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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인격신’이라는 교리적 전제에 가두지 말라
[한국교회 개혁 제안5]원시 유일신 신앙 극복하여 이웃종교와 상생하라
 
류상태   기사입력  2011/01/01 [10:27]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이기에 어느 정도 배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진정한 유일신 종교라면 배타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1. 유일신은 특정 종교인에게만 계시될 수 없다

유일신교란 무엇입니까? 유일신관의 핵심 개념은 글자 그대로 ‘신은 오직 하나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유일신은 어느 특정 종교인들에게만 계시되거나 그들과만 관계를 맺는 편협하고 지엽적이며 유한한 존재일 수 없습니다. 즉 하느님의 유일성은 전체 포용으로써의 ‘오직 하나(唯一)’이며, 모든 막힌 담을 허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크게 품으시는 ‘궁극 실재(ultimate-reality)’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유일하신 참 하느님이 기독교만 인정하셨고, 기독교를 통해서만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편협한 원시 유일신 신앙이 인류 역사에 수많은 갈등을 만들어냈습니다.

기독교 세계가 오랫동안 배타와 독선에 빠져있었던 이유는, “성서의 모든 기록은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므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며, 또한 절대 권위를 부여받은 기독교 성서가 자기 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확신하는 기독교인들의 신념을 확고하게 뒷받침하는 기록자들의 고백을 수없이 많이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의 복음서 14:6)라는 문장과 “이분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사도행전 4:12)라는 고백의 문장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2. 성서의 언어는 ‘객관적 진술’이 아닌 ‘고백의 언어’

제 글에서 여러 번 반복했지만, 너무나 중요하기에 여기서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성서의 언어는 고백의 언어라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나 사도행전 기자가 그렇게 전하고 고백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객관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애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진실로 고백한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이 성서를 열심히 읽는 것은 좋으나 성서의 언어가 고백의 언어라는 사실은 잊지 말고 읽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므로 몇 가지 예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기독교 성서의 출애굽기(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에 관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장자를 모두 죽이셨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한밤중에 야훼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맏아들을 모조리 쳐죽이셨다. 왕위에 오를 파라오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땅굴에 갇힌 포로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에 이르기까지 다 쳐죽이셨다.” (출애굽기 12:29)

“그 때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야훼께서는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실 수밖에 없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까지도 처음 난 것은 모조리 죽이셨다.” (출애굽기 13:15)

그러나 성서의 이 기록은 당시 사람들의 고백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또한 파라오 한 사람의 고집을 꺾기 위해서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을 죽이는 신이라면 인류 전체의 신으로 경배받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요? 혹 그가 이스라엘 민족만의 수호신에 그친다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편협한 신으로 지탄받아 마땅하지 않을까요?

성서의 모든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그때는 ‘율법의 시대’였기에 ‘복음의 시대’인 지금과는 다르며, 하느님께서 지금은 그런 일을 하시지 않는다고 자위하는 기독교 보수 신앙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 때 그 아이의 부모였다면, 그래도 여전히 하느님을 ‘정의와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성서는 “야훼께서는 파라오로 하여금 또 고집을 부리게 하시었다.”(출애굽기 10:27)고 기록함으로써 하느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믿게 되면 야훼는 파라오의 마음을 그렇게 조종해놓고는 신의 섭리에 거역할 능력이 없는 불쌍한 그에게 책임을 묻고 벌을 주는 파렴치하고 괴팍한 성격을 가진 신이 되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섬겼다는 이유로 모세가 레위족속 사람들에게 살인면허를 주어 자기 동족 삼천 명을 몰살시켰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성서기자는 이 사건을 ‘야훼께서 하신 일’이라고 명백히 기록하고 있습니다.(출애굽기 32:35, “그 뒤에 야훼께서는 백성이 아론을 시켜 수송아지를 만든 데 대한 벌을 내리셨다.”) 이 기록은 신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지 않으면 이방민족 뿐 아니라 자기 백성들도 가차없이 죽이는 신의 잔인무도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납고 반인륜적인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과 기록자의 신인식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의 기록은 당시 사람들과 기록자가 하느님을 그런 분으로 믿고 해석했음을 반영하는 것이지 그 기록 자체가 객관적 사실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서가 기록된 시대는 2~3천 년 전입니다. 2천 년 전 사람들은 그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도 그런 편협하고 반인륜적인 기록을 “성서는 오류가 없다”는 정통 교리 때문에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믿는 것은 2천 년 전의 원시신앙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입니다.
 
3. 하느님을 ‘인격신’이라는 교리적 전제에 가두지 말라

다원화된 사회에서 여러 이웃종교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교리에 의한 배타적 유일신 신앙’을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기독교 전통이 고백하는 ‘유일하신 참 하느님’은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인류의 아름다운 종교 유산과 신념체계를 모두 부정하는 ‘배타적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자’이며 우주만물을 크게 품어주시는 ‘궁극 실재’로서의 하느님입니다. 그런 유일신 신앙에는 배타성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그 동안 설정해 놓았던 모든 교리적 전제를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만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는 그 마지막 하나의 교리까지 다 내려놓고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처음부터 다시 재구축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모순들이 보이게 될 것이며, “이것만은” 이라며 그토록 소중히 붙들었던 그것이 바로 우상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진정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이웃종교와 더불어 상생 발전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은 인격’이라는 전제까지도 돌파되어야 합니다. 그 전제에 매인 착한 기독교인들이 “하느님은 사람을 심판하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착한(?) 결론을 내리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신으로 믿고, 성서의 기록을 오류가 없는 신의 말씀으로 믿게 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성서가 가진 기록상의 오류와 한계뿐 아니라 기록자의 의도적인 왜곡에도 저항할 힘을 잃어버린 채 이성이 매몰된 폭력적 종교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구절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엘리사는 그 곳을 떠나 베델로 올라갔다. 그가 베델로 가는 도중에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 하며 놀려대었다. 엘리사는 돌아서서 아이들을 보며 야훼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암곰 두 마리가 숲에서 나와 아이들 사십이 명을 찢어 죽였다.” (열왕기하 2:23~24)

이 글에는 신에 대한 원시적 인식 내지는 기록자의 의도적인 왜곡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 중에는 이 글마저도 ‘신의 절대 권위에 의해 기록된 성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 기록에 의해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놀려댔다는 이유만으로 철없는 수십 명의 아이들을 곰을 보내 찢어 죽이는 잔인무도한 하느님에 대해 아무런 저항 없이 순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그대로 오늘날의 ‘목사’와 일치시켜 교회 안팎으로 범죄를 저지른 일부 파렴치한 목사들이 자신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내세우며 불가침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는 웃지못할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을 그런 신으로 인식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은 물론이며 기독교인 전체에 대한 기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말이 신을 믿는다면 그 신은 말을 닮았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이 사람을 닮았다는 원시신앙의 전제를 비꼬는 말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인격’이라는 말을 신에 대입하면 그 순간 하느님은 우리가 규정한 그 ‘인격’ 속에 갇힐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느님은 ‘사람의 격(人格)’을 가진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격(神格)’을 가진 분이며, ‘인격적인 분’이 아니라 ‘초인격적인 그 무엇’입니다. 인격의 범위와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격’이라는 교리적 전제도 돌파되어야 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제 우리는 ‘하느님은 누구신가?(Who is God?)’라고만 묻지 말고 ‘하느님은 무엇인가?(What is God?)’라고도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물을 수 있다면 하느님을 더욱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격’이라는 개념은 신성의 신비와 독특성을 우리의 경험과 논리로 설명하기 위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서 ‘인격’이나 ‘하느님 아버지’라는 표현은 적절하고 아름다운 말일 수 있지만, 그 용어를 절대화하게 되면, 하느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 안에 갇혀버리고 말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매여서는 안될 개념과 규정에 매여 틀을 만들고, 그 틀 속에 우리의 신앙과 삶, 심지어 하느님까지 모두 구겨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잔을 비우지 않고는 새 술을 담을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도 이제는 비우고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과 구원의 길에 대해, 또한 신과 그 섭리에 대해 지금까지 규정했던 모든 교리의 굴레와 전제를 돌파하고 뛰어넘지 않으면 21세기에 기독교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 본문은 격월간지 <공동선> 2011년 1+2월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하고 보완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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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1/01 [10:2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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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ter2333 2011/02/09 [23:27] 수정 | 삭제
  • 성경을 직해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지 리얼리티가 없기 때문에 성경은 가치가 없다라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리얼리티를 찾아보기 힘든 구절이 대부분이지만, 그렇다고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글에서도 말씀하셨듯이 고백과 의미의 언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잘못된 것이지 그 고백과 의미의 언어를 시대정신을 가지고, 호기심이나 의심을 가지고 물음을 던지며 읽는다면 이 리얼한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책이 되는 것입니다. 리얼리티가 없기 때문에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리얼리티 보다는 의미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비단 성경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경전들이 그렇습니다.
  • 다물인 2011/01/07 [06:07] 수정 | 삭제
  • 어렵게 풀이했네..
    인간의 문명이란 무엇인가? 문자가 아닐까? 고대문자가 발달해서 서술적인 문자로 진화되기 까지, 십계명이니 천부경이니 하는 문자들이, 문자신비주의의 틀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게 한다.
    이미 몇천년이 지난것들에, 연연하는 그 무지함이 아쉽다. 당대에는 효과적인 메세지였거나 정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현재에까지 끌고 들이는, 역사의 왜곡이 너무 심하다. 그래서 인간문명 전체가 지금 아주 심각한 리얼리티를 상실하고 있다, 종교 때문에, 리얼리 없는 문자신비주의에 빠져서 언제까지 우려먹을 것인가? 종교인이나 무속인들은, 천기누설한답시고 복음을 전합답시고, 리얼리티를 상실하는 문명이 아닌가? 지금 차라리 모든 미디어가 과거의 종교처럼 인간의 생할을 지배하고 있지 않는가? 거기서 새로운 룰이 만들어지고 있다. 좀 전까지는 무슨 언론인이라는 좀 특권화된 면이 대세였지만, 지금은 네티즌이라는 사방팔방에서 미디어의 주체들이 설치고 있을 만큼, 새로운 규칙이 생기는 것은, 정해진 육법이 아니라, 새롭게 형성되는 사람들간의 소통에서 오는 규칙인다. 그것이 곧 자유에 바탕을 둔 규칙이라면, 지금은 기독교니 불교니 이슬람교니 하는 것보다는 자유교가 대세인것 같다. 이런 자유를 조금이라도 배제하려는 시도는 역시 이데올로기적인 음모로 보인다. 모든 종교의 규칙자들이 자유인들을 억압하는 꼴이 된다. 초기 기독교는 우리민족에게 예수를 맏어라 그러면 해방될거라고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대승주의에 입각한 살림차리기 아닌가 싶다. 거대해진 교회들의 자본을 보면서..그것을 종교자본이라고 하자면, 엄청난 것이다. 거기에 암투가 없을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