성일반노조를 결성하여 삼성의 무노조경영, 노동자 탄압에 맞서 10여 년간 싸워 왔고, 결국 '업무방해죄'로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이계삼, <프레시안> 8월 10일자)고서 수감 중인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을 석방하라는 글이 <한겨레>에도 실릴 수 있는 가다. 

윗 기사가 실린 <프레시안>의 경우 창간 초기부터 현재까지 포스코 광고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바가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불거진 포스코 사태와 하중근 씨 죽음에 대한 일련의 보도행태에서는 상당히 독립적 비판적 보도를 견지하고 있다.
 
"한 달 1만 2천 원 구독료에 주저하며 장렬한 최후를 맞으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선명성으로 이 땅의 몰상식한 언론 환경을 바꾸려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 스스로 물어보는 겸손함을 기대할 수는 없을까?"라며 홍세화 선생이 칼럼에서도 말했듯이 <한겨레>의 경영난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물고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언론을 향한 자본의 포섭에 대한 딜레마의 또 다른 일면이다.
 
▲극우의 목소리를 한데 모은 지만원씨의 조선일보 의견광고     ©조선일보 8월 1일자 광고 PDF

광고 또한 엄연히 신문편집의 일부에 들어간다. 독자들이 실질적으로 잘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광고에 대해서 지나치게 의미를 두는 게 아닌가라는 혹자들의 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광고의 정치·경제적인 작동에 대한 몇 가지 사례로 <조선>, <동아>의 오피니언란에 실리는 극우단체들의 의견광고를 단순히 광고로 볼 수 없는 것은 뒤집어 생각해서 이들 의견광고가 <한겨레>, <경향신문>에 실릴 수 있는 가로 되물으면 쉽게 알 수 있다. 몇 해 전 <오마이뉴스>가 정부의 차세대전투기사업 홍보광고를 실었다가 수많은 질타를 받고 결국 광고를 내렸던 것도 신문사 경영상 광고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보, 개혁매체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중요성이 더 크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방한했던 미디어 정치경제학자 그레이엄 머독 또한 미디어에 대한 자본의 침투로부터 '공영성'의 가치를 강조하였듯이 이러한 언론을 향한 자본의 포섭에 대한 딜레마는 비단 한국에서만의 국지적인 문제가 아니다. 한미FTA 협상과 관련해서도 세계체제적인 측면에서도 보다 시야를 넓혀 진보, 개혁매체들이 자본의 침투를 두고서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할지 치열한 고민과 결정을 내려야할 때가 왔다.

[참고기사] 자유와 비루함의 경계(홍세화 칼럼, 한겨레 8월 2일자)

 
자본주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자유인이 아니라 마름이 지배하는 사회다. 그 체제가 자유를 억압하고 자유인을 혐오하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적 독립이 정치적 자유의 조건이라는 점을 모르는 이 누구겠는가.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그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더구나 속물적 자본주의의 극을 달리는 한국 사회에선 더욱 그렇다. 〈한겨레〉는 어차피 양손에 떡을 쥘 수 없으며 자유와 비루함의 경계에 서 있다.
 
사회는 더욱 우경화하고 구성원들은 다투어 물신에 전력으로 투항하고 있다. 대중과 긴장하는 불편함에서 스스로 해방한 ‘급진’은 자신의 선명성을 드러내면서 찻잔 속의 태풍을 일으키고, ‘내강’이 전제된 ‘외유’ 대신에 ‘내유’를 증거하는 ‘외강’이 횡행하면서 수구세력에게 빌미마저 제공하고 있다. 대중은 더욱 멀어지고 대중이 멀어지는 만큼 이념이나 의식의 선명성은 더욱 강조되는데, 그 영향이 한겨레에도 미치고 있는 듯하다. 워낙 기대가 컸기 때문이라고 찬웃음으로 웃어넘기던 정도를 넘겨 사회 우경화가 한겨레의 탓이나 되는 양 비난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그리고 나만의 일일까, 절독 소리가 더 자주 들린다. ‘조·중·동’ 독자들은 소리 없이 절독하는 반면에 한겨레 독자는 꼭 주위에 선언을 하기 때문인지 내 귀엔 한겨레 절독 소리만 들린다.  
 
한겨레 구성원들에게도 소설 속의 근사한 주인공처럼 장렬한 최후의 유혹은 마지막 위안이고 기댈 언덕일지 모른다. 장렬함이 그 결단이 가져올 무책임까지 면죄해 줄 수 있다면 분명 그렇다. 그러나 거듭 주장하지만 진정한 자유인은 나 홀로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불어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겨레 구성원들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비루하게 생존을 지속하고 있다는 비난이 아니라, 조·중·동에 비해 턱없이 적은 구독자 수에 있다. 한겨레를 위해 ‘봐준다’는 독자가 많은데도 그렇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비루함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대중이 처한 삶의 조건이다. 못된 상사에게 한방 멋지게 날리지 못한 아버지의 비루한 모습은 희희낙락 철없던 우리 자신을 탓하게 하지 않던가. 때론 친구들 앞에 뽐내며 소개할 수 있는 부모를 그려보기도 하지만 우리를 살아남게 한 것은 아비의 지문이 사라진 손이고 어미의 재빠른 계산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한 달 1만2천원 구독료에 주저하며 장렬한 최후를 맞으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선명성으로 이 땅의 몰상식한 언론 환경을 바꾸려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 스스로 물어보는 겸손함을 기대할 수는 없을까? 그렇다고 ‘한겨레마저!’라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을 그려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각자 몫의 비루함에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묻고 싶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갑자기 오지 않는다. 성실한 일상의 결과로서 꼭 그만큼 올 뿐이다. 한겨레 비난이나 외면이 불성실한 일상에 주는 면죄부가 돼선 안 될 것이다.  
 
오늘 한겨레의 소신은 화려한 비탄이나 장렬한 최후가 아닌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하나의 현실로 살아남는 데 있다. 물론 그 현실은 피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개선돼야 할 것이라는 전제에서다. ‘자발적 복종’은 한겨레의 사전에 없고 한겨레의 비루함은 자유의 버림에서 온 게 아니라 자유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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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8/11 [13:1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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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웃사이더 2006/08/12 [10:30] 수정 | 삭제
  • 한겨레신문도 보지 않으면서 한겨레에 너무 지나친 요구는 하지말라고? 이것은 어느정도 맞는 말이다 요즘 신문시장에서 조중동을 제외한 잘나가는 회사는 별로 없다 한겨레도 예외는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장사가 안된다는 이유만으로 이번 금속노조 광고거절한것을 정당화할수 없다 자신들의 책임이 아닌 무조건 독자들의 한겨레신문을 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핑계일뿐이다 잘되면 내탓 안되면 남의 탓으로 돌리는 습성때문인가 독자가 과연 한겨레를 왜 안보는지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나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신문은 넘처나는데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신문이 어디 있기나 한가 한겨레신문을 무조건 자본 친여신문이라 매도 할수 없을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신문으로써 아니 진보신문이라면 적어도 이런광고는 실어주어야 하는것이 정당하지 않은가 자신들은 아무것도 안하고 무조건 독자들이 신문안보니 어쩔수 없이 광고입장만 대변해야 한다고 조중동은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도 자본의 입장을 대변하는것은 무었때문인가 무조건 독자들이 한겨레를 안본다 나무라지 말고 독자들곁에 다가가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그다음에 독자의 선택을 기다려야 할것이다 한겨레가 달라진다면 독자들 특히 노동자입장을 잘 대변한다면 노동자들은 한겨레구독을 거부할 이유가 없으며 꼭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