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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적인 한국 교회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복음(복된 소식)이 화음(화를 부르는 말)이 되다
 
류상태   기사입력  2009/01/17 [20:23]
지하철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납니다.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전도방법이 꽤나 여유가 없고 전투적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곧 세상이 망할 것 같은 위기의식을 불어넣으며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허탈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길 잃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겠다고 열심을 내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분들의 전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나오는 사람들보다 등지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정통 교리에 의하면, 인간은 원죄에 의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의지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기에, 그를 믿는 자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얻고, 마침내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진위 여부를 떠나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복음(복된 소식)으로 인정 받을만합니다. 그러나 그런 교리적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화음(화를 주는 소식)이 됩니다. 그 교리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참한 종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에 의하면, 그 교리가 상식과 합리에 반한다고 생각되어 정직한 양심의 판단에 의해 그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예수님의 생애와 정신을 마음 깊이 존경하고 그를 따라 사는 사람까지도 지옥의 불구덩이에 던져질 수 있습니다.
 
예수를 신의 성품을 가진 하느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로 믿지 않는다면 아무리 선하고 훌륭하게 살아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구원에서 제외된 자를 기다리는 것은 죽은 후에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져 영원한 고통을 받는 비참한 종말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그리스도교 보수 정통 교리’가 말하는 구원론의 골자입니다.
 
원시적 흑백 논리에 다름 아닌 이런 기이하고 사나운 교리가 아직도 극복되지 못했기에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리스도교 제도권 내에 있는 신학자들 중에서도 이런 정통 교리에 과감히 맞서는 분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인정받는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느님의 구원은 완전하기에 모든 죄와 악을 근원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 알려진 지옥까지 파괴하기에 이릅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있는 한 언젠가는 구원 아닌 것은 종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가 제시하는 구원론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는 그 날에는 불완전한 모든 것은 폐기되고 없어질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지옥이 있고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는 한 하느님은 아직 모든 것을 완성하신 것이 아니기에,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지옥도 없애고 지옥에서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몰트만이 지옥에 들어간 사람도 마침내는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는 근거는 역설적으로 그가 가진 뿌리 깊은 정통 보수 신앙에 기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크고 완전한 것임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이해하는 십자가의 능력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힘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지옥을 깨트릴 수 있는 힘까지 갖고 있습니다. 몰트만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 뿐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을 기준으로 희망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이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완전히 버려진 자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십자가는 그 누구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의 표현이다.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들을 바르게 하고 그들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는 희망과 은총의 빛이 그들에게도 작용하고 있다.” 이른바 유명한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최후 심판의 날은 하느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혹한 심판을 내리시는 무서운 날이라는 생각이 보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그렇게 무서운 날이 아니라 오히려 은총의 날이 될 것이라고 몰트만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최후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의 아들이 단번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모든 인류의 죄값이 지불되었고, 인류가 안고 있던 원죄의 값이 다 지불되면서 인류는 그 원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몰트만에 의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은 총체적인 용서와 만유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기쁜 날’입니다. 성경이 끊임없이 증언하는 ‘마지막 날’은 역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모든 인간과 피조물이 구원을 받아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음을 선포하는 날이 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결코 진보신학자라고 볼 수 없는 몰트만의 신학조차 한국 교회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 교회의 흐름에서 볼 때 극우에 속하는 한국의 대다수 교회들은 하느님을 지극히 옹졸하고 편협한 하느님으로 만들고 구원의 범위를 교회 안으로 제한하여 마침내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교회를 떠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을 성전 안에 가두고 거기서만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광야의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그 성전을 이방인에게 내어주어 허물어버릴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몇 번이나 이방인에게 정복당하고 허물어졌던 예루살렘 성전 터에는 지금 이슬람 성전인 모스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옛날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저질렀던 오류를 오늘의 한국의 주류 개신교회 지도자들이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1700년 기독교 역사와 정통 교리의 뿌리를 파헤친 류상태 목사의 소설 콘스탄티누스     © 인물과사상
요즘 한국 교회에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의 문제로 고민하는 보수 개신교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배타적 신앙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보여 다행입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라는 교만한 질문이 아니라 “한국 교회 안에도 구원이 있는가?”라는 자성의 질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천년 전 원시인(무지하다는 뜻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앞서 살았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의 신앙고백을 근거로 만들어진 교리, 게다가 로마제국 황제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크게 왜곡된 1700년 전의 교리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주류 개신교회가 과연 구원받을 길이 있을까요?
 
오로지 자신과 똑같은 방식의 신념을 가져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다른 방식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예외 없이 지옥의 불구덩이로 던져진다고 믿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불편하고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한 사람의 개신교인으로서 이처럼 무례하고 무모한 폭력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사회 갈등 현상에 대하여 어찌 사죄해야 할지 부끄럽고 참담합니다.
 
그리스도교 정통 교리에 대해 적어도 몰트만 정도의 질문과 재해석이 없이는 한국 교회가 구원받을 길은 요원하다고 생각되는데, 독자들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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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1/17 [20:2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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