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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저널리즘의 여왕, 아리아나 허핑턴
[인물 FOCUS] 인터넷 뉴스 혁명 <허핑톤포스트>, 한국에서 통할까?
 
김환표   기사입력  2014/04/02 [22:13]
“『허핑턴포스트』의 짧은 역사는 ‘인터넷 뉴스 혁명사’다. 인터넷이 주요 뉴스 플랫폼으로 떠오르면서 기존 매체들이 인터넷 영역으로 확장을 꾀하고, 수많은 인터넷 매체들이 탄생했지만 그만큼 성공한 사례는 없다.”1 온라인 저널리즘의 대명사로 각광받고 있는 『허핑턴포스트』에 대한 2013년 11월 11일자 『한겨레』의 평이다. 『허핑턴포스트』의 질주는 거침이 없다. 2011년 5월 『허핑턴포스트』의 방문자 수는 정통 언론의 마지막 보루로 평가받는 『뉴욕타임스』 홈페이지의 방문자 수를 추월했는데, 4월까지 미국에서 홈페이지 방문자 수가 『허핑턴포스트』보다 많은 기존 신문사 웹사이트는 『뉴욕타임스』뿐이었다!2
 
그럼에도 배가 덜 부른 것일까? 『허핑턴포스트』는 “전 지구적이지만 지역적으로 행동한다(be global and act local)”는 ‘글로벌 네트워크’ 전략 아래 2011년 5월 『허핑턴포스트 캐나다』를 시작으로 세계 곳곳의 미디어 시장에 적극 진출해 2013년 현재 미국·캐나다를 포함해 영국·프랑스·일본·스페인·이탈리아·마그레브(북아프리카)·독일 판 등을 서비스하고 있다. 2014년에는 『한겨레』와의 합작 법인인 『허핑턴포스트 코리아』를 통해 한국어판 인터넷 뉴스 서비스를 시작하기로 합의했다.3 1월 22일 경제연구기관인 베르그뤼앵 경영연구소(BIG)와 50대 50 합작 투자로 글로벌 디지털 매체 『월드포스트(The World Post)』를 창간했는데,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피에르 오미디아 이베이 창업자·월터 아이작슨 아스펜연구소 CEO 등이 편집위원으로,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등이 정기 기고자로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4

2005년 창간된 『허핑턴포스트』는 온라인 미디어 분야에서 구글과 같은 존재로 평가받는다. 인터넷 검색 엔진 분야에서 후발 주자로 출발했음에도 패권적 지위에 오른 구글처럼 역사가 일천한 『허핑턴포스트』 역시 기존 온라인 미디어를 저만치 따돌리고 온라인 미디어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5 예컨대 영국 일간지 『옵서버』는 『허핑턴포스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온라인 미디어로 꼽았다.6 온라인 미디어의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허핑턴포스트』를 보라는 말마저 등장했을 정도다. 외국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의 전문가들도 온라인 미디어의 롤 모델로 『허핑턴포스트』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허핑턴포스트 미디어그룹의 회장 겸 편집인인 아리아나 허핑턴은 블로거의 여왕, 새로운 미디어의 기수, 저널리즘의 미래를 보여준 인물로 평가받는다.7

허핑턴은 누구인가

1950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난 허핑턴은 11세 때 부모가 이혼을 하면서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허핑턴의 아버지는 나치 치하의 영국에서 저항신문을 펴낸 언론인이었으니, 허핑턴이 저널리스트였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허핑턴은 외국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캠브리지대학에서 토론 클럽으로 명성이 높던 ‘캠브리지 유니언’의 회장을 지냈는데, 이때 영국의 『더 타임스』 칼럼니스트 버나드 레빈을 만나 저술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 레빈이 사망했을 때 허핑턴은 그에 대해 “작가로서 멘토였으며 사상가로서 롤 모델이었다”고 회고했다.8

영국 BBC 방송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방송계에서 일하다가 1980년 미국으로 이주해 1986년 석유재벌 마이클 허핑턴과 결혼했다. 남편이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공화당)에 당선되면서 아리아나 허핑턴도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내조를 넘어서 독자적으로 정치 분석가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등 왕성한 사회 활동도 병행했다. 당시 허핑턴은 워싱턴의 정계 인사들과도 폭넓은 교분을 쌓았는데, 공화당 내에서도 ‘강경 보수’로 불리던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의 정치 활동을 적극 도왔을 만큼 이념적으로 상당한 보수주의자였다. 허핑턴의 정치적 야망은 대단했다. 1997년 남편과의 이혼도 정치적 야망 때문이었다. 남편이 양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혼했다는 설(說)도 있지만, 허핑턴은 결별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마이클은 유럽으로 떠나 배나 타며 즐기고 싶어 했지만 나는 내 인생을 더욱 상승시키고 글쓰기를 계속 하고 싶었다.”9

그런 야망은 정치 무대에 투신하는 연료로 쓰여 2003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무소속으로 직접 출마하기도 했다. 이때 영화 <터미네이터>의 주인공으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아널드 슈워제네거와 맞섰지만 선거일 직전 중도 포기했는데, 주지사 선거 패배는 『허핑턴포스트』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선거 자금 모집 과정에서 인터넷의 위력을 깨닫고 인터넷 신문을 창간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10 아메리카온라인(AOL)의 전 임원이었던 케네스 레러는 허핑턴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미디어 블로그를 만들기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곧바로 준비에 들어가 2005년 온라인 미디어를 창간했는데, 이게 바로 『허핑턴포스트』다. 초기 투자금은 100만 달러로,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을 레러가 투자했다. 이때 허핑턴의 나이 55세였다.11

『허핑턴포스트』는 미디어 블로그의 효시격으로, 민주당 정치인들에 대한 폭로성 기사로 유명한 보수 인터넷 매체인 『드러지리포트』를 벤치마킹하며 출발했지만 보수 성향인 『드러지리포트』와 반대로 진보 성향을 표방했다. 초기만 하더라도 “살아남기 힘들 수밖에 없는 실패작”이라는 혹평에 시달렸다는데,12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인터넷 언론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상황이었을뿐더러 52세에 블로그 세계에 눈을 떴을 정도로 디지털에 대한 허핑턴의 지식도 일천했기 때문이다.13 하지만 이후의 역사가 말해주듯, 세상은 허핑턴의 손을 들어주었다.
 
『허핑턴포스트』는 2008년 미국 대선에서 사상 최초로 대선 주자들의 온라인 토론회를 열었는데, 이를 계기로 순 방문자 수가 500만 명을 돌파하더니 2009년 9월에는 미국의 유력지 『워싱턴포스트』와 『로스앤젤레스타임스』를 월 순 방문자 수에서 따돌리는 기염을 토했다.14 2009년 미국에서는 정치 블로그가 미국 정계를 뒤흔들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는데, 그 중심에 『허핑턴포스트』가 있었다. 『허핑턴포스트』가 이렇게 빠른 시간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허핑턴포스트』의 성공 비결

첫째, 허핑턴의 친화력과 사교술이다. 이승선은 “허핑턴은 진보 진영의 저명한 논객들을 고료도 거의 주지 않고 블로거 필진으로 대거 동원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것이 『허핑턴포스트』가 급성장한 최대 비결이다”고 말했는데, 이는 과장이 아니다. 앞서 본 것처럼, 창간 초기 『허핑턴포스트』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허핑턴의 네트워크가 보태지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찰스 영국 황태자, 존 케리 미국 국무 장관 등 정치인은 물론이고 세계적 석학 놈 촘스키,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 저널리스트 월터 크롱카이트 등 허핑턴이 ‘창조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250명의 세계 유명인들이 무료 봉사로 글을 올리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15 허핑턴의 이런 넓은 오지랖은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권선희는 “허핑턴이 놀라운 매력으로 쟁쟁한 인맥을 자랑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탁월한 사교술 덕분이다. 아리아나의 엄마 엘리는 전혀 몰랐던 사람도 눈 깜짝할 사이에 절친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뛰어난 사교술을 자랑했다”고 말한다.16

둘째, 온라인 저널리즘에 전통 저널리즘의 장점을 결합한 공세적인 확장이다. 『허핑턴포스트』는 초기에 유명 필자들의 블로그에 많이 의존하고 다른 매체 기사들을 1차 자료로 활용해 “미디어가 아니라 뉴스 수집가”라는 비아냥을 들었다는데, 그런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허핑턴은 온라인 블로그 미디어의 강점인 속보성에 전통 미디어의 강점인 심층 취재를 결합시켰다. 전통 언론사의 유명 언론인 몇몇을 스카우트해 심층 취재 기사를 늘리고 기사의 정확성을 강화하고 나선 허핑턴의 전략은 크게 적중해 2007년 일본의 소프트뱅크가 500만 달러(약 46억 원)를 투자하기도 했다.17 베테랑 기자를 적극 영입해 논평뿐만 아니라 보도 부문에서도 ‘깊이’를 자랑하기 시작하자 2009년 4월부터 『허핑턴포스트』는 자사를 소개할 때 ‘뉴스 블로그’라는 용어 대신 ‘인터넷 신문’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18

셋째, 소셜 저널리즘(Social Journalism)이다. 2013년 11월 현재 『허핑턴포스트』의 월간 순 방문자 수는 미국에서만 데스크톱과 모바일 기기를 합쳐 6,000만 명을 넘나들고 페이지뷰는 6억 건이 넘는다. 또 미국 안팎에서 글을 싣는 블로거는 5만 명까지 늘었는데, 이는 일찍부터 소셜 저널리즘을 구현한 전략이 낳은 성과다.19 소셜 저널리즘은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블로그 등 뉴스를 유통하는 미디어의 힘을 활용한 취재 행위를 말한다. 『허핑턴포스트』의 소셜 저널리즘 전략은 2009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바 ‘허프포스트 소셜 뉴스’ 서비스를 통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이용자가 온라인상 친구와 교류하면서 뉴스에 대한 관여도를 높일 수 있도록 했는데, 속된 말로 대박이 났다. 이를 계기로 급속하게 성장했으니 말이다.20 소셜 저널리즘은 『허핑턴포스트』를 상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핑턴포스트』의 소셜 저널리즘 전략

『허핑턴포스트』가 추구하는 소셜 저널리즘의 핵심은 이용자와의 쌍방향성을 극대화한 점에 있다. 이용자와의 쌍방향성이 소셜 저널리즘의 고갱이니만큼 이를 ‘차별화 전략’으로 강조하는 것은 하나마나 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허핑턴포스트』의 전략이 주도면밀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봉현은 “허핑턴의 ‘유저 참여형 소셜 뉴스 전략’은 한마디로 물고기가 놀도록 ‘인공어초’를 넣은 것과 같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독자에게 소셜 뉴스라는 화면을 따로 제공해 댓글을 매개로 친구를 모으고, 기존 소셜 네트워크의 친구를 끌어오고 대화할 수 있도록 했다. 또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와 연동해 댓글을 쓰고 누르면 바로 자신의 페이지에 게시된다. 이는 다른 언론사도 하는 것이지만 허핑턴에서는 댓글이 우선이고 뉴스가 참고자료인 점이 다르다.”21

웹사이트의 디자인 역시 이용자 중심이다. 대부분의 온라인 뉴스 사이트는 뉴스가 중심이지만, 『허핑턴포스트』는 눈에 잘 띄는 왼쪽에 블로그, 가운데에 뉴스, 오른쪽에 생활·엔터테인먼트를 배치하고 있다.22 물론 이는 팀 블로그에 가까운 『허핑턴포스트』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용자의 쌍방향성을 최대한 구현하겠다는 전략이 낳은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소셜 뉴스 서비스를 더욱 활성화하고, 유저의 참여를 한층 장려하기 위해 게임화(Gamification) 기법도 도입하고 있다. ‘게임(Game)’과 ‘화(Fication)’를 합한 말인 게임화는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미·보상·경쟁 등의 요소를 다른 분야에 적용시켜 사람들이 재미없어 하거나 혹은 번거로워 하는 일을 보다 즐겁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기법이다. 대표적인 게 포스퀘어(Foursquare)에서 제공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배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제공하는 배지는 다수의 코멘트를 쓰거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을 사용해 『허핑턴포스트』의 기사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주는 ‘슈퍼유저(Super-user) 배지’, 팬이나 팔로어가 많은 사람에게 주는 ‘네트워커(Networker) 배지’, 부적절한 코멘트를 신고하는 사람에게 주는 ‘조정자(Moderator) 배지’ 등 3가지인데, 소셜 뉴스에 이용자 간의 경쟁 심리와 인정투쟁 심리 등을 결합시킴으로써 독자들이 스스로 정보를 생산·공유하도록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23

『허핑턴포스트』가 2012년 8월부터 제공하고 있는 동영상 서비스 ‘허핑턴포스트 라이브’ 역시 유저와의 쌍방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최원형은 “인터넷 동영상을 차세대 미디어의 핵심으로 보는 곳은 『허핑턴포스트』만이 아니다. CNN과 BBC 같은 방송사뿐 아니라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스』 같은 전통적 종이 매체들도 앞다투어 생방송 동영상을 제공하고 있다”면서 “그렇지만 『허핑턴포스트』의 동영상 전략에는 남다른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블로그와 댓글 등 쌍방향 소통에 초점을 맞춘 기존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하는 점이 눈에 띈다”고 했다. ‘허핑턴포스트 라이브’에서 이용자들은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이메일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쉽게 방송에 참여할 수 있는데, 이를 두고 『허핑턴포스트』의 창립 편집자인 로이 세코프는 “CNN이 유튜브를 만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24 소셜 저널리즘을 통한 수익도 적지 않게 올리고 있다. 예컨대 2010년 『허핑턴포스트』는 주요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트위터의 리스트 기능을 활용해 ‘라이브 트위터’라는 코너를 개설해 아이티 대지진과 미국전자박람회(CES) 2010 등 이슈에 기민하게 대응했는데, 이슈 때마다 개설되는 이 페이지 상단에 광고를 게재해 수익을 거두었다.25

허핑턴을 둘러싼 논란

온라인 저널리즘의 대명사로 떠올랐지만 허핑턴을 둘러싼 논란도 적지 않게 일고 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일까? 우선 『허핑턴포스트』의 급속한 성장을 보는 전통 미디어의 시기와 질투가 적잖게 작용하고 있다. 전통 미디어는 허핑턴이 자신들이 힘들게 작성한 뉴스 콘텐츠를 가져다가 살짝 재포장해 판매하는 ‘언론의 기생충’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예컨대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사설에서 『허핑턴포스트』를 향해 “해적들이 지휘하고 노예들이 노를 젓는 갤리선”이라고 폄훼했다.26

두 번째는 허핑턴의 정치적 변절이다. 앞서 본 것처럼, 이념적으로 강경 보수주의자였던 허핑턴은 『허핑턴포스트』 창간 전 갑자기 진보 성향으로 탈바꿈했다. 허핑턴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민간 영역의 한계를 인식하고 정부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한 것이” 변화의 이유라고 말했는데,27 비판론자들은 허핑턴의 정치적 변절은 성공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워싱턴포스트』의 데이나 밀뱅크는 “이념적, 사상적 스펙트럼이 무엇이든 다음에 유행할 아이디어를 무작정 쫓아다니는 방법으로” 허핑턴은 “기업가이자 작가로서 우리 시대에 탁월한 입지를 차지했다”고 비꼬았다.28

2011년 2월 AOL이 3억 1,500만 달러(3,490억 원)에 『허핑턴포스트』를 인수하면서 ‘이념의 장사꾼’이라는 오명은 더욱 확산되었다. AOL은 “이번 인수로 1억 1,700만 명의 미국 독자와 2억 7,000만 명의 전 세계 이용자를 확보했다”며 “『허핑턴포스트』의 고품질 뉴스와 AOL이 보유한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콘텐츠가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지만,29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2011년 2월 9일 ‘AOL-허핑턴’의 인수 합병을 분석한 기사에서 허핑턴이 진보 이념을 팔아 대박을 노렸고, AOL의 CEO 팀 암스트롱이 여기에 ‘봉’ 노릇을 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허핑턴은 AOL에 인수된 이후의 『허핑턴포스트』가 뒤죽박죽 잡탕의 저질 매체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만큼 똑똑한 여자이기에, 거의 현금으로 매각 대금을 받아냈고, AOL은 『허핑턴포스트』를 인수하면서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할 바보 같은 거래에 동의했다는 것이다.30

비판은 『허핑턴포스트』에 무료로 글을 게시해온 블로거들에게서도 나왔다. 2005년부터 『허핑턴포스트』에 글을 게시해온 언론인 조너선 태시니는 2011년 4월 뉴욕시 맨해튼연방법원에 제출한 소장에서 『허핑턴포스트』가 블로거들에게 무료 칼럼을 게시하게 해 1억 5,000만 달러를 불공정하게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태시니는 “『허핑턴포스트』는 콘텐츠를 제공한 블로거들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이번 소송을 다른 블로거들까지 대표하는 집단소송으로 바꾸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미국과 캐나다, 푸에르토리코 등의 언론 종사자 3만 4,000명을 대표하는 ‘뉴스페이퍼 길드’라는 단체는 『허핑턴포스트』의 AOL 인수 이후 『허핑턴포스트』에 대한 무료 기사 제공을 중지한다고 말했다.31

진보를 팔아 대박을 노려온 이념의 장사꾼이라는 세간의 비판에 대해 허핑턴은 개의치 않겠다는 듯 보인다. 허핑턴은 “왜 쓸데없는 일에 내 에너지를 낭비해야 하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의 비판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다. 그런 미친 짓거리 같은 것들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둔다면 뭔가 당신이 잘못돼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비판 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32

『허핑턴포스트』는 ‘라이프스타일 공론장’을 꿈꾸는가

허핑턴은 『허핑턴포스트』를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들이 모여 정치와 사회, 예술 등을 토론하며 여론을 형성했던 ‘아고라(광장)’를 온라인에 옮겨놓은 것으로 비유한다.33 그래서일까. 허핑턴은 “나는 그리스 유전자를 지녔다”며 “공론장을 지구촌으로 확산시키고 싶다”고 말한다. 허핑턴이 꿈꾸는 ‘지구촌 공론장’은 어떤 모습이 될까? 예측하기 어렵지만 『허핑턴포스트』의 공론장은 정치·경제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의미의 뉴스 공론장보다는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공론장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실 이는 『허핑턴포스트』의 가장 중요한 성공 비결이기도 하다. 허핑턴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2014년 허핑턴은 “처음 『허핑턴포스트』가 출범했을 때는 정치 관련 뉴스가 주였지만 현재는 주류 뉴스는 물론 여성, 결혼, 아동, 스타일, 연예 등 70여 개 섹션을 별도로 만들어 다룰 정도로 거의 안 다루는 주제가 없다”며 “바로 이런 점이 『허핑턴포스트』의 DNA이고 독창성”이라고 했다.34 허핑턴은 다른 자리에서도 『허핑턴포스트』의 라이프스타일 전략을 자주 강조했다. “처음부터 『허핑턴포스트』는 음료수 자판기 앞과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나눌 법한 정치·예술·책·음식 등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온라인에서 하도록 돕는 것이었다.”35 “난 다종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모아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긴다. 『허핑턴포스트』의 구상은 정치, 책, 예술, 음악, 음식, 성에 관한 이런 류의 대화를 사이버공간에 모아놓고 뉴스와 오피니언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원스톱 사이트를 만드는 것이다.”36

비판론자들은 『허핑턴포스트』가 좌우 균형을 가장한 좌편향 매체라고 지적하는데, 그런 비판이 힘을 얻지 못하는 것도 『허핑턴포스트』가 구현하고 있는 라이프스타일 전략 때문은 아닐까? 라이프스타일 공론장에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적절한가? 그렇지 않다. 취향과 라이프스타일 앞에서 이념은 무기력하다. 이념도 취향이나 라이프스타일에 포함시킬 수 있겠지만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지 이념이 아니다. 미국 정계 등에서 『허핑턴포스트』를 자유주의(리버럴) 또는 친민주당 성향이라고 보는 이념적 분류법에 대해 허핑턴이 “기존 주류 매체는 모든 사안을 좌파나 우파의 필터로 보려고만 한다”며 역공을 취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37 ‘라이프스타일 공론장’을 무기로 한 『허핑턴포스트』의 확장 전략이 어디까지 진화할 것인지 지켜보는 재미는 쏠쏠할 게 틀림없다.


1) 이본영, 「각계 필진만 5만 명…댓글·SNS 통해 ‘열성 독자’ 키워」, 『한겨레』, 2013년 11월 11일
2) 황규인, 「『허핑턴포스트』 > 『NYT』 홈피…‘신문 최후보루’ 『NYT』 추월」, 『동아일보』, 2011년 6월 11일
3) 박현, 「『한겨레』 『허핑턴포스트』 손잡다」, 『한겨레』, 2013년 11월 10일; 최원형, 「『허핑턴 코리아』 세계·한국을 오가는 빠른 창이 열린다」, 『한겨레』, 2013년 11월 11일
4) 김수진, 「『허핑턴포스트』, 기고 중심 온라인매체 『월드 포스트』 창간」, 『조선일보』, 2014년 1월 9일
5) 강태호, 「인터넷미디어의 미래 ‘허포’를 보라」, 『한겨레』, 2010년 7월 29일
6) 김종화, 「인터넷신문 호황 끝, ‘조정기’ 어떻게 버티나」, 『미디어오늘』, 2009년 7월 8일
7) 오애리, 「글로벌 미디어 ‘빅뱅’」, 『문화일보』, 2011년 2월 8일
8) 「Arianna Huffington」, 『Wikipedia』
9) 송선옥, 「AOL 열쇠 쥔 ‘허핑턴’은 누구…최고 미디어 블로그 성공 신화 이끈 ‘이카루스의 후예’ 아리아나 허핑턴」, 『머니투데이』, 2011년 2월 8일
10) 박현, 「보수논객 활동하다 진보로 전향…아버지는 나치 치하에서 저항신문」, 『한겨레』, 2013년 11월 12일
11) 권성희, 「환갑의 이혼녀, 허핑턴의 성공엔 남자가 있었다」, 『머니투데이』, 2011년 2월 9일
12) 이진영, 「블로거 2명과 『허핑턴포스트』 만든 담대女 허핑턴」, 『동아일보』, 2012년 5월 5일
13) 「『허핑턴포스트』 출범 6년 만에 3,476억 원 ‘대박’ 낸 사연」, 『매일경제』, 2011년 2월 10일
14) 이본영, 「블로그와 뉴스의 만남…‘시민 참여 저널리즘’ 이끌다」, 『한겨레』, 2013년 11월 11일
15) 「『허핑턴포스트』 출범 6년 만에 3,476억 원 ‘대박’ 낸 사연」, 『매일경제』, 2011년 2월 10일
16) 권선희, 앞의 기사
17) 이민주, 「美 블로그 미디어의 진화 심층 취재·정확성 제고 등 정통 미디어 벤치마킹 활발」, 『한국일보』, 2007년 10월 2일
18) 정미경, 「美 미디어 여걸 2명 인터넷 뉴스 ‘쥐락펴락’」, 『동아일보』, 2010년 11월 4일
19) 이본영, 「블로그와 뉴스의 만남…‘시민 참여 저널리즘’ 이끌다」, 『한겨레』, 2013년 11월 11일
20) 최성진, 「‘이용자 참여형 소셜 뉴스 전략’ 눈길」, 『한겨레』, 2011년 7월 5일, 28면
21) 이봉현, 「“표현은 오락…사람들은 정보 활동 참여하고 싶어한다”」, 『한겨레』, 2012년 6월 5일
22) 박현, 「“한국인들이 세계에 직접 의사 표현할 플랫폼 제공할 것”」, 『한겨레』, 2013년 11월 12일
23) 신현규, 「허핑턴포스트 미디어그룹 회장 ‘아리아나 허핑턴’…“애덤 스미스를 다시 공부할 때”」, 『매일경제 Luxmen』, 제18호(2012년 3월)
24) 최원형, 「짧은 동영상+SNS 참여 ‘허핑턴 라이브’ 4억 4천만 건 시청」, 『한겨레』, 2013년 11월 12일
25) 이성규, 「해외 언론 트위터 활용법: [기고] 전담 에디터 두고 리얼타임 뉴스 강화…팔로워 매입」, 『미디어오늘』, 2010년 1월 21일
26) 이본영, 「블로그와 뉴스의 만남…‘시민 참여 저널리즘’ 이끌다」, 『한겨레』, 2013년 11월 11일
27) 박현, 「“한국인들이 세계에 직접 의사 표현할 플랫폼 제공할 것”」, 『한겨레』, 2013년 11월 12일
28) 권성희, 앞의 기사; 윤현, 「『허핑턴포스트』 돌풍, 유럽으로 이어질까 프랑스어 판 『르 허핑턴포스트』 출범…초대 편집장에 안 생클레르」, 『오마이뉴스』, 2012년 1월 24일
29) 김동욱, 「AOL, 美 인터넷 뉴스 1위 『허핑턴포스트』 인수」, 『한국경제』, 2011년 2월 8일
30) 이승선, 「진보 팔아 대박 친 『허핑턴포스트』 창업주의 실체 『FT』 “『뉴욕 타임스』가 아니라 저질 거대 매체 될 것”」, 『프레시안』, 2011년 2월 10일
31) 「무료 칼럼 블로거, 『허핑턴포스트』 상대 소송」, 『경향신문』, 2011년 4월 13일
32) 권성희, 앞의 기사; 윤현, 앞의 기사
33) 박현, 「“한국인들이 세계에 직접 의사 표현할 플랫폼 제공할 것”」, 『한겨레』, 2013년 11월 12일
34) 박봉권, 「[2014 신년기획] 月 8,600만 명 방문 『허핑턴포스트』는…뉴스 섹션 70개…독자와 쌍방향 소통」, 『매일경제』, 2014년 1월 1일
35) 박현, 「“한국인들이 세계에 직접 의사 표현할 플랫폼 제공할 것”」, 『한겨레』, 2013년 11월 12일
36) 이본영, 「각계 필진만 5만 명…댓글·SNS 통해 ‘열성 독자’ 키워」, 『한겨레』, 2013년 11월 11일
37) 이본영, 「블로그와 뉴스의 만남…‘시민 참여 저널리즘’ 이끌다」, 『한겨레』, 2013년 11월 11일
 
* 글쓴이는 『트렌드 지식사전』 편저자입니다.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14년 3월 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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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4/02 [22:1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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