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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도덕경, 해석의 다양성
논술: 노자의 도덕경, 심리학적으로 이해하기
 
신정모라   기사입력  2004/11/03 [18:42]
노자 도덕경(道德經)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  

도덕경이란  도덕에 대한 책이 아니라,  진리 깨달음에 관한 책입니다. 
한자나 국어에서  용어의 개념 혹은  정확성 보다는   이해에 무게 중심을 두고자 했습니다. 여러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고 달리 해석된다는 것을 미리 말합니다.  예: 과학적 접근 방법, 심리학적 접근 방법,   구도적 접근 방법 기타 등등 -필자 주.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 (도가도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최근 다양하게 해석되면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노자 도덕경. 표지는 현암사에서 나온 노자 원전. 오강남 풀이의 도덕경이다.     © 현암사 2002

위 문장의 뜻은,  진리라고 인간이 인식하는 것도 마음의 산물이라서 영원성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非常道에  현상학적인 것과 영원성의 대립이 상징되어  녹아 있다)  뒷 구절은 앞의 것을 구체화시켜 놓고 있다.   진리-->마음-->언어 이런 식으로 되므로, 사람들의 인식이 항상성을 가지는 것은 어렵다.  즉,  비항상성의 인식을 표현하는 언어가 항상 같은 뜻일 수도 없다.


無名天地之時,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묘, 유명만물지모)
구별(차별)하지 않는  '무'의 세계는 깨달음의 영역이다.    현상계의 만물을  인식하는 '유',  즉 차별 의식은      마음(인식)의 영역이다.   어린아이가  자아가 생기기 전,   자연 그 자체로서 차별의식이 없다.  어린 아이 상태는 깨달은 사람과 비슷한 상태이다.   자아가 생기면서,  만물을 인식하고 구별하는 의식이 생기고  현상계(만물)를 진실처럼 믿게 된다.  

故常無慾以觀其妙,常有慾以觀其僥   (고 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고로,  욕심이 없으면 차별의식(자아)이  없어  실체(진리의 묘)가 저절로 드러난다.   반면에 욕심이 있으면(자아의 집착)  차별 인식으로  저절로 드러나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보이는 현상계를 실체라고  생각한다.   

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 (차양자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구별이 없고,  이 양자(욕심이 있고, 없고)가 같다.   생각 혹은 언어라는 것은  구별성에서 출발한 인식의  표출이다.     깨달은 사람이 언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인식을 가지고  현상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구별성 개념인)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를 사용한다 해도 정작  깨달은 사람이 뜻하는 것은  언어 너머, 언어를 초월한   심오한(검은 현) 진리에  기반 한다.  이 근원적이고 심오한    영원성의 실체에서 갖가지 현상계가 표출된다.

참고: 도올과 이경숙의 번역 

<도덕경 제1장>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無名天地之時,有名萬物之母,故常無慾以觀其妙,常有慾以觀其僥  ,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

< 김용옥 역>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를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 했을 뿐이다.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라고 한다. 가물코 또 가물토다.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는가!

<이경숙 역>
도(는 그 이름을 )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이름이) 꼭(항상)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이름으로 (어떤 것의)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꼭(항상)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고 (우리가)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름을 붙이기 전(도의 이전)에는 (천지지시의) 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묘함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붙인 후(도의 이후)에야 그것의 요(실상계의 모습)를 파악할 수 있느니라.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것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이름뿐이니 (도 이전의 세계와 도 이후의 세계가)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은 것이니 < 도와 도 이전의 무엇은 같은 것이니라> 도는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니(지금부터 그것을 말하려 하느니라)
 
* 필자는 페미니즘 연구서 '공자를 울린 여자', 동화 '내 마음의 미운 오리'의 저자입니다. 필자의 홈페이지 신정모라 문학서재 http://mora.zo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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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11/03 [18:4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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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4/29 [03:41] 수정 | 삭제
  • 참 뜻이 어렵군요. 도올님이나 이경숙님이나 다 해석이 어려운데요. 제 나름대로 해석을 해볼까요? 좀 엉뚱하게 해석하렵니다. 제 나름의 방식으로요. 웃지 마세요.


    도가 도로 통하는 것은 도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이다. 이름이 이름으로 통하는 것은 이름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인 것이다. 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모태라. 그러므로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한 것의 이치를 알고 욕심이 있으면 도리어 욕심 같은 것을 본다. 이 양자는 같으나 같지 아니하며 이것은 다른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같은 것을 '아득하다'라고 말한다. 아득하고 아득하도다! 묘한 것들은 이 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