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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끼 하야오의 세계, 성장? 혹은 타협?
[벼리의 Cineview] 오마주의 퇴색,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대한 단평
 
벼리   기사입력  2005/01/18 [03:20]
다른 감독은 몰라도 벼리는 미야자끼 하야오에 대한 편애에 늘상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밝혀야 하겠다. 작품을 평하는 사람이 이런 편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안들지도 모르지만, 벼리가 그런 분들에게 하는 말은 늘 똑같다.
 
"그건 당신 편견이고, 난 편애야"(용서하시길). 
 
▲다리 달린 증기기계 하울의 성     © 미야자끼 하야오
이런 불공정한 편애는 꽤 오래된 것인데, 그건 어느날 우연히 《이웃집 토토로》(1988)를 보았던 대학시절의 추억에서부터다. 불법 CD가 막 발흥하던 시절, 벼리는 친구의 건강한(?) 꾀임에 넘어가 그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완전히 몰입한 거다. 솔직히 말하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화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토토로가 거대한 나무 줄기를 작은 우산을 타고 날아 올라가는 장면에서 말이다. 그건 슬픔에 의한 눈물이 아니고, 너무 벅찬 감정 때문에 흐르는 그런 종류의 짜고 상쾌한 카타르시스 같은 거였다. 그 후 벼리는 이 감독의 작품들 거의 대부분을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구해 보았다. 불법CD로 말이다. 개봉이 안되니 할 수 있나? 그런 미야자끼 하야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이후 다시 돌아왔다.
 
오시이 마모루나 사토시 콘 같은 재패니매이션의 거장들이 그렇듯이 미야자끼 감독의 미덕은 애니매이션의 비쥬얼한 효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실사영화의 작가주의를 능가하는 일관된 철학과 세계관에 있다.
 
전자가 작품에 합당한 기술적 완성도의 기여를 증명하는 제작진들의 노고의 산물이이라면, 후자는 바로 작품의 영혼에 해당한다. 우리가 미야자끼 감독의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요소의 충일한 결합에 있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헐리우드 애니매이션의 재미라는 것이 그저 《슈렉》같은 패러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지만 그 이상을 넘어가는 것은 이미 재패니매이션의 소관이다. 따라한다면, 아류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헐리우드 자본이 그걸 원할지도 또한 의문이다.
 
그렇다면, 미야자끼 감독의 철학은 무엇일까? 그건 그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시피, 자연에 대한 동경 또는 그것을 훼손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고발이다. 이러한 일관된 관점이 신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에서도 변주된다. 그런데, 어떤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그건 어떤 것일까? 일단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자.

▲산업과 마법이 공존하는 도시 앵거리     © 미야자끼 하야오 
장소는 19세기 상상의 도시 앵거리. 산업화된 다운타운과 마법이 횡행하는 외곽의 게토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주민들은 약간의 공포를 가지고 있지만, 마법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그리고, 소녀들은 상당한 동경 또한 가지고 있다.
 
'하울(키무라 다쿠야 목소리분)'이란 인물은 아름다운 소녀들의 심장을 빼내간다고 소문이 난 마법사. 그러나, 그건 진실이 아님이 곧 드러난다. 가업을 이어받아 모자를 수리하는 일을 하는 착하고 순진한 18세 소녀 '소피(바이쇼 치에코 목소리분)'는 어느날 황무지 마녀의 수하인 고무인간들에게 쫓기다가 하울을 만나 꿈같은 체험을 한다. 흉악한 몰골을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던 것과는 달리 생머리를 찰랑거리는 미소년인 하울의 팔에 안겨 하늘을 훨훨 걸어 다닌 거다. " 나 꿈을 꾼 것 같애"라고 소피는 말한다.
 
그런데, 평소 하울의 재능과 젊음을 시기하던 황야의 마녀는 소피에게 저주를 걸어 80세 노파로 만들어 버린다. 실망한 소피. 그래도 괜찮은 것은 소피가 용기를 잃지 않은 것이다. 미야자끼 감독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늘 그렇듯이 어떤 황당한 경우에도 소피는 절망하는 법은 없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을 알고 길을 떠나면서도 소피의 마음은 그저 앞으로 황무지 마녀를 혼내줄 생각으로 가득하다. 노파가 된 씩씩한 소녀 소피가 무대가리 허수아비를 만나 엉너리치는 장면에서는 웃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마법의 게토에서 소피는 허수아비의 도움으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들어선다. 말로만 듣고, 멀리서만 보던 그 성에 들어선 소피. 짐짓 노파임을 가장하고 그 성의 청소를 도맡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장면에서 예전 미야자끼 감독의 깜찍한 기계들과는 다른 기계가 이 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긴, 커다란 덩치에 비해 움직이는 게 둔하고, 성에 발까지 달렸으니 귀엽기는 하지만, 이건 《이웃집 토토로》에서의 고양이 버스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의 글라이더와는 달리 동력이 증기기관이다.
 
나무땔감을 사용한다는 것. 의아하다. 어쩌면, 빠질 수 없는 캐릭터인 가루시파(의인화된 작은 잉걸불)를 위한 것일까? 가루시파가 움직이는 이 성의 동력이 나무땔감이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러나, '나우시카'에서 그토록 분개했던 미야자끼가 여기서는 이런 것에 관대하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에, 우리는 미야자끼 감독의 어떤 변화를 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변절? 아직까지 만화 속의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는(제작사인 '지브리'의 스즈키 토시오는 "미야자끼는 하울을 자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백발 성성한 소년에게 변절이라는 말이 어울릴지 아직 모르겠다. 하여간 이야기를 더 따라가 보도록 하자.
 
▲가루시파, 성을 움직이는 작은 잉걸불     © 미야자끼 하야오

성의 청소부로 이 성의 집사격인 소년 마르클과 무대가리 허수아비 그리고 하울과 함께 살아가면서 소피는 점점 하울이 마법에는 뛰어나지만 겁많고 짜증 잘 내는 평범한 청년임을 알아가게 된다. 그런데, 하울에게는 천성적이라고 볼만한 그런 평화주의가 있다. 지금 왕국은 전쟁중이고, 앵거리의 마법사들은 마법학교에서의 서약에 따라 전쟁에 참여할 의무가 있음에도 하울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작품에서 이런 하울의 행동이 겁많은 성격에서 비롯되는지 아니면, 충분히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지는 불분명하지만, 그것이 하울의 어떤 운명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지점이 이것인데, 벼리가 보기에 하울은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그 능력이 뛰어나며, 그것은 그를 사악한 마왕이 되게 할 수도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하울은 세상에 대한 연민과 평화주의 그리고, 그의 운명 가운데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이러니, 소피의 하울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지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잠깐. 사랑? 이상하다. 미야자끼의 작품에 사랑이라니!
 
원작(다이에나 윈 존스)에 충실한 것도 좋지만, 이건 너무 한 것 아냐 라고 한다면, 그동안 미야자끼의 영화를 정말 충실히 봤다고 할 만할 것이다. 그런데, 미야자끼 영화에 사랑의 테마가 등장하지 말란 법도 또한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도 않는다. 그저 낯선 상황인 것이다.어쨌든 천신만고 끝에 왕실마법사 설리만과 황무지 마녀의 추격을 따돌린(황무지 마녀는 참 귀엽게도 노파로 변해 그들의 식구가 된다) 소피와 하울은 미야자끼 영화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진한 키스로 라스트씬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제 쓴소리 몇 마디를 해야 하겠다. 자세히 본 사람들은 느낄 수 있겠지만, 미야자끼 감독의 이번 작품은 그 스토리 라인이 전작들에 비해 매우 엉성하다. 꽤 긴 분량의 원작을 2시간 분량으로 압축하기 위해 생략한 것이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더라도 다른 면에서 우리는 몇가지 뚜렷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여전히 섬세한 애니매이션 비쥬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방면에서의 약화된 작가적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80 노파가 된 소피와 미소년 하울     © 미야자끼 하야오
첫째, 앞서 살펴 보았다시피, 자연친화적 감수성의 약화다. 가루시파의 상징은 작품 속에서 생명의 원동력을 뜻한다. 설정에 의하면, 그건 애초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무수한 별똥별 중의 하나였다. 어쩌면, 이야기의 구성에 따라 상당히 신화적 상징일 수 있는 이 캐릭터는 그러나, 작품 내에서 끝장면을 제외하고는 줄곧 희극적으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가루시파가 내내 삼켜대는 나무땔감들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 묻지 않는 것은 불문율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에 미야자끼 감독은 그렇지 않다.            

둘째로 인간욕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거리감이 무뎌졌다는 것이다. 이야기 진행의 초점은 사실, 하울이 그토록 막으려고 애쓰는 국경 부근에서의 전쟁이 아니라, 소피와 하울의 사랑이다. 그래서, 정말 이 이야기에서 전쟁은 국경에서만 일어날 뿐 우리에게는 전혀 무관한 듯 보인다. 인간의 파괴적 욕망에 순수한 자연의 테마로 맞섰던 예전의 미야자끼가 여기에는 없다.
 
백발의 소년에게 일본은 44일만에 1000만 관객이라는 선물을 안겨 주었다. 우리가 보기에도 이건 합당한 성공이다. 그러나, 왠지 이 작품에는 미야자끼의 취향이 짙게 깔려 있지 않다. 오마쥬의 퇴색인가? 우리가 미야자끼에게 가지는 애정이란 그것까지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가 이 작품에 물음표를 두 개, 하나는 긍정적으로 하나는 부정적으로 붙이는 것은 매우 온당하다. 그리고,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NomadIa>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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