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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상실, 좌절된 동일시와 타자 살해
[벼리의 Cineview] 사토시 감독의 97년작 애니메이션 영화 [퍼팩트 블루]
 
벼리   기사입력  2005/12/13 [22:10]
영화는 현실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축한다. 다시 한번, 애니메이션은 영화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구축한다. 역설적으로 애니메이션은 여기서 현실을 모방의 모방으로 재창조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통상 제패니메이션이라고 부르는 곤란한(?) 장르는 이 시뮬라크르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작품성과 대중성이라는 이중구속으로부터 벗어난다.

▲ 애니메이션 '퍼펙트블루' 포스터     © 튜브엔터테인먼트 제공
구속을 극대화하고 그 강도를 임계점으로 까지 밀어 부침으로써 지평을 파괴하며 스스로를 해방하기. 이것이 시뮬라크르의 효과며, 보드리야르가 말한 바 시물라크르의 '내파implosion'라는 공식이다. 그러므로, 이 애니메이션이  실사영화로 제작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느니, 애니메이션이 표현할 수 있는 SF류의 장점을 탈각했다 라느니 하는 비난은 애초에 맞지 않다.

감독인 사토시는 이것을 충분히 고려한다. "일본 만화는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은 거의 대부분이 미소녀나 로보트SF뿐이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퍼펙트 블루를 통해 애니메이션을 다른 관점에서 만들어 보고 싶었다.  … 나는 로보트나 전투씬이 애니메이션의 전부라고 믿지 않는다. 내가 만약 그렇게 생각했더라면, 퍼펙트블루는 아마 실사영화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여기에다 우리는 또 하나를 덧붙이고 싶은데, 그것은 이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는 분열증적 힘이다. 작품의 주제群 가운데 하나가 분열증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작품 내부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감독 자신이 이 작품의 또 다른 복사판인 [더블 바인드(Doulble Bind, 이중구속)]를 라디오물로 제작하는 것은 정말로 어떤 전략적인 기획을 가지고 하는 행동들이다.
 
다시 말해, 감독은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현실을 구축함과 동시에 그 현실을 애니메이션과 똑같은 도플갱어로 재창조하며, 그럼으로써 우리들을 영원한 분열증적 증식 속으로 몰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서두가 길다. 거두절미. 이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삼인조 그룹 참(Cham)     © 튜브엔터테인먼트 제공
촉망받는 삼인조 그룹 '참(Cham)'의 아이돌 스타인 미마는 기획사의 의도에 따라 배우로 변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물론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코드는 '화폐'다. 기획사는 아이돌 가수가 가지고 오는 이윤에 만족할 수 없다. 미마는 화폐로 거래 가능한 자본주의의 아이콘이며, 자본의 논리에 따라 끊임없이 증식되는 상품이어야 한다.
 
애초에 가수가 되기 위해 멀리서 동경에 온 미마는 이런 자본의 물신화 전략을 알 수 없다. 이미 가수와 배우라는 직종 상의 차별화는 이 물신화 과정에서 쓸모 있는 '차이'가 될 수 없다. 쓸모 없는 차이는 가차없이 폐기되어야 한다. 약간의 방황이 있다. 그러나, 미마는 개의치 않는다. 에이전시 타도코로는 그녀의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질좋은 상품으로서의 미마를 다듬어내기 위한 작업에 물심양면 애쓴다. 일반적 구도가 작동한다.
 
▲  자본의 요청, 섹스
아이돌 스타에서 성인스타로의 신고식. 그건 목소리가 가진 비가시성과 에소테릭한 감각적 상품성에서 육체가 가진 관능적이며 페티쉬한 상품성으로의 변신을 요구한다. 누드와 강간씬이 이어진다. 화폐로 전화한 인격은 애초의 자연적 존엄성의 여지를 전혀 남겨 둘 수 없다. 거래 가능하기 위해서 인격은 몰인격화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일반적 구도란 이런 것이다. 미마를 벗겨라. 그녀의 자연적 모습을 렌즈에 담아 팔아라. 미마는 서서히 이 거대한 이윤 기계 속에 꼼짝없이 부품화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때는 늦다.
 
분열증은 여기서 이중으로 미마를(또는 우리를) 괴롭힌다. 하나는 그녀가 출현하는 드라마인 [더블 바인드]고, 또 하나는 인터넷 상의 그녀의 홈페이지다. 둘 다 가상이며, 관객인 우리 입장에서는 가상의 가상이다. 벌써 시작되었다. 우리는 또는 미마는 현실과 가상의 착종 상태 속에 놓인다. 예측가능한 현실이 여기 있을 리 없다. 시뮬라크르의 본성은 사건이며, 그것은 어떤 인과율도 포착할 수 없는 것이다.
 
▲  혐오와 자기 파괴
첫째, 드라마 [더블 바인드]. 이 드라마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예술적 의도도 거부한다는 것이다. 아니, 차라리 작품 속의 거대 상품(대문자 상품-C)인 [더블 바인드]는 인물과 사건의 개체성들(individualities)을 상품(소문자 상품-c)으로 만든다. 거대한 블랙홀-기계로 작동하는 것이 이 드라마의 임무다. 당연히 상품성의 중요한 아이콘으로써 섹스는 필수. 미마는 한 번의 강간씬 안의 두 번의 쇼트로 인해 정체성 혼란에 휩싸인다. 굳이 두 번의 쇼트로 나누어 찍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은 이런 이유다. 강도의 누승화. 이 측면에서 사토시는 영악했다. 그러므로, 보는 우리는, 미마는 더욱 고통스럽다. [더블 바인드] 아니, [퍼팩트 블루]는 이 지점에서부터 분열증-기계를 작동시킨다. 미마는 예전 그룹 시절의 자신의 분신이 질책하는 환영에 시달린다. 
 
둘째, 인터넷 상의 '미마의 방'. 미마가 초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자신의 팬이 만들어 놓은 이 사이트를 기웃거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이트의 관음성이 점점 변태화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미마의 정체성 혼란에 제동장치를 풀어놓기 충분하다. 미마의 분신은 더욱 극성스러워 진다. 
 
▲  나르시시즘 또는 분신 
여기 놓인 이 장치들, 다시 말해 드라마 [더블 바인드]와 '미마의 방' 그리고 분신은 작품 안에서 어떤 인과성을 가지고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순수한 '조우' 속에서 그야말로 '착종'되고 '작동'한다. 드라마와 인터넷, 분신은 다만, 작품의 편집의 선을 따라 사건으로서 만나고 그 효과를 만들어낸다. 효과? 그게 이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는 공포의 참 근거다. 인과성 없는 사건들의 만남이 만들어 내는 효과. 여기 살인이 있다.
 
처음으로 드라마 작가인 시부야가 죽는다. 그리고, 그녀의 누드를 찍었던 무라노가 다음 표적이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가 배반당하는 살인이 일어난다. '미마의 방'을 만든 스토커 우치다의 죽음. 이쯤 되면 코난도일식 추리 패러다임에 물든 우리로서는 묘한 짜증에 휩싸인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더블 바인드] 안의 살인과 [퍼팩트 블루]의 살인은 동일한가? 또, 분신은 뭔가? 심히 괴롭다.
 
▲ 우치다
사토시 감독이 웃는다. 이건 정말 '더블 바인드'가 아닌가? 관객들은 흠칫 놀란다. 범인이라니? 동일성이라니? 작품을 보다 말고, 만만치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우린 여기서부터 범인을 찾는다거나, 누가 누군지 구분해야 한다는 동일시의 강박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참, 그러나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끝까지 생각한다. '범인은 누군가? 미마는 누군가?' 여기까지는 나은데, 게다가 교훈적으로 '나는 누군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사토시로서는 작품이 실패했다는 식으로 우리를 엿먹일 수도 있다. 하긴 감독은 범인도 동일시도 중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시종일관 분열증식 되는 가상의 효과-드라마와 애니, 드라마의 인물과 작품의 인물, 그리고 작품을 배반하는 우리의 문제의식과 우리를 배반하는 작품의 문제의식. 이 항들은 서로의 계열과 만나지 않는다. 이것들은 서로 수렴하지 않고 매번 발산하며, '범인'이라는 기표와 '동일성'이라는 기표를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결국 어떻게 되냐고? 누가 범인인지 말하지 않는 한에서(?) 말한다면, 결국 미마의 코디인 루미가 분신이며, 범인이며, 미마 자신인 것'처럼' 끝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포기할 건 포기하고 작품을 보라는 게 필자의 부탁이다.
 
그런데, 문득 우리는 이 분열증적 계열의 발산 속에서 이상한 특이점을 발견한다. 하나는 일종의 타자살인의 특이점이며, 또 하나는 루미의 특이점이다. 
 
▲  타자살해
첫째, 여기서 살해되는 인물들은 모두 눈을 찔린다. 연상되는 게 없는가? 오이디푸스? 그렇다면, 가망 없다. 왠 뜬금 없이 오이디푸스? 이 인물들이 희랍인들이라도 된단 말인가? 들뢰즈와 가따리가 프로이트를 냉소한 것은 이런 이유다. 차라리 이 인물들에게서 물신성의 공통성을 찾고 '눈'이라는 특이점을 원점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왜 이들은 하나같이 송곳으로 눈을 찔리는가? 이 물음이 부질없다고 생각한다면, '왜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자들은 시퍼런 강물을 마주보고 뛰어 드는가?'라는 질문도 비슷한지 생각해 보는 게 좋을 듯 싶다.
 
생각하기에 '눈'은 '시선'의 물화다. '시선'은 눈을 통해 나타나지만, 눈이 없는 곳에서도 시선이 가능하다. 싸르트르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열쇠구멍으로 누군가의 정사를 엿보고 있을 때, 저쪽 계단 참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수치심으로 당장 그 짓을 그만둘 것이다. 이때, 우리는 타자의 '눈'이 아니라 '시선'을 참조하고 있다. 이 현상은 시시각각으로 우리를 규정한다. 이 애니 안에서 미마는 처음부터 타자의 시선을 강렬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돌 가수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시선의 집요함은 마지막에도 이어진다.
 
미마는 정신분열증으로 입원해 있는 루미를 찾은 뒤 차 안에서 백미러를 보며 자신이 주목받고 있음을 흐뭇해한다. 그런데, 이때 미마가 보고 있는 것은 거울 속의 자신의 '눈'이다.  살인은 타자의 시선에 대해 일어나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은 그러므로, '폭력'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폭력은 애초에 우리가 알 수 있었던 바, '화폐'며 '물신성'이다. 살해된 자들은 미마를 그 화폐와 물신성의 시선 아래에 던져 놓은 자들이다. 그런데, 여기 뭔가 잘못되었다. '눈'은 '시선'이 아니다. 그들의 눈을 찌르고 살해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얼마든지 시선은 다시 그녀를 폭력적으로 다룰 수 있다. 감독의 시니컬한 계몽주의가 작동한다.
 
다시 말해, 작품은 어떤 평온한 결말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범인이 누군지, 미마는 누군지,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작품을 피칠갑했던 그 살인의 추억이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에서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죽여 놓고도 문제는 새로운 지평을 헤집고 다가온다. 타자의 시선, 그건 우리 존재를 지탱하는 근거며, 폭력이라는 것. 다시 '이중구속'이다!
 
▲  타나토스의 길 
둘째로 가자. 루미. 그녀는 진정한 동일시의 천재다. 미마의 분신으로서 그녀는 정신분열에 이르기까지 그 역을 충실히 해낸다.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분열증이 진정한 '되기'의 분열증이 아니라, '동일시'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것이다. 분열증은 자본주의적이거나, 편집증과 함께 갈 때, 퇴행적이며, 타나토스 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에로스와 생성과 함께 갈 때, 급진적이며 노마드적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루미는 타나토스로의 길을 걸었던 것 같다. 이 면에서 이 작품은 요상한 비극성마저 안겨 준다.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1997년 작품이다. 이제 정체성 상실은 일상이 되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멀리 간 것일까? 영화를 보면서 '주체 상실'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코드를 한 번 더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암울한 분위기에 반발심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오시이 마모루의 암울함은 SF를 통해 현실을 우회한다.
 
그러므로, 거기서는 암울함이 어떤 전환(사이보그 주체성?)을 암시하며 전개되었다. 약간의 Blue(우울). 그러나, 사토시는 그런 우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의 페시미즘은 정확하게 '지금-여기'에 기반한다. 주체상실은 분열증으로 진단되며, 냉소적인 인물 배치와 시나리오 속에서 간단없이 증식한다. 암울하다.
 
그러나, 주체상실이 암울한 것은 우리가 그 주체의 관성에 그만큼 끄달리기 때문이다. 왜 이래야 되는가? 주체 없는 신체/정신은 늘 자유롭고 노마드적이다. 그 운동 속에서 활달하게 노닐기. 이건 불가능한 윤리학인가? 영화는, 코기토는 아직 악몽이 아니며, 분열증은 여전히 '징후'라고 속삭인다. 완벽한(Perfect) 우울(Blue). 아직 갈 길이 멀다.    -NomadIa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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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12/13 [22:1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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