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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거룩한' 책? 성서로부터의 자유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그리스도교 성서 안에 담긴 불순물을 가려내라
 
류상태   기사입력  2008/11/07 [19:55]
지난 해 도올 김용옥 선생이 ‘구약 폐지론’을 주장하다 개신교와 가톨릭 양쪽으로부터 집중 비판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구약 뿐 아니라 신약도 할 수만 있다면 폐지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 성서가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 함께 들어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성서의 기록 전체를 신의 전갈로 간주하는데서 오는 폐해 때문입니다.

‘성서’라는 이름의 이 멋진 책은 수천 년 인간사의 온갖 비극과 희극, 욕망과 질투, 음모와 암투,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처절한 삶의 장면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담아냅니다. 인간 세상에 대한 가차 없는 고발, 그 점만으로도 성서는 인문학 고전으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치를 인정받아 마땅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 책은 어두움과 혼란에 둘러싸인 인간세계에서 진정한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신적 계시를 담고 있기에 ‘거룩한 책’ 즉 성서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서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은 당시 사람들이 만나고 인식한 신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이기적인 지 너무나도 생생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기에 ‘성서의 거룩함에 동참하려는’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오늘은 구약성서에서 그런 당황스런 구절을 하나 꺼내어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 하며 놀려대었다. 엘리사는 돌아서서 아이들을 보며 야훼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암콤 두 마리가 숲에서 나와 아이들 사십 이 명을 찢어 죽였다.” (공동번역 열왕기하 2장 23,24절)

이 구절은 선지자 엘리사에게 임한 신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나타내는 사례로 기록되었지만 ‘사랑과 자비의 신’으로 정리된 신약성서의 신관은 물론이고 사랑보다는 법과 정의를 먼저 요구하는 구약성서의 신관으로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사람을 놀렸다는 이유만으로 42명의 생명을 몰살시키는 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게다가 희생자들은 그저 철없는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서 전체가 신의 계시이므로 모든 구절을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교육받은 보수 개신교인들은 이 구절조차도 실제 사건으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이런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이 내놓는 논리라고는 “그 때는 율법의 시대인 구약시대였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지만 신약시대는 은혜의 시대이므로 하느님께서 지금도 그런 일을 하시지는 않는다.”는 정도의 궁색한 변명뿐입니다.
 
문제는 이런 맹신이 그들이 몸담고 있는 종교의 세계만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사회 전체에 매우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실제로 세계에서 신도 수가 가장 많다는 교회의 목사가 이 구절을 본문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 구절을 근거로 “목사가 잘못이 있더라도 교인이 함부로 목사를 비판해서는 안된다. 목사의 잘잘못은 하나님이 물을 것이다.”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가 교회를 은퇴한다고 선언했을 때는 장로들과 부목사들이 엎드려 은퇴를 철회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비이성적이고 반인륜적인 설교를 아무 거리낌없이 하는 목사에 대해서 수십만에 달하는 교회 구성원들이 바치는 일사분란한 충성심은 그저 놀라운 뿐입니다.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훌륭한 분인데 종교 문제로 들어가면 꽉 막힌 개신교인들을 자주 만난다”는 말을 가끔 듣습니다. 그런 분들은 ‘이성보다 계시가 우선’이라는 믿음에 따라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스스로 내려놓았기에 맹신에 빠져든 것입니다. 이렇게 교리에 세뇌된 사람은 아무리 합리적인 근거를 들이대도 대화 자체가 힘들어집니다.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서와 교리’라는 자신들의 절대 기준에 의해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 이야기(엘리사 사건이 아니라)는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사제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고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경전에 삽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진보 그리스도교 학자들은 그 구절이 문자 그대로 실제 사건일 수는 없지만 당시에 있었던 비극적 사건을 시대적 한계와 무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신의 징계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전승을 타고 전해져 성서에 기록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성서 안에 시대 상황에 따른 한계는 있어도 고의에 의한 왜곡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는 있지만 고의적 왜곡은 없는 진실의 책’이라고 믿는 것과 ‘시대의 한계 뿐 아니라 고의적인 왜곡까지 담겨 있기에 진실과 허구를 반드시 가려내야 하는 책’임을 아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성서의 권위를 훼손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실제 가능성이 가장 큰 해석을 무시해 버리는 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면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애정으로, 또한 전통적인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받을 충격을 고려하여 보다 유연한 해석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해석자의 그런 유연함(?)이 결과적으로 성서에 관련된 진실을 덮고 교인들을 무지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요?

성서의 기록과 해석의 관계를 꿈으로 비유하자면 성서 안에는 개꿈과 용꿈이 함께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꿈은 의미를 찾기 어려운 꿈이고 용꿈은 좋은 뜻과 의미를 담은 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해석자라면 개꿈은 개꿈이라고, 용꿈은 용꿈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수 개신교인들이 성서 안에 담겨있는 개꿈을 용꿈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분들이라면, 성서의 권위를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진보 개신교 해석자들은 개꿈을 기어코 용꿈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성서에 개꿈은 없다고 확신하는 보수 신앙인들보다 개꿈인 줄 알면서도 기어코 용꿈을 만들려고 애쓰는 진보 해석자들이야말로 교인들로 하여금 성서의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는 사람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성서는 이삼천년 전의 시대적 정황 속에서 기록되었기에 시대의 한계와 기록자의 인식의 한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지배계급이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삽입한 불순물도 적지 않게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서는 정금 자체가 아니라 정금을 포함하고 있는 금광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석에서 정금을 얻어내려면, 즉 성서에서 진정한 신의 말씀을 들으려면, 이 광석을 용광로에 넣어 펄펄 끓여서 모든 불순물들을 분리해내야 합니다. 이 작업은 어떤 교리적 전제에도 매이지 않고 과학과 이성에 의해 성서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열린 신학’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혹독하고 정직한 정련의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는 성서 안에서 인간의 말과 정금과도 같은 신의 말씀을 가려서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성서가 그리스도교인 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최고의 문학적 가치를 가진 고전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성서를 통해 영적 깨달음을 얻고 진리 안에서 자유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전승자와 기록자들의 무지에 의한 한계 및 오류와 함께 지배계급의 고의에 의한 왜곡도 반드시 가려내야 합니다.

* 이 칼럼은 <공동선> 2008년 11+12월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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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11/07 [19:5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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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준 2008/11/12 [15:44] 수정 | 삭제
  • 교인이 된지 벌써 20년이 지났는데, 그간 교회의 가르침과 마음 깊은 곳의 생각간의 불일치는 항상 큰 짐이었읍니다. [한국교회는...]을 통해, 또 오늘의 본문 같은 글을 통해 얼마나 큰 힘을 얻는지 모릅니다. 외롭고 힘드시더라도, 건필을 기원합니다.
  • 박성광 2008/11/10 [11:23] 수정 | 삭제
  • 음 본문은 성서라는 텍스트를 절대적으로 맹신해선
    안된다는 게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성서라는 게 결국 로마시대에 수많은 경전중에 '인위적으로' 몇가지가
    인간에 의해 '선택'된 거라는 건 아시죠?
    그렇다고 볼 때 성경에 대한 여러 숨은 의도에 대해 한번쯤은
    필자가 쓴 것처럼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 노류장화 2008/11/09 [21:46] 수정 | 삭제
  • 성경에 대하여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분들의 건전한 주석을 읽어 볼 것을 권합니다.
    당신의 글은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잘못된 해석이라고 할 수조차 없는, 해석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이의 예를 들며, 텍스트를 부정하자는 소리는 목욕물 외에 아이까지 버리자는 소리밖에 안 되지요.
    엘리사 시대에 어린아이마저 하나님을 껌으로 여겼다면 그 시대상이 어땠을지는 생각이 안 드나요?
    지금이나 그 때나 하나님이 우스운 시절에는 돈이 세상을 좌우하고 그럴수록 세상이 험해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