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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하루’, 기억과 망각의 쁠랑세깡스
[벼리의 Cineview] 앙겔로플로스의 영상미학 가득한 ‘영원과 하루’ 단평
 
벼리   기사입력  2005/01/13 [03:38]
▲지중해의 환상     © 벼리
"내일은 뭐지? 안나/영원과 하루/응? 뭐라고?/영원과 하루에요." 알렉산더는 마침내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다. 영원과 하루. 바다를 이루는 그 무수한 물마루의 포말들. 고대 그리스 시어들처럼 내밀한 은유들. 그러나, 내일은 영원과 하루. 죽음은 영원의 한 페이지 누락된 작은 기억일 뿐.
 
앙겔로풀로스 감독이 시인인 알렉산더를 통해 인정하고자 하는 것은 삶의 허무가 아니라, 죽음의 덧없음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의 역전이 여기에 존재한다. 죽음은 덧없다. 그것은 삶을 온전히 긍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닥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감독이 섣불리 삶을 찬양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빛나는 추억들에 비해 현실은 얼마나 부박한가.  슬픔의 유래는 그 빛나는 추억들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망각이라는 심연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추한가? 이것은 죽음이란 덧없지만 그렇게 추하지도 않다는 것을 긍정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소하기 때문이다. 죽음조차 망각되는 지점, 여기에 이 영화가 아름다운 이유가 놓여 있다.
 
▲사랑이 말하는 죽음     ©벼리
알렉산더(브루노 간츠 분)가 찾아 헤매는 것은 사라진 고대의 기표(signifiant)도 아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규정하는 시어의 기의(signifie)도 아니다. 언어가 유래하는 시간의 경사면에서 우리는 시어들의 단편들보다 사랑과 절망과 이념과 청춘의 사건(event)들을 만난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들과의 조우며 그것을 통해 하나하나씩 찾아가는 기억들에 있다. 우리는 무엇을 놓친 것일까? 필연적으로 편지는 분실된다. 알렉산더의 아내 안나(이자벨 르노 분)는 그의 남편 알렉산더가 볼지도 안 볼지도 모르는 편지를 남긴다. 삶의 가장 충일한 순간에 그들의 딸이 요람 속에서 생일을 맞고 있다. 그 순간에 쓰는 편지는 알렉산더의 관심이 닿는 순간 되찾아질 것이다. '관심'이 없는, 삶의 현실태에 대한 자각이 없는 수신자는 편지에 대한 미필적 방기자다. 알렉산더는 죽음이 닥친 그 순간에야 아내의 문자가 가지는 중요성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순간을 위해 많은 고뇌가 기다리고 있다.
 
애초에 알렉산더의 관심은 유령처럼 떠도는 먼 옛날의 기표를 시의 운율 안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오직 책에만 묻혀 사는"(안나) 알렉산더.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현재가 회색이 되는 시절은 갑자기 찾아오지만, 그것은 오랜 시간 준비된 것이다. 그리스 도시의 절망적인 그레이톤이 장면을 가득 메운다. 유적과 폐허가 압도적인 이 도시에서 아르바니티스(촬영감독)의 카메라가 궁극적으로 뒤좇는 것은 축축하고 음울한 이 폐허들의 꿈이 아니라, 찬란한 지중해를 배경으로 노래하는 사람들, 또는 인생의 모든 것을 압축시켜 놓은 듯한 발랄한 버스 안 풍경이다. 환상과 기억 그리고, 현실은 따로 있지 않다. 그것들은 서로를 간섭하고 중첩되며, 때로 길항(拮抗)한다. 유장한 쁠랑세깡스와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보는 듯한 정적인 화면구성은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그 둘은 환상과 기억, 현실을 응축하고 전치하기 위한 영화적 판타지의 앙겔로풀로스식 문법이다. 그리고, 대사는 영화가 담아낼 수 있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정점에까지 밀어 올린다. 
 
▲시인이 찾는 것     © 벼리

따라서, 진리는 의외로 단순한 것이다. 삶에 대한 태도에는 하나의 형이상학이면 충분하다. "삶은 아름다워." 버스를 내리며 시인(파브리지오 벤티보그리오 분)은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내일은? 시간은 그 경구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의 태도로서 삶이 규정될 수 있음과 동시에 그 삶은 내일을 향해 곧장 달려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은 유동적이고 비결정적인 채로 있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내일 없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알기 위해서는 내일 또는/동시에 죽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영화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엘레니 카레인드루의 음악은 이번에도 예외없이 그 그림자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첫 장면을 수놓는 그 음악은 바로 앞 건물의 발코니에서 흘러나오는 죽음의 메시지일 것이다. 발코니에는 희고 얇은 수의처럼 커튼이 휘날린다. 지중해의 옅은 바람에 몸의 한쪽을 맡기고 죽음이 경쾌하게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장면. 음악은 그 필요충분조건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항상 반복되는 죽음의 목소리. 알렉산더는 그것을 알고 있다. "다음에도 똑같은 음악이 반복될거요." 따라서, 죽음이 미래에 단 한 순간 덮치는 유일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영화가 가지는 형이상학적 심도가 이토록 깊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감독에게 죽음은 개념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알렉산더가 시어를 찾기 위해 다니는 모든 길 위에 죽음이 있다. 어린 알바니아 난민 아이의 삶이란 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알레고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삶이든 죽음이든 어느 한 쪽의 내기 속에서 번번이 패배하는 반면, 이 아이의 정체성은 알바니아와 그리스, 그 죽음과 삶의 경계 위에서 끊임없이 부유하는 태도를 취한다. 지혜가 경계에 존재하고, 어린아이에게 있다면, 우리는 그것의 응축물인 시어들을 그 아이를 통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세 개의 시어가 아이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온다. '코폴라(작은 꽃,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의 기분)', '세니띠스(망명객, 떠도는 사람)', '아르가디니(너무 늦었다)'. 영화의 끝장면에서 알렉산더는 이 세 시어를 외친다. 코발트빛 지중해를 향해 걸어가면서, 알렉산더는 어떤 기분에 젖어 이 시어들을 읇조리는 것일까? 그리고, 앙겔로풀로스는 어째서 이 시어들을 선택한 것일까?
 
사랑이 모든 죽음을 뛰어넘는 삶의 원질(arche)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그는 아기가 아니며(코폴라), 대지를 떠난 망명객이며(세니띠스), 그러므로, 너무 늦은 것(아르가디니)일까? 과연 이러한 해석이 그럴듯해질 수 있으려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그동안의 풍부함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가능하기라도 한 것일까? 
 
▲기억과 망각     ©벼리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내내 해석을 뛰어넘어버리는 담론의 상황에 직면해 있 음을 알게 된다. 이 개념의 무능력이라니! 왜 그런가? 그것이 삶과 죽음의 본질이며, 그 비언어적 사태야말로 우리 존재의 씨실과 날실을 엮어내는 방추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 항상 커텐 뒤에 숨어 반복되는 감미로운 음악을 흘려 보내는 것, 죽어가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알렉산더, 알렉산더...", 찬란한 기억과 유실된 편지, 망각, 마침내 아내의 키스와 그녀의 답변. '영원과 하루'는 이 모든 존재론적 알레고리들에 사후적인 방점을 찍는다. 폐가가 되어버린 옛집에 도착한 알렉산더가 아내의 화신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풍경과 인물을 함께 잡아 메는 극단적인 롱 쇼트와 트래킹 쇼트의 율동에 가뭇없이 노출되어 있었을 뿐이다.
 
알렉산더와 앙겔로풀로스도 그러했을까? 그런데, 여기, 아내가 나타나고 함께 춤을 추고, '영원과 하루'를 말하고, 사라지는 장면에서 동선의 역전이 일어난다. 이제껏 바다 쪽을 향하던 안나의 발걸음이 프레임 밖으로 튀어 나오며, 반대로 항상 바다를 조감하며 헛돌기만 하던 알렉산더의 움직임이 바다쪽으로 향한다. 죽음이 삶이 되고 삶이 죽음의 품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장면. 모든 것은 하나의 깨달음을 기축으로 전환된다.
 
'영원과 하루'라는 안나의 답변은 그래서 영화가 담고 있는 모든 질료적 특성과 형식적 특성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가는 유일한 출구가 된다. 정수리 끝에서부터 소름이 끼친다. 테마음악이 변주되고, 크레딧이 올라간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영화의 관객이 아니라, 수많은 알렉산더, 수많은 앙겔로풀로스가 된다. 형이상학의 언어가(!) 이해의 지평을 단숨에 넘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가는 체험. 영화의 가장 순수하고 기본적인 미덕이 '완성'되는 순간이다.<NomadIa>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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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1/13 [03:3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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