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카란디루, 담 밖의 제복에 죽어간 담 안의 사람들
지상 최악의 감옥폭동 진압 사건, 브라질 ‘카란디루’ 감옥의 비극
 
임흥재   기사입력  2004/09/10 [23:50]
아주 오래 전에 ‘브리질’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의 하나인 로버트 드니로가 출연한다는 이유만으로 보게 된 영화였다. 정보화로 모든 시간이 획일화된 미래 사회에서의 인간의 소외와 기계문명에 종속된 인간의 모습을 그린 SF 코메디물이었다. 제목은 브라질이었지만 헐리우드 영화였다. 오늘 극장가의 스크린에는 ‘카란디루’라는 진짜 브라질 영화가 개봉된 것으로 안다.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브라질 영화(일본의 소니크라식 닷컴이 스크린에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는 소니가 제작이나 배급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인 탓에 비록 2003년산 필름의 뒤늦은 국내개봉이라는 아쉬움은 그리 크지 않았다.


▲1992년 브라질에서 일어났던 최악의 감옥 폭동 사건인 카란디루 진압작전을 그린 영화.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 헥터 바켄코 필름

‘카란디루’는 이 영화의 무대가 되고 있는 브라질에 실재했었던(지금은 없어졌기에 과거형이다) 감옥의 명칭이다. 이 말은 이 영화가 실화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감옥을 무대로 그 안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찍혀진 영화들은 무수히 많다. 영화의 고전에 속하는 ‘빠삐용’에서부터 인간의 자유의지의 숭고함을 제대로 살린 ‘쇼생크탈출’에 이르기까지 그 소재의 특수성으로 인해 감옥영화들은 상당한 영화적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의 ‘광복절 특사’는 그 발상의 참신함으로 재미나게 본 영화로 기억 된다.


담 안의 작은 세상, 카란디루


우리의 교도소에 관한 선입견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무참히 깨어진다. 특정한 시간에만 열고 닫히는 우리의 교도소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누가 간수이고 누가 범죄자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카란디루의 사람들은 (일정한 영역에서만큼은)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도 하고 담배며 마약에서부터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을 구할 수 있고 티브이시청과 운동 등 여가 활동 또한 방해받지 않는다. 카란디루는 세상의 일상적인 삶이 대부분 그대로 영위되는 작은 세상이다. 다만 방은 창살과 철문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방들을 담으로 둘러쳐 놓았기에, 그 안의 사람들이 그 밖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다는 정도의 제약만이 그 곳이 감옥인 것을 알게 해준다.


그 안으로 오랜 만에 의사가 찾아든다. 영화는 바로 그 의사의 눈에 비친 카란디루의 모습이다. 그 안의 사람들은 범죄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장면이나 외상으로 구입한 마약값을 갚지 못해 살해되는 이즈카엘의 살해 장면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 안의 사람들은 결코 범죄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담 밖의 세상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간다. 이른바 뽕쟁이에 뽕팔이가 있고 상업은 삶의 근간이라는 담배장수도 있다. 2인조 강도에서 보석털이범, 동성애자, 바람둥이, 청부살인범, 절도범, 동생을 성폭행한 불량배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순진한 청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그대로 흉악무도한 범법자들이 살고 있는 감옥인데, 범죄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필자의 말은 언뜻 모순 된다. 그렇지 않다. 그 안의 사람들이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며 털어 놓는 담 밖에서의 삶은 우리의 신산스럽고 고통스런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담 밖에서 그들이 어떤 흉악무도한 범법을 저질렀는 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현재의 담 안에서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삶에 적응하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자연인에 다름 아니다.


그들의 삶을 간수들이나 혹은 그 윗선의 누군가가 거의 간섭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곳의 관리를 맡고 있는 자들의 개입 없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그 곳의 질서를 지켜나간다. 그 곳을 관리하는 자, 즉 그 안에 살고 있는 범법자들의 우두머리는 ‘에보’라는 이름의 사내다. 에보를 중심으로 그들은 그들만의 룰을 존중하며 담 밖의 세상보다 더욱 완벽한 질서와 치안을 유지해 나간다. 의사 선생님의 질문에 대꾸하는 교도소장 피레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내가  이 곳을 관리 한다구요?  천만에요, 저들이 교도소를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카란디루는 그런 곳이다. 물론 담 안에서만 인정되는 자유란 온전한 것이 아니다. 또한 담 안의 세상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가지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은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이성과의 성애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동성을 통한 성의 해소가 횡행한다. 따라서 카란디루는 에이즈의 천국이기도 하다. 친구는 가질 수 있어도 그들은 가족은 가질 수 없다. 가족은 담 밖에 존재하는 먼 이웃 같은 존재다. 그리움과 외로움은 마약의 몽환적 유혹에 그들을 빠지게 한다. 마약 장사는 성업 중이다.


충분한 의료서비스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결핵으로 죽어가도 속수무책이다. 다행이 의사는 카란디루를 떠나지 않는다. 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아픈 삶과 괴로운 기억을 어루만져주는 참으로 고마운 친구인 것이다. 때문에 그 안의 사람들은 의사 앞에서는 행복한 마음으로 웃는 얼굴로 지나간 흔적의 잿빛 추억을 담담히 말할 수 있고 푸근한 심정으로 기억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경찰과 바람이 난 아내의 배신과 이를 알려준 친구를 의심했던 결핵환자는 죽어가면서 2인조 강도였던 자신의 친구에게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그런 그를 끝까지 지켜주는 친구의 우정은 아름답다.


두 명의 아내에게 여전히 인기만점인, 그래서 양쪽을 오가야했던 마약장수의 유쾌한 너스레는 의사를 웃게 만들고 우리들을 미소 짓게 한다. 마약 외상값을 갚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이즈카엘이 감방의 벽에 높은 파도 사진을 부쳐놓고 그 앞에서 서핑에 열중하는 모습에서는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요리 조리 궁둥이를 흔드는 그의 모션은 파도에 올라탄 그 어느 서핑맨보다 더욱 그럴싸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측은지심을 감출 수 없다.


풍선을 만들어 담 밖의 세상으로 날려 보내는 치코라는 중년사내가 있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인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18명이나 되는 자녀를 가졌다. 그 중의 막내가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이 안 난다며 감옥에 오겠다는 소식을 듣는다. 카란디루의 한 가운데 빨래줄에 널린 이불보 같은 천막이 처지고 작은 탁자도 준비하였다. 테이블보 위에는 향긋한 포도주와 몇 가지의 과일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빌려 입은 하얀 양복으로 한껏 멋을 낸 치코는 딸을 기다린다. 그러나 딸은 끝내 오지 않는다. 높은 담 밖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년사내.


옆에 있던 간수의 “왜요, 딸이 저 담 위에서라도 나타날까 봐서요” 비웃는 듯한 그 한마디에 이 온순한 사내는 간수의 코를 이마로 뭉그러트리고 만다. 그 덕분에 그는 빛도 없는 좁은 독방에 갇히고 그는 그 안에서 의식을 부여잡기 위해 교도소장에게 동전 하나를 빌린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좁은 독방, 그 속에서 치코는 동전을 던지고 땅을 더듬어 그것을 찾는다. 중년사내는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의지는 숭고하다.


왜냐하면 그가 갇힌 곳은 이른바 황색구역이다. 그 곳은 스스로 삶을 포기한 채, 한발자국도 움직이기 싫은 자들이 자진하여 들어온 죽음의 묘역이기 때문이다. 카란디루의 또 다른 감옥이 그 곳이다. 치코는 끝내 그 곳에서 살아남는다. 담 밖으로 날려 보냈던 풍선이 아마도 그를 살렸을 것이다. 그는 희망 아니 가족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영화에서 형기를 마치고 담 밖의 새로운 세상으로 걸어 나가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다. 그가 “그 안의 친구들은 필요치 않아” 독백하며 카란디루를 떠나고 의사가 휴가로 카란디루를 잠시 비운 그 날들의 가운데, 비극은 잉태되고 인간학살의 진짜 범죄는 카란디루에서 몸을 푼다.


권력에게 카란디루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필자가 이 영화에서 가장 서운했던 부분이 있다면 카란디루의 비극이 왜 벌어졌는지를 영화는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단지 우연처럼 비극은 일어났고 권력의 하수인들은 제복의 무리들로 카란디루에 나타난다. 그들은 그 제복의 권위와 권력의 존엄을 위해 카란디루의 평화와 그 안 사람들의 질서를, 그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는다. 카란디루의 사람들은 결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길에 버려진 유기견 보다 못한, 선거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할 수 있는 썩은 생선이거나 혹은 그들의 평화로운 집 앞에 들어선 쓰레기 매립장의 악취 나는 음식찌꺼기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일의 비극적 운명도 모르는 채, 카란디루는 파티를 연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교도소가 아니라 국군훈련소의 수료식 날 같은 ‘방문자의 날’이라는 행사가 카란디루에서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 안의 사람들은 모처럼 찾아온 가족 친지 이웃들과 담 밖의 세상과 똑같은 자유를 누리며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 아내와 뒹굴던 마약장수는 연이어 찾아온 다른 아내의 방문으로 곤혹한 지경에 처하고 두 아내는 끝내 웃지 못 할 헤프닝으로 카란디루를 웃기고 우리를 실소하게 만든다.


카란디루의 조정자 에보 역시 모처럼 사랑스런 가족들과 해후하고 여동생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던 순진한 청년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동생의 친구가 사랑스럽기만 하다. 어머니와 아들이 만나고 아비와 자식이 포옹하고 아내와 남편이 정을 나누는 행복한 축제의 현장, 카란디루. 청부살해범 다헤르 만이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어 카란디루를 헤멘다. 동성애자인 의사의 조수는 아내가 될 게이 레이디 지의 부모에게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이 때까지 카란디루는 평화롭고 행복하다.


행사가 끝나고 가족들이 돌아간 카란디루는 동성애자들의 결혼식으로 들썩이고 주례를 맞은 의사는 진심으로 그들의 결혼을 축복한다. 카란디루의 축구대항전에서 시구를 마친 의사는 휴가를 떠난다. 여전히 평화롭고 행복하다. 의사는 자신이 돌아온 카란디루가 생지옥으로 변할 그 비극의 운명을 결코 예감하지 못한다. 축구대항전이 끝난 카란디루는 갑자기 폭동의 현장으로 변한다. 평화는 깨어졌고 질서는 사라졌다. 그 이유를 감독은, 영화는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우연 혹은 운명 같이 폭동은 발생하였다. 필자가 아쉬웠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말은 이미 했다.


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제복은 총과 방패와 말을 타고 등장한다. 그러나 그 폭동은 이내 가라앉고 교도소장 피레스의 안내에 따라 그들은 가지고 있던 무기들, 고작 쇠붙이를 갈아 만든 뭉툭한 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그것들을 창밖으로 던지며 질서 회복의 의지를 나타낸다. 그 때 영화는 티브이 화면을 비추고 선거가 코  앞에 다가왔음을 알려준다. 선거라는 권력의 가장 중요한 행사가 임박한 시점에서 이제 카란디루는 앞서 언급했듯이 하루빨리 치워버리고 싶고 묻어 없애고 싶은 악취 나는 쓰레기 매립장에 불과하다.


그 곳에 사람은 살지 않는다. 다만 더럽고 광기에 찬 짐승들이 울부짖는 시궁창 같은 곳이다. 적어도 위정자들의 눈에는, 권력을 기획하고 도모하는 자들에게는 분명 그렇다. 제복들에게는 폭동의 진압과 카란디루의 회복이 아니라 흔적을 말끔히 치워버려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항거의 의사가 전혀 없는 카란디루의 사람들에게 그들은 총을 난사하고 무자비한 살육을 전개한다. 카란디루 사람들의 발걸음과 그들의 죄를 씻듯이 먼지와 병균을 씻어내던 하얀 비눗물이 흐르던 계단에는 시뻘건 핏물만이 흥건히 흐른다. 유쾌한 농담과 친구를 향한 애정과 연민의 대화들이 건네지던 카란디루의 복도에는 무참히 죽어가는 사람들의 절규와 신음만이 가득하다.


단지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 작은 질서를 잠시 깨트렸다는 이유만으로, 조금 심하게 흥분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카란디루 사람들은 제복의 총알에 죽어간 것이다. 권력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 위정자의 눈살을 찌푸리도록 귀찮은 짓을 벌였다는 까닭으로 카란디루 사람들은 도살장의 짐승보다 못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권력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잔혹한 집단 학살극이 백주 대낮에, 매스컴의 헬기가 치코가 풍선을 날리던 그 하늘에 떠있는 공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질 수 있을까.


분노를 넘어 사람으로서 살아가야할 희망도 꿈도 존재의 당위까지도 생각할 수 없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나의 의식과 우리의 생각은 미친 권력의 살인 놀이가 끝나고 카란디루의 마당에 끌려나와 앉은, 살아 있으되 살아 있음으로 더욱 고통스럽고 죽음보다 더한 무서운 기억에 시달려야할, 발가벗겨진 카란디루의 사람들처럼 의식과 이성의 공황상태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다. 참으로 섬뜩한 이 비극의 공포에서 필자를 비롯한 우리들은 아주 오래도록 신음하며 아파해야만 할 것이다. 폭파되어 먼지로 사라져간 카란디루처럼 내 기억도 그렇게 먼지처럼 흩어지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음을 아는 우리의 병은 깊어만 갈 것이다. / 논설위원      

 

* 필자의 블로그 바로가기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4/09/10 [23:50]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혼자말에 대어드는 사회 2004/09/21 [13:28] 수정 | 삭제
  • 누구라고 꼭 꼬집어 가해자라고 할 수 없는데도(구체적 가해상황을 제시하기 어려운데도) 감옥내 사람들과 닮은 것 가테요..
    거슬린다고 제거할 권력을 갖지 않아서인지. 타고난 피해망상인지.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할 수 없는 일을 두고 ,(혹은,어떤 사람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범죄처럼 몰아가는 사회라면, 감옥밖처럼 모순된 것이 아닐까요?
    범죄자는 아니지만, 처벌대상도 당연히 아니지만, 어떤 모순된 상황에 빠져있는 바깥이요. 자신의 사생활은 철저히 보호받아야 한다면서, 정작 남의 사생활을 함부로 이용하는 사람과 같은 모순이요. 카란디루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 않을까요? 질서유지란 이름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뭉개 버리는 모순된 모습이 나타나지 않게요.