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상태의 참예수를 찾아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개신교 봉은사 무례, 배타적 교리가 문제
[한국교회 개혁 제안4] 예수 재해석하여 원시 교리의 감옥에서 해방시켜라
 
류상태   기사입력  2010/11/07 [15:07]
1. 개신교 청년들의 봉은사 무례, 배타적 교리에 근본 원인이 있다

얼마 전, 봉은사에서 있었던 개신교인들의 무례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몇몇 기독 청년들이 봉은사에서 저지른 무례한 행위에 대해 지도 목사가 찾아가 사죄하고 주지스님이 사과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번 사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개신교인으로서 너무나 부끄럽고 다시는 이런 불미스런 일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며, 수없이 반복되는 기독교인의 무례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불심으로 포용해주신 명진스님과 봉은사 관계자들, 또한 이 일로 마음이 아프셨을 모든 불자님들께 마음 깊이 사죄드립니다.

도대체 왜 이런 어리석고 무모한 언행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일까요?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기독교인들의 무례와 독선의 뿌리에는 배타적인 교리가 있으며, 이것은 기독교의 중심 문제이지 결코 '몰지각한 일부 기독교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개신교가 우리 사회에 일으키는 여러 갈등의 중심에는 지난 이천년 동안 간직되어 온 이른바 '정통 보수' 교리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에 대한 재해석이 없이는 이웃종교에 대한 기독교인의 무례한 언행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오늘날 개신교회가 겪고 있는 총체적 위기와 그로 인한 사회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혹자는 교회조직개혁과 도덕성회복운동으로 한국 교회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교회조직의 부패와 기독교인의 일탈은 표피현상일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부 목회자들의 금전적 비리나 윤리적 탈선, 이웃종교와 문화를 존중하지 않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기독교 전도자들의 공격적 전도행태가 개인의 도덕성과 무관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도덕적 긴장에서 해체되도록 만든 보다 깊은 원인을 찾아보면 역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에 닿아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2. 예수는 기득권에 저항한 혁명가였다

예수는 그리스도(구세주)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본질상 신의 성품을 가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인격이라는 고백은 기독교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예수에 대한 해석을 근본적으로 달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는 어떤 이념이나 교리도 인간을 억누르고 통제할 권리가 없다며 자유와 해방의 권리를 선언한, 또한 자신은 물론 자연을 비롯하여 존재하는 모든 이웃을 하늘 아버지의 딸아들로 인식하고 무한한 자유를 구가한 멋지고 호방한 젊은이였습니다. 또한 청년 예수는 깊은 사색과 명상을 즐긴 영성가였고 따뜻하고 섬세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불의를 보면 분노하고 거친 욕설도 불사하는 불같은 성격의 혁명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안타깝고 불행하게도 사회 질서를 뒤흔들었다는 죄목으로 잔혹한 처형을 당했습니다.

예수의 육신은 이렇게 죽었으나 그의 아름다운 정신은 죽을 수 없었습니다. 그를 사랑하고 따르던 제자들의 마음과 삶 속에 부활한 예수의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었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전하는 사람의 생각과 해석이 첨가되었습니다. 전승을 타고 되살아난 예수는 어느새 민중의 영웅이 되었으며, 그를 흠모하고 따르던 사람들의 모임은 여러 동아리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조직체로서의 초대교회가 탄생된 것입니다.

예수처럼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스승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현실의 어떤 벽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가 스며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과 삶으로 뚜렷하게 보여주신 이정표를 따라 살았습니다. 그것은 신분에 대한 차별과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고 억누르는 모든 전통과 압제를 돌파하는 역동적이고 신나는 삶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마침내 천국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경험한 천국은 죽은 후에나 갈 수 있는 미래의 천국이 아니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현재적인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가 죽은 뒤 20~30년이 지난 후, 사람들은 그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삶의 이야기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의 이야기가 전승 과정을 거쳐 기록의 단계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수많은 전승들 가운데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그 진위를 가려내기 어려웠습니다.

어떤 자료는 그의 영웅담에 치중한 나머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어떤 자료는 영웅은커녕 너무나 인간적인 연약한 모습으로 묘사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서기자들(비록 자기의 글이 거룩한 책으로 편집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은 이미 신의 아들로, 한 종교의 숭고한 창시자로 고백되기 시작한 인물에 대한 자료를 자기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무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은 서로 모순되는 자료들이라도 대중의 공감을 얻는 내용은 기록에 담았습니다.

3. 예수, '따라야 할 모범'에서 '믿어야 할 대상'으로 바뀌다

한편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 그러니까 예수가 죽은 뒤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아서 매우 영리하고 독특한 학자가 예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그의 글은 당시 유력한 교회들에게 편지로 전해졌습니다.

유대인의 혈통과 로마인의 시민권을 아울러 갖고 있던 사도 바울은 유대 전통과 그리스 철학에 근거하여 예수를 새롭게 해석했으며 세련된 문체와 논리 정연한 글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사람과 세상을 사랑한 진정한 인본주의자이며 불의한 세계를 개혁하고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던 예수는 사도 바울에 의해 매우 다른 모습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은 억울하고 안타까운 비극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속사의 정점이며 죄와 악에 대한 영원하고 궁극적인 승리였습니다.

복음서보다 20여 년이나 앞서 기록된 바울의 가르침은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에 더없이 쉽고 만족한 것이었습니다. 예수처럼 처절하게 살지 않아도 되었고, 다만 그를 바라보며 그에게 기대는 것으로 충분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제 사람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 아니라 '믿어야 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사멸되고 구원을 받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바울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마음을 점차로 사로잡았습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으며, 현실은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저 하늘나라에서 주님 품에 안기면 그 모든 고통과 애곡과 눈물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그의 가르침은 가난하고 힘없고 체제에 눌리고 착취당하며 살아가던 연약하고 가난한 민중에게 현실의 질곡을 넘어 삶에 소망을 불어넣어주는 최상의 복음(good news)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이 보편적인 호응을 얻게 될 즈음, 예수에 대한 전승 자료들이 모아져서 오늘날 신약성서에 수록된 형태의 복음서로 탄생되었습니다. 4개의 복음서를 살펴보면, 제일 먼저 기록된 마르코의 복음서에서는 비교적 가장 인간적인, 그리고 복음의 원형에 비교적 가까운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예수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그냥 '가난한 자'에게 복을 선포하신 예수였습니다. 영성이나 초월성보다는 현실성, 사회성, 역사성을 강조한 예수의 모습이 마가복음에는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과 또 다른 자료(Q문서)를 토대로 기록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묘사된 예수는 인간적인 면보다는 신적인 예수의 모습이 조금 더 많이 그려지고,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에는 '태초부터 있었던 말씀(로고스)으로서의 하나님'으로 그려지게 됩니다.

이후의 교회 역사에서, 예수는 그 때까지 형성된 예수의 이미지로, 혹은 사람들의 비의도적인 무지로, 혹은 교회의 필요에 의해, 무엇보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정권 유지와 로마제국의 새로운 부흥을 위해 '신의 아들'을 넘어 '신 자체'가 되었으며,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선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4. 혁명가 예수, 마침내 신이 되다

서기 4세기 초반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늙고 병든 제국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기독교를 동반자로 선택했습니다. 제국의 정신적 구심점을 새로이 세우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와 사상을 아우르는 절대신념체계가 필요했는데, 마침 그때 지난 200여 년에 걸친 정책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신념으로 버텨낸 유일신 종교가 눈에 띄었던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제국의 동반자로 선택한 중요한 이유는, 예수가 "카이사르(로마 황제)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고 말함으로써 로마제국의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타협을 시도한 당시 교회가 예수의 입을 빌어서 기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중심으로 모인 교회들도 하나의 신념으로 통일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는 유일신의 유일한 아들로 고백되기도 했지만, 단순히 인류의 영적 스승 중 한 분으로, 또는 기득권에 저항하는 혁명가로 인식되는 당 다양한 예수관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견해 중에서 콘스탄티누스에게 필요한 것은 '유일신의 유일한 아들'로서의 예수뿐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예수의 가르침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신의 절대계명이 될 수 있었고,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바치라는 신의 명령을 중심으로 제국을 하나로 규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성자로 추앙받고 있지만 로마 황제이며 이교도였던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선택에 의해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의 친구'였던 예수는 '신의 아들'의 지위를 넘어 급기야 '신 자체'로, 또한 인류에게 구원을 베풀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웃을 아무 조건 없이 신의 자녀로 품은 예수의 너그러운 사상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배타적 교리로 바뀐 채 중세 천년을 지나 한반도에까지 유입되었습니다. (예수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신이 되는 과정을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제가 지은 <소설 콘스탄티누스>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5. 한국 개신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오늘날 예수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세상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한 신의 아들이며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인격)로 고백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신학은 예수를 2천 년 전에 살았던 참 자유인으로, 진정한 휴머니스트로, 압제에 저항했던 혁명가로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재해석은 이미 기독교의 본거지인 유럽에서 이삼백 년 전부터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존 힉(John Hick) 등 다원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에 '그리스도 중심에서 신 중심'으로 전환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는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원하지 않았다. 새로운 삶을 원했을 뿐이다."라고 하여 교회가 예수의 유연하고 따뜻한 인류애 정신을 배타적 교리로 만들고 종교조직을 유지 발전시킨 것은 예수의 뜻을 거스른 잘못된 선택이라고 보았습니다.

문제는 이런 다양하고 열린 예수 연구가 지구 마을에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불러오고 있지만 배타와 독선에 빠진 미국의 근본주의 교회와 한국의 주류 개신교는 여전히 이천 년 전의 원시 교리에서 한 발자국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본받아 이제 한국 교회도 이런 현대 신학의 도전에 정직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모든 전제, 즉 기독론과 연관된 배타적인 교리와 전통을 모두 내려놓고 현대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검토하며 정직하게 예수를 재탐구하여 아름다운 인류 문화 특히 지구마을의 정신을 지켜온 고등종교들과 화합하고 상생할 수 있는, 또한 현대 과학이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교리를 재구성해야 합니다.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입니다.

* 이 칼럼은 격월간지 <공동선> 2010년 11+12월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하고 보완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0/11/07 [15:07]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jfsjd 2010/11/18 [07:58] 수정 | 삭제
  • 남의 종교는 헐뜯는다. 제 종교만 믿으라고 한다. 한국 사회를 깨는 집단이다. 나는 그렇게 보았고 느꼈다.
  • 대단한 착각 2010/11/11 [14:17] 수정 | 삭제
  • 개신교 자신들만의 교리를
    세상 사람들 모두가 따라야 할 보편적 교리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려드는
    개신교의 오만과 독선이 일으키는 문제다.
  • 다물인 2010/11/09 [21:29] 수정 | 삭제
  • 이미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를 따르지 않아도 이미..개벽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떤 선생이 있어서 그 선생을 따르는 대승주의적 행동은 헛수고이다. 평하운동가 간디가 있어서 간디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평화스러운게 좋기 때문에ㅡ 그걸 유지하려는 것이다. 또한 부처가 있어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맑스레닌주의가 있어서 맑스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끊임없이 현실의 부조리한 정보들을 통계내서 사회과학을 만들어가고 있고, 그 분야는 정치제도에만 있는 것이아니라, 환경 교육 여성 등 우리가 해야할 영역이 광대하다. 그래서 그 끊임없이 발생하는 세상의 요지경 속을 슈퍼컴퓨터로 완전 과학을 이루내면 ..완전 짱이다. 헐
  • 다물인 2010/11/09 [02:09] 수정 | 삭제
  • ..뭘 많이 쓰다가 삭제함..끝도없는 논쟁꺼리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