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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재구성', 상실된 사랑을 위한 아다지오
[벼리의 CineView] 리얼리티가 죽은 사랑의 손짓 그린 '리컨스트럭션'
 
벼리   기사입력  2005/01/23 [04:51]
▲알렉스와 아메     © 벼리
시작은 마술이다. 탈색된 흑백화면에 등장하는 마술사. 불붙은 담배를 허공에서 띄워 두 손 사이에서 움직인다. 뜨거운 시작. 그리고 "이것은 영화다, 그라고 허구다. 그러나 가슴아프다" 라고 이어진다. 마술 속에는 트릭이 있고, 영화 속에는 시공간을 가르고, 재구성하는 미학적 기술이 동원될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사랑' 때문이다.
 
감독인 크리스토퍼 부는 이 진부한 주제에 특별하게 다른 정의를 내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너절한 경구들을 남발하며 과장된 비극적 수사를 동원하지도 않는다. 단 하루만에 일어난 만남과 이별이 중요하다. 그속에서 코펜하겐의 차가운 공기가 흐른다. 건조한 인격들이 거리를 돌아다니지만, 주목되는 인물는 단지 네 명 뿐이다. 29세의 사진사 청년 알렉스(니콜라이 니 코스 분), 그를 사랑하는 청순한 여인 시몬느(마리아 보네비 분)와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사랑에 빠진 여인 아메(마리아 보네비 1인2역 분) 그리고, 시몬느의 남편이자 이 영화의 화자인 어거스틴(크리스터 헬릭슨 분)

▲시몬느와 알렉스     ©벼리
감독은 이 네 명의 인물들이 시간과 기억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오가도록 교차편집을 통해 복잡하게 배치한다. 프롤로그인 마술장면은 에필로그로 반복되며, 아메와 알렉스의 첫만남은 영화의 중간부에 변주된다. 함께 격정적인 밤을 보내는 장면은 그것이 아메의 호텔에서인지 아니면 다른 장소인지 정확하게 구분이 되지 않도록, 아니면 그것이 시몬느였는지 아메였는지 불분명하게, 공간과 시간을 쪼개고 병치시킨다. 게다가, 인물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오브제들은 매우 독립적이다. 그것은 어느새 주인이 뒤바뀌며(라이터), 특정한 소유자의 '것'이기를 거부하며(반지), 마침내 아주 증발해 버린다(알렉스의 아파트).
 
주변인물들도 예외가 아니다. 알렉스가 시몬느를 버리고, 아메와 사랑에 빠진 순간 모든 인간관계가 사라진다. 친구는 그를 몰라보고, 아버지도 그를 외면한다. 완전히 타인이 되어버린 지인들. 참으로 영화에서만 가능한 것은 이런 것들이라는 듯, 감독은 시공간의 예술이라는 영화의 모든 정수들을 다 활용하면서 어떤 심각한 알레고리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마누엘 알베르토 클라로의 카메라 워킹도 심상치 않다. 불가해한 사랑에 빠지는 그 '나락'의 순간을 만화경 트릭으로 표현하는 것, 그리고, 상실된 인간관계를 드러하기 위해 동원되는 카메라 트램블링(trembling), 열락의 장면에서 사용된 아름다운 몽타쥬 스타카토 편집 등.

그렇다면, 영화는 이런 것들을 통해 결과적으로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일까? 맨 앞과 뒤에 반복되는 마술 장면과 "이것은 영화며 허구"라는 나레이션은 직접적으로 이 영화가 리얼리즘의 범주와는 상관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극대화된 카메라 워킹과 편집의 스타일은 '사랑'이라는 주제가 마치 현실을 떠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쩌면, 사랑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둘 만의 대화에 열중하는 것, 우리의 눈에 클로즈업된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과 입술과 몸의 구석구석들. 따라서, 사랑의 프레임 안에 현실은 가뭇없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알렉스의 말처럼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떠남의 대상은 사랑을 하는 그 주체의 기대와 완전히 어긋날 것이다. 사랑에 빠진 충만한 자의식이 희생해야 하는 것은 옛애인만이 아니다.
 
모든 관계와 모든 기억이 변형되고, 기대와 욕망이 늘 앞서가기 때문에 가상이 현실을 아예 구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끝없는 나락이 형성되는 순간, 알렉스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지만, 아메의 사랑스런 모습 앞에서는 또다시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리고 다시 반복되는 장면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사랑이라는 폐쇄된 프레임 안에 영원히 인물들을 가두어 놓겠다는 듯 벼르는 것 같다. 동일한 것의 반복과 변주는 그 자체로 체념을 유발하고, 운명에 집착하게 만든다.

▲상실된 사랑     © 벼리
그러나, 이 윤회론적 허무주의가 감독의 전언일까? 하긴, 아메와 알렉스는 영원히 로마로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영화는 그들이 그토록 갈구하던 그 땅으로의 엑소더스를 철저히 부정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뒤를 돌아보지 마라'라고 나레이터는 알렉스에게 충고한다. 그러나, 로마로 가기 위해 만나기로 한 그 둘, 약속시간을 어긴 알렉스는 그 시간에 이제는 그를 완전히 알아보지 못하는 시몬느와 카페에 있었다. 알렉스에게 그것은 새로운 사랑에 대한 불안과 옛사랑에 대한 허튼 집착을 확인하는 절차다. 아메는 알렉스를 기다리지만, 그는 너무 늦었다. 나레이터는, 다시 '뒤를 보지 말라'고 말한다. 영화적 알레고리가 등장한다. 알렉스는 앞서가고 아메가 뒤를 따른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 상실의 순간, 떠나온 시몬느를 뒤돌아본 것과 똑같이 알렉스는 불안에 휩싸여 뒤따르는 아메를 돌아본다. 베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가 흐른다. 아메는 떠났다.

"자기가 날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메의 호텔에 서둘러 달려온 알렉스를 몰라보는 아메가 남편인 어거스틴에게 그렇게 말한다. 사랑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리고,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사랑을 나눈 방. 침대에 평화롭게 누워 잠든 아메에게 이번에는 알렉스가 이별을 속삭인다. "잘있어요 아메" 그리고 나레이터는 반대로 말한다. "그녀는 떠났다." 그렇다면, 영화는 처음부터 마술과 같다. 아메와의 충동적인 사랑이 시작된 순간부터 사랑을 나눈 후까지, 리얼리티와 환상이 겹친다. 또는, 그 둘이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눈 후까지 그러하다. 모든 이별과 사랑과 그로 인한 환상은 족히 알렉스와 영화가 만든 '허구'의 몫이었을까? 
 
▲크리스토퍼 부 감독의 \'리컨스트럭션\' 포스터     © 크리스토퍼 부
허구의 재구성(Reconstruction)? 감독은 대꾸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 속을 배회하는 담배연기와 코펜하겐의 차고 건조한 겨울 속에 서 있는 작은 얼음성과 같은 영화의 미로에서 우리는 길을 잃는다. 누가 누구를 떠난 것이고, 누가 누구를 사랑한 것일까. 그리고, 애초에 사랑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더듬어 나가는 것은 부질없다. 영원히 갇힌 사랑은 현실과 관계의 끈을 상실하게 만들며, 그것은 또다시 사랑의 본질을 놓치게 만든다.
 
리얼리티가 죽은 사랑의 손짓은 언제나 그 절정의 주변에서 끝없는 나락이요, 허방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비라기 보다는 먼저 상실이며, 그래서 상실된 것을 찾기 위한 끝없는 반복이며 슬픔일 것이다. 엔딩크레딧이 오르기 전, 마침내, 마술사는 '펑'하고 스스로를 삭제해 버리는 것이다. 사랑은 떠났다.<NomadIa>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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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1/23 [04:5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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